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3화
14층 - Lv. 459 잊힌 자들(4)
이상함을 느꼈다면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긴 해야 한다.
좀비들은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수분이 다 빠져 말라비틀어지기는 했지만 종족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또 의문이다.
종족이 너무 다양하다. 그린스킨의 것이 아닌 것은 너무나도 확실하지만 인간, 난쟁이, 요정, 기타 등등 다양한 형태의 시신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군함이란 말이지.
어떤 사연이 있나 싶어도 이 미래의 역사를 자세하게 공부하지는 않아서 모르겠다.
모든 미래 스테이지는 각각의 대체역사물과도 같다.
기준점이 되는 중세 판타지 월드는 로그라이크 특유의 랜덤성이 있다곤 해도 어느 정도 엇비슷하게 시작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미래는 정말로 무수한 나비효과들이 작용한다.
어느 정도는 미궁이 바라는 대로 정형화되어 흐르지만 자세한 부분은 천차만별이다.
대강의 얼개만 아는 나는 알 수 없는 부분.
이민선 같은 걸까?
군함이?
제국이 모행성을 장악한 후 어떻게 탈출하였는지는 알지 못하는데 그 시절의 물건일까?
마법으로 연대 측정을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비가 필요한 일이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어둠에 노출된 시체들은 그에 걸맞은 강력한 좀비로 되살아났지만 원래 없던 신체기관이 자라나는 일은 없다.
지상을 걷고 달리기 위해 진화한 육신이 무중력 상태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수가 많다곤 해도 허공에 떠다니며 휘적휘적 다른 것을 노릴 뿐이다.
물론 붙잡히면 큰일이 날 수는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몸을 박쥐로 흩어버릴 수도 없으며 안개화는 더더욱 무리다.
혹여 피해를 입더라도 핏물을 컨트롤할 수는 있겠으나 손상은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러니 안전하게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빨리 지나가야 하기도 했다.
함선의 잔해 외곽에 있던 통로가 아니라 안쪽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는 좀비를 우주의 미아로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달렸다.
일단 발을 땅에 붙인다는 것이 인공 중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달리며 몸을 뒤집어 천장을 딛기도 했고, 벽을 타고 달리기도 했다.
중간에 마주치는 좀비들을 더 이상 제압하려고 하진 않았다.
디딜 곳이 없는 괴물들은 떠밀기만 해도 버둥거리며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힌다.
초근접 상황이라도 손아귀나 이만 조심한다면 큰 문제 없다.
그래플링도 도움이 된다.
관절기를 걸 수는 없다. 7층에서 천사에게 날개 꺾기를 걸었을 때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응용하여 붙잡히지 않을 수는 있다.
무게가 없으니 간단히 메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머리통 속을 불로 지져 순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불은 빛을 내며, 빛의 원소와 어느 정도 흡사한 작용을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몸속에 어둠을 쌓아왔는지 간에 뇌 속이 지져진 좀비들도 잠깐 행동을 멈추었을 뿐 기능을 정지하지 않았다.
마력을 듬뿍 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격적인 내구도다.
벽 몇 개는 그냥 구멍을 내고 돌파했다.
복도는 가면 갈수록 좀비들로 그득그득하게 차 있었고 조금 지나면 그냥 시체들의 장벽으로 틀어막힐 지경이었다.
벽을 폭파시키며 진행하자 더 많은 시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끼로 마법을 던지기 시작해야 했다.
화려한 폭발은 형형색색의 마력을 사방에 흩뿌린다.
그리고 내 마력의 빛을 가리기 위해 어둠을 조금 받아들였다.
시야가 순간 아찔해진다. 물리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단지 몇 가지 안 좋은 기억이 플래시백 된다.
우주는 역시 건강에 해롭다.
좀비들은 순간적으로 어둠을 휘감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난쟁이 하나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계속 전진.
마침내 꼬맹이가 숨죽이고 있는 탈의실까지 도달했다.
「묘기를 보는 것 같군.」
‘그리 평가해 주시니 또 감사하군요.
「무중력 전투에 익숙한 걸 보니 심연 깊은 층을 뻔질나게도 드나들었나 봐.」
‘환경이 좀 비슷하긴 하죠.’
심연이란 건 깊이 들어갈수록 우주와 비슷해진다. 좀 더 악의와 혼란이 가득한 우주.
문을 열자 꼬맹이가 창백한 얼굴로 기절해 있었다.
아니 좀 다른가? 뱀파이어라 원래 창백하긴 하니까.
흔들어 보았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급하니 등에 들쳐업은 다음에 마력을 흘려보내어 상태를 판단했다.
시커멓다.
마력에 대한 감응 능력이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너무 뛰어난 탓이다.
완전히 잠식되었냐면 압도적인 재능 덕에 또 그렇지는 않다.
