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37화
13층 - Lv. 1120 용암망치 강습사단장(1)
나는 꽤나 떨어진 곳에 나타났고, 오우거는 얼른 나를 찾지 못해 당혹스러워했다.
석양의 흔적도 모두 저물어버린 하늘은 약간의 별빛 이외에 어떤 빛도 비추지 않았다.
전장을 찾는다면 지금도 번뜩이는 무수한 광원들을 따라가면 되겠으나, 나 개인을 찾겠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무리할 이유가 없기에 어둠 속에서 가만히 관찰한다.
세월과 사회의 변화,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그린 스킨들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으나 그만큼 다른 것도 쥐여주었다.
오우거는 영리하다. 다만 게으를 뿐이다.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면 점차 부지런할 필요성을 찾는 오우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 엘리트 오우거들을 구분하는 법은 쉽다.
종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축 처진 뱃살의 유무다.
타고난 본성이 나태한 만큼 그것을 극복하고자 마음먹은 오우거는 병적으로 부지런해진다.
게으른 제 동족을 혐오하며, 멍청한 트롤들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나마 오크 정도나 멀쩡하다고 여긴다.
고블린은 본래라면 괜찮은 동지라 여겨진다.
그런 깨달은 자들에게 오우거 하면 연상되는 두툼한 뱃살은 나태의 상징이자 저주받은 낙인이다.
병적으로 운동에 몰두하는 엘리트 오우거들의 몸은 트롤 이상으로 단단하며 꽉 조여진 강철과도 같은 근육으로 가득하다.
정상적인 그린스킨 사회에서 기술이 발전한 후에 주축이 되는 것은 오우거와 고블린이다.
고블린은 부분적으로는 난쟁이만큼 손재주가 좋으며, 인간만큼 다양한 발상을 할 수 있고, 어린 요정만큼은 마력을 다룰 수도 있다.
그러나 연방의 존재 덕에 높은 곳을 차지해야 했을 고블린들은 멸시받으며 노예로 부려졌다.
그런 비극 끝에 제국은 온전히 오우거의 손에 들어갔다.
지혜가 뭔지 더듬을 줄 아는 종족. 홀로 남은 오우거.
그중에서도 엘리트 오우거들은 지극히 강하고 똑똑하며 책임감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상대 오우거의 불타는 전의 또한 아무래도 그런 사명감의 발로인 듯했다.
나는 내가 기억하던 정보보다 오우거들의 레벨을 좀 더 높게 상정하기로 했다.
이게 참 골치 아픈 부분인데,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 멀어질수록 적들의 레벨에도 나비효과가 미친다.
레벨이 올라가는 요인이 생겼으니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다.
"어디냐아아아!"
분노한 오우거는 몸에 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불의 원소를 지니고 태어난 오우거였던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휘두르기만 하던 힘을 온전히 통제하기 시작한 오우거는 강력하다.
불길이 달려드는 핏물을 막아내었다.
마법적인 것이기에 마법으로는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다.
온몸에 화염을 휘감은 오우거는 불길의 거인과도 같았다.
화염 거인은 전혀 다른 종족이지만 저것은 미니어처라 보면 딱 적당할 정도다.
나는 깔끔한 후퇴는 불가능하리라 판단했다. 여기서 죽여두자.
아직 통제가 미치는 붉은 짐승들이 움직인다.
오우거는 내재된 막대한 마력을 불태워 핏물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발견했다.
"당장 이 괴물들을 지워라!"
"내가 못 지우는데? 그건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죽어라!"
트롤을 3미터로 압축해 둔 듯한 무지막지한 근육이 땅을 박찬다.
근력뿐만은 아니었다.
오우거의 무기로서도 지나치게 거대한, 제 체구보다도 더 큰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무식한 로켓 해머가 불길을 뿜는다.
도약에 그 추진력이 더해지자 소녀와는 다른 느낌으로 비행이었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이미 저것은 광역 공격이다.
내 몸이 박쥐가 되어 흩어진다.
오우거는 노렸다는 듯이 무기에 불길을 휘감았다.
