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36화
13층 - Lv. 775 용암망치 강습사단(7)
기다란 검붉은 털은 마치 갈기 같아 보인다.
무시무시한 형태의 짐승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좋은 울림이군."
"길들여서 타고 다닐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저건 생물이 아니다. 멍청아."
"흥, 말이 그렇단 거지."
거대한 핏빛 늑대.
체고는 거의 2미터가 넘는다.
트롤의 채구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며 오우거라면 피하는 것이 좋을 정도의 짐승이다.
물론 영관급인 이상 뱀파이어의 늑대와 싸워본 경험 정도야 다들 있다.
종족적 특성이 강하지 않고 조직화된 전장에서 강점을 보이는 고블린들은 흔히 일반적인 병사로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뱀파이어는 강력한 개체가 다수 존재하며, 여러 가지 변칙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일반적인 병사라기보다는 어떠한 목적을 지닌 소수 정예로서 나타나곤 했다.
특수부대로서 움직이는 뱀파이어 부대는 당연히 그린스킨과 정정당당하게 싸워 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 반드시 존재하다시피 하는 것이 피로 만들어내는 소환수를 강화한 녀석들이다.
주로 도주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내던져지는 존재들이다.
귀찮으나 치명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그간 봐온 뱀파이어의 소환수들이 저렇게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큰 차이는 없었으며 빛깔이 좀 거무스름한 것 외에는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그랬기에 첫 번째 트롤이 희생되었음에도 지상의 장교들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죽은 녀석이 약간 안이했을 뿐이며 언제건 있는 일에 불과하다.
귀중한 참모자원이 또 하나 사라졌음에 이마를 감쌀 것들은 인사처의 오우거들뿐이다.
참모진들은 그런 사실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게 그 연방의 신 나으리인가?"
"신은 아니고 대전사라던가 그랬는데."
"유배자는 맛있을까?"
육식만을 즐기는 괴물들에게 식인이 금기일 리는 없다.
뱀파이어는 특히나 별난 맛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상대를 맛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한 것은 아니다.
죽은 트롤도 충분히 강했다.
강자의 여유를 보여주던 느릿한 걸음걸이는 적수를 인정한 돌진으로 변모했다.
우렁찬 전투 함성이 울려 퍼졌다.
* * *
그린스킨의 전투 함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맹수의 초저주파 이상의 공포를 만들어낸다.
본래라면 약간은 움츠러드는 병사가 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무도 없었다. 고블린들은 자신의 곁에 임하고 있는 위대한 혼돈의 화신을 떠올렸고, 쉬이 공포를 이겨내었다.
그것은 낙하한 정예 강하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그린스킨으로 둘러싸인 험지였으나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굳건히 사기를 떠받치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대전사의 안배가 이 행성을 뒤덮을 때까지 시간을 끌라.
그리고 빠르게 탈출하라.
뱀파이어의 국가는 연방이다.
연방의 500년 세월 동안 강력한 뱀파이어는 여럿 출현했다.
국부인 바르바로이 국장을 포함하여 전쟁에서 스러졌던 위대한 전사들 역시 많다.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있었다.
피로 뒤덮인 행성 이야기.
그 행성은 결국 완전히 불살라져야 했고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런 영역에 도달했던 뱀파이어가 자신의 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온갖 기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단순한 함대 전력 이상으로 강력한 개인의 존재와 그에 대한 정보는 중요하다.
모든 것을 함대로 갈아버릴 수는 없다. 함대는 느리고 둔중하다.
강력한 개인이란, 신체적으로 늘 약자였던 고블린들에게는 이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연방이 과거에 뜻밖에 거두었던 전과는 무엇보다 자세히 기록이 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을 당한 것이 제국이었기에 제국에도 기록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제국의 그린스킨들은 대체로 공부와는 거리가 멀며 목도한 이가 살아 있을 만큼 장수하지도 못한다.
기억한다면 늙은 용인이나 드래곤이지만 적어도 이 전장에는 그들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저 검붉은 늑대를 보고 먼 과거의 어떤 참사를 기억하고 있는 그린스킨은 없는 듯했다.
고블린 병사들은 두근두근하면서도 뒤편에서 일어날 일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고 있다.
새로운 전설의 한 장면에 자신들이 새겨지리라 믿고서.
반면 달려드는 그린스킨들은 그런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는다.
"크아아악!"
"쏴라! 계속 쏴! 저지력을 발휘해야 한다!"
백병전은 그 무엇보다 큰 공포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트롤이 주춤하고 그 옆에서 마찬가지로 뛰어오던 오우거가 총탄에 고통스러워한다.
워낙 덩치가 있고 죄다 유사 기적의 샘물을 짊어지고 다니기에 쉬이 쓰러지지 않는다.
거기에 거대한 덩치들 사이에 섞여 엄폐하며 달려오는 오크를 보면 골치가 아파 온다.