어둠 속성의 마력도 결국은 마력인지라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 과정에 어떤 정신적 피해를 입을지는 또 알 수 없다.
표정도 고요하고 그냥 잠자 듯하지만 그런 부분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부분이라.
우선은 이 어둠으로 가득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
밀폐된 에어포켓은 우주의 어둠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이 골치 아픈 잔해에 계속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지. 아주 그 공기가 있는 방만 통째로 분리해서 우주로 내보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자 마력을 아끼지 않고 투입했다.
마법사로서 여러모로 혹사당한 일정이었기에 내 마력 역시 만전은 아니지만 마투사는 원래 가성비는 쓸만한 편이다.
벽에 손바닥을 대고 지향성 폭발을 일으킨다. 우드득하고 철이 뜯겨나갔다.
파편이 튀며 상처가 생겼지만 일단은 달렸다.
내가 급하게 오느라 사방에 흩뿌린 흔적 덕에 좀비들의 밀도가 높을 대로 높아져 있다.
좋은 일이다. 파티원들이 있던 방은 함선의 꼬리 쪽이었기에 그쪽만 어떻게 차단한다면 안전은 확보될 것이다.
아까부터 스멀스멀 불길함이 올라온다.
내가 살짝 받아들인 어둠 덕분인지, 아니면 직관이 경고하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럴 땐 무조건 서둘러야 한다.
좀비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뛴다.
머리채를 쥐어 잡으려는 손.
머리카락을 살짝 베어 떨친다.
발목을 붙잡은 손은 신발을 던져주고 달린다.
망토 끝이 붙잡혔다.
아, 이건 못 주지.
아주 절제된 마력의 운용. 공간이 아니라 선으로 작용하는 얇은 폭압이 좀비의 팔을 베어낸…….
안 베이네, X부럴.
빠르게 두 번 더 시도해서 떨쳐낸다.
다시 벽을 폭파. 반대편에 있던 좀비들이 입을 벌리면 덤벼든다.
떨어져 나간 벽을 방패처럼 붙잡고 휘둘렀다.
얻어맞은 좀비들이 밀려난다. 무중력은 무게에 대한 부담이 없어도 되어서 참 편리하다.
그러다가는 아예 앞뒤로 폭발을 일으키고, 뒤쪽으로 마력을 분사해 추진도 했다.
마침내 노출된 우주가 보인다.
때리고 차고 달리고 힘들었다.
그리고 그 앞을 가로막듯 그림자가 일어났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고 이 배의 무덤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도 깨달았다.
적이 약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우주전 최악의 상대 중 하나가 도사리는 땅이었군.
* * *
고블라초프 서기장은 오랜만의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물론 평소에도 그에게 찾아오는 이들은 수없이 많지만 연방의 정점에 선 서기장이자 대신관 대리가 손님으로서 맞이해야 하는 이는 적다.
그것이 타국의 높으신 분도 아니고 연방 내부의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르바로이 국장과는 달리 전면에 나서지 않고 칩거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분이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생존 여부마저 불투명하던 차였다.
전황을 보고 받으며 보드카를 홀짝이던 서기장은 갑작스러운 한기에 고개를 돌렸고 불타는 어둠을 마주 보게 되었다.
누군지 모른다면 여신님께 귀의할 자격이 없다.
얼른 안락한 자리로 안내하고 차를 끓여 자신도 앉았다. 비서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끝에 상대가 차를 삼킬 목구멍이 없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러는 동안도 손님은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짙은 어둠이 불타오르고 있는 해골의 눈구멍을 보며 서기장은 오싹함을 느꼈다.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지금이야 여러 가지 기술이 발전하여 그 자리를 대체하였으나 본래 연방은 아주 적은 수의 난민들로 출발한 국가다.
그 국가의 시조이자 모든 고블린의 경외를 한 몸에 받는 강대한 사령술사 리치가 그곳에 있었다.
사령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연방도 없다.
수가 적었던 뱀파이어들 이상으로 무수한 역사 속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존재.
성대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울려 퍼지는 마력적 음성이 들려온다.
[스승님이 위기에 처했다고 들었다.]
그 말에 서기장은 생물로서 강대한 리치에게 느끼는 공포 대신 위대한 대전사와 위대한 사령술사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오, 위대한 아르카나시여 당신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연방의 함대가 알아서 처리하겠나이다."
리치가 불쾌하게 이빨을 딱딱거렸다.
고블린의 해골은 그 크기도 작다.
딱딱거리는 소리도 어딘가 새된 느낌이 든다. 서기장은 혹시 자신이 실례하지 않았나 걱정을 했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영웅, 그것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거하던 영웅은 기묘한 압박감을 준다.
