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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45화 (145/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45화

14층 - Lv.2200 어둠의 정령왕(2)

내가 어떻게 정령왕을 상대할 수 있는가를 따지려면 일단 정령이라는 존재들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마법적인 미궁의 세계관에서 일반적인 정령의 인식은 뭔가 위대한 존재, 더 그레이트 스피릿, 자연의 화신.

그리고 정령왕의 계약자는 그 옛날 만화의 샤먼킹 쯤 되는 그런 입지로 평가된다.

물론 그건 계약한 정령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경우에나 그렇다.

정령왕의 계약자라고는 하나 현재 레벨이 네 자리가 채 못 되는 내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마력을 끌어다가 잠깐이나 겨우 쓰는 정도에 불과.

본래부터가 정령왕과 계약한 수준의 정령사라면 이미 레벨 네 자리가 기본이다.

아니라면 계약에 필요한 마력도 충당하지 못할 뿐더러 계약할 기술도 없다.

신들의 주관 하에 꽤나 야매로 계약한 내가 특이한 셈이다.

그리고 어차피 우주에서 바람의 정령왕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체 행성 근처라면 또 다른 의미에서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여줄 수 있겠으나 이런 망망대해에서야 뭐.

어둠의 영역, 이미 어둠 정령의 정령계나 다름없는 이런 땅에서는 실피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령왕은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을 창조해 내지는 못한다.

그치만 말이지.

정령이란 게 저렇게 대단하고 신비한 존재로 표현 되는 것도 연구가 진행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마법과 신비가 말라죽어 가고 있는 우주 SF 시대에도 어느 구석탱이에는 샤크마처럼 늙은 마법사가 도사리고 있는 법이며, 늙은 정령사도 존재한다.

과거 회차에서 만났던 그런 정령사들은 내게 상당히 인상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정령이라는 건 말이지,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니다.

그냥 매지컬 AI다.

실피드만 해도 처음에 자아가 희박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건 딥 러닝이 덜 진행된 알파고 같은 상황이다.

상급 정령이건 왕이건 정령은 결국 무식할 정도의 단일 원소 마력이 뭉쳐져 탄생한 어떤 특이점일 뿐이지 자연을 수호하는 사명 같은 건 없다.

계약이라는 것 자체가 그 자연적인 슈퍼 AI들을 본 과거의 천재들이 이건 써먹을 수 있어!

하면서 순진한 정령들을 어르고 달래 이용해먹은 결과다.

정령사라는 클래스의 탄생비화 되시겠다.

정령은 계약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털 숭숭 난 시커먼 정령사들이 귀엽고 순진한 정령들을 꼬드겨,

‘야야, 이거 봐라 우리랑 계약하면 막 이렇게 소환되어 이런 거도 구경하고 이거도 보고 재밌고 신나고 행복하단다.’

하고 사탕을 내민 것이다.

그걸 쫄래쫄래 따라간 선배 정령들을 본 어린 정령들도 잘은 모르지만 우리도 해야하나 보다 하고 계약에 관대해진 것이고.

자 그럼 정상적으로 정령계에서 태어나지 않고 우주 한복판에서 어쩌다보니 뿅 하고 태어난 녀석들은 어떨까?

규모가 규모다보니 하나의 행성에 적을 두고 있는 사대원소 정령들에 비하면 힘의 총량은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저건 제대로 된 정령도 아니다.

인간의 손을 타며 딥마인드 챌린지를 해본 적도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AI 되시겠다.

그리고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건, 좀 나쁘게 말하면 멍청하다는 거다.

살짝 엿보인 힘을 휘두르는 형태를 보아도 그렇다.

과거의 실피드는 비록 어린 정령왕이었으나 친절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서 두들겨 패면 효율적이고 강력하지 가르쳐 줄 계약자님이 있었단 말이지.

오래 묵은 다른 정령왕들 역시 그런 경험을 쌓으며 역으로 계약자를 농락하는 관록을 쌓는다.

이 녀석은 아니다.

내가 파고들 틈은 그곳에 있다.

마법사들끼리의, 아니, 마법적 존재들끼리의 마법전은 힘의 총량만이 결정하는 싸움이 아니다.

샤크마는 막대한 힘과 더불어 그 재능에서 비롯된 힘만으로도 히어로 유닛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 데미 리치보다 다섯 배가 강하더라도 멍청하게 힘을 뭉쳐 던지기 밖에 못하는 정령왕은 어떻게 비벼볼 여지가 있다.

혹시 그렇지 않다면?

그럼 끝장이다.

이 또한 확률의 문제.

저 어둠의 정령이 태어난 후 어떤 삶을 보내왔을까.

* * *

미래의 막내는 함선을 수리할 정도의 기술을 익히진 못했다.