오우거나 오크들은 심지어 사격을 한다.
쾅!
갑작스레 토치카나 다름없는 역할로 앞에 내세워진 장갑차가 기우뚱하더니 쓰러진다. 한구석이 잔뜩 찌그러져 있다.
"혼돈 만세!"
쓰러진 장갑차량에 깔린 고블린은 마지막까지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어느 오우거가 짊어진 제멋대로 생겨 먹은 대포는 안정성은 몰라도 구경만큼은 고블린이 통째로 들어갈 만큼 컸다.
큰 덩치와 뛰어난 완력은 더 강력한 화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보다도 체구가 작은 고블린들이 고정시켜 놓고야 간신히 다루는 화기를 권총처럼 다룬다.
소대장들이 이를 악물었다.
무식한 생체전차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온다.
기관총 사수가 계속해서 오크 사수들에게 노려지니 공백이 발생했다.
시체를 치우고 새로운 사수가 들어서도 사방에서 빗발치는 적들의 사격에 곧 숨을 거둔다.
피로 피를 씻는 와중이었다.
"플라즈마 투척!"
살상 반경은 보이는 것만큼 크지 않으나 플라즈마는 충분히 저 괴물들에게 유효하다.
일제히 투척되자 달려오던 괴물들이 주춤하고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강하 캡슐! 직접 강하한다! 요격!"
장비를 뒤집어쓴 고블린들이 움직인다.
먼저 강하하여 후발 강하를 요격하는 레이저 대공포가 열선을 조준한다.
직접적으로 진지 위에 투하되던 검은 관들이 타오른다.
"낙하지점에서 물러서!"
미처 증발하지 않은 관이 진지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땅이 움푹 패이지만 그 안에서 트롤이 뛰쳐나오진 않았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
근방에 낙하한 전차들이 우측에서 달려왔다. 전차라고는 하지만 결국 트롤과 비슷한 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계는 그럼에도 생물보다 강했다.
"포구를 처박아!"
"혼돈의 이름으로 쏴라!"
트롤 하나가 달려오는 전차에 빛나는 플라즈마의 대검을 휘둘렀다.
수직으로 내려찍힌 장갑이 녹아내리지만 전차는 그대로 들이받으며 포를 갈겼다.
완충된 푸른 광선이 트롤의 가슴을 꿰뚫는다.
트롤은 이상한 신음을 내며 등에 짊어진 액체를 입에 문 호스로 빨아들인다.
옆에서 추가적인 사격이 들어왔고 간신히 트롤이 쓰러졌다.
대열이란 것이 없다. 제멋대로 달려드는데도 신장 5미터의 재생하는 근육 덩어리는 질기고도 질겼다.
그리고 불길, 어느 오우거가 타고난 마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장갑차에 의지하여 버티던 소대를 구워버렸다.
얼른 다른 쪽에서 그 공백을 메꾼다.
그러나 결국 그린스킨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동료의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패 삼아 녹색 피부의 괴물들이 돌격해 온다.
같은 녹색의 피부이건만 이토록 타고난 힘의 차이가 크다.
스펜서 중령은 가장 앞에서 지휘를 하던 와중 공격받았다.
그의 검은 번뜩이는 플라즈마를 둘렀고 달려가서 트롤 하나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냉병기를 다루는 기술이란 기묘하게도 연방에서 더 고평가받는다.
오랜 세월 쌓여온 종족적 콤플렉스는 트롤을 상대로 사격이나 포격이 아닌 승리를 거두는 상징적인 장면을 원한다.
스펜서 중령은 사격보다는 검술에 더 많은 점수를 받던 고블린이었다.
번뜩이는 검이 트롤의 시체 뒤에서 나타난 오크와 겨루어진다.
힘은 밀린다. 하지만 슬쩍 당겨내며 흘린다.
오크의 도끼가 불을 뿜었다. 문자 그대로 뒤편에 달린 조악한 로켓이 파괴적인 추진력을 낸다.
압도적인 물리력을 흘려내는 것에 한계가 왔으나 몸을 회전하며 회피, 그리고 대가리에 권총을 겨누고 당겼다.
이 시대의 검사라면 무릇 다른 손으로 권총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오크가 단말마를 내지른다.
"이런 비겁한 고블린……."
"전쟁에 비겁이 어디 있나."
그러나 고개를 드는 순간 스펜서 중령도 죽음을 직감했다.
빛이 시야를 메운다.
트롤이 애용하는 거대한 광선 대검은 이미 검신이 고블린의 몸통보다 두터웠다.
자신은 아마 저걸 쥐기는커녕 들 수조차 없을 것이다.
트롤은 기습이 아니면 고블린 검객은 이길 수 없는 상대.
그가 눈을 감으며 기도하려 했을 때, 덜컥하며 중령을 태우려던 빛이 가로막혔다.
