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28화
12층 - Lv.917 요정 마법사(3)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서 요정 마법사는 거대한 마력의 파장을 느꼈다.
소녀 역시 하늘에서 쏟아지는 어둠을 보았다.
물론 서로에 대한 주의를 놓지는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은 다시 한번 마법의 폭격이 시작되며 끊어졌다.
견제가 간편한 번개와 얼음 위주로 중위급 마법을 전개하며 시간을 번다.
하지만 이대로 지속되면 결국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비상한 스탯을 지닌 전사들은 마법사를 상대로 견디기만 해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마력은 소모가 빠르며 회복은 더딘 자원이다.
요정 마법사는 판단해야 했다. 이대로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우선 한 타이밍을 잡아내야 한다.
시간을 멈출 한순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스킬에 의한 마법은 전자동이다. 한 땀 한 땀 술자가 짜 올리는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르다.
미궁에서 규정한 규격화된 마법의 형태로 일정하게 발현된다.
비록 응용이란 면에서는 경직되어 있지만, 시간을 다루는 수준이라면 응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일반적인 [시간 정지]는 굉장한 대마법으로 온갖 마법진의 보조를 받으며 천천히 엮어가더라도 수십 분은 걸릴 정도의 복잡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느려터진 마법 시전에 실전성은 없다.
시공간 마법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숙달되기까지 반복 연습을 하는 것도 힘들다.
그나마 죽음 앞에 자유로운 유배자라면 모르지만, 그 유배자조차 그런 영역을 건드리는 수준의 파밍을 끝마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한 많은 걸림돌들이 실전 사용 가능한 [시간 정지]를 스킬만으로 한정하곤 한다.
스킬 [시간 정지]는 어차피 그 복잡한 과정을 미궁이, 마인드맵이 대행한다.
인간과 컴퓨터의 연산 속도 차이와 같다.
샤크마는 마도를 탐구하는 자로서 언제나 그 차이를 불쾌해했다.
그리고 갈망했다.
다시 공방이 반복된다.
소녀의 입장에서는 언제 시간 정지가 나올지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요정 마법사는 언제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 몰라 타이밍만을 보고 있다.
견제를 위한 마법이라지만 일정 이상의 강력한 마법이 아니라면 육탄으로 뚫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다.
스킬로 발동하는 마법이라도 캐스팅 시간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취약한 순간이다.
거기에 유배자인 저 소녀의 전투 방식은 ‘당장 죽지만 않으면 된다’이기에.
사실 이미 많이 불리했다.
팔을 지혈할 시간도 없다.
그런 틈을 보이는 즉시 죽는다.
더러운 초기 스탯. 자신에게 저런 압도적인 초기 스탯이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마법사는 결국 선택했다.
시운도 따라주었다.
오랜 유배자로서의 경험이 [시간 정지]를 발동할 한순간의 틈을 잡아낸다.
생각이라기보단 감각으로 그 찰나를 붙잡는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바로 눈앞에서 소녀의 시간이 얼어붙는다.
하지만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의 얼굴은 생사를 걸고 싸우는 중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살짝 발그레해진 뺨,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입.
눈빛만은 먹이를 포착한 매처럼 날카로우나 확연히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
죽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그렇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
한때의 자신 역시 그랬음을 알지만 이제는 잃어버렸던 죽음의 공포가 돌아왔다.
이미 오래전에 마비되었던 본능이 생존을 갈구하게 되었다.
유배자가 아닌 요정 마법사에게는 배정된 포션 병도 없다.
어느 유배자의 것을 빼앗아 사용하고 있을 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모습을 일별했다.
물러날 때다. 생포는커녕 승리조차 장담할 수 없다.
파릇파릇한 후배였던 아이는 이제 그에게 후배조차 아니며, 벌써 성큼 멀리 걸어가 있다.
그래도 도전자 비슷한 것이었던 요정 마법사는 자신의 처지에 약간의 회한을 느꼈다.
더 나을 수도 있었는데. 더 좋을 수 있었는데.
동시에 그것은 결의가 된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멈춘 시간 속에서 요정 마법사는 다른 목적을 이루러 떠났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 도시에는 수많은 유배자들이 붙잡혀 있다.
개중 충분히 다룰 수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전력도 될 수 있는 자들을 추리자.