간혹 회의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며 현직도 맡고 있는 바르바로이 국장 역시 전설적인 영웅이지만 자주 보면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칩거인지 사망인지조차 불투명하던 이 리치는 정말로 어린 시절 동화로나 듣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무수한 전설 속에서 여신의 이름으로 대륙을 뒤흔들었던 위대한 마법사.
다행스럽게도 리치는 서기장에게 불쾌함을 느끼진 않은 듯했다.
[고개를 들라. 내 어찌 나를 공경하는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제자가 제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야 어찌 눈을 감겠는고.]
"그, 그렇습니다."
고블린의 가느다란 뼈다귀로 이루어진 해골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서기장은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허공에 살짝 떠올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서기장의 앞까지 도달한다.
검은 어둠이 이글거리는 눈구멍은 마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서기장에게도 그 막대한 마력의 존재감을 찬연하게 내비치고 있다.
[내가 탈 배를 준비해라.]
"하지만 어둠의 정령왕이 도사린 곳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마법적인 생명체인지, 실체가 있는 괴물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금역임을……."
[어둠이야말로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내가 죽을 곳. 연방에서 나보다 어둠에 정통한 이가 있느냐?]
"함대가 출진할 것입니다! 국모께서는 부디 자리를 지켜 연방의 인민들을 굽어……."
[혀가 잘 돌아가는 것만은 그 영감과 똑같구나.]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혁명의 깃발을 가장 먼저 들어 올리고 연방의 기틀을 다진 그의 조상님.
새삼 이 리치가 그 시절 함께했던 인물임을 다시 떠올린다.
해골에서 마력이 번져 나온다. 시커먼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서기장의 집무실을 휘감았다.
몸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서기장이 움찔했다.
방이 짙은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그럼에도 검게 타오르는 국모의 눈만은 선명히 보인다.
어둠이 목을 죄어온다. 숨을 쉬기 힘들다. 이것이 정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지 그가 보는 환각인지 모르겠다.
식은땀이 흥건해져 등골을 타고 흐른다.
위대한 사령술사 아르카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실제로 마지막인지는 모른다. 하나 서기장은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배를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서기장이 전화기를 들고 국방장관을 불러들였다. 국방장관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서기장이 그를 윽박질렀다.
배가 수배되었고 승무원도 배정되었다.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리치는 만족한 듯 모습을 감추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어둠의 흔적을 보며 서기장은 땀을 닦았다.
국방장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은……, 설마?"
"자네 생각이 맞다네."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자 서기장은 국모 아르카나가 어둠 정령의 영지에서 생환한 이후를 생각할 수 있었다.
드래곤, 현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장 우려되는 존재.
전설에 따르면 과거 저 위대한 사령술사는 드래곤을 죽여 없앤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이제 사령술사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움직인다고…….
제아무리 여신님과 연방의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이런 순간마저도 손익계산부터 떠오르는 자신에게 조금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기장은 웃음 지었다.
* * *
소녀는 답답해했다.
"바깥을 어떻게 내다볼 수도 없나요?"
"마법을 구사하면 들킨다네. 우주의 언데드는 마력을 보고 생자를 추적한다던데."
영감님이 고개를 젓는다.
소녀는 좀이 쑤시기도 하지만 바깥에서 두 가족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모른다는 것을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다.
짠하고 달려가서 도와줄 수도 없는 환경이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일단 마법 강의도 그다지 재밌지는 않았다. 소녀가 바라던 마법은 얍하면 번개가 빠직! 하고 나가는 그런 것이었지, 온갖 계산을 머릿속으로 굴려야 하는 그런 술식들이 아니었다.
학생이 열의가 없으니 영감님도 큭큭 대며 웃었다.
"그럼 잠깐만 바깥을 좀 보도록 할까."
마력 탐지와는 다른 조금 떨어진 곳의 시야를 제공하는 마법이 구현되었다.
어두운 함선의 잔해는 고요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더 멀리는 잘 못 보겠군."
그때 갑자기 충격이 잔해를 덮쳤다. 잔해 내에 있는 방에도 그 충격이 생생히 전달될 정도였다.
흔들리는 가운데 전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감님의 마법으로 비치는 바깥의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발.
알아볼 수 있는 폭발.
"저거 아저씨가 하는 거 아니에요?"
우드드득 하며 선체가 비틀리기 시작한다. 무언가가 뜯어내듯이 함선이 반으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어어어?"
멍하게 그렇게 말하는 동안 완전히 분단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둘로 나뉜 잔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잖아!"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도 큰일이군!"
영감님이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린다. 졸고 있던 꼬마 마법사도 깨워야 했다.
선체의 뒤틀림이 점점 번져온다. 조각난 함선이 문자 그대로 분해되고 있었다.
공기가 남아 있는 이 방까지 뒤틀린다면 전멸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