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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29화 (12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29화

12층 - 최소한의 정리

까무러친 현재의 소녀를 내버려 두고 미래의 소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날아드는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가 나타났다.

텅 비어 공허한 해골바가지가 함께 있다.

보자마자 샤크마를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꼬맹이가 가지고 온 쪽지에 없어가지고 그런데. 샤크마는 원래 놓치는 거지?"

"네에……. 바꿔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좀 더 일반적인 왕국의 환경이었다면 별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지금 그곳도 장난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큰 의미 없는 일이리라.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빛을 잃은 샤크마의 골통을 쪼개려고 했다. 내가 말렸다.

"그거 나름대로 귀한 거야. 왕국에 가면 비싸게 팔 수 있을걸?"

"어, 이거요? 어디다 쓰는 거죠?"

"천사의 눈물처럼 여러 가지 촉매로 쓰이지. 데미 리치쯤 되면 아무래도 귀하니까."

뼛가루로 만들어도 마력의 띈 뼛가루가 된다. 미궁에는 흑마법이라는 분야도 존재한다.

자신의 마력을 사용하는 통상적인 마법, 주변의 환경을 위주로 운용하는 주술, 신앙을 통해 마나를 신성력으로 변환해 사용하는 성법.

흑마법은 그 어느 것과도 호환되지 않는 마법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무언가의 힘을 빌려 오는 주도적이지 못한 마법 클래스.

흔하게 말하는 악마의 계약자 같은 걸 상상한다면 바로 그것이다.

각 서버의 대륙 같은 곳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터부를 그다지 개의치 않는 유배자들은 곧잘 사용하곤 한다.

유배자의 영혼은 저당 잡힐 수 없기에, 위험부담도 적다.

쉽고 그 무엇보다 효율을 우선시하는 것이 유배자다.

당연히 흑마법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한다.

"유배자들 사이의 거래는 물물교환인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지."

"그건 들은 것 같아요. 미래의 아저씨한테 강의를 잔뜩 듣다가 왔거든요."

"초회차인 거 티 안 나게 하려고?"

"천사니까 주목을 엄청 받을 거라니 할 말이 없더라고요."

소녀는 두개골을 봉인하고 있던 신성력을 풀어헤쳤다. 나는 그것을 받아 막내가 지고 다니는 짐 속에 넣어 두었다.

전투 시에는 보통 다른 곳에 벗어두기에 우리의 짐은 멀쩡했다.

방어력을 지닌 장비들이 대체로 소실되었기에 짐에서 예비용을 꺼내 남정네들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소녀에게는.

"과거의 자신에게 옷을 입히는 기분은 어떨까?"

"그러게요."

요정 사제의 로브 같은 물건을 다시 구할 수는 없었기에 평범한 전투복이다.

중세적인 복장을 지금 입고 다닐 이유는 없기에 미래에 오고 난 뒤에 구해둔 장비인데 착용감만큼은 더 나으리라.

미래의 복장들은 대부분 마법과는 인연이 없지만 물리적 소재로 방탄, 방검 정도는 해낸다.

우스운 일이지만 마도공학이 발전하며 개인장비에 마법을 부여하는 기술은 쇠퇴했다.

장인의 영역에 도달한 이들이나 총기를 방호할 만큼의 마법을 부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이들의 숫자는 적었고 생산량에도 한계가 있었다.

가성비의 문제로 도태되어 사라진 기술들.

세월이 더 지나고 나서는 그런 물건들이 귀하게 대접받으며 프리미엄이 붙어버리니 시간을 넘나드는 유배자 입장에서는 우스운 일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억류되어 있던 유배자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우리 파티원들은 치워두고 의식이 있는 영감님과 프로보이, 그리고 나만 대치한다.

유배자의 숫자는 많고 결코 약하다고는 못하겠으나, 대부분 인간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을 상대로는 거의 무적이다.

대부분은 제정신을 곧바로 차리지 못했다.

샤크마는 아주 효율적으로 유배자들을 억류했다.

저들은 전부 각자의 의식 속에 침잠하여 원하는 환상을 보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환상 속에서 현실로 내팽개쳐지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다.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유배자들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착란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피를 뽑아 제압했다. 혈액이 부족하면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다.

제 피에 묶이고 급성 빈혈로 헤롱헤롱한 유배자들을 통제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온전히 정신을 차리는 이들도 있었다.

