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23화
12층 - Lv.1350 데미 리치 샤크마(5)
마법에 조예가 있는 파티원들이 많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내가 뱀파이어라는 것 역시 좋은 시너지를 낸다.
뱀파이어는 신체의 부피 이상으로 많은 혈액을 보유할 수 있다.
그리고 혈액은 언제나 그렇듯 마법의 매개체로서는 최상의 물질이다.
꼬마 마법사, 꼬맹이, 그리고 영감님이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피의 마법진을 새겼다.
내 피는 늑대의 형태로 운송하면 된다.
마법사들이 멀어지자 다른 파티원들은 약간의 곤란에 처했다.
이 행성은 항성을 끼고 있지 않기에 낮이 존재하지 않는다.
버려진 황량한 도시는 언제나 밤이다.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
의외의 사실이지만 뱀파이어도 밤눈이 좀 밝다뿐이지 이런 짙은 암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뱀파이어의 박쥐들이 초음파를 통해 길을 알아낼 수 있을 뿐.
다행스럽게도 버려진 도시는 길이 복잡한 것이지 구조물의 형태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꼬맹이는 조심조심 움직일 수 있었고 마법사들은 각자 옅은 불빛을 밝혔다.
물론 그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다.
상공에서 관측하는 바람의 정령이 있다면 그 작은 불빛을 통해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
다만 이미 수색이 시작되었다면 마력 탐지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미는 아직 없다.
이건 좋은 일이라기보다는 불안한 일이었다.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고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대개 그런 식의 방비는 경보에 관련된 것이다.
탐색해 보았으나 딱히 발견할 수 있는 마법의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그 샤크마이니 발견하지 못할 만큼 정교한 위장이 있을 수도 있다.
마법의 장점은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상대도 그렇다는 것이다.
파티원이 흩어졌을 때가 최대의 위기다.
그러나 별일은 없었다. 샤크마가 신성한 번개로부터 받은 타격이 어느 정도일까?
아주 요양해야 할 정도라면 전면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기대다.
마법직 파티원들이 어둠 속을 헤매며 내 피를 사방에 설치했다.
간격은 제법 촘촘하다. 그다지 멀리까지 설치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게 멀리까지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단지 순간순간의 판단을 늦추기 위한 재료일 뿐이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어둠에 잠긴 도시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숫자의 우위가 반드시 장점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파티가 다시 한자리에 모였을 때, 나는 우리가 이미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 * *
샤크마는 신중한 마법사다. 그가 흔히 알려졌듯 단지 미치기만 한 대마법사였다면 진작에 토벌당했으리라.
그 비용이 어떻건 간에 이 시대는 강대한 힘을 지닌 개인을 용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그는 잠깐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가장 안전한 방법.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방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것이 영웅들의 존재가 세월의 저편으로 밀려난 후에도 그가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냥 여기서 대충 도시의 한 구역과 함께 날려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재주가 있는 놈들이니 그렇게 하면 일부는 살아남으리라.
그 일부를 생포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일 것이다.
오래 묵고 노련한 유배자가 어떤 식으로 강력해지는지 샤크마도 잘 알고 있다.
불가해한 힘과 정보를 휘두르며 스펙상의 약세를 극복해 낸다.
그들의 경험은 단순한 세월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요정 마법사로부터 어떠한 이가 저들의 리더인지도 확인했다.
LFV에 금이 감으로써 새긴 교훈도 있다.
그랬기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도 샤크마는 고민했다.
이곳에서 전술급 마법을 사용한다면 무엇보다 안전하게 원하는 바를 취할 수 있다.
온전하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사실 그런 방식이 올바른 마법사의 소양이다.
위험으로 뛰어들지 않고 화력을 십분 활용하는 현명한 방법.
그러나 곧 그가 쌓아온 세월이, 그리고 자존심이 그 선택지를 거부했다.
겁이 많은 것은 생존에 유리할 수는 있으나 무언가를 성취함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둠이다.
유배자 무리들의 이동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누군가를 버리지 않고서는 결국 이 구역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으리라.