화염이 폭발했다. 땅이 일그러진다. 중심부는 조금 녹아내려 연기를 피워 올린다.
폭탄이 터진 듯한 광경이다.
마력이라면 오우거보다 충만한 종족도 많지 않다.
저 화염은 끊임없이 타오르리라.
사방으로 아낌없이 마력을 뿜어내는 마력로 같은 투스타의 오우거는 이제 핏물들을 밀어내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건 원래 미래에 더 잘 먹힌다. 모든 신비와 마법이 과학에 의해 뒷전으로 물러난 시대.
오히려 중세 판타지 월드라면 인구도 더 적으니 쉽게 진압될 수 있는 재앙이리라.
그러나 지금 그 과거의 힘과 미래의 힘을 모두 손에 쥔 오우거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응대하는 수밖에.
* * *
사단장은 최선을 다했다.
그가 아는 모든 뱀파이어의 특징을 되새기며 상대를 짓이겨버리려고 했다.
로켓 해머는 훌륭한 무기이자 이동 수단이었으며 성공적으로 파괴를 흩뿌리고 있다.
대지를 갈아엎고 불길로 어둠을 밝힌다.
온갖 뒤틀린 붉은 액체들이 사방에 넘실거리는 지금, 이 불의 거인은 오히려 정의로 보였다.
사악한 어둠의 존재를 처단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불꽃을 태우는 용사.
하지만 오우거가 타고난 마법에 성스러운 기운은 없다.
대신 다른 것은 있었다.
사단장이 포효했다. 그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세상의 시간이 흉포한 붉은색으로 물든다. 핏빛이라기보단 화마의 불길 같은 그것은 전쟁을 상징하는 색이다.
지켜보고 있던 전쟁의 신은 실로 오랜만에 웃음 지었다.
잘만 한다면 여기서 저 골치 아픈 녀석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미래에서 서버의 중심이 되어버린 저 유배자를 마주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현재 만신전에 적을 둔 모든 신들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그는 이 서버에서의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그것이 전쟁이기에.
사단장은 조용히 신에게 말을 걸었다.
경건하기는커녕 공손하지도 않은 태도였으나 전쟁의 신은 그 대화마저 기꺼웠다.
"내가 왜 낡아빠진 신앙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었는지 아시오?"
「모른다.」
불편한 이야기였으나 익숙했다.
서버의 시간이 미래로 흐른다면 전쟁 같은 신앙은 사그라지는 것이 순리기에.
애초에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당신은 제국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신의 탐욕을, 그리고 유배자의 습성 잘 알면서 그러는가? 거기에 어차피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유배자를 따르고 싶나?」
사단장이 코웃음 쳤다.
"물론 아니지. 하지만 신의 힘은 진짜란 말이오."
「힘이 필요한가? 왜? 신의 힘을 빌려보아야 비웃음만 살 것인데. 진정한 힘은 녹색 피부 아래의 근육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지. 하지만 때로는 부끄러운 힘에 손을 댈 필요도 있을 뿐이오."
사단장은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부하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강력한 유배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연방의 시조이자 무수히 역사에 간섭한 자라면 틀림없이 끔찍하게 강력한 자다.
일개 뱀파이어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그는 여기서 패한다.
하지만 불리함을 딛고서도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난 제국의 병사. 제국의 신민. 황제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국가는 내 고향이지."
「애국심? 드문 일이군.」
"드래곤들의 엉덩이는 참으로 무거우니, 그 괴물들이 나설 때까지는 우리가 버텨야 하지 않겠소."
「무엇을 위해?」
"모든 그린 스킨을 위해."
전쟁의 신은 웃었다. 정말로 유쾌하여 웃었다.
그 말이 옳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린 스킨들은 어찌 될까? 우주에서 갈 곳 없이 내몰리는 무식한 것들이 어찌 살아가야 할까?
고블린이라는 기둥이 빠져나간 미래에서 오우거들은 좀 더 현명해지고 책임감을 지니게 된 모양이다.
이것 참 우습다.
