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0화
14층 - Lv. 459 잊힌 자들(1)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다르다.
인간의 몸은 아무리 튼튼하고 강인해져도 24시간 주기로 활동한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이건 사실 인간이 아닌 생자들은 다 비슷하다.
리더가 빠르게 언데드가 된 이유는 아무래도 과로를 방지하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할 일이 많다면, 언데드는 최고의 선택이다. 언데드나 기계나 조금 멀리서 보면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니까.
인간과 오크와 고블린들이 잠든 새벽에도 리더는 무언가 궁리하고 있었으며, 오랜만에 파티원 한 명 한 명의 면담을 진행했다.
사냥꾼의 순번은 마지막이었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모두가 알고 있고, 이루어지기 직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로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여전히 목적은 시간의 신전인가?"
"물론입니다. 저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가고 싶을 뿐이니까요."
"파티의 상황에 대해 불만은 없고?"
"은퇴를 앞둔 늙은이의 심정인데 뭐가 불만이겠습니까. 다만 아직도 입장상 위에 서는 게 맞나 조금 생각할 뿐입니다."
12년차다.
튜토리얼 구간에서나 고참 취급을 받지, 이미 우주로 가버린 이번 튜토리얼에서는 전혀 다를 것 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파티 내에 리더를 제외하면 더 고참 유배자가 없다하더라고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없을 때 리더 잡을게 당신이나 영감님뿐이니까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상이긴 해. 뒤틀린 왕국 이전 구간의 난이도도 기대 이상이라 그렇지."
"촌동네 무지렁이 사냥꾼 노릇이나 하다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솔직하게 말해서는 당신도 상당히 인재긴 해. 전투 면에서야 장비에 의지해야할 수밖에 없어 보이지만, 저번 회차 때 당신처럼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가 길드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상사 전역을 하긴 했습니다."
"조직화된 전투 경험이 많아 보인다 했더니 그런 거였군. 그럼 결혼은 일찍 했었지 않나?"
"지구의 가족은 이혼한 후에는 소식을 모르겠군요."
안정된 발판 위에 올라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흔히 금기로 여겨지는 바깥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이 동료라는 이름으로 스쳐지나가는 유배자의 삶에 필요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좋은 추억으로만 남는다면 별 문제될 것도 없는 법이다.
짬이 안 되는 이들은 그걸 몰라 여러 가지 바보짓을 하곤 하지만, 꼬마 마법사 정도만 되어도 사리분별은 할 경력자다.
"보스 층인 10층 말이야. 거기서 뽑을 건 아마 요정 카드일거야. 퇴직금으로 받아 가라고."
"어찌 확신하십니까?"
"확신은 아니야. 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행운의 신의 눈을 피할 수도 있지. 불확실한 암시, 원인과 과정은 다 생략하고 대강의 결말만을 남겨두면 충분히 모호해지거든."
사냥꾼으로선 알 수 없는 기준이다.
하지만 신들을 상대로도 대등하게 대화하며, 신들 역시 그리 대하는 수준의 유배자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겠거니 한다.
신과 같은 고참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전 정말로 운이 좋군요."
"운이라. 이 미궁의 본질이긴 하지."
그 이외에는 그냥 잡담이었다. 리더는 충분히 친화적인 사람이었고 대화하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 줄 아는 이였다.
사냥꾼은 오랜만에 술을, 리더는 요정의 피를 홀짝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함대 사령관이 찾아올 때까지 야심한 밤의 담소가 이어졌다.
사냥꾼은 꾸벅 인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군용 우주선은 잠수함과도 같다. 최대한의 공간효율을 위해 복도도 좁고 방도 작다.
그나마 뱀파이어 군인들을 상정하기에 조금 넉넉한 공간이 있다.
마음을 옥죄어 오는 듯한 좁은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미묘하게 짧은 침대에 드러누워 마인드맵을 열었다.