샤크마는 그 선별만은 그에게 일임했다.
강대한 리치라 한들 일개 NPC에 불과하다.
결국 왕국은 미지의 영역이며 믿을만한 길잡이가 필요할 터이다.
그리고 모든 마력을 소진해 가며 시간을 멈추고 일을 끝마쳤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직전, 요정 마법사는 샤크마가 이미 패했음을 깨달았다.
* * *
힐링 포션의 효과가 아무리 기적적이더라도 죽음에서 돌아온 수준이라면 한동안은 어떤 식으로건 후유증이 남는다.
체력을 회복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유배자를 무적으로 만들지 않는 최후의 밸런싱이다.
소녀는 털썩 쓰러졌고 억지로 다시 일어났다.
우웩 하고 토하면서 비틀비틀 걸어간다.
상대가 사라진 후, 다시 전력으로 회피를 시도했으나 아무 곳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뒤늦게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진 혈흔을 보았다.
「도망쳤군. 시간을 멈추는 것만큼 훌륭한 생존기도 없지.」
소녀는 대꾸할 기력이 없었기에 그저 걸었다.
사냥꾼과 막내, 그리고 꼬마 마법사가 죽었을 수도 있다.
흥분이 가라앉으며 뒤늦게 찾아온 생각이 불안감을 증폭한다.
「살아 있다.」
여신님의 보증에 안도하면서도 두 눈으로 집적 확인했다.
타이밍이 절묘했을지도 모른다.
시간 정지에 대하여 미리 알고 있었던 파티원은 없으나, 어떤 위험이 즉시 닥칠 수 있다는 것은 마법사를 상대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수칙이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준비를 쌓아 올릴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보통 눈앞에 갑자기 등장하는 마법사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반사적으로 삼킨 포션이 생명을 구한 셈이다.
포션의 효과는 짧은 한순간만 지속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불사나 다름없는 수준의 효과를 보여준다.
다만 이 경우엔 사망 판정이 발생하기 전에 회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번만큼은 운이 따라준 모양이다.
동료들은 거의 발목만 남은 상태에서 다시 재생되었을지도 모른다.
2층에서 트동트의 번개에 직격당한 당시에도 소녀와 사냥꾼의 상태는 그랬다고 들었다.
죽음을 넘나들며 줄타기를 하는 삶을 100년.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소녀는 새삼 그 사실을 느꼈다.
그리고 도전자라 불리는 이들의 위대함도.
이제 초회차인 그녀 또한 그렇게 도전자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전 같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는 확신할 만큼 자신이 넘치지는 않는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다행이다. 다들 살아서 다행이야."
드물게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안다.
혹여 지금 요정 마법사가 다시 돌아오거나, 아예 처음부터 근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죽는다.
하지만 연속된 전투는 육체의 피로 이상을 불러왔다.
다리를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무리였다.
곧 소녀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 * *
이게 무슨 일이야.
어째서 내 파티원들이 죄다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일까.
흔적으로 보아 요정 마법사가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의 생존을 확인하고, 차곡차곡 정리해서 눕혀둔 다음에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이쪽도 [시간 정지]인가. 마력의 흐름이 좀 이상한데."
"아저씨는 그걸 보면 알아요? 어떻게 하는 거지."
"나중에 가르쳐 줄게. 어차피 시공간 관련으로는 대책이 있어야 해. 어떤 공간에서 어떠한 마법이 사용되었는지는 마력이 움직인 흔적으로 추측하고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법도 배워야 하고."
그 말에 소녀가 인상안 확 찌푸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옆을 본다. 영감님과 눈이 마주친 모양이다.
영감님이 눈빛에 대답했다.
"난 못 하는데."
"뻥치지 마십쇼. 대충 아시지 않습니까."
"시간을 다루는 마법 같은 건 당연히 못 알아보지. 내가 그걸 대체 어디서 보겠나."
"보다 보면 보입니다."
"쯧, 난 그럴 자신이 없구먼."
소녀가 상체를 일으킨다. 요정 사제의 로브가 거적때기가 되어버린 탓에 여러 가지 엄한 곳이 보이려 했다.
문제는 이 녀석이 그다지 가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허둥지둥 퍼덕거리자 프로보이가 내 눈치를 슥 보더니 제 망토를 벗어다 덮어준다.
