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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30화 (130/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30화

13층 - Lv. 775 용암망치 강습사단(1)

여신님께서 부르자 연방의 일개 군단이 호위하고자 이쪽으로 워프해 오려고 했다.

여신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전함조차 와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주변에 그리 인식되어서도 아니 된다.

대신관 대리 고블라초프 서기장은 기꺼이 그 말씀을 따랐다.

동맹의 허가를 받아 아무런 무장을 갖추지 않은 수송선이 자그마한 인공행성에 착륙했다.

물론 동맹이 그 요구를 아주 떨떠름하게 받아들였음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장조차 하지 않은 채로 연방의 영웅이 함께한다고 했으니 겨우 받아들였으리라.

동맹으로서도 연방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다른 속사정으로는 어찌 되었건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무장 세력을 치워준 덕분이기도 했다.

혹자는 유배자를 숭배하는 연방이 또 헛소리를 지껄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다는 식으로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일어나게 된 일을 보며 프로보이는 울상이 되었다.

"아니,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곳에서 퇴거해야 합니까? 갈 곳도 없는데."

"흠, 연방으로 가볼 생각은 없나?"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장 앞서서 배척한 게 바르바로이 그자인데. 거 물론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맞지만……."

500년 묵은 원한이라고 해야 할지. 바르바로이와 그 클랜원들은 딱히 과거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갈 곳 잃은 뱀파이어들이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보려고 연방으로 향하였을 때, 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던 모양이니.

"밑으로 들어갈 생각도 없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랬다간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말았지요. 무엇보다 그 시절의 연방은 그 정도로 굽히고 들어갈 만큼 강하지도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렇다. 연방이고 동맹이고 아직 불안정했고, 제국은 여전히 강했을 것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하는데, 대놓고 제국을 적대하는 연방의 아래로 자존심마저 굽히고 들어갈 메리트는 없었으리라.

물론 단지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맹은 만족스러웠어?"

"그랬으면 뱀파이어 클랜들이 이런 변방으로 밀려났겠습니까."

"행복하진 못한 모양이군."

"저희는 그래도 살만은 하지요. 다른 클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많은 중세 판타지 월드에 존재했던 것들이, 분화된 미래에서는 사라진다.

새로 생기는 것도 있겠으나 역사책에만 남게 되는 것도 많다.

한때, 인간의 국가와 협정을 맺으며까지 공고하게 밤을 지배했던 뱀파이어 클랜들은 이제 와선 서로 안부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는 프로보이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나는 클랜 마스터란 말이지."

"예? 예."

충격적인 일만 가득했던 하루인지라 제정신이 아닌가 보군.

"그 바르바로이네 클랜, 이젠 오르골 클랜이라고. 아니지. 이제는 무슨. 여기선 500년 전부터 말이야."

"오르골요?"

"거 날 지칭할 땐 그렇게 부르면 되니 기억해 둬."

"가명이죠?"

"유배자가 본명 말하고 다니는 거 본 적 있나?"

프로보이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생긴 청년의 외모를 하고 있는 소드 마스터가 그러고 있으니 기묘하다.

"어, 그럼."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바르바로이도 반대할 수 없단 소리지."

"그리 해주신다면 정말 기쁘기 한량없겠습니다. 저희 클랜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좋지, 새 보금자리는 제법 마음에 들 거야. 내가 그리 말할 테니."

프로보이는 희희낙락하며 혼돈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기꺼이 혼돈에 귀의하겠다고 했는데도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데려온 꼬맹이와 바르바로이 말고도 당시의 다른 클랜원들은 대부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한을 잊기 힘들 것이고.

10층의 마지막에 보았던 거지꼴이 잊히지 않는다.

낙오 클랜의 말로는 원래 그런 식이다. 태양마저 적인 뱀파이어에게 도피 생활은 가혹하다.