"구출대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초췌한 안색에도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이는 궁수로 보였다.

마력을 다룰 줄 알고,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장비는 전부 압수당하여 알 수 없으나. 제법 고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영감님과 프로보이도 함께 구출대 행세를 했다.

내가 이리될 것이라 미리 설명한 것만으로도 노회한 오크와 오래된 뱀파이어는 훌륭하게 연기를 해냈다.

얼굴만 보고 트동트를 알아볼 정도의 고참이 있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겠지만 그 정도라면 여기 잡혀 있지도 않았겠지.

혹시 몰라 내 얼굴과 프로보이의 얼굴도 잠깐 바꿔두었다.

어느 시간대에서 이 층에 도달한 녀석들인지 알 수 없다.

나를 아는 녀석들일 수도 있다.

시간대가 꼬일 수 있는 미궁은 이런 게 참 귀찮고 피곤하다.

나는 모르는데 저쪽만 일방적으로 알아보는 상황만큼 곤란한 일도 달리 없다.

점점 제정신을 차리는 이들이 늘어나며 일단은 리더인 자들이 움직여 수습했다.

몇 명은 자살했다.

단꿈에서 깨어나 직시한 현실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각자 남은 타이머를 확인했다. 가장 오래 붙잡혀 있었던 이는 자기도 모르는 새 90년 차의 고참이 되어 있었다.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자기 연차를 밝히지도 못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겼는데. 내가 그리될 줄은 몰랐군."

이렇게 되면 당연히 그 어떤 대우도 받지 못한다.

미궁의 모든 존중은 능력에서 나온다.

소위 말하는 물고참들은 자신의 연차를 낮춰 부를 수밖에 없다.

대뜸 하이 랭커급 고참인 척을 해놓고 그 시간의 대부분이 허송세월이었음을 들킨다면 곱게 끝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구출대답게 그들을 굳이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착란이 아닌 지극히 냉정한 판단 끝에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왕국에 돌아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자들일 것이다.

여러모로 정리가 끝난 후 유배자들은 흩어졌다. 자신들의 계단을 찾아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단 한 파티, 왕국에 도달한 적도 없는 파티가 있었다.

그들은 15층에서 억류당했다고 했다. 보스층이 운이 지지리도 없게 걸린 셈이다.

우린 이게 12층인데. 흠.

그들은 어찌 되었건 왕국에 도달함을 기뻐했다.

리더를 제외하고는 왕국에 도착해 본 경험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16층에 있을 왕국의 문을 통과한다면 유배자들의 나라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내게 말을 걸었던 파티 리더가 나를 구출대라고 했기에 아무 의심 없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첫 단추가 잘 끼워진 탓인지 트러블은 없었다.

"이건 좀 아쉽군요. 덤비는 녀석들이 더 있었다면 [피의 샘]을 좀 더 수급할 수 있었을 텐데."

"자살한 이들이 꽤 많지 않나."

"영감님도 그사이 많이 익숙해지셨습니다. 그려."

"유배자처럼 생각하기 말인가? 겪은 일이 일이다 보니 말이지. 늙어서 굳어버린 머리도 깨져버린 모양이지. 껄껄껄."

다시 찾은 내 육신은 아주 편안했다. 역시 박쥐보다는 인간형이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샤크마가 천사 깃털 패딩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점이다.

뭐 뱀파이어가 된 후에 방어력이 필요한 일은 많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다.

왕국에 가면 뽑을 깃털이 또 있을 테니 그동안 잘 쓴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일단 왕국에 먼저 가 있을 천사에게 샤크마와 요정 마법사를 수색하도록 해야겠다.

파티원들이 뻗어 있는 곳으로 가자, 미래 소녀가 현재 소녀의 옷을 입히고 눕혀둔 채, 빤히 바라만 보고 있다.

"뭐해?"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그럼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게 안 신기해요?"

그건 그렇군. 내 기준에선 특별할 것 없는 일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쪼끄매. 귀여워."

"나르시스트냐?"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아니, 뭐 지금이랑 별 차이도 없는데."

"정말요?"

소녀가 가슴을 내밀었다.

"진짜 진짜 정말요?

소녀가 비장의 섹시한 포즈를 취했다.

아 이거 안다. 그때 거울 보고 연습하던 거다.

어떻게 이렇게 없어 보일 수 있을까.

"머리를 다쳤니?"