[1226회차]
[남은 시간 : 1분 12초]
유배자가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사냥꾼은 자신이 다시 부활할 수 없게 됨을 알리는 타이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는 유배자 출신의 NPC가 되었고, 미궁을 클리어 할 자격을 잃었다.
* * *
함대 사령관은 여신의 대전사이자, 화신이자, 연방의 시조이자, 그의 신앙의 증거인 나와 최대한 오래 함께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충분히 피로했고, 그와는 잡담보다는 향후 연방군이 나아가야할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내 전략적 식견에 감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슬슬 항문이 헐 것 같았기에 축객령을 내렸다.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여신께서 지켜보시는데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내 시간을 빼앗았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
분명 조만간 우주에 모습을 드러낼 드래곤에 대응하는 법에 대한 토론이 주였다.
사령관은 무려 대장급 인사인 만큼 고루 전파되리라.
여신님 역시 옥음으로 조금 거드신 바, 사령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도하며 내 방을 나섰다.
사실 지금 내 방이 본래 사령관실이다.
대뜸 포 스타와, 아니 포 롤리팝과 함께 취침하게 된 하급 장교 및 병사들에게 묵념.
이미 상당히 친근해져버린 자연의 신이 말을 걸어온다.
「그 친구 상태가 좀 별로던데.」
"어디서 많이 본 표정 아닙니까?"
「그거지 그거. 저주인줄 알았던 불사가 마침내 끝났을 때, 갑자기 사실 그건 축복이 아니었을까 하게 되는 그런 표정.」
"그거 말고는 저렇게까지 시원섭섭한 심리상태가 나오기 힘들지요. 100년만에 전역하는 건데."
왕국에 성공적으로 눌러앉은 유배자들이라고 반드시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마무리하고 천수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왕국은 분명 대다수가 뚫지도 못하는 이전 구간에 비하면 편안한 환경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들의 상상처럼 이상적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기가 참 힘들다.
왕국은 튜토리얼이 새로 열릴 때마다 꿀렁꿀렁하고 새로운 유배자들이 쏟아지는 공간이다.
그곳도 하나의 사회다.
그런데 그곳은 왕국이다.
그렇게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본래 거긴 그냥 여러 가지 세계가 교차하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통칭이 ‘왕국’이 되어버린 이유는 왕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왕이 누구겠는가?
힘세고 세력 있는 유배자다.
심지어 유배자는 초인이다.
나는 유배자끼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는 꼬라지를 본 적이 없다.
일격에 땅을 뒤엎는 자와 그냥 좀 건강하기만 한 자가 어떻게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해?
힘 센놈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거지.
왕국이 왕국이라 불리는 건 간신히 그곳에 도달하는 이들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회가 있는 시점에서 계층이 발생한다. 취약계층을 보호해줄 복지정책은 미궁에 없다.
그냥 미궁치고는 아주 살만한 것일 뿐이지.
그래서 요정 유배자처럼 그냥 대륙에서 NPC로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기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참 어중간하게는 살만 하단 말이죠. 그러다보면 여러 미련이 생기죠."
죽음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던 유배자들이 점차 죽음과 멀어진다.
한 번 왕국에 도달하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차원도 달라진다.
일단 도달한다면 그 이후에 다시 하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자주 왕국에서 지내다보면 도전자가 아닌 이상 빠르게 안주하게 되며 시간도 빠르게 소모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 것이다.
유배자 생활 초기에는 저주로만 여겨졌던 남은 시간이 아쉬워진다.
차라리 죽고 싶은 환경이 아니라면 죽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단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100년이나 되는 시간은 생물의 본능에 마저 혼선을 줄 수 있다.
대부분 다시 죽음의 품에 안기게 된 자들은 복잡한 감상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태도로 나타난다.
오래보다 보면 구분할 수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그리 길게 이어지기 힘든 미궁에서, 그런 깊고 질척한 회한이 얼굴에 묻어나는 경우는 드무니까.
