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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22화 (12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22화

12층 - Lv. 1350 데미 리치 샤크마(4)

프로보이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할 틈이 없었다.

드디어 고민할 틈이 생겼을 때는 이미 휘말릴 대로 휘말린 후였다.

권태에 찌들었다고는 하나 한 클랜의 마스터로서 오랜 세월 군림해온 뱀파이어 로드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런 강력한 데미 리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샤크마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다. 오히려 지금보단 먼 과거에나 소문으로 돌곤 하던 미친 마법사였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하며, 그럴만한 힘을 가진 인간 마법사.

뱀파이어 역시 오래 살면 더 강해지는 종족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 자체로 세월이 곧 힘인 족속들이다.

리치가 되는 방식으로 수백 년을 지내왔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젊은것들은 잘 알지 못하는 공포다.

한 명의 위대한 마법사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물론 함대를 상대로 단독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건 되는 편이 더 이상한 것이고.

어찌 되었건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또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개인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프로보이는 유배자에게 경고하려 했다.

"저기, 지금 상대가 어떤 리치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체험도 했고."

"음? 뭐라고?"

파티 리더인 사내가 그 말에 작업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든다.

피를 뿌려 간이 마법진을 그려낸다. 마법진은 비슷한 계통이면 형태가 어느 정도 엇비슷하다.

교란을 위한 마법진이다. 아마도 마력 탐지를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마법에 조예는 없으나 보면 알아볼 정도의 경험은 있다. 프로보이는 그 정교함에 감탄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그 연방 함대라도 부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미치광…… 이런 실례. 그 충성스러운 고블린과 뱀파이어들이라면 기꺼이 이 행성으로 워프해 올 것인데."

그 발언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단초가 당신들 아니냐고 떠보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배자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겠지. 하지만 그건 썩 좋은 생각은 아닐 거야. 저 리치의 존재를 안다면 그냥 여기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 같은데?"

"그건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군요. 클랜원들이 대피할 시간만 주신다면야."

"그걸 감안해도 이 근방은 일단은 동맹령이란 말이지. 제국이 쓰러질 때까지는 적으로 돌릴 수 없지."

프로보이가 입을 벌렸다.

"전쟁에 이길 거라 생각하는군요."

"질 이유는 뭐지?"

"제국이 시작의 행성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던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제국의 저력을 얕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절묘한 균형이 자리하고 있다곤 했으나 결국 다른 두 국가를 몰아내어 새 터전을 찾도록 만든 것은 제국이다.

승자가 제국이라는 뜻이다. 직접 봐온 그 전쟁의 역사를 프로보이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배자 사내는 그저 슬며시 미소 지을 뿐이다.

"그렇지, 하지만 알지 않아? 그 역사를 비트는 것이 유배자가 하는 일이잖아."

할 말이 사라지는 대답이었다. 프로보이는 가만히 전율했다.

결국 유배자를 위해 만들어진 우주다.

그 우주는 유배자의 손 위에 있다.

물론 이 도시에 사로잡힌 얼치기들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사내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이 어떻게 제압당했는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연방을 통해 알려진 수많은 이 사내의 행적들도.

프로보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부터 그를 권태에 빠지게 한 이 세계의 진실이 이제는 열망이 되어간다.

유배자가 될 수는 없더라도 그 동료 비슷한 것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저기 저 오크 주술사처럼.

어린 시절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던 모험심과 동경이 다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왕국이란 곳도 한번 가보고 싶군요."

"책임질 클랜원들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까짓거 아무나 넘겨 줘버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소극적인 합류 의사만을 표현했다. 유배자 사내는 피식하고 웃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프로보이는 왠지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꼈다.

* * *

소녀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녀도 이해하고 있다.

그녀가 리치와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주요 전력이다.

하지만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냐면 그것은 또 아니다.

객관적으로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는 아주 잘 싸웠다.

아저씨는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미래에서 온 것이 소녀 자신이라면?

리치를 상대하는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생긴다.

시간여행에서 강제 송환될 가능성 때문에 미래의 자신이 참전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와중 아저씨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넌 그쪽으로 보낼 거다. 억류당한 유배자들을 구하러 가."

"그렇네요! 지금 전부 우리를 잡으려고 몰려들고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그쪽이 허술해지는군요!"

"아마 꽤 도움이 될걸? 그 리치를 상대로 약해서 붙잡혔다고 말하기는 힘들잖아."