나이트 크로우는 뱀파이어 사회의 협정에서 벗어난 낙오 클랜을 사냥함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한때 동족이던 인간, 그리고 지금 동족인 뱀파이어들에게 이중으로 추격당하는 꼴이었다.

실제로도 10층에서 바르바로이가 박박 긁어온 생존자들은 썩 많지 않았다.

6층의 북부 설원지대에 얼어 죽었던 클랜원들도 생각하면 절반 이상이 그때 재로 돌아갔으리라.

하지만 이건 아마 프로보이가 도달한 결론일 것이다.

실제로는 어떨까? 나는 좀 다른 이유에 였다고 생각하는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우리 클랜원들이 나에게 얼마나 충성하는지를 알아보자.

네모나게 각진 커다란 수송선이 열리고 아주 번쩍번쩍한 계단이 내려왔다.

연방의 함선들은 대체로 딱딱 각진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제국의 수도에 감행한 충각이 그래서 더 강력했을지도 모르겠군.

가장 먼저 뱀파이어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10층에서 보았던 생존자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스쳐 지나간 얼굴들도 가능한 그 회차 내에서는 머릿속에 집어 넣어둔다.

이건 습관이라 특별히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아는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원 500살 이하인 모양이다.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클랜 마스터를 알아보았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왔다.

잠깐 빛났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도시는 지극히 뱀파이어스러운 배경을 깔아준다.

하지만 그 배경 앞에 도열한 뱀파이어들의 태도가 참으로…….

바르바로이가 걸어 나왔다.

지극히 귀족적이고도 잘생긴 얼굴.

동방의 피가 섞여 살짝 인종이 다름에도 어색함 없이 녹아드는 날카로운 인상이다.

전혀 변함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정말로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관록이란 것이 꼭 얼굴의 주름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시선의 처리, 걸음걸이, 자세, 미세한 표정의 변화.

인간은 원래 그런 사소한 정보들을 모아 본능적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나는 그것을 좀 더 의식적으로 할 수 있다.

바르바로이는 확실히 [히어로 유닛]이 될 만한 삶을 살아왔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오랜만 수준이 아닐 텐데."

"십 년 정도야 뭐."

"우리가 꽤 자주 만났나 봐?"

바르바로이가 슬쩍 웃는다.

"언제나 그렇듯. 앞으로도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는데."

"연방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시간대는 이미 끝자락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이 미궁이 ‘먼 미래’라고 판정하는 구간인 모양이지요."

"그럼 우리가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가?"

우습게도 그 누구보다 유배자를 신봉하며 유배자를 연구해 온 연방은 출현 위치나 출현 시기에 관해서는 나만큼이나 잘 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수집한 자료가 다르니 대강의 추측인 나보다 연방의 결론이 더 신빙성 있다.

바르바로이가 말을 잇는다.

"아마도 그건 아닙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91년 전에 나타난 마스터가 가장 미궁 후반에 있었습니다. 그때 말하기를 이 뒤에 한 번이 더 있다고."

"그럼 그때 마스터 자리를 내려놓으면 되겠군."

"마스터가 항상 뱀파이어였던 것은 아닙니다만."

"아, 그럼 이미 내려놓은 후를 보기도 했겠네."

"예……. 뭐 보안을 위해 최대한 통제하긴 했습니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나에게 꽤나 귀한 종족이 나온 모양이다.

지금 그 정체를 알게 되는 것 자체가 확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족카드는 특히나 확률에 민감하기에, 어딘가 꼬여버리기 쉽다.

행운의 신은 시간의 신이 자신의 영역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획자 놈이 슬쩍 말해준 내용이었다.

소녀에게도 천사가 된다는 사실은 숨길 것이다.

물론 본인이 나름대로 추측은 할 수 있겠지만, 확신할 수 없다면 그대로 이루어지겠지.

추측건대 나는 15층에서 소녀에게 뽑기를 시켰다.

이 아이가 확률을 비트는 존재니까 천사 카드를 뽑아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운에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것은 소녀를 시키는 편이 옳다.

