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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33화 (13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33화

13층 - Lv. 775 용암망치 강습사단(4)

정령을 돌보는 일은 초기에는 사실 대단한 일이 없다.

실피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령왕씩이나 되는 존재일지라도 그 격이 높을 뿐, 갓난아이임은 변치 않는다.

가끔 찾아가 어루만져주고, 마력을 흘려 잊지 않게 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며 교감한다.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기 시작한다면 그 후에나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생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령사는 정령을 소유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령은 정령사에게 귀속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다.

힘을 빌려 쓴다는 점에서는 흑마법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봐야 한다.

계약 자체도 한 정령왕의 계약자가 한 명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피드에 접근하여 계약을 시도하는 정령사는 NPC 유배자 할 것 없이 상당히 많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강아지 귀의 언급에 따르면 결국 그 이후 정령왕에 도달한 정령사는 없었다는 모양이지만.

어쩌면 그런 환경이 실피드를…….

내게 꽤나 의존적이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바람의 권화가 계약자의 마음에 들기 위한 모습을 취한다.

인간의 형태는 취했으되 익숙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동작이 약간 어설펐다.

비틀비틀 걸어오더니 얼굴을 내게 비빈다.

소녀는 절대 이런 일을……, 아니, 걔도 하지.

하지만 나름대로 세월을 보내온 정령왕이 이러는 것은 느낌이 좀 다르긴 하다.

내가 원래 겪어왔던 정령왕들은 대부분 신들만큼이나 노회한 존재들이었다.

그야말로 왕의 품격.

동시에 그렇기에 믿음직한 구석도 있었는데.

우리 실피드는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었으나 경험은 좀 부족해 보인달지.

관록이 없다. 느껴지는 힘은 분명 강렬하지만 그럼에도 어째 그냥 귀엽다.

소녀에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은발의 소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원본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점잖은 인상을 유지하는 게 신기하다.

[아주 과거에서 오셨군요. 제가 아는 어떤 아버지보다도 젊은 느낌이 납니다.]

‘늙었다고 해봐야 몇 년 흐르지 않았을 건데.’

[심리적인 부분 아닐까요?]

음, 뭔가 좋다. 소녀보다 더 좋다.

어린애 같은 치기를 쏙 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외모는 은발을 빼면 지금 바깥에 있는 현재의 소녀와 똑같은데도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한 서버의 정령왕으로서 실피드는 넘어야 하지 않을 선을 잘 알고 있었다.

교감이라는 이름의 담소는 정신적인 세계인 정령계에서 꽤나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현실에 돌아왔을 때, 흐른 시간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 * *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만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생물이다.

물론 소녀는 평소에도 아저씨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호화로운 휴일을 보내며 그 생각은 더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예를 들자면 바빠서 구체화하기 힘들었던 계획이라거나.

아저씨가 늘 방패로 내세우는 것은 주로 아직 포기하지 않은 대한민국 국적과 그에 따른 미성년의 제약이다.

아닌 건 아니라는 태도.

물론 핑계일 뿐이지 단지 그뿐만 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갑자기 몸만 쑥쑥 크고 있긴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아직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남이 보기에는 확실히 그러한 모양이라고 주변의 반응에서 깨닫는다.

스스로는 전혀 모르겠지만 겉으로 내비쳐지는 치기 같은 것에 아저씨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 아닐까?

한 번 생긴 이미지는 고착화된다. 더 오래 가면 바꿀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면 상대가 나를 다시 봐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자칭 연애 고수인 그녀의 언니가 전수한 가르침이었다.

언니가 연애 고수라는 게 진짜인진 그녀도 모른다. 분명 어여쁜 편이었다 생각하지만 언니의 남친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말 자체는 그럴싸하다.

그러니 실천한다.

어차피 연애 상담을 받아줄 사람도 없다.

딱 거기서 소녀는 멈칫했다.

한 명 있을지도 모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

소녀는 여신님께 기도를 올렸다. 답지 않게 경건한 태도로.

여신님께서는 아주 미심쩍어하며 응답하셨다.

「웬일로 그리 공손히 기도를 올리느냐.」

‘위대한 혼돈이시여. 혹시 연애 경험 많으십니까.’

「뭐 남심을 사로잡는 비법이라도 원하느냐?」

‘그렇사옵니다.’

여신님게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선포하셨다.

「내 유배자가 된 나이가 열셋. 나름대로 귀족의 딸내미였지만 정략결혼이랑은 인연이 없는 금지옥엽이었지.」

‘네에? 귀족이셨어요?’

「그럼. 물론이지. 고귀한 기품이 느껴지지 않니?」

‘어……. 네.’

떨떠름한 반응에 여신님은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았지만, 더 큰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소녀의 생각을 깊이 읽지 않기로 했다.