이래서야는 저 붉고 어두운 부정한 힘을 휘두르는 유배자가 악이 아닌가.
이 오우거야 말로 용사이고.
하지만 유배자의 시각에서 전쟁의 신은 그 관점을 긍정했다.
그 또한 신좌에 다다르기 전에 얼마나 많은 약탈을 행했던가.
미궁의 주민들에게 유배자는 악일 뿐이다.
그것도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악.
연방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없을 악의 제국이다.
"부디, 내 신앙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고 이런 때에 나를 외면하지 마시오. 신이여.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내게 주어야 할 것이니."
하지만 전쟁의 신은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고블린들은 그린 스킨이 아닌가?」
"맞지, 오래된 제국이 짊어진 무수한 죄의 굴레 중 하나 아니겠소.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 나라일 뿐."
「해방론자가 여기도 있었군.」
"필요에 따라 외면하고 있을 뿐, 양식 있는 오우거라면 모두가 알고 있겠지."
전쟁의 신은 웃음을 멈추었다. 그 신앙이 온전히 그에게 바치는 것이 아닐지언정, 조국을 위한, 그리고 종족을 위한 헌신은 군인의 귀감이었다.
신은 실리 이외에도 이 오우거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원하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군. 내 뜻 또한 너와 같으니.」
* * *
불꽃과 함께 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저건, 그러니까. 신의 화신인가?
대성녀에 버금갈 정도의 신성이 갑자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면 그 이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대전사니 뭐니가 아니라 그저 억지로 강림한 상황이다.
신의 화신이 된 오우거가 신언으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죽어라! 유배자!」
"아니! 아바타라니 그런 걸 할 정도로 이 미래가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럼 마음에 들 거 같나?」
신성을 머금기 시작한 불꽃은 효과적으로 뱀파이어의 수단을 불사른다. 공격은 내가 받는데 붉은 짐승들이 재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쟁의 신은 과연 노련했다.
지금의 상태라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 나 자신을 노리는 척하며, 은근슬쩍 붉은 짐승들을 모조리 불사르는 게 더 낫다.
그렇다면 지상전은 결국 승리할 것이며, 함대전을 패하더라도 최소한의 현상유지는 보장된다.
"거 서버 하나는 내주는 셈 치고 다른 서버에서 도모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랑 싸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타협 모르십니까?"
막상 이 시대의 제국에는 크게 영향력도 없는 양반이.
「자존심의 문제다. 트롤의 긍지가 달렸다. 유배자여.」
"당신 원래 인간이잖아!"
「하! 그린 스킨의 멋짐을 모르는 모기 따위가!」
이런 미친, 롤 플레이에 푹 빠졌군. 하지만 있을 법한 일이다. 한 종족 플레이에 열중하는 유배자들은 곧 자신을 그 종족으로 여기게 된다.
아무리 해도 적응할 수 없는 요정 같은 종족도 우리 사냥꾼처럼 푹 빠져서 동화되는 인간이 나타나는지라.
어쨌든 이대로 간다면 좋지 않다.
드글드글한 지상의 그린 스킨들을 모두 제거하기는 쉽지 않고 이 행성의 가치는 빛이 바랠 것이다.
식량은 어느 시대에나 중대한 사항이니까 제국은 일단 그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공세라면 무언가 더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행성 요새 달랑 하나? 아니지. 드래곤이라도 나설지 모를 일이다.
그 전에 붉은 짐승이 제대로 증식해서 이 지상을 쓸어버려야 한다.
고블린과 오크는 잡식이지만 오우거와 트롤은 육식이다. 목축 중이던 무수한 가축들이 짐승의 먹이가 된다면 말이다.
고블린에게만 식량을 생성하는 행성으로 바뀌는 거지.
좋아 싸워주지. 신의 화신은 분명 까다로운 상대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엘리트 오우거가 순순히 신앙을 바쳤을까?
그럴 리가 없지. 대전사도 뭣도 아닌 대충 신도기만 한 육신에 강림해 봐야 별 볼 일 없다.