전설적인 대전사의 동료가 든든하게 방패를 짊어진 채 트롤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무려 한 손으로.
갈색의 피부를 가진 오크만큼이나 커다란 근육질의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지휘를 해야지. 중령."
다른 팔에 쥐어진 총기는 연방 제식 라이플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난쟁이들이 만든 귀하고도 강력한 출력의 라이플들.
대검이 더 움직이지 않자 트롤은 불쾌하게 으르렁거리며 힘을 더 가했다.
마법적으로 플라즈마를 가두고 있는 강력한 역장이 날이 되어 방패를 파고든다.
"끙차!"
방패에 몸을 부딪치듯 힘을 가하며 그것을 힘차게 밀쳐내자 트롤이 순간적으로 힘에서 밀렸다.
근육질의 히스패닉은 힘에서 밀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괴물의 다리를 향해 로킥을 날렸다.
놀랍게도 체구의 압도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있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롤이 기우뚱한다. 고목 같은 다리가 폭음과 함께 몇 미터 밀려났다.
정말로 휘청일 정도의 타격이 있었다기보단 상상도 못 했기에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트롤의 아가리에 총구가 박히고 뇌가 곤죽이 될 때까지 플라즈마 라이플이 빛을 토해내었다.
"긴가민가했는데 되는군."
막내는 얼마 전에 탱커 계통 스킬을 찍다 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영역에 들어섰다.
탱커라 함은 힘이다.
힘이라 함은 공격력이다.
무수한 탱커 계열 패시브를 쌓아 올린 끝에, 방어력만큼의 공격력을 가지게 되는 스킬들은 여러 게임에서 흔하다.
패시브 스택이 잔뜩 쌓인 고레벨 탱커란 인간 같은 종족으로도 트롤만큼의 괴력을 탑재한 존재다.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숙여!"
이젠 너무 친근한 목소리에 막내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고 방패를 내세웠다.
번뜩이는 빛과 열기가 지나가고 조금 먼 곳에서 막내를 겨누고 있던 오크 둘이 쓰러졌다.
"정말 세군. 나보다 더 쓸모 있겠는데."
"어휴, 형님. 저는 언제나 형님의 방패입니다."
사냥꾼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라도 고맙군."
* * *
"으랏차차!"
소녀는 날아올랐다.
사실 뛰어오른 것이지만 남에게는 틀림없이 그리 보이리라.
몇 번의 [대시]를 중첩하자 정말로 비행이 되었다. 그것도 추진체로 보이는 수준의 속력이 나오는 비행.
소녀의 역할은 고블린들의 진영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검은 관들을 제거하는 것.
강하병은 어떤 식으로건 내려온 직후에는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그 틈에 강하 캡슐 자체를 찢어발기고 뜯어내어 안에 들어 있는 병사의 목숨을 취한다.
소녀는 최근 들어 미궁의 게임적인 부분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한 힘으로만 무언가를 베어냈다면, 이제는 ‘공격력’이라는 것이 휘두름에 깃들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암습 보정과도 비슷한 비현실적인 어떤 보정.
약간의 틈을 타 마인드 맵을 살짝 펼쳐본다.
레벨 195에 빛나는 소녀의 마인드맵 한구석에는 지금까지 중첩된 패시브의 숫자가 떠올랐다.
[단검 마스터리 (10)]
마스터리가 쌓일수록, 그리고 스탯이 쌓일수록 미궁의 보정은 강해진다. 그 보정은 현실을 초월하여 작용한다.
유배자는 살아 있다면 결국 강해질 수밖에 없다.
요격하지 못한 검은 관들을 정말로 관짝으로 만들어주며 돌아다니던 소녀는 슬쩍 뒤를 보았다.
검붉은 늑대들이 잔뜩 늘어나 있었다.
아주 강력해 보이는 고레벨 그린스킨들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으나 이미 승산이 없음은 확실해 보인다.
쏟아지던 검은 관들도 주춤하다.
마력이 떨어져 총만 쥐고 어정어정 서 있는 마법사들에게 갔다.
영감님이 호위하듯 묠니르를 쥐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불만이 넘쳐나는 표정이다.
소녀를 발견하고는 말한다.
"혼자만 재미 보니 좋나?"
"영감님은 죽을까 봐 안 무서워요?"
"네가 할 소린가."
"저는 음. 좀 이상하긴 하죠."
"오크는 원래 다들 이상하고."
그런가.
소녀는 대충 납득하기로 했다.
"제길, 앞으로 나섰다간 뒤에서 총을 맞게 생겼으니. 후. 저 로켓 도끼 하나만 주워오지 않겠나?"
"마음에 드셔요?"
"너무 멋진걸. 나중에 저걸로 대련 한 번 하자고."
"안 져 줄 거예요!"