꼭 좋은 결과만을 내지는 않겠지만, 반 정도만 좋은 결과를 낸다면 충분하다.

그걸 굴리는 것은 내 몫이다.

그 후에 준비된 만찬이 있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동석한 자리에서 상석에 앉아 있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바르바로이와는 사실 서로 그리 친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한 친한 척을 해주었다.

다른 젊은 뱀파이어들의 분위기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만찬이 끝나고 전설의 클랜 마스터와 담소하는 시간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서비스했다. 무게감을 잃지 않는 선에서 바르바로이를 곁에 두고.

젊은 뱀파이어들이 감격에 겨워 떠난 후, 바르바로이가 큭큭 대며 말한다.

"언제나 상황을 정확하게 보시는군요."

"분위기를 잘 읽는 것이 내 최고의 장점이지."

"이제 쉬시지요. 최고로 훌륭한 객실을 준비했습니다."

"신세 좀 지겠어."

"당신의 것입니다. 신세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파티원들을 진작에 모두 수송선 내부로 옮겼다. 각자의 객실을 배정받았다.

눈을 떴을 때 시중을 들기 위해 수만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직원들이 대기 중이라는 모양이다.

프로보이가 바르바로이의 눈치를 살핀다.

나는 낄낄대며 말했다.

"이 친구 좀 용서해주지그래?"

"원망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럼 문전박대한 건 역시 그건가."

"저자가 이곳에 있어야만 마스터께서 생존하실 테니."

그럴 것 같긴 했다. 필요에 따라 이곳에 배치되기 위해 배척당한 셈이다.

프로보이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찌 되었건 그는 안도했고, 클랜원들을 데리러 가기 위하여 다시 행성을 관통하는 열차에 올랐다.

미래 소녀가 입맛을 다신다.

"그거 좀 재밌었는데."

"이제는 그거보다 네가 더 빠르지 않아?"

"지금은 스릴을 느끼긴 힘들 거 같긴 해요."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나도 내 개인 객실이라는 곳으로 갔다.

나는 소녀에게 질문했다.

"12층에서 가져오란 거 없었어?"

"아! 맞아! 돈 좀 가져오랬어요! 금 같은 걸로."

즉시 준비되었다. 소녀가 주머니를 끌어안고 인사했다.

"저는 그럼 이제 가볼게요! 여기의 저한테도 잘해줘야 해요!"

"아무렴. 도와줘서 고맙다."

"에이 참, 쑥스럽게."

금빛의 신성이 소녀를 휘감았다.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미래에서 온 천사는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나는 내 개인 서재라는 곳으로 갔다.

여러 가지 메모가 남아 있었다.

기준을 나 자신으로 잡는다면 미래의 내가 남긴 것이지만, 이 서버로 잡는다면 과거의 내가 남겨둔 것이다.

우스운 꼴이지.

나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국에서도 후반부, 혹은 중반부에 도달한 내가 와서 남겨둔 정보들.

이 또한 완전히 고정된 미래는 아니겠으나 미궁이 판단하기에 이 시점에선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짜 맞추어둔 것이다.

게임 시절에는 단순히 미래 스테이지, 과거 스테이지 이런 식이었는데 현실의 보정이 씌워지고는 아주 머리 아픈 일이 되었다.

"하지만 뭐, 머리 아픈 일이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힌트를 얻을 수도 없었겠지."

세상만사 모든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쪽만 존재하는 경우는 생각 외로 적다.

언제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 생각한다.

* * *

휴식은 하루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로 철저하게 휴식했다.

바르바로이가 말하길, 내가 직접 가장 안전하고도 밀도 높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전용 수송선을 준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파티는 이미 이 전용 수송선을 몇 번이고 써왔다고 했다.

그때마다 멤버는 조금씩 달랐겠지만, 그건 묻지 않기로 했다. 늘 그렇듯 정보가 제한되어야만 미궁이 유리하게 판정해 주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의 정보마저 통제해야 한다.

