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39화
13층 - 행성 상공
"아이고 죽겠다!"
내가 도착하자 반응은 극적으로 갈렸다.
우리 파티원들은 대체 당신은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가장 눈치가 빠른 것은 그래도 사냥꾼이다.
"실례지만…… 리더입니까?"
내 성대에서 또랑또랑하고 새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주 낯설…… 것까지는 또 없는 경험이지만 오랜만이긴 하다.
여신님이라면 지을 것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대꾸한다.
"그럼 누구겠어?"
"맙소사."
"젊은 두목님이군요."
"허허, 세상에나."
"말도 안 돼요."
"……."
각자의 반응이 지나간 후, 멍하니 굳어 있던 주변의 다른 고블린 병사들이 움직였다.
환호도 비명도 격앙도 없었다.
그들은 기계처럼 멍하니 무릎을 꿇었다.
파노라마처럼 군인들의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들이 연속하여 겹쳤다.
그 자체로 절도를 만들어내는 합치된 동작.
이 순간만큼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포화 소리마저 잦아든 것 같다.
그저 고요했다.
수백의 고블린 군대는 미리 연습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바쳤다.
뭐라고 계속 말하려던 파티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압도적인 분위기.
어떤 소음조차 내서는 안 될 경건한 분위기가 사방을 메운다.
지나치게 조용하기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이질감마저 있었다.
그 고요한 박력 속에서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왜 다 알아보죠? 동상이라도 만드셨습니까?’
「그럼, 당연히 만들었지. 사회주의 지상락원의 필수품 아닌가.」
‘아니, 언놈이 가르쳤는지, 정말 제대로 배우셨군요.’
「늙어 죽을 걱정도 없는 신이라는 철인으로서 그의 이상을 구현했으니 저승의 마르크스도 웃고 있지 않겠나. 마키아벨리도 행복할걸?」
‘스탈린주의라고 안 하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어차피 처음부터 내 독재였는걸. 신정에서 신이 실존하는데 어찌 안 그러겠나.」
정말 내가 뭘 만든 건가 싶군.
나는 최대한 여신의 대리인 같은 태도로, 혹은 여신님 그 자체 같은 태도를 연기했다.
온화하게 웃으며 하나하나는 아니더라도 여신의 은총 같아 보이는 연출을 흩뿌렸다.
지금 이 자리에 혼돈의 여신님께서 강림하사, 병사들을 긍휼이 여기리라.
* * *
지쳤다.
정말로 지쳤다.
분위기가 너무 무시무시했다.
마중 나온 수송선을 타고 우주로 올라간 후에야 평화를 되찾았다.
대전사이던 나보다 여신의 화신인 내가 훨씬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그 와중에 여신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 정말. 하. 너무 화가 나지만 인정하도록 하지.」
‘뭐요 또.’
「네놈이 나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같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쇼. 세이렌 같이 여자뿐인 종족을 할 때 익혀둔 거니까.’
「요리부터 재봉에 가사 만능일 때부터 알아봐야 했군.」
‘그건 필요에 의해서 익힌 것이고요.’
여신님은 황송하게도 몸소 약간의 해설까지 곁들이며 나를 칭찬한다.
「옛날에 교단 좀 크게 굴릴 때도 난 별로 안 나섰어. 고상한 척은 할 수 있는데 진짜로 고상하냐면 그렇진 않았거든. 나보다 고상한 신도들에게 직책을 던져주고 알아서 하라고 했지.」
‘연기엔 재능이 없으셨나 봅니다.’
「말 안 했던가? 그냥 지방 귀족의 영애였다고. 영애도 아니지. 걍 딸내미지. 변경에서 영지민의 아들내미들을 휘어잡던 골목대장이라고 하면 알겠지?」
‘그 경험이 유배생활에 도움이 되긴 하셨나 봅니다. 아직 기억도 하시고. 전 이제 바깥의 삶이 좀 가물가물한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본래 강렬하지. 돌이켜봐도 난 장군감이지 색싯감은 아니었군.」
소녀도 그렇고 주변에 별로 멀쩡한 여성이 없는 것 같다.
뭐 미궁에선 좋은 것이긴 하다.
고상하고 우아한 귀부인 같은 건 여기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뭐, 유배자로서 대륙의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나 안타깝게도 사교계의 여왕이 되면 나타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결국 미궁이 유배자에게 원하는 것은 전투와 정복, 그리고 승리다.