소녀는 그 말에 동의했다. 정말로 컬처 쇼크가 다시 한번 올 정도의 강력함이었다.

물론 리치가 그 전투에서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녀도 이제 마력을 느낄 줄 안다. 볼 줄도 안다.

아저씨와 리치 사이에 벌어진 마법전을 고스란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 수준의 높음은 이해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중간에 방해를 걸어줄 마법사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도.

근접했으니 더 잘 안다. 그 막대한 마력의 소용돌이를.

단검을 찔러 넣으면서도 농밀한 마력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지금도 은은하게 흩날리는 특징적인 마력이 도시 구석구석에 흐르고 있다.

이게 고작 해봐야 새어 나온 것이다. 그런 적이다.

"그런데 그러면 아저씨는 괜찮아요? 엄청 위험해질 것 같은데."

"묠니르가 생각 이상으로 잘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끄는 식으로 해야지."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핵심은 그녀가 아니다.

사냥꾼은 자신이 이끌 무리에 소녀가 합류함을 기뻐하는 동시에 파티 리더를 걱정했다.

"주요 전력 아닙니까? 괜찮은 것 맞습니까?"

"언제는 괜찮았나? 다 어떻게든 하는 거지."

그리고 리더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번 층이 유난히 무대가 크단 말이야. 그렇다면 쉽게 누군가를 찾을 수는 없겠지?"

시간의 신전은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명확하게 특정 장소를 지정하여 과거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적당히 근방에 떨어진 다음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

그것도 홀몸으로.

이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엔 지금 길을 잃은 것 같아."

소녀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저 길치 아니거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 * *

요정들이 움직인다. 샤크마는 요정들만으로 그 유배자 파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버렸다.

결국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리고 위치가 특정된다면 샤크마 정도의 마법사가 한 무리의 유배자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마법사답게 요정들을 앞에 세워두고 뒤에서 포격이 무엇인지 보여주면 된다.

LFV 한구석이 쓰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생포는 어려울 것 없다. 마법사지만 대뜸 준비된 적의 한가운데로 순간이동하여 집중 공격을 당한 것이 잘못이다.

힘의 우위는 완벽하게 이쪽에 있었다.

모든 문제는 방심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금은 확실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자들도 있었다.

중앙에 서 있는 탑. 본디 이 도시를 모두 관리하던 관제탑에 해당하던 곳이다.

현재는 샤크마의 마탑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곳으로 두 명을 불렀다.

"연방의 영웅, 정령왕의 유일한 계약자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나한테 줄 거야?"

"물론이다. 난 정령사가 아니다. 정령에 대한 흥미는 오래전에 해결했지.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정령왕은 너희들도 양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정령사들은 뒤통수를 후려갈겼을걸?"

가장 처음 침입자의 존재를 보고해온 강아지 귀 정령사가 말해 온다. 샐쭉한 표정은 깜찍하지만 이제는 늙은이다.

그녀가 경고하듯, 조언하듯 다시 말한다.

"정령왕은 모든 정령사들의 숙원이나 다름없는 거야. 그걸 가져간다면 너도 모든 정령사를 잃었겠지."

리치는 자못 근엄하게 말했다. 성대가 없어 마력을 울리며 퍼져나가는 언어.

이미 마법 그 자체인 목소리는 얼핏 기괴하지만 동시에 묘한 위엄이 서려 있는 법이다.

"그건 나도 안다. 네가 정령왕을 가지겠다면 내가 적극 지지해 줄 의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정령사들이 돌아설지도 모르는데?"

"소개나 좀 해주면 되지 않나. 다만 소유권은 온전히 너의 것으로."

"좋아. 난 뭘 하면 되는 걸까?"

"내 싸움을 도와라.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너 자신을 위해서."

미친 요정에게 자신을 위하라는 것만큼 적절한 발언도 없다.

강아지 귀는 과연 밝게 웃음 지었다.

"그럴게."

잠시 후에는 요정 마법사가 하나 들어왔다. 단순히 요정이고 마법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샤크마는 이 자가 본디 유배자였다는 사실을 안다.

"자네는 말이지. 참 불만이 많아 보이더군."

"불만 말입니까? 저는 딱히……."

"후회가 있겠지? 유배자 생활을 그만둔 것 말이야."