하지만 바깥에서의 경험과 연방 엔지니어들의 조언에 따라 쓸 수 있는 우주선과 쓸 수 없는 우주선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운전은 막내 자신이 살던 지구의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14층의 가장 큰 문제는 언데드가 아닌 산소가 필요한 파티원들의 생존이다.

그랬기에 시간의 신전을 통해 이곳으로 보내진 막내는 가장 먼저 잔해를 수색했다.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 생명 유지 장치는 기능하는 우주선을 찾아야 했다.

아닐 것 같지만 전투조차 하지 못하고 승무원만이 죽어버린 배가 너무나도 많다.

난파한 지 오래되지 않은 배 위주로 수색하니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둠의 정령은 사람의 정신에 파고든다. 마법적 소양이나 특출나게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쉬이 미쳐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왜 괜찮은 거죠?"

"유배자는 원하건 원치 않건 지능 스탯을 찍게 되지 않나."

"아……. 정신력 보정. 스스로는 못 느끼겠는데도 그게 의미가 있나보네요."

"나는 주술사니 문제가 없지."

마법이 저물어가고 마도공학이라는 산업의 일부로서만 이어지는 시대.

마법적 소양을 가진 승무원들이 많을 리 없다.

대부분의 배들은 그렇게 잠들었다.

파티원들이 탑승한 배의 생명 유지 장치는 낡은 느낌도 크게 없었다.

공기가 조금 퀴퀴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차피 험한 곳만 골라 헤쳐 온 여정이다.

이제 와서 조금 수상쩍은 정도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바깥이다.

"저게 뭐지요?"

작동하는 외부 카메라에 비치는 장면은 장엄하고도 장대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파티원들은 모두 현실을 인지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 괴물을 상대로 대항할 수단도 없을뿐더러 우주에서 활동할 수단도 없다.

이번 층에서만큼은 구경꾼에 불과하다.

영감님이 감탄했다.

"세상에. 저건 어둠의 정령인가? 저것이 실존할 수 있냐의 여부는 주술사들 사이에서도 오랜 화두였는데."

이미 시커먼 우주에 거대한 검은 장막이 드리웠다.

그게 마법적인 현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마법적인 나머지 오히려 물리적인 현상 같아 보였다.

"마력 장벽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진짜로 커튼이 드리운 것 같네요."

"사실일지도 몰라. 마나는 입자이며 파동이지만 마력은 그 움직임이라는 사실은 아까도 말해 알지 않나?"

"으, 공부 싫어요."

"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밖에서 싸우는데 도움이 될 텐데?"

소녀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지금은 우주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뛰쳐나가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점도 안다.

영감님은 껄껄대며 설명을 계속했다.

"저건 오히려 안 좋은 형태라고 볼 수도 있지. 정령이 왜 실체를 가지지 않는지 아나?"

"모릅니다."

"마나라는 기초입자의 상태에서 그것이 움직여야만 마력이 발생하지. 마력은 곧 막대한 힘이고. 정령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기에 강하다네. 하지만 저 정령은 실체화되어버렸군. 지나치게 힘을 응축한 결과겠지."

이건 과학 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소녀라고 수업시간에 항상 졸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재밌는 이야기도 있었다.

"너무 마력을 과다응축해서 그냥 평범한 물리적 실체가 되어버렸단 뜻이 거군요!"

"음? 이런 부분은 또 이해가 빠르군."

경지에 도달한 주술사들만이 간혹 체감하곤 하는 아주 드문 현상에 대한 설명이었다.

마나는 모든 물질의 기본 구성 입자다.

그러나 마나만으로 물질을 만들려고 한다면 정말로 대륙 전체가 끝장날지도 모르는 수준의 마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을 의지만으로 자유자재로 해낼 수 있는 술자가 없을 뿐.

그런 고차원적인 설명을 빠르게 이해하다 못해 건너뛰고 결론에 도달하는 모습에 영감님이 의아해한다.

중세 판타지 월드에서 살아온 오크 주술사는 현대과학을 알 리가 없으니.

"어쨌든 저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괴물이지만 힘에 욕심낸 나머지 스스로를 약화시켰어. 저런 거대한 육신으로 실체화될 정도의 마력이라면…… 나로선 상상하기도 힘들군."

정령답게 그것을 그저 힘으로만 휘둘렀다면 훨씬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오히려 육체를 구성하기 전의 괴물이 더욱 강력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 아저씨가 쉽게 다룰 수 있나요?"

소녀는 그럼에도 저 괴물이 강력해 보인다는 것에 이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거대한 덩치. 빌딩은커녕 어지간한 위성만큼이나 거대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거대한 나머지 원근감이 고장나버렸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과거에 보았던 케찰코아틀? 그것조차 어린애 장난감 같아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옆을 본다. 사냥꾼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꼬마 마법사는 너무 반복적으로 마력을 짜내어 그런지 얼굴이 노래져있다.

영감님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그나저나 저 친구 눈을 뜰 거 같은데 다시 좀 기절 시키게."