치열하고도 격렬한 생존 투쟁.
좀 더 야만적이며 원시적인 것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정치적인 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신도들이 네 귀족적이고 우아한 태도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야. 엘레강스한 여신님이라고 신앙심이 폭주하는군.」
‘다른 의도도 있는 것 아닙니까?’
「고블린의 심미안은 좀 다를 거 같긴 한데.」
‘뭐 어쨌든 신씩이나 된 입장에서 귀엽다는 취급을 받는 것보단 나은 결과군요.’
「다 우리 대신관 덕분이지. 내 치하하겠네.」
‘말이나 마시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귀족의 혈통이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 듯, 거울에 비친 여신님의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서양권 인종이다 보니 빠르게 어른스러운 모습이 된다.
체구는 작지만 소녀의 또래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유배자가 된 시점은 중학생 정도 나이가 맞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보라색 머리카락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모르겠지만 그런 세계였겠거니 싶다.
‘솔직히 말하시죠, 이거 데빌이 되고 보정 좀 받은 외모 아닙니까?’
「거 피부 같은 건 어쩔 수 없지. 솔직히 어떻게 인간 시절의 내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겠나.」
‘알았으니 이제 원래대로 돌려나 주시죠.’
여신님은 승낙하였으나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함선에 비축되어 있던 인간의 혈액을 혼자 다 소비해야 했다.
죽기야 하겠어 싶을 정도로 넉넉하게 피의 샘을 채워 둔 다음에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신님이 잠깐 다시 임하시고, 장비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모습을 바꿀 때부터 어느 정도는 노리신 거지요?"
「지난 500년간 오토 플레이를 했던 나는 이런 짓은 하지 않았지 않겠나. AI의 한계지.」
신들도 신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 서버의 시간은 계속해서 흐를 것이고 결국 유배자가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먼 미래로 흘러가버릴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닫힌 서버가 된 후에도 주민들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신들은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마침내 신들조차 잊힌 시대가 온다면…….
그 서버는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서버는 서버 기준시로 유배자가 도달하는 마지막이 가까워 온다.
여신님은 닫히기 전에 이 서버에 입지를 단단히 다져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더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이적은 신앙을 더 오래 유지시키겠지.」
"결국 언젠가는 잊히겠지만 말입니다."
「새로운 서버가 생기지 않겠나.」
"참 허무하군요."
「뭔들 안 그렇겠나. 전에도 말했지만 난 정말로 미궁이 게임이 맞았으면 좋겠군.」
그건 또 그것대로 많은 이들이 고뇌하게 될 문제지만 어차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아직까지는.
* * *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여신님의 모습을 뵙지 못해서 너무 슬픈걸요."
"그게 아니라 단순히 날 붙잡고 끌어안고를 못 해서 그런 거 아니냐?"
"아아아, 하지만 아저씨 평소엔 너무 크잖아요! 그립감은 중대사항이에요!"
"사람을 무슨 반려동물 보듯이 보지 마라……."
사소한 해프닝이다. 정말로 사소한.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우리 앞에 있었다.
"계단이 어디에 있을까?"
전장에 떨어져 어쨌든 승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사소한 건 치워두고 연방의 편이 되어 싸웠는데.
그래서 계단은 어디에 있냐고!
"제국 함대가 완전히 패퇴하는 대로 저희가 온 힘을 다해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가 저 꼴이 났는데?"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직접적인 함대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수송선이다.
바르바로이가 마련한 우리 파티 전용은 아니고 지극히 군사적 목적의 수송선이기에 쾌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전장인 이곳에선 군사 장비가 잔뜩 달려 있는 편이 좋다.
지상을 관측하는 모니터는 붉은 짐승들의 해일을 보여주고 있다.
지상군은 모두 성공리에 철수했다. 희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린 스킨의 크고 둔중한 탈것들은 고블린의 날렵한 수송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후퇴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항전하기를 명받은 부대들은 역사에 순국선열로서 기록된다는 모양이다.
어쩐지 오싹한 일이다.
그리고 남겨진 그린스킨 병사들과 제국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길러지던 가축들은 이미 대부분 붉은 짐승의 일부가 되었다.
그 붉은 물결은 대기권 밖에서도 선명히 관측되는 것을 넘어, 아예 육지의 절반 이상을 덮어버리고 있다.
그대로 둔다면 해양 생물들조차 삼켜져 바다를 메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 끝에 모든 혈액을 가진 동물을 흡수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후에야 수명을 다해 죽어가기 시작하겠지.