"그만둔 것이 아니라 끝나버린 것입니다. 은퇴할 때가 온 것에 불과하지요."

요정 마법사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에 오히려 말에 가시가 생긴다.

"왕국으로 가볼 생각 없나? 내 연구도 좀 돕고."

요정 마법사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질 듯 말 듯 했다. 눈앞의 리치는 NPC다.

그 역시도 100년의 세월 동안 간혹 마주하던 NPC였다.

그런 NPC가 이제 다를 바 없어진 유배자에게 역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왕국의 사정이 어떤지는 지금까지 붙잡은 녀석들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무시무시한 강자들도 존재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런 곳 같은 서버에 관심이 없어. 그렇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해골은 이를 딱딱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알지 않나. 내가 본래는 왕국을 정복해 보려는 생각이었단 것을."

"이번 회차의 왕국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랭커니 하이랭커니 하는 것들은 미궁의 법칙을 그 손아귀에 틀어쥔 괴물들이다.

이 샤크마조차도, 비정상적으로 미궁의 연구에 집착하게 된 미친 마법사조차도 손가락 하나로 감당할 만한 이들이 널렸다.

"그래서 포기하긴 했지. 하지만 난 서버라고 불리는 이런 곳에서 썩고 싶지는 않아. 자네도 이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나. 연구도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요정 마법사는 점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목가적인 생활을 원했던 유배자 말년의 감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점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조급해지는 마음뿐이다.

요정의 수명에도 익숙해졌다. 신체나이만 500세니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요정으로서도 중년에 접어든 나이다.

요정은 오래 살지만 불사는 아니다.

그동안 무엇을 해왔냐고 하면 없다.

동맹에서 요정이 몰락하며 그가 해온 모든 일은 무가치해졌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긴 세월이 흘렀다.

샤크마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배자에 대한 연구에 열중한 이가 한때 유배자였던 요정을 붙잡아두고 무엇을 했겠는가.

사악한 리치는 짜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짜내고도 놓아주지 않았다.

물론 그건 요정 마법사 개인의 불합리한 감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어차피 놓아주어도 갈 곳도 없는 마당에.

그럼에도 뭉실뭉실 피어나는 검은 안개 같은 어두운 마음이 있다.

리치가 말을 이어갈수록 그 불쾌한 어둠 속에 푹 잠겨 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NPC를 차별한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는 차라리 계속 유배자이고 싶었다.

100년의 세월은 본래부터 나이든 노인이었던 그의 마음속에 모험심이건 역마살이건 무언가를 싹틔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유배자로서의 삶의 다섯 배나 되는 500년의 세월이 마침내 그의 마음을 고장 낸 것일지도.

그러나 그 모든 상념은 리치의 다음 말에 씻겨나갔다.

"저들을 사로잡은 후에 그 장비와 지식을 탈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왕국으로 가도록 하지."

"왕국으로…… 말입니까?"

"100년의 기한이 다하지 않아 아직도 계단이 남아 있는 포로를 많이 잡아두고 있지 않나."

실제로는 100년 근방까지 간 이도 없다.

요정 마법사 본인이 증명하고 있듯이 오랜 세월을 미궁에서 보낸 유배자는 강력하다.

왕국 이후에서 더 많은 파밍을 했다면 더욱더 그렇다.

왕국 이전은 결국 본 게임이 아닌 튜토리얼에 불과하니.

"세뇌가 끝난 녀석들도 있으니, 그것들을 앞세워 왕국으로 스며들 수 있을 것이야. 유배자 놀이를 해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 그 답답함도 좀 달라지지 않겠나?"

요정 마법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웃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이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왕국에 안 좋은 생각을 하고 흘러드는 NPC들은 생각 외로 많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NPC들 중에서도 [스킬]을 연구만으로 분석해 구현하던 자들은 없다.

미궁을 분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리치는 따를 만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연방의 영웅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당장 연방함대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는 이상 이 리치를 이길 방법은 없다.

그리고 연방은 전쟁 중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유배자의 간섭인지 요정 마법사는 대충 알 수 있다.

그 남자라면 그다지 연방의 전력을 이쪽으로 분산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요정 마법사는 웃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계약 관계상의 부하로서가 아니라, 유배자 파티의 동료로서.

샤크마는 기꺼이 그 손을 붙잡았다.

유배자였던 것과 유배자이고 싶은 것의 손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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