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4화
14층 - Lv. 2200 어둠의 정령왕(1)
꼬맹이는 꿈을 꾸었다.
버려지는 꿈.
죽는 꿈.
되살아나는 꿈.
그리고 다시 죽는 꿈.
마지막이 이상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몸과 정신이 모두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행복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좋고 나쁘고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꼬맹아, 이쁜 생각하랬지?」
여신님의 속삭임에 겨우 정신이 든다.
흐릿한 시야.
흔들리는 시야.
누군가에게 업혀 있다.
전혀 따뜻하진 않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늘한 느낌의 체온.
새아빠다.
「흠,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구나. 마력에 쉬이 감응하는 아이는 그만큼 영향을 받기도 쉽지만.」
여신님의 신언을 들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원래 입고 다니던 패딩 대신 매끄러운 공용 전투복이다.
그 차가운 질감이 더욱 서늘함을 준다.
하지만 어둠의 느낌과는 다르다. 어딘지 포근한 느낌.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저항력도 강하지.」
그냥 조금 이대로 더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 의식이 살짝 멀어진다.
* * *
어둠의 정령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의 원소라고 불리긴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어둠의 정령이라는 게 태어나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밤이 되면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 시절 사람들의 인식은 어둠은 자연이 아니었다.
악마가 실존하며 언데드도 실존하는 세상이기에 그럴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어둠은 원소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운 어떤 힘에 가깝다.
빛의 빈자리를 채우는 두려움의 상징.
보편적인 인식이 그리됨에 따라 과거에는 어둠의 정령이 탄생하지 않는다.
어둠을 원소라 인식하는 것은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뿐이다.
하지만 우주 시대가 열리면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우주의 개념이 주입된다.
많은 이들이 그저 밤하늘이라고만 여기던 우주가 명백한 실체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마법적인 이 세계관의 미신에 따라 우주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마법은 본래 미신이 실현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우주는 실제로 어둠의 원소로 채워졌다.
모두가 그것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믿기에.
그러면 그 넘쳐나는 어둠의 원소를 토대로 비로소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이 태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어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들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둠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런 인식 속에서 태어난 정령이 제대로 된 정령일까?
아니다.
계약할 수도 없으며 지극히 음산하고 이해하기 힘들며 두려운 무언가로서 탄생한다.
여러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이미지 그대로 말이다.
현재 나를 추격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이 그런 존재다.
어차피 천지 사방에 널린 것이 마법적으로는 어둠의 원소에 해당한다.
그것들이 모두 적으로 돌변했다.
피를 다루는 건 뱀파이어의 기능이며, 그것을 극대화하여 권능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것이 바르바로이의 망토다.
지금까지는 혈액이기만 하면 전부 내 통제에 넣을 수 있으니 아주 요긴하게도 써먹었다.
하지만 이거 참 곤란하게도 이제 상대가 그런 짓을 한다.
이 진공상태의 함선 잔해는 우주의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말인즉슨 여기는 저 정령들의 뱃속이나 다름없다.
검은 그림자가 요동친다.
단순한 마력 탐지의 응용으로 주변에 펼쳐둔 내 마력이 그것을 감지해낸다.
한순간 먼저 공격의 전조를 파악하고 몸통을 틀었다.
꼬맹이에게 맞으면 안 되니 더 조심하고.
다음 순간, 으스스한 기운이 유형화된 창이 되어 솟구친다.
정신을 바짝 집중하고 긴장하고 있어 겨우 피한다는 느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공격의 주체인 어둠의 정령은 뒤편에서 계속 나를 추격하고 있다.
저 인식과 마법의 사생아들은 물리적 실체를 지니고 있어 자유자재로 공간을 넘나들지는 못하니 다행이다.
젠장, 그 패딩이 무사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덜 조심하고 달려도 되었을 것이다.
상성이 나쁜 언데드가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애초에 생물도 아닌 정령 같은 게 적으로 배정되는 것은 아마 미궁의 난이도 조절이겠지.
이게 단순한 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이 서버에 간섭하고 있다.