망토는 여러모로 뱀파이어의 필수품인데, 햇빛이 없는 이 행성에 정착하고도 일종의 습관으로서 두르고 다니는 법이다.
지구에서 흡혈귀가 언제나 망토를 두른 캐릭터인 건 이유가 있었다.
소녀가 툴툴거렸다. 어딘가 심통 난 것처럼.
"볼 것도 없는 몸인데 왜 가리고 그래요."
"뭐 어디서 놀림이라도 받았냐?"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누군가 지적하면 아무래도 더 신경 쓰이는 법이죠."
"그 영감탱이가 그런 소리를 했나 보군."
거, 4층에서 바르바로이 때려잡고 나서는 사랑의 작대기를 이어주려던 양반인데.
뭐, 하지만 태도로 보아 괜히 혼자 상심한 거지 그 양반이 뭔가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이 꼬마는 저런 태도가 더 어린애 같아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희소식을 전하려 했다.
"미래에서 온 너를 봤는데."
"아, 저 폭발 제가 한 거예요?"
"그래. 엄청나던데."
"정말 정말 놀랍긴 하네요."
미처 전하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끄덕끄덕한다.
소녀가 다시 털썩 드러눕는다. 안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더 힘이 빠지는 모양이다.
몸도 못 가누면서도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다시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었던 모양새다.
본래 사람을 지키는 히어로였다고 하니 뭐. 책임감 면에서는 항상 합격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점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이미 왕국 이후나 다름없는 꼬라지의 난이도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은 나와 소녀, 그리고 사기템을 들고 다니는 영감님 정도다.
나머지는 이제 머릿수가 필요한 일을 돕는 보조일 뿐, 제대로 된 활약할 수는 없다.
샤크마 같은 것이 노골적인 계층 보스로 등장하려면 왕국에서도 초급 수준은 아니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파티의 부담이 소녀에게 쏠린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본인도 안다. 그러니 더욱 책임감도 강해지는 법이다. 어쨌든 성실한 아이니까.
자기를 따돌리고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에 불만을 가지던 녀석이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약한 소리도 못한다.
쥐방울만 한 게 끙끙대는 걸 보고 있자니 몹시 귀엽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상당히, 정신적으로도 탈진한 모양인지 표정이 몽롱하다. 쉴 필요가 있다.
"그냥 좀 누워 있어라. 피가 급해도 네 피는 빨지도 못하겠다."
"어? 괜찮은데. 목을 물어주실래요?"
"미쳤구나."
"이히히. 저한테는 포상인데. 해주면 안 돼요?"
그렇다고 하니 가서 물었다.
소녀가 간지러워한다.
"그런데 왜 계속 박쥐예요?"
"몸을 유지를 못 해서. [피의 샘]이 완전히 메말랐어."
"아저씨도 엄청 고생했네요."
또 혼자 죽을 뻔했냐고 눈을 흘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게 그냥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내 날개를 폭 끌어안는다.
"괜찮아요. 박쥐도 보다 보니 나름대로 귀엽더라고요."
"뭐래는 거야."
소녀는 열심히 건강한 척을 했으나 정말로 피를 쭉쭉 다 빨아버릴 수는 없다. 전투력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체구는 가느다란 편이다.
이제 슬슬 쪼그맣다고는 못하겠지만 몸에 흐르는 혈액이 많을 수는 없다.
지혈하며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아까 하려던 말인데. 미래의 너를 봤는데 많이 컸더라."
"키도 더 컸어요?"
"꼬마 마법사랑 비슷하겠던데."
"오오. 사실 전 항상 170은 좀 너무 크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그 정도였는데. 너무 크더라고요. 그렇지만 이젠 좋다고 생각해요."
"왜?"
여전히 멍한 표정의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뒤꿈치를 들고 닿으니까……."
"어이쿠, 영감님. 애 좀 챙겨요."
말을 하던 도중 눈이 감기더니 그대로 까무러친다.
몸의 부상은 힐링 포션으로 깨끗하게 낫는다고 치더라도 전투로 다치는 건 몸만은 아니다.
다시 좀 쉬어야 하는 타이밍인가. 쉬지 않고 왕국까지 달린 후에 그곳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뜻대로 되는 게 잘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소녀는 기절한 덕분에 미래에 키만 성장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굳이 다시 말해주진 않았다.