시설은 좀 많이, 사실 과할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연방의 모든 기술력이 집약된 편의 시설들이 드넓은 수송선에 공간이 없을 지경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

온갖 속성의 마력을 흘려 만든 온천에 와서는 영감님이 가장 감탄했다.

"이건, 소문으로만 듣던 그건데."

"대륙에도 있었습니까?"

"있었지. 뭐 숨겨진 전설 같은 거긴 한데. 인공적으로 구현한 것인가? 어떻게 한 거지."

꼬맹이는 바르바로이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꼬맹이 입장에서는 아직도 나보다 저쪽이 더 친숙한 모양이다.

바르바로이 본인이 원하기도 했다는 모양이고.

마찬가지로 저 또한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르바로이는 이미 미래의 꼬맹이를 과거에 보았을 테니까.

이건 꽤 나쁘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스스로의 정보를 제한해도 대신 활용하여 파티 관리에 도움을 주는 존재.

집사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우주는 아무래도 이대로 확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름대로 신세 지고 있는 자연의 신에게 그 의향을 말하자 그는 흔쾌히 내 결정을 지지했다.

"요정들이 안타깝게 되었는데 문제없으십니까?"

[내 그간 이 서버의 요정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다른 신들에게 좀 수소문을 해보았지. 이런 미래를 만든 것은 거의 자네 혼자지만 대부분의 신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 혼자 반대한다고 어찌 되겠나. 혼돈도 좋아라 하는 마당에.]

나도 예의상 물은 것이긴 했다. 여기 억류되어 있던 유배자들만 보아도 생각보다 많은 신들이 이미 이 우주를 관측했다.

동맹을 장악한 규율의 신이 선수를 친 것 또한 그래서일 것이다.

"그럼 그리 생각하고 움직이겠습니다."

[사실 그걸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정말로 한 명의 유배자 손에 서버 하나가 틀어 쥐어진 꼴이니.]

"늘 하는 소리지만 제가 좀 대단합니다. 규율의 신 쪽은 특별히 소식은 없는 겁니까?"

[단지 가장 먼저 이 미래에 진입했을 뿐인 것 같은데. 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긴 하군.]

"그렇다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규율의 신과 내가 특별히 적대관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원만한 해결이 불가능한 트러블이야 있겠는가.

[그렇다 해도 이 서버의 미래는 시작점이 꽤나 뒤쪽이군.]

"가끔 그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간섭하기 힘들도록 말이죠."

시간 순서가 꼬여 있으니 오해하기 쉽지만 이 서버의 ‘미래 스테이지’는 지금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미래에 이 서버의 과거를 방문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만들어져 끼워 맞추어진 내용일 뿐이다.

미궁은 철저하게 유배자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모든 시간의 기준점 또한 왕국이다.

유배자인 신들이 인식하는 시간 역시 왕국 기준이다. 신에게 각 서버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새로운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바르바로이가 말한 과거에 나타난 미래의 나.

그건 왕국 기준에서는 본편 이후에 출시한 프리퀄 스토리에 불과하다.

만약 무언가 크게 변하여 이 미래가 없었던 것이 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그런 이야기.

결국 모두 NPC다.

나를 보며 감동을 받았던 클랜의 뱀파이어들도, 수백 년간 헌신해 온 바르바로이도.

덧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그 사실을 되새긴다.

어쩌면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 * *

계단을 내려갔다.

온갖 부귀영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몇 명의 눈빛마저 흔들릴 정도로 호사스러운 하루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진한다. 이곳에 남고 싶어 하기에는 다들 각자의 목적이 있으니까.

그리고 총탄과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주 공간이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빛나는 대검을 든 트롤 부대가 돌격해온다.

뒤편에서는 수세에 몰린 고블린 군인 한 무리가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기 전에, 우선 다들 무기를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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