「유배자가 된 후 악착같이 살아갔지. 연애? 본의 아니게 창에 바친 인생이지 뭔가. 거기다가 나는 좀 꽝이었어.」

어딘가 중요하고도 덧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 와중에 소녀는 호기심이 일었다.

‘꽝이란 건 뭐죠?’

「유전자 문제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어린이였는데 거의 자라질 않더군. 스탯 보정도 크게 못 받아서 힘들었어. 내 무기가 창인 이유가 뭐겠니. 다른 무기로는 팔이 짧아 닿지 않는단 말이야.」

‘혹시 가족들이 전부……?’

「낮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갔었던 것 같긴 하군. 여튼 그래서 아무도 나를 원하진 않던데. 변태 같은 일부 녀석들은 내 쪽에서 사절이었지.」

소녀는 어딘가 납득했다. 유전자의 포텐셜이라면 정씨 가문의 구성원들은 키가 큰 편이었다. 그녀가 좀 유난히 작은 편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원래 이렇게 자랄 것을 되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 말은 거창했지만 어쨌든 모솔이란 거네요. 거기에 묘하게 동병상련…….’

「그래.」

‘슬픈 일이군요. 그리고 왜 그렇게 당당하십니까.’

「신은 언제나 당당하지. 뭐 그래도 원한다면, 음. 남편이 열넷인 고블린에게 신탁을 내려 보마.」

‘좀 아닌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러해.」

소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알지 않아도 상관없는 정보만 갑자기 떠안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 어쨌건, 이대로 현상유지만 된다면 좋지 않다.

히어로의 히로인이 되고 싶다면 가만히 앉아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결행일은 명목상으론 스무 살이 되는 날.

미궁의 시간이 어떻게 꼬여 있건 그녀의 몸은 정직하게 나이를 먹는다.

만약 그럼에도 안 된다고 하면 그때야말로 쟁취할 것이다.

이곳은 미궁.

애초에 대한민국도 아니며, 그 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지조차도 의문이다.

소녀의 순정은 쟁취하는 것이다.

힘으로.

* * *

딱 정령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을 때 보인 소녀의 얼굴은 기묘한 결의로 가득 차 있는 것같아 보였다.

거기까지 읽어내더라도 그 결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독심술]이나 [마인드 스캔]은 아주 귀한 스킬이다.

대신 나는 그 얼굴에서 조금 다른 부분을 느꼈다.

그것은 미래에서 온 소녀의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소녀의 형태로 색다른 차분함을 보여준 실피드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던 탓일까, 선입견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아이는 금방 자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벽에 쾅 하고 박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냥 당하고 있자니 소녀는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러더니.

"이게 아닌가?"

하고 가버렸다.

뭔데.

옆을 보자 가만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영감님도 허허헣. 하고 웃기만 했다.

요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거기에 어쩐지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는걸.

갑자기 자연의 신이 웃었다.

「자네는 정말 눈치가 빠르군.」

불안하게 무슨 소리야 이건.

* * *

함대로부터 통신이 전해졌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연방은 적 행성 요새의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 함대를 총동원하고 있었다.

일단은 연합군으로서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맹군 역시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 제국이 한쪽을 뚫고 나왔다. 행성 요새 하나를 앞세운 강행돌파였다.

그런 짓을 할 것이라 생각을 못 했던 동맹군은 그대로 뚫렸다.

함대전이야 어쨌건 본디 제국령이던 거주 가능한 행성은 어디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기인 백병전을 살려 항전 중이다.

인질은 행성 그 자체다.

주둔군은 보통 가장 쓸모 있는 땅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연합군은 차마 그곳을 함포로 날려버릴 수 없었다.

가장 현명한 그린스킨인 오우거 사령관들이 만들어낸 교묘한 교착상태다.

그린스킨은 인구가 상당히 많은 종족들이며 우주 시대 이후에는 더욱더 늘었다.

천재적으로 부지런한 오우거들은 열심히 제국을 일구어 나갔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 보이더라도 폼으로 제국을 칭하지는 않는단 것이다.

그 석학들은 이제 제국의 강점인 지상전을 지원하여 활로를 뚫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무모하다면 무모하지만 현명하다면 현명한 판단이다.

아니 어쩌면 실로 그린스킨다운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영감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암, 이게 오크지."

"오우거일 텐데요?"

"아, 아무튼 오크야. 황제는 오크 아닌가."

그때 일단은 이 주둔지의 주인인 연대장이 도착했다.

"회의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질문이지만 설렘으로 가득한 것이 당연히 참석하리라 믿는 모습이다.

"그러도록 하지."

파티원들이 이동했다. 어차피 내가 설명하겠으나, 같이 들어두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소녀는 이런 것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황제 하니 생각이 났다. 전쟁의 신과 당대 황제는 여전히 밀접한 관련이 있을 텐데.

그쪽이 참으로 조용하다.

유배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좀 찝찝하긴 하다.