애초에 전쟁의 신은 악신이다.
선신만큼 언데드에게 치명적일 수 없다.
나는 몸을 피로 분해했다.
육신 자체가 혈액인 뱀파이어의 몸이 흐트러지며 모습을 바꾼다.
붉은 짐승의 거무튀튀함과는 다르게 선홍빛의 늑대.
[피의 군주]에 딸려 있는 무수한 하위 스킬들은 피로 이루어진 소환수들을 강화하는 형태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자신의 육신 또한 소환수와 동등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변신의 능력은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그렇다면 그 보정들이 적용된다.
체고만 5미터에 달하는 늑대의 모습으로 오우거에게 달려든다.
이미 트롤보다도 육중한 맹수다.
신성한 불꽃을 휘감은 로켓 해머가 가속한다.
오우거는 날듯이 내려찍었고 나는 대지를 딛고 전력으로 앞발을 휘두른다.
그 끝에, 마투사로서의 마력이 타고 흐른다. 불꽃의 마력에 대항하는 무속성의 지향성 폭발이 상대를 향한다.
인간과는 다른 관절, 근육의 형태. 힘이 타고 흐르는 방향이 다르다. 네발짐승이 위에서 내려찍는 공격을 방어하는 것은 불리하다.
그래도 순간적으로는 비등했다.
물리적 힘은 길항했고, 마력적 충격 역시 서로 상쇄되었다.
그 충격은 부딪힌 둘뿐만 아니라 주변에 미친다.
항공폭탄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자잘한 부스러기가 들썩이고 둘러싼 붉은 짐승들이 그 여파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미 제 주인조차 몰라보는 붉은 짐승들은 산 것을 보려 입맛을 다셨다.
언데드인 뱀파이어조차 혈액 덩어리인 이상 산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물러날 곳이 없는 죽음의 투기장이었다.
아주 잠깐 허공에서 멈춰 선 듯한 자세에서, 화신이 해머의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과 함께 해머의 뒤편 추친체가 불을 뿜는다. 계급이 되니 고품질의 물건이다.
마법적 불꽃이 휘감긴 가운데도 고장 없이 작동하여 작용 반작용의 힘을 이끌어낸다.
발톱부터 기기긱 하고 으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신은 해머를 놓았다.
갑작스러운 동작은 나로서도 예측이 늦었다.
익숙지 않은 늑대의 모습이어서라고 변명해 보자.
머리가 으깨질 뻔했다.
그런다고 죽진 않으나 시야의 문제가 생긴다.
통나무 같은 다리, 아니, 그냥 통나무도 아니고 조각되어 울퉁불퉁한 다리가 포탄 같은 위력으로 내 털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의 방향을 틀고 힘껏 다리를 물어뜯는다.
그때 오우거가 해머를 다시 쥐었다.
펑 하는 소리가 나고 내 몸이 분해될 뻔했다.
"와, 이거 못 할 짓이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육신을 재생성하고 투덜거렸다.
물리적으로 그린스킨과 싸운다는 건 정말로 할 짓이 아니다. 종족적 기초 스탯이 너무 차이 난다.
[피의 군주]로 강화되었다곤 해도 저런 고레벨 오우거는 쉽지 않다.
[죽어라아아아!]
다시 한달음에 좁혀지는 거리.
나는 자연의 신에게 잠깐 비키라고 요청했고, 여신님과 이어졌다.
세상이 혼돈으로 상징하는 보랏빛으로 물든다. 신이 임하며 시간이 잠깐 멈춰 선다.
여신께서 말하셨다.
「화신하라고? 내가 몸 쓰게 해주면.」
"좋습니다. 콜! 하지만 똑바로 못하면 직접할 겁니다?"
「전쟁 저 녀석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내가 봐왔지. 창대로 두들겨 맞고 징징 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늙은 티 내십니다. 그려."
「젊게 살면 젊은 거지.」
"그 소리 하는 시점에서 늙은 건데."
「아아! 안 들려! 지도 백 년 묵은 요괴면서!」
어찌 되었건 여신께서 강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