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31화
13층 - Lv. 775 용암망치 강습사단(2)
모든 전쟁은 단지 거대한 병기로 포격을 날려 박살 내버린다고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쟁은 결국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싸움이며 점령에는 보병이 필요하다.
이런 시대에도 보병이 존재하면 백병전을 벌이게 되는 원인이다.
그저 행성의 표면을 깨끗하게 유리화해서는 어차피 누구도 가질 수 없을 뿐이니까.
아무리 멍청한 그린 스킨들이라도 그 사실만은 온전히 이해했다.
그들의 상식에서도 전쟁은 보상이 따라야 함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제국 역시 보병은 운용했고, 그 대부분은 트롤들로 채워져 있었다.
트롤들은 골치 아픈 총기의 사용법을 배우기보다는 그저 휘두르면 되는 쉽고 간단하며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빔 그레이트 소드나 로켓 해머 따위의 거대한 무기였다.
사실 사이즈만 보면 그건 무기라기보다는 이미 병기다.
트롤은 먼 옛날 거대한 도마뱀들을 길들여 타고 다니던 시절부터 살아 있는 공성 병기였다.
그들이 돌격하여 부딪히면 성벽이 흔들렸고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무너져 내렸다.
전쟁과 야성의 신 아래에서도 가장 야성적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것이 트롤이다.
우주 시대가 찾아오며 많은 것이 변했으나 트롤들만큼은 그 강력함을 잃지 않았다.
늘어진 오크 사수들과 겁쟁이 오우거들을 비웃으며 그 누구보다 낡은 전쟁 신앙을 지니고 달려나간다.
빗발치는 총탄도 체장만 5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질량을 단숨에 사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버텨내며 돌격, 다시 돌격!
그 끝에는 언제나 승리가 기다린다.
* * *
연방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동시에 국지적인 패배의 가능성마저 외면하지는 않았다.
백병전은 제국이 명백하게 강세를 보이는 영역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함대 전력은 연방과 동맹의 압도적 우세다.
제국은 거대한 행성 요새를 바탕으로 간신히 수비만을 해내고 있을 뿐이다.
군을 장악하고 있는 오우거 사령관들은 어리석거나 멍청하지 않았기에 전략적으로 함대를 보존했다.
무슨 일만 있다면 행성 요새가 나타난다.
연방으로서는 제공권은 완전히 장악했음에도 적을 온전히 쓸어버리기는 지난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연방의 행성 요새도 이동하기 시작했다.
본디 수비 목적으로 건설되기에 결코 공격 용도를 고려하지는 않았으나 광신도들은 그 비효율을 기꺼이 감내했다.
애초에 총력전이다.
연방의 모든 것은 혼돈의 이름 아래 영광을 쟁취하기 위에 존재한다.
다만 그에 걸리는 시간만은 어쩔 수 없다. 우주는 너무나도 광활하다.
그리고 행성 요새의 막대한 질량이 워프할 수 있는 거리는 한계가 있다.
그에 드는 에너지마저 막대하다.
행성 요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미 한 달이 지났으나 아직도 절반도 이동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함대 전선은 고착화되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연방과 동맹은 제국의 버려진 영토를 공격했다.
제국의 테라포밍 기술은 대부분 약탈한 것이지만 제대로 작동은 했다.
제국령 A - B02 행성.
한때는 화산 활동이 활발했으나, 약 십여 년에 걸친 테라포밍 작업으로 푸르른 대기를 지니게 된 지구형 행성은 그 어떤 국가라도 탐낼만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고기만을 원하는 제국은 그곳에 대규모 목축만을 하고 있지만 동맹이나 연방의 손에 들어간다면 곡창지대가 되리라.
그런 상상을 하며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스펜서 중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가 볼세라 재빨리 그것을 주워 담았다.
지상의 전세가 지지부진하다.
연방에게 있어 여신은 절대적인 존재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위해 현실을 완전히 등한시하며 살아가지는 않았다.
모든 물질적 가치는 여신님을 위해 존재한다.
언젠가 여신께서 다시 도래할 그 날을 위해 기술을 갈고 닦으며 물질적 부를 축적한다.
그리하여 연방이 쌓아 올린 기술과 전력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발목을 잡았다.
거대한 트롤들.
저 타고난 야수들을 고블린이나 뱀파이어가 순수한 지상전에서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물론 옛날처럼 맨몸이라면 고온의 플라즈마나 레이저가 저 괴물들의 몸을 불태울 것이다.