꾸준히 새로운 유배자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순찰을 도는 요정들은 있으나 결국 버려진 구역이다.
특이한 점은 회복의 샘이 꽤나 많이 몰려 있다는 정도.
아마 그것까지 고려하여 전장으로 삼을 생각을 한 것이리라.
허공에 떠다니는 인간의 해골이라는 모습인 데미 리치는 본인이 그 누구보다도 공포를 불러일으킬 모습이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연구한 유배자란 언제나 그렇게 불가해한 존재였다.
그러니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왕국으로 스며들자.
* * *
요정들의 포위를 깨달은 것은 박쥐를 통해서였다.
본디 밤에 활동하는 생물인 만큼 뱀파이어의 일부인 흡혈박쥐 역시 이런 환경에서 운용하기 안성맞춤인 기술이다.
벽처럼 둘러선 채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 신중하군."
"그 리치가 받은 타격이 예상보다 더 컸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주의해야 해. 아마 이번에는 LFV를 제 몸속에 넣어두고 오지 않았을 거야."
"유효한 타격이, 아니지, 아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이군요."
"그래, 방심하지 않겠다는 거지. 일단 내 위치가 특정된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은 추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야. 그때 도시의 중앙으로 달려."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막내, 꼬마 마법사, 그리고 소녀를 데리고 유배자들이 갇혀 있는 감옥을 습격하는 것이다.
"조심해. 상대가 엄청나게 신중하게 나온 이상 그쪽에도 여력이 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연방의 선전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니 우리 파티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샤크마가 기이할 정도로 신중하게 나선다.
그렇다면 정보 제공자가 있다는 것인데 구면인 인물이 하나 확인되었다.
요정 마법사는 아마도 적이다.
이건 좋지 않다. 100년 묵은 유배자 마법사가 다시 500년을 더 묵었다.
샤크마 이상으로 골치 아픈 적일 수도 있다.
거기에 어쩌면 요정 마법사 이외에도 구면인 누군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요정의 수명은 길고, 이 서버의 인과는 거의 모두 우리 파티에게 몰려 있다.
가는 층마다 누군가 아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모두가 우호적이리라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기대다.
다만 그런 사실은 굳이 파티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냥꾼에게만 알려두었을 뿐이다.
미리 알아봐야 크게 소용이 없는 부정적인 정보는 차단하는 편이 옳다.
요정들의 포위망은 아주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노림수는 단순해 보였다.
단순한 숫자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기가 막힌 전술이라는 것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내가 생각했다면 다른 누군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역량에 따라서는 알고도 당하는 법이다.
* * *
샤크마와 요정 마법사, 그리고 강아지 귀 정령사가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모두 나름대로 정예인 자들이며 샤크마가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선불로 지급한 요정들이다.
돈벼락을 맞게 된 요정들은 타고난 성실함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되었다.
요정은 그 사실을 지나치게 늦게 깨달았다. 그랬기에 이제는 누구보다 돈에 집착했다.
"과수원 만들고 싶다!"
"감나무 심을 거야!"
"시끄럽다. 조용히 하도록."
"어차피 저쪽은 우리가 오는 걸 다 알고 있을걸? 뱀파이어가 셋이나 있다며."
샤크마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실을 긍정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버려진 도시의 완전한 암흑은 뱀파이어에게 비교적 유리한 상황이었다.
마력 탐지가 봉인되기 전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무수한 탐지를 터뜨리며 진입을 시작했을 때 느꼈다.
대체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슨 짓을 해둔 것인지 마력 탐지의 단순한 파동으로는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어둠 덕에 [천리안] 따위의 스킬로도 감시할 수가 없다.
보다 본격적인 관측 마법이 필요해지는 시점이지만 그마저도 효과가 없었다.
그 시점에서 샤크마는 이미 이곳의 어둠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설의 기능은 요정이나 그가 관리하지 않아도 정상 작동 중이다.
적이 도사린 구역의 전등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때 빛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단순히 전선을 끊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 용의주도함에 과연 고개를 끄덕였으나 조금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건 마법이었다.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샤크마조차도 알지 못하는 어떤 비술에 가까운 것.