아무래도 제국은 아직 최후의 패를 테이블 위에 까지 않았다.

용인들과 연합한 그린스킨의 제국.

그렇다면 그 뒤에는 드래곤이 있다.

그야말로 미궁 최강의 생물인 드래곤은 시대에 관계없이 그 위엄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다.

맨몸으로 우주 비행이 가능한 종족들은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도통 나오지 않는 천사나 악마와 달리 드래곤은 다른 종족들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게 좀 큰 문제다.

전력적으로도 큰 문제다.

샤크마가 아무리 강력한 데미 리치였다곤 해도 함선 한두 척도 아니고 함대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충분히 오래 묵은 드래곤은 단신으로 그것이 가능한 생물이다.

역사 속에 기록된 제국의 드래곤만 해도 여섯 기.

단순 전력으로도 일개 함대에 맞먹는 에이션트급 드래곤은 절반인 세 기다.

그것도 단순하게 그렇다는 것이지 강력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기동력과 의사결정 속도는 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우주전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고성능의 기동함대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제대로 막아낼 것이라면 행성 요새급의 거대한 병기가 필요한데.

그러한 병기의 존재가 여러 가지 전력을 놓고서도 삼파전을 고착화시킨 주요 원인이었으리라.

"행성 요새 수준의 병기가 이렇게 많은 우주 시대도 처음 보는데. 왜 개판을 쳐둔 것 같은데 더 발전을 했담."

말은 이렇게 해도 대충은 알 것 같다. 이렇게까지 첨예한 대립을 하는 삼파전은 드물었다.

그것도 종족과 사상까지 완벽하게 갈라친 경우는 더욱 드물다.

게임이 아닌 현실의 미궁에서는 누가 분배한 듯 예쁘게 갈라지는 것이 더 힘들다.

이념과 사상은 때로 종족을 뛰어넘고, 그 반대의 일도 흔히 일어난다.

그리고 당연히 적이 강해 보인다면 더 안간힘을 쓰게 되는 법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발전은 없다.

갈등이 한계까지 다다른 상황에서야 생물은 비로소 성장 동력을 얻으니까.

슬프지만 미궁의 역사는 대부분 그렇게 흘러간다.

지휘통제소에는 이미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군사전문가인 고블린들을 존중했다.

결국 유배자의 역할은 제대로 된 지휘관이 아닌 조커 카드 정도에 불과해야 한다.

그리 길지 않은 회의 결과에 스펜서 중령이 환호했다. 그리고 다른 장성과 대령들의 눈빛에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진급 길이 막히진 않았겠지?

마주 진군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무도 승리를 의심치 않는 가운데, 우리 파티는 스펜서 중령의 대대와 함께한다.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할 것이다.

그 와중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항성의 존재는 뱀파이어를 약하게 한다.

아직 [데이 워커]는 아닌 내 입장에서 지금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적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 * *

제국은 순순히 물러났던 것이 아니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투가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잠깐 물러났던 적함들이 다시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단거리 워프를 통해 행성 상공에 직접 침투할 것으로 보인다고.

그리고 아직 전선에서 함대가 돌아오지 않은 하늘, 적의 함선들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거대한 쇳덩어리가 가득 메웠다.

남아 있던 수비함선이 워프의 예상지점에 즉시 포화를 퍼붓는다.

제국의 울퉁불퉁한 제멋대로의 고철 덩어리들도 도착한 직후 마주 사격을 개시했다.

포화가 하늘에 차올랐다. 빛이 하늘을 메운다.

눈부실 정도는 아니나 눈을 돌리지 못할 정도는 되었다.

서로의 실드를 두드리거나, 빗나가 먼 곳으로 그어지는 선들.

담고 있는 파괴력만 아니라면 아름다운 화폭이다. 허나 그것을 지켜볼 시간은 없었다.

번뜩이는 빛 사이로 강하 캡슐들이 낙하한다.

제국의 검은 관들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내리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연방의 푸른 별들이 섞여 있었다.

군단장이 비서병이라도 된 것처럼 찾아와 현 상황을 전달했다.

"현 시간부로 지상의 전투는 지연 섬멸전에서 강하전으로 이행합니다. 2개 군단이 추가로 강하할 예정이며 적 역시 비슷한 규모의 강하 전력을 보유하리라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군단장은 비장하게 경례를 올렸다.

"대전사님께서는 이 행성의 모든 지휘권을 가지셨습니다. 저희는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믿어 의심치 않는 승리에 대한 믿음이 콧수염을 기른 고블린 군인의 눈에 깃들어 있다.

또렷하게 불타오르는 열망이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군단장이 이런 계급에 도달하기까지 거친 세월은 어떤 것이었을까.

처음에는 당황이 앞섰으나 이런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는 마주 경례했다.

"위대한 혼돈 앞에!"

군단장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받았다.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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