사냥꾼이 꼭 그랬다.
끝이 다가오는 유배자의 표정.
당연한 것이었으나 이젠 낯설어진 것.
그걸 다시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공포.
하지만 동시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기쁨.
살고자하는 본능이 고장나버린 자 특유의 진득한 감정이다.
「혼자 그리 느꼈으면 심증이겠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했군.」
"그럼 대충 맞겠지요. 여신님께 확인해도 될 거 같긴 한데……."
「어차피 곧 보내줄 파티원 아닌가. 그냥 내버려두지.」
"아마 과거 어느 회차에서 요정들이랑 살다가 늙어죽은 모양이지요. 건드리지 맙시다."
인간의 수명은 짧다.
어중간한 시간과 나이에 요정의 덫을 밟는다면 저렇게 이상하게 꼬인 삶을 살게 되는 수도 있다.
「정말 요정 카드라면 퇴직금으로는 딱이군.」
"우리 파티 복지가 이렇게 좋습니다."
어차피 왕국에서 카드를 구할 방법은 많다.
하지만 시간의 신전을 왕국 이후에서 다시 찾는다?
그건 소녀가 있다 해도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그래서 그 소녀는 왜 그런 것 같나?」
"확률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요? 아마 행운의 화신 정도 되는 거 아닐까 싶은데."
「액면 그대로 말인가?」
"이 미궁에서 확률을 관장하는 거면 애초에 행운의 신뿐이지 않습니까."
「시간의 신전에서…… 흠.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자네 파티는 내가 본 그 어느 파티와도 다르군. 이래서는 대신격들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조만간 심연의 신을 섬기는 신도 하나를 보러갈 예정인데 그때 뭔가 말이나 걸어볼 생각입니다."
「대신격이 갑자기 대답을 하면 정말 놀랍겠군.」
그러게 말이다.
대신격이란 것들은 게임 시절의 설정으로도 모호한 존재들이었다.
아마 이 미궁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면 그들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우선 빨리 왕국에 도착하고 봐야하는데.
* * *
우리 파티 전용 수송선과는 다르게 마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온천 따위는 없었기에, 마법사들의 마력은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마법사는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소모성인 면이 있다.
마나 포션 같은 게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지.
밸런스적으로도 너무 다재다능하며 화력도 좋은 마법직들에게는 그렇게 제약이 걸릴 필요가 있긴 하다.
아예 좀 더 쉴까 생각도 좀 해보았으나 내 남은 시간을 보자 그러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석 달이 걸렸다고 하니 어딘가에서 덜컥 걸릴 일이 있단 뜻이다.
강제로 휴식할 시간이 준비되었단 사실을 알고 있다면 굳이 여기서 더 쉴 필요는 없다.
"계단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기동대가 이미 위치를 확보를 마쳤습니다. 곧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나는 물론 그렇게 했다.
대체 계단을 어떻게 찾는 거냐고 물어나 봤는데 유배자의 출현 지점과 진행도를 바탕으로 계단의 위치를 예측하는 AI가 있다고 한다.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다.
유배자에 너무 진심인 나라로군.
모든 장병들이 나와서 경례하고, 군악대가 행진가를 연주하는 성대한 행사 사이를 지나, 우리 파티는 다시 계단에 발을 들였다.
늘 그렇듯이 부유감이 찾아온다.
[TIP : 공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알려줘도 이미 늦었겠지만 당신의 짐에 산소를 저장할 수단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없다고요? 다음 회차에선 행운이 따르기를 빕니다!]
이래서 모르면 죽어야 한다. 저 팁이란 게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에 나와야하는 거 아니냐?
거지같은 게임. 팁 메시지의 저 느낌표 봐. 정말 역겹다.
당연히 우주 테마였던 시점에서 산소통은 막내가 계속 짊어지고 다녔던 품목이다.
나와 꼬맹이는 아예 언데드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