"안 봐줘도 못 이긴다네."
유배자가 아닌 늙은 오크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 *
준장은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소환수가 아니다.
피로 이루어진 늑대가 저희들끼리 뭉친다. 그리하여 거대한 늑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뭉치고 뭉쳐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된다.
흘러내릴 듯이 꿈틀거리는 붉은 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사이에는 발톱도, 눈도, 털도, 이빨도…….
베어내고 태워버리고 차서 떼어내고 거리를 벌리고.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
사방을 휩쓸며 덮쳐온다.
준장은 자신의 얼굴에 핏기가 가심을 느꼈다.
급류에 휩쓸리듯 덮쳐오는 유체를 막아낼 수가 없다.
거대한 아가리가 트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늑대인지 모를 무언가에 집어 삼켜진 준장은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니었다.
몸의 감각이 흐려진다. 손끝부터 조금씩 자신이 아니게 된다.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오싹한 기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쩐지 증오가 솟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대한 무한한 적의.
트롤의 파괴본능과는 다르다.
이것은 그보다는 마치 구울 같은 언데드가 지닐 법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에서 힘을 끌어냈다.
입을 벌리자 그 속으로도 핏물이 파고든다.
젖먹던 시절의 힘까지 짜내자 강대한 트롤의 완력은 잠시나마 유체들을 밀쳐내었다.
준장은 마구 기침하며 핏물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달리려고 했다.
발목이 붙잡혔다. 아니, 물렸다.
핏물에서 이빨만이 생겨나 트롤의 발목을 잡아 뜯는다.
그 끝이 스르르 녹아내려 분해된다.
몸 곳곳이 녹아내리고 있다.
달리려고 했으나 철퍽하며 발이 뭉그러진다.
더욱더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타고난 재생력 덕에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하던 몸이다. 하지만 그 재생력도 지금은 소용없었다.
휘청휘청하며 나아가다 결국 쓰러졌다.
다시 핏물에 잠겨 든다.
시야가 붉다. 사방이 소란스럽다.
무언가가 귓가에 속삭인다.
모든 생명을 말살하자.
하나가 되자.
우리는 하나다.
준장은 의식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하나다.
* * *
"슬슬 통제하기 힘겹네."
[그걸 그 정도로 붙잡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군. 원래 싸지르고 튀는 게 올바른 사용법 아닌가?]
"그러면 빨리 제압당할 수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해야죠."
증식하기 전에는 생각보다 약하다.
원래 늑대였던 것이 점점 통제를 벗어난다.
내 [피의 샘] 내부에 있던 혈액의 지분이 점점 줄어간다.
거대한 체격에는 피도 그만큼 많다.
인간의 피조차 아닌 것들이 섞여갈수록 이 소환수는 내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소환수이자 광역기이다.
피아식별조차도 없는 광역기.
유니크 스킬 [피의 군주]의 가장 중요한 하위 스킬,
[종말의 붉은 짐승]
세상 간단한 스킬명이 성능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
대충 던지고 튀면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 물건이다.
그나마 다행이란 것은 식물은 생물 취급을 안 한다는 것.
지극히 뱀파이어 기준의 생물이기에 애초에 혈액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논외로 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걸로 이겨봐야 어차피 여긴 못 쓰게 되지 않나?]
"제가 이 층을 벗어나면 멈출 겁니다. 술자가 사라진 판정이라."
[그게 그렇게 되는군.]
"모르셨습니까?"
[유배자가 이런 스킬을 쓰는 것 자체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왕국에서는 좀 숨겨야지요."
[걸어 다니는 핵미사일이 따로 없겠군.]
"랭커 정도가 나서면 어떻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밉보이니까요."
자연의 신이 껄껄대며 말한다.
[왕국에 도달한 후의 레벨링 계힉이 궁금해지는군]
"보시면 알 겁니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슬슬 뭔가 이게 뭔지 아는 녀석들이 있을 수 있는데.
여길 날려버릴 만큼의 함포 지원을 할 여유는 없을 것이고.
노련한 역전의 용사 하나가 허둥지둥 내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딱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눈앞에 관이 하나 폭음과 함께 떨어졌다.
정말로 관 같은 형상으로 디자인한 강하 캡슐이다.
안에 타고 있는 것들이 워낙 커야 말이지.
연방은 체구가 작으니 동글동글한데.
사이즈로 보아 오우거.
생자를 탐하는 핏덩어리들이 스멀스멀 기어가는 와중 관짝이 벌컥 열렸다.
근육질의 오우거가 도약한다.
들고 있는 해머가 점화하고, 로켓 해머의 추진력이 오우거의 도약을 가속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내 소환수를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온몸에 두른 것을 보면 아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고레벨 오우거, 계급장에는 빛나는 별이 두 개.
강습 사단장 정도 되겠군.
그리 생각하며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