그건 게임의 진행도가 높아졌다는 것과 다름없다.
게임 후반부에 더 강하고 까다로운 적들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렇지만 너무 화가 나는데?
마력을 펼쳐 주변의 어둠을 밀어낸다.
좀비들이 환장을 하며 달려든다. 이렇게까지 마력을 쏟아내면 선명한 태양 빛처럼 보이겠지.
좋아, 이대로 가면 어차피 죽는다.
어거지로 피하고 있지만 결국 맞을 것이고, 그럼 끝이다.
좀비들의 밀도가 너무 높다. 메치고 밀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공간이 없다.
빽빽하게 들어찬 시체들은 이미 그 물량만으로도 나를 덮어버릴 지경이다.
그럼 일단 좀비들은 치워버리자.
몸 안에 남은 마력을 되는대로 짜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마력이 고갈될 정도로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그렇다.
마법사의 실력은 얼마나 적은 마력으로 큰 현상을 일으키느냐도 크게 작용한다.
유지력이 부족한 클래스 특성상 매우 중요한 행위다.
뭐 대부분은 뱀파이어의 종족적인 능력으로 때워서 그런 거기도 한데.
어쨌건 나는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으며 뒤로 돌았다.
빛으로 변환할 만한 틈이 많지는 않았으나 최대한 빛으로 속성 변환을 진행하고.
이미 언데드인 내 몸속에서 빛이 발생한다.
아이고 따가워라. 언데드가 빛을 다루는 것도 참 우스운데.
나중엔 신성한 언데드를 볼 일도 있긴 하지만.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불쾌한 감촉, 살아 있는 생명체에 가까운 형태로 발현한 정령이군.
그야말로 우주 괴물이 따로 없는 모습.
주먹 끝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함선의 잔해라는 매질을 타고 빛이 흐른다.
이미 내가 돌파하며 구멍을 많이 뚫어둔 덕에 오래된 선체는 충분히 약해져 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쇳덩이가 갈라지고 비틀리는 소리가 들린다.
끼에에에엑
반쯤은 생명체이되 반쯤은 정령이 괴이한 것은 리치가 말하듯 마력적인 음성을 내질렀다.
밴시의 단말마처럼 들린다. 저주 같은 효과는 없어 다행이지만.
선체가 갈라진다. 벌레 먹은 바게트를 반으로 부러뜨린 것처럼 온갖 것들이 우주로 흩뿌려진다.
우주를 계속 유영하다가 미아가 되는 건 아주 위험하지만, 배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에는 다른 잔해도 많다.
마력 분출을 통해 방향을 조정한다. 난파되어 있는 다른 잔해로 향한다.
자연의 신에게 물었다.
‘연방에 지원 요청은 여기 오자마자 했는데 뭐 좋은 소식은 없답니까?’
「워프로 온다는군.」
‘이 근방에 온단 거군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는데.’
「아니, 그냥 여기 찍고 온다는데.」
‘제정신입니까?’
「열 대 중 한 대만 도달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혼돈도 마지못해 승인했다.」
‘좋아 상식이 뭐가 중요해. 잘한다 우리 고블린들!’
슬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영역이 아니다.
고블린들이 얼마나 도착할까? 그걸 어떻게 활용할까?
그런 영역의 이야기가 되고 있단 말이지.
아마 15층도 그런 느낌일 것이고.
전쟁의 신이 지껄인 소리가 생각난다.
다다음 층에 두고 보자?
15층은 어디로 떨어지는 거지?
[예언]이라도 사용한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 먼 곳에 아주 거대한 어둠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빛이 빨려들어 가는 듯한 모습.
블랙홀이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다면 저런 모습일까.
거대하고도 장엄한 그림자.
아마 어둠의 정령왕쯤 되는 존재.
그것이 눈을 떴다. 우습게도 눈이 붉었다.
뭐 어때, 대부분 권능의 영역에서만 힘을 사용했기에 마력은 만전이다.
실피드를 부를 때도 나 자신의 마력보다는 융합로를 혹사 시켰다.