살아 움직이는 어둠이라니. 점점 더 악몽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갑자기 지금까지의 불편함, 혹은 불길함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마법,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 * *
"이게 대체 뭡니까?"
"교란용 어둠이지. [메인 던전]에 가면 이런 게 깔려 있기도 하거든."
설치된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번쩍이더니 어둠을 꿀렁꿀렁 움직이는 무언가로 만들었다.
어둠 속성 마법 중의 하나인데 어둠을 빛의 부재도, 마법 관념의 일부인 원소도 아닌 물리적 실체로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이름은 없다. 마법이라기보다는 환경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을 내가 뜯어다 구현한 것에 불과하기에.
"미궁이 주민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지. 유배자만이 들여다보는 심연이니."
단순히 시간만 끌 것이라면 이보다 좋은 수단도 드물다.
빛이 들지 않는 환경과 어둠에 가까운 종족, 그리고 충분한 사전 준비.
부족한 사전 준비는 꼬맹이를 매개로 보충한다. 언데드는 죽어 있기에 그 자체가 마법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작업 끝에 범위가 좁으나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만 가용 마력의 부족이 문제이긴 하다.
구현까지는 성공했으나 샤크마가 막대한 마력으로 부딪혀 온다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을 만큼 허술하다.
하지만 리치씩이나 된 마법사는 제 목숨보다도 마법이 소중하다. 실제로 목숨을 버리기도 했고.
새로운 마법을 그렇게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할 리가 없다.
이런 것을 나는 방심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마법사는 원래 그런 것들이다. 그런 종족이라고 봐도 좋을지도 모른다.
내 예상대로 샤크마는 순순히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 어둠이 전부 내 몸의 일부다. 곳곳에 흩어진 핏방울들이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다.
"일단 조건은 다 성립했군. 이제 미래에서 온 소녀가 충분한 전투력만 있다면 되는데. 부디 리치의 인내심이나 탐구심이 먼저 바닥나기 전에 찾아와달라고."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우리는 이곳에 있다.
그런 의미를 담고.
* * *
포위망은 이제 그리 넓지 않았고 어둠의 가장자리 안쪽까지 좁혀졌다.
요정들이 불이나 빛의 정령들을 불러내었으나 어둠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 기이함에 요정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정체불명의 어둠 속성 마법. 오랫동안 살아온 그들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다.
그때, 포위망 속에 갇힌 유배자들이 발견되었다.
가장 먼저 접촉한 것은 강아지귀 정령사였다.
잠깐이나마 어둠을 흩어버릴 맹렬한 바람이 기동했다.
불의 정령이 그에 어울려 춤춘다.
어둠 속에서 화염의 소용돌이가 수없이 피어났다.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가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며 어둠과 함께 정령을 베어냈다.
그와 동시에 뛰어들었다. 늑대로 변한 뱀파이어는 인간의 모습일 때보다 훨씬 빠르다.
가뜩이나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어둠 속, 정령사는 빛의 정령을 불러내어 전진시켰다.
늑대의 주둥이가 보이는 순간 최선을 다해 몸을 굴린다.
주둥이에 물려 있는 검이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다.
방어하기 위해 내세운 빛의 정령이 오러 블레이드에 찢겨 사라진다.
강아지귀도 검을 꺼내 들었다.
상급 정령 둘이 나타나 검에 깃든다.
그리고 하나, 다섯, 열, 셀 수도 없이 많은 정령들이 어둠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른 정도는 강아지귀가 불러낸 것이다. 나머지 일흔 정도는 다른 정령사들이었다.
"공격!"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정령과 마법의 폭격이 이어진다.
한순간 어둠이 찢어졌다.
뱀파이어 소드 마스터는 최선을 다해 방어하며 몸의 일부를 늑대로 만들어 뒤쪽으로 달리게 했다.
결국 검 한 자루만을 남겨놓고 놓쳤다.
강아지귀가 귀를 씰룩였다.
"좋아! 정령왕을 향하여 전진!"
상대가 그걸 사용할 수는 없다고 언질을 받았다.
요정의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