문제는 시대에 나름대로는 적응한 트롤들이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오랜 옛날의 전쟁에서도 그러한 부대는 있었다.
충격대대라고 명명된 제국의 최정예 집단들은 무수한 전장에서 위협적인 위력을 선보였다.
당시에 아직 작고 약했던 연방에 트롤들의 공포는 뼛속까지 새겨져 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수한 전술과 전략이 입안되었다.
실제로 시험해 본 것은 아니었다.
스펜서 중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신님께서 가호하사 야만적인 트롤들을 다진 고기로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오산이라면 제국 역시 전쟁에 대한 기술만큼은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갑옷은 과거처럼 투박한 쇳덩이가 아니다.
첨단 기술이 적용되어 플라즈마 및 레이저에 대한 방호를 제공하는 아주 제대로 된 방탄복이었다.
열은 분산시키고 빛은 흩어버린다. 무수한 마법적 원리가 트롤들의 질긴 생명력을 훨씬 더 강화했다.
안면마저 확실하게 보호하고 있는 트롤을 정면에서 저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결국 동원되는 것은 명백하게 에너지 병기보다 화력에서 우위에 있는 실탄 병기다.
포대들이 사격을 개시한다.
연방의 군대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귀청이 멀어버릴 것 같은 포화와 함께 돌격하던 트롤들이 하늘을 날았다.
일부 직격당한 것들은 터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화망이 촘촘하더라도 그 범위 전체에 충분한 살상력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지겹도록 재생하고 또 재생하는 괴물들은 어딘가 다쳤을지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일어서 돌격해온다.
혹여 직격하였더라도 즉사하지 않았다면 등에 메고 있는 탱크가 터지며 쏟아져 나온 유사 기적의 샘물이 트롤을 살려낸다.
유배자가 가지고 다니는 기적의 샘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것이 연구된 이후 전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다시 한번 포탄 세례가 날아든다.
대규모로 운용되는 저격수들의 사격도 개시된다.
달려오던 트롤들의 일부가 갑자기 엎어졌다.
레일건의 탄환이 정확히 뇌를 관통했다. 즉사다.
비로소 트롤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엄폐물을 찾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산개하며 포화를 연막 삼아 돌격해온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두터운 헬멧을 착용한다.
바로 앞의 점 말고는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식한 물건이지만 즉사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는 저보다 훌륭한 물건이 없다.
저격수들의 사격이 힘을 잃는다.
비록 그 물리력이 트롤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을지언정 다시 일어나 달린다.
충분하다고 판단한 스펜서 중령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후퇴를 지원하기 위해 드론들이 사출된다.
트롤들은 도주하는 고블린들을 보며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재생하는 5미터의 근육 덩어리 괴물은 이런 시대에도 막대한 위력을 발휘한다.
각지에서 후퇴가 시작된다. 트롤들을 충분히 소모시킨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전과만 보자면 일방적이다.
죽은 트롤은 많으나 죽은 고블린은 거의 없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위기가 닥쳐왔다.
다른 사방의 방향에 강하 캡슐이 떨어졌다.
제국을 상징하는 검고도 거대한 관과도 같은 것들.
하늘을 보자 함선 하나가 서둘러 지나가고 있다. 그곳에서 지금도 빗발치듯 무수한 강하부대가 투입되고 있었다.
"이런 제길! 저 트롤들은 고립된 녀석들 아니었나?"
지원이 있을 리가 없어야 했다.
제국이 공세에 나섰나? 어째서?
사전에 알기로는 지상에 남아 항전하는 패잔병일 터였다.
지상으로 투입된 군단은 그런 작업을 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저지력만을 발휘하며 백병전의 거리를 주지 않고 밀어서 갉아먹는다.
이렇게만 하면 결국 안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순식간에 대대가 고립되었다. 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특히나 돌출되어 있었던 것이 스펜서 중령의 대대였다.
그의 대대가 바로 최소한의 저지력이었다.
주변의 다른 대대는 전원 포병대다. 화력이 너무나도 중요한 트롤들의 섬멸 작전이기에 발생한 기형적인 편제다.
중령은 여신의 곁으로 떠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 * *
위대한 혼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고블린들이 돌격하려 했다. 최후의 최후에 플라즈마 수류탄과 함께 트롤 한 기라도 길동무 삼고자 함이다.