* * *
신성으로 잘 포장된 두개골 속에서 샤크마는 생각했다.
요정 마법사도 이제 사태를 깨달았으리라.
그 녀석은 제 마음대로 어찌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글러 먹었다.
아까부터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고 있으나 두텁게 포장된 신성의 장막은 외부로 어떠한 간섭도 불가능케 했다.
데미 리치는 머리통만 남아도 딱히 큰 부상이 아니지만 봉인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 상황도 참으로 곤란하다.
오래 살아왔고 모든 것을 뜻대로 해왔다고 생각했으나, 언제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마법사는 오랜만에 순수하게 관조적인 태도로 자신의 상황을 직시했다.
여기까지군.
뭐, 썩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닿고자 하는 마법은 많았고, 동시에 닿고자 하는 세계도 있었다.
하지만 아쉽다 해도 단지 그뿐.
어차피 그가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샤크마라는 인물은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미래조차도 여러 가능성 중 일부에 불과함을 늙은 마법사는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샤크마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을지도 모르지.
같은 과거에서 갈라져 나왔을 또 다른 미래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샤크마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LFV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몹시 낯선 감각이다.
차가운 손이 심장을 움켜쥔 듯한 서늘함.
하지만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기에 샤크마는 이빨을 딱딱거리며 웃었다.
새로운 기회로군.
천사가 핀잔을 준다.
"뭐가 좋다고 웃어요? 빨리 라이프 포스 베슬이 어디 있는지 말해요!"
[내가 왜?]
"아 모르겠다. 일단 전부 박살 내고 다녀야지."
가장 먼저 마탑이 쪼개졌다.
샤크마의 실험실을 포함하여 수많은 연구의 결과가 있던 탑은 흉포한 천사가 구석구석 두들겨 부숴버렸다.
지하까지도 파고들었다. 완전히 아작나는 여러 시설들을 보며 샤크마가 마법적인 한숨을 내쉰다.
[그게 다 얼마짜린데.]
"왜 이렇게 여유로워! 이미 그 영감탱이가 들고튀었나?"
번뜩임과 동시에 찬란한 금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천사는 인상을 썼다.
샤크마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세상의 시간이 잠깐 멈췄었음을 눈치채긴 어렵지 않았다.
"결국 어디 있었던 거지?"
이 천사가 찾아온 미래에서도 자신은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 * *
요정 마법사는 어째서 LFV가 이런 곳에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샤크마가 죽는다면 부활하는 곳은 LFV가 있는 장소다.
유배자 감옥의 비처에 숨겨둘 공간을 마련하면 억류된 유배자 하나를 급하게 깨워 계단으로 도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이걸 발견하게 된 것은 우연인가?
샤크마라는 마법사 NPC 특유의 경고와도 같은 표식,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마력이 짙게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붉은 유리구슬같이 생긴 베슬에 금이 가 있다. 그 사이로 마력이, 어쩌면 리치의 생명력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부활할 생각이었건, 이런 식으로 자신이 눈치채길 바랐건, 그 리치의 의도대로다.
"이제는 내 의도대로가 되겠군."
요정 마법사는 그리 중얼거리며 파티 리더를 앞장세웠다.
멍한 표정의 유배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계단으로 걸어갔다.
왕국에서 찾아온 얼간이다. 유명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고, 특기할 만한 특징도 없다.
실종되었다 돌아온다 한들 알아볼 이도 없을 것이다.
왕국 내부로 스며들기에는 적당하다.
LFV에 대해 약간의 우려는 있었으나, 다행히 그것은 계단을 통과했다.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영웅다운 행보를 걷지 못한 샤크마는 세월이 흘러, 영웅도 무엇도 아닌 일개 마법사가 되었을 뿐이다.
일개 클랜 마스터에 불과하던 바르바로이가 연방의 영웅이 되어 역사의 중심에 서며 [히어로 유닛]이 되었듯.
더 이상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휩쓸릴 뿐인 샤크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히어로 유닛]이 아니다.
그것은 샤크마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자조였다.
어찌 되었건 비슷한 처지 아니겠는가.
요정 마법사는 계단을 내려갔다.
* * *
마력을 띤 데미 리치의 해골이 어느 순간 그 힘을 잃었다. 마치 본체와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 듯.
천사는 분개했다.
"이런 역사는 반복될 필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