정령도 결국 마법적 존재.
마법적 기교로는 절대 지지 않는다. 상대가 정령왕일지라도.
정 안된다면, 음. 화신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벌써 우주전이라니. 왕국에 가고 싶다. 이젠 나조차도 왕국이 낙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 * *
영감님과 꼬마 마법사는 거의 기진맥진해졌으나 붕괴로부터 공기를 지켜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최초에 안착했던 함선의 잔해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방 하나만 건사하여 우주에 표류하는 꼴이다.
그것도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공기가 새어나가고 있다. 잔해 전체가 뒤틀리며 같이 어긋난 부분이 생긴 탓이다.
사냥꾼은 이 상황에서 아무런 방법을 짜내지 못했다.
마법사가 활약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모두의 시선이 영감님에게 향했다.
"얇은 마력 장벽으로 공기를 가둘 수는 있네. 물리적인 격리보다 오히려 효과적이겠지. 하지만 다른 방호는 기대할 수가 없는데."
하지만 나이든 오크라고는 해도 우주에 나와 보는 것은 처음이다.
산소통을 껴안고 이 안의 공기를 마법적인 장벽 안에 구겨 넣은 채 표류하게 되는 것이 현재로썬 최선으로 보였다.
이 파티에 우주전 경험이 있다고 해봐야 리더뿐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단 그렇게 했다.
우주의 한가운데에 마력으로 빛나는 비눗방울 같은 꼴이 되어 두둥실 떠오른다.
사냥꾼은 여신님게서 무언가 계시를 내려주길 바라며 기도했다.
「다행스럽게도 너희 리더가 미래에서 구원을 보낸 모양이군.」
꼬마 마법사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 가장 먼저 깨달았다.
"저거 난파선인 거 같은데 왜 움직이죠?"
그리 크진 않았다. 민간 상선이나 그런 것이 아닐까? 연방의 마크가 선명하다.
"고블린?"
「그 친구들은 정신없이 이쪽을 향해 워프하고 있긴 하지만 워프도 만능은 아니지. 아직 시간이 약간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워프의 여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배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배를 보며 막내가 말했다.
"거의 손상이 없습니다. 저 정도면 배의 기능이 멀쩡할 수도 있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럼 누가 타고 있냐는 게 문제인데."
그 순간 사냥꾼의 잿빛 뇌에 스파크가 튀었다.
"어이 막내, 혹시 우주선 조종할 줄 아나?"
"미궁의 기술이란 게 제가 살던 세계의 기술과 아주 흡사하니……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밀수할 때는 작은 우주선을 쓰곤 했거든요."
"빨리 저놈 기절시켜!"
"예?"
사냥꾼이 주변을 둘러봤다. 저 튼튼한 놈을 기절시키려면.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사냥꾼이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빨리! 기절! 저거!"
비슷한 일을 겪어본 소녀가 그 말에 상황을 깨달았다.
짧은 [대시]로 소녀가 막내에게 날아가 부딪힌다.
뒷목을 힘차게 내리쳤으나 너무 튼튼해져 버린 탱커는 비명만 내지르지 기절하진 않았다.
소녀가 빠르게 다음 판단을 했다.
등에 달라붙어 목을 조른다.
"어엇, 왜 이러십니까 누님! 끄으윽."
리어 네이키드 초크.
체급을 무시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는 수단.
경동맥이 차단되고 이미 초인의 반열에 접어든 막내는 일반인보다 좀 더 오래 버텼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
뒤늦게 영감님도 상황을 파악했다.
"오, 과연. 저런 걸 조종할 능력이 있는 건 한 명뿐이군."
작은 우주선이 충분히 가까워졌다.
외벽의 문이 열렸다. 에어도크다.
에어록이 잠기고 공기가 채워진다.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다행스럽게 시간 내에 도착했군요. 저 좀 기절시켜……, 어라? 혹시 여기의 저는 죽었습니까?"
카메라로 혀를 빼물고 엎어져 있는 자신을 본 미래의 막내가 몹시 황당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