가장 앞에 서 있던 트롤이 긴장했다.
먼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고블린에게 트롤이 죽을 수도 있는 시대다.
그 조심성 덕에 고블린들의 마지막 저항은 이루어지지 못하려던 참이었다.
트롤은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보폭의 차이 덕에 고블린은 트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투척되는 수류탄은 대량의 열을 발생시켜 주변의 공기를 이온화하기 전에 빛나는 검에 삼켜졌다.
모든 수단을 상실한 고블린이 검을 빼든다. 발톱 하나라도 벗기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달려가는 끝에 트롤이 발길질을 날렸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발이 사라졌다.
트롤도 고블린도 당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날아간 발은 산산이 박살이나 피를 뿌렸다.
그런 와중에도 재생이 시작된다. 트롤이 등에 멘 탱크에서 관이 뻗어 나와 입에 물려 있다.
정말로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재생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몸집이 큰 만큼 대량으로 쏟아졌던 혈액이 파스스 떠오른다.
재생하고 있던 혈관의 혈액도 트롤의 몸 밖으로 조금이라도 삐져나오는 순간 어떤 기이한 힘에 붙잡혔다.
트롤이 쓰러진다. 빠르게 재생되지 않아 균형을 잃었다.
그런 트롤을 그의 피가 덮쳤다.
사방을 파고든다. 푹푹하고 방탄복 사이를 헤집고 피가 휘몰아친다.
순식간에 피칠갑을 한 트롤이 허우적거린다.
고블린 소대장은 입을 떡 벌렸다.
연방의 모든 이들이 이것을 안다.
뱀파이어가 아닐지라도, 연방을 수호하는 뱀파이어 클랜의 존재를 모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클랜 마스터.
권능과도 같은 힘을 다루는 밤의 지배자.
위대한 혼돈의 대전사.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그분들은 언제나 위험한 전장에 나타나신다.
"위대한 대전사께서 전장에 임하셨다!"
다른 고블린들의 눈에도 빛이 돌아온다. 그들의 전투 의지는 꺼지지 않았을지언정,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혼돈께서 직접 지켜보시는 곳에서 패배할 수는 없다.
소대의 막내가 비명 같은 환호를 내지르며 달렸다.
승리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행성에는 전략적 후퇴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통신병이 무기를 내던지고 상황을 전파했다.
그들의 눈앞에 신화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상의 유배자 파티가 있었다.
모든 전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포병들은 후퇴를 멈추었다. 일절의 전략적 유불리를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포병들은 달려드는 트롤의 아가리에 포구를 쑤셔 박으려고 했다.
심지어 일부는 그것을 성공하고 격발했다.
그 분노에 가득 찬 야성의 화신들이 기에 밀려 주춤할 정도였다.
스펜서 중령 역시 열광했다.
비교적 침착했던 부관이 검을 뽑아 들고 지휘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대대장을 말렸다.
바지가 벗겨지고서야 중령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
위대한 혼돈께서는 아직 그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도 남아 있다.
* * *
화려하지만 저 트롤의 사인은 결국 질식이다. 재생을 거의 무위로 돌릴 만큼의 지배력을 발휘할 수는 있으나, 전장을 나 혼자 뒤엎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겐 다른 무기가 있다.
트롤들은 화기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법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라울 만큼 똑똑한 트롤들만이 그 덩치에 걸맞은 포를 짊어지고 다닌다.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가서 다 물어 죽여라!"
"으르렁 왕왕!"
늘 그렇듯이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은 나와 소녀.
다른 파티원들은 진형을 갖추며 소대와 합류한다.
엄밀히 따져서 군대끼리의 싸움에서 유배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우리가 전장에 나타난 순간, 온 사방에 그 사실을 알리고 미쳐 날뛰고 있는 고블린들을 후퇴시키긴 해야 한다.
"이 녀석들아! 후방으로 돌격!"
그 말에 우리 쪽을 향해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멈칫한다.
그렇다. 전략적 후퇴가 아니다. 돌격의 방향이 바뀔 뿐이다.
과연 위대한 대전사!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다.
나는 계속 닦달했고 고블린들은 감탄하며 후방으로 달렸다.
놀랍게도 혼돈의 대전사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명성은 트롤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사방을 휩쓰는 피의 파도를 목격한 트롤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정말 기묘하다. 고블린과 트롤이 반대가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