"쳇, 뭐 그래도 이쪽 시간선에서도 아저씨는 아저씨네요."

"왜? 저쪽의 나도 다를 건 없을 텐데."

"음, 많은 것이 다르죠."

소녀가 살풋 입가를 올린다.

그러며 눈을 흘겨 뜨는데 믿을 수 없게도.

요염했다.

객관적으로 그러했다.

급격히 어른스러워진 얼굴에 그동안은 있을 리가 없다 생각한 것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방금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꿈에도 모르는 눈치다.

나는 그게 너무 우스워서 실소를 흘렸다.

소녀는 어리둥절하게 나를 보더니 어찌 해석하였는지 흥하고 소리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곧 고백받을 건데. 조심해요."

"뭐?"

반문했으나 더 이상은 대답하기 싫다는 듯 현재 소녀의 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돌아다니며 파티원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대부분이 의식만 없을 뿐 멀쩡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방에 널린 게 치유의 샘이다 보니 죽지 않았다면 몸은 완전히 건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샘물이 회복시켜주지 못한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었음은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살아남은 요정들이 찾아왔다.

미친 요정들은 그 흉흉한 수식어와는 달리 언제나 냉정하다.

그렇기에 미쳐 있는 것이겠지만.

대표로 나선 강아지 귀는 혹시 몰라 정령을 소환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귀가 축 처진 채 손을 들고 다가왔다.

"소환 해제해."

"으응."

정령들이 모두 사라진다. 난 그제야 안도했다. 저렇게 다가오는 척하고 우리를 급습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어버린 요정들의 사고를 예측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을 대비할 뿐.

그렇기에 강아지 귀를 숫제 결박해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것까지 순순히 응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전투할 의사는 없는 모양이었다.

미래의 소녀도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요정들도 그 대폭발의 근원이 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구면 아닌가?"

"맞아, 너 결국 정령왕 소개 안 해줬어."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신앙이 자연의 신이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후, 신님을 배신한 건 지금도 후회하고 있어."

"그럼 용서를 빌어."

강아지 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연의 신께서 발하는 신언을 들려주자 귀를 파들파들 떤다.

"애초에 넌 왜 배신했던 거야? 10층, 아니, 유적에서는 이쪽 편을 잘만 들더니."

"으응, 그건 좀 부끄러운데."

그러며 고백하기를 정령왕 계약 시도를 금지해서란다.

나는 일단 자연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랬습니까? 얘들 정령이라면 환장하는 거 알잖아요."

[하아, 그걸 어찌 용납하겠나. 그러다 다 죽어버리는걸.]

"성공할 정도의 인재는 또 없는 게 문제였군요."

강아지 귀가 부끄러워한다.

"그땐, 나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를 보니 아닌 것 같았어."

"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고?"

"응, 신앙을 배반하고 전쟁의 신에게 갔지만 말이야. 거긴 요정이 살 곳이 아니더라고."

자연의 신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굳이 신언으로 한숨을 내쉬어서가 아니라 정말 온 정신을 다 하여 탄식하는 와중이라 그렇다.

"발랑 까진 요정이 많은 서버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하지만 본래 요정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부분 시답잖은 것들이다.

명확한 악의를 가질 수 있는 요정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의 요정들은 그저 별생각이 없는 것이다.

본래 인간인 자연의 신에게도 한계가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요정이니까.

나 역시 어느 회차에서는 요정 제국을 재건해 본 입장에서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의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썩 행복한 일은 아니다.

강아지 귀가 슬쩍 나를 보며 묻는다.

"너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 그때의 나를 말려줄 수는 없을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미래가 생기더라도 여기 있는 너와는 아무 관계 없는 또 다른 미래일 뿐이야."

강아지 귀가 귀뿐만 아니라 몸도 축 늘어뜨렸다.

"잘못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구나. 응, 염치가 없긴 하지. 미안해."

"사과는 신님께."

"응, 신님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자연의 신이 다시 한숨을 내쉰다.

뭐, 모든 요정이 이렇지는 않다. 정령사의 소양에 현명함은 없다 보니 유난할 뿐이다.

일단 그루터기 요정들은 좀 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서 있는 미래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다행스럽게도 내 눈빛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음으로써 최소한의 지능을 증명했다.

"제가 그래도 얘들보단 낫죠?"

"그건 맞는 말이야."

"후후. 나의 승리."

기천사보다는 잎사귀 요정 카드가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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