그래도 남은 흔적들은 유기물이니 부패하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식물들이 그것을 양분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성도 자비도 존재하지 않는 본능만을 따라 움직이는 괴물이다.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흡수하고 집어삼키리라.
퍼져나가는 속도는 내가 보아도 경이롭다. 대부분의 왕국이 [피의 군주]를 금기로 취급하는 이유다.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힘이기에.
"정말로 저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함대 사령관은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함대전 지휘를 부관에게 던져버렸다.
그래도 되나 싶긴 했는데, 워프로 추가적인 지원 함대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단순히 숫자로 보아도 이미 제국에게 승기는 없다.
이 판을 뒤집으려면 드래곤이 나서야 할 텐데 그 엉덩이가 무거운 녀석들은 아직도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기묘하게 데포르메 된 롤리팝 기호 4개를 계급장에 달고 있는 고블린, 함대 사령관이 말한다.
"연방은 언제나 유배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쳐왔습니다. 길 안내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계단을 찾는 기술만큼은 이 우주 최고를 자부할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나는 고블린들을 믿기로 하고 지상을 관측하던 카메라를 돌렸다.
혼돈의 화신이 창을 내지른 전장.
진원지인 만큼 붉은 짐승들이 산 것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자리를 비웠다.
무너진 지각의 일부가 고스란히 보인다.
그 공격에 구름도 쓸려나가 별다른 보정 없이도 선명하다.
애초에 구름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삼각형으로 갈라져 있다.
저런 규모의 힘을 휘둘렀음에도 뒤편으로는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정점에 도달한 창잽이의 컨트롤이라고 봐야 하나.
다시 나를 관음하기 위해 돌아온 자연의 신이 코멘트한다.
「정밀하게 압축된 직선 형태의 파괴로군. 땅을 꿰뚫고 1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빠져나와 대기권 밖으로 사라졌고.」
‘처음부터 땅 방향으로 살짝 빗겨 지른 모양이군요. 전쟁의 신에게 뭐라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보다는 안전빵으로 한방에 작살을 내되 그 여파로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걸 경계했겠지. 허공으로 저런 걸 지르면 함대까지 닿지 않겠나.」
이미 하이랭커 영역의 무력이다.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이번 회차에서 내가 미궁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신이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좋다.
여신님은 의외일 정도로 강했으나 전쟁의 신은 생각보단 실망스러웠다.
그 이야기를 하자 자연의 신이 낮게 웃는다.
「전쟁의 신이 약한 게 아니다. 혼돈이 너무 강한 거지. 나도 단 한 번을 이겨본 적이 없군.」
‘마법사셨습니까?’
「그렇긴 하지.」
‘일대일은 힘겹죠.’
상성의 문제니 어쩌겠는가.
그다음 이야기는 여신님께서도 들을 수 있도록 육성으로 말했다.
"직선 파괴력이 강한 [롱기누스의 창]을 메인으로 물리적으로 강력한 [행성 타격] 등을 보조로 붙였군요. 원래 행성 쪼개는 용도니까 힘을 집중시키기도 더 좋겠고, 거기에 [소멸의 노래]는 잔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다 갈아버리는 용도군요. 세심한 조합인걸."
다 들었을 텐데 소녀가 슬쩍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의아해서 돌아보니 소녀의 표정이 이상했다.
"여신님, 좀 자러 간다고 그랬어요. 오랜만에 몸 쓰니까 피곤하다나. 그런데 아저씨가 아마 그런 거 물어볼 거 같다고 알려 주랬는데."
"방금 내가 다 읊었다고?"
"그러게요."
자연의 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묻는다.
「혼돈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한 모양이군. 그걸 다 써봤나? 그것도 섞어서. 내 평생에도 저 양반 말고는 그렇게 운이 좋았던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운이라니. 유니크 스킬 뽑는 거도 설계입니다."
원래 잘 만든 운빨망겜들은 그런 맛이 있다. 결국은 운이지만 운 이상의 무언가도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맛.
오랜만에 미궁을 게임으로서 즐기던 시절의 감각으로 덧붙였다.
"시너지가 괜찮게 나는 좋은 조합이네요. 물리 계열에선 정석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고. 그래도 하필 종족이 마법특화인 악마라 좀 옥에 티긴 한데."
아, 원래 한국인들은 게임에서 그런 거 못 참는다고.
텅 빈 통장이 참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