신음을 흘리던 현재의 막내가 다시 끅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소녀의 타격이 너무 강렬했기에 사냥꾼이 걱정스럽게 맥박을 확인한다.

그 모습을 본 미래의 막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는 저 꼴을 당했기 때문에 이전에 보지는 못했지만 리더는 별일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미래에서 온 이의 확답은 무게감이 다르다.

소녀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영감님은 속으로만 신음했다.

별일이 아니기는.

솔직히 말하면 다 죽게 생겼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물리적 실체고 나발이고 현실도피일 뿐이지 저딴 괴물이 팔만 휘둘러도 다 죽지 않나.

그냥 지금까지의 상황 중에서 가장 위기인 것 같다.

드래곤이 적인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가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괴물인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

무지도 때로는 약이 된다.

어차피 모험을 하러 나선 참이다.

전쟁의 신을 배신하고, 어찌 보면 같은 종족들마저 배신했으나.

영감님은 그럼에도 오크다.

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만이 감당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 와중 미래에서 온 막내를 슬쩍 본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낸 느낌이다.

미래가 달라질 수는 있다곤 하지만 뭐 별 일이야 있겠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 죽고 싶은 것과는 다르긴 하다.

어쨌든 얼굴만은 웃고 있기로 했다.

* * *

타격을 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길 생각을 하는 순간 뚫린다.

고블린들이 미쳐서 워프를 여기다 바로 찍고 날아온다고 한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니 생으로 병력만 들이부을 리는 없고, 마법직들도 상당수 날아들겠지.

마법전은 물리적 전투 이상으로 숫자가 중요하다.

간섭과 통제.

한 개체가 막대한 장악력으로 근방의 마법사들을 모두 먹통으로 만드는 일은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마력은 모두의 것이다.

하물며 저 정령은 실체화된 괴물이기에 본래 지닌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신 골치 아픈 일은.

우드드드득

물리적 공격 수단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육신이 팔을 휘두른다.

내가 방금 전에 있었던 공간이 통째로 뒤틀린다.

마투사 특유의 효율 좋은 폭발을 미세하고 연속적으로 반복함으로서 로켓과도 같은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단거리 순간이동을 두어 번쯤 시도한다.

우주에 마나는 있어도 물질은 없다.

순간이동 계통은 아주 위험한 마법이지만 이런 환경에서라면 도리어 막 갈겨도 상관없다. 어차피 텅 빈 공간이니.

마투사 특유의 사거리 제한 덕에 멀리 이동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특유의 발동 속도 덕에 연속적으로는 사용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마력이 빨려나가고 있지만 별 수 있나.

대신 나 자신의 마력은 온전히 기동에만 사용한다.

물리적 실체만이 아닌 실로 마법적인 공격 또한 날아온다.

갑자기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

이건 아주 위험하군.

7층에서 내가 천사를 괴롭힐 때 썼던 [다크니스 폴]과 유사한 효과를 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저항력이고 나발이고 저기 휘말리면 내 지난 97년의 트라우마가 역류할 것이다.

저건 즉사기로 분류해야 해.

속도를 더욱 가속한다.

꼬맹이는 아예 내 등에 묶어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부하라고 할 수 있을 작은 정령들이 주변에 흐릿하게 나타난다. 함선 내에서도 보았던 짙은 어둠이 나를 찌른다.

회피하는 와중에도 신경은 다른 곳에 썼다.

정신통일. 명경지수.

내가 조심해야할 것은 다른 모든 자잘한 공격들이 아니다.

막대한 힘.

저 괴물이 날파리처럼 여기는 인간 하나를 참다못해 제가 지닌 막대한 힘을 고스란히 투사하려고 할 때.

배의 무덤 중앙에 일어서있는 거대한 그림자가 마침내 화를 참지 못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고방식은 예측하기가 쉽단 말이야.

검은 어둠이 광선이 되어 쏟아져온다. 밀도 높은 마력의 격류는 가시화된다.

누가 보더라도 검은 기둥이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그 사이에 있는 잔해들을 모두 치워버리며 압도적인 힘이 쏟아져온다.

거기서 나는 안도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저 어둠의 정령왕은 그 어떤 외부의 존재와도 제대로 된 접촉 없이 외로이 지내왔다.

배운 것도 없고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힘만 세고 사용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다.

그렇다면 할 수 있다.

우선 잡졸들과 거리를 벌린다.

한순간 연속된 십여 번의 순간이동.

다시 주변에 어둠이 출현하기 전에 저 막대한 마력이, 혹은 질량이 나를 덮칠 것이다.

육신 자체가 손상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마력 장벽을 편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거의 내 모든 마력을 다 꼴아다 처넣고 있다. 넉넉하게 채워둔 [피의 샘]에서도 혈액을 뽑아낸다.

망토의 권능이 [피의 군주]가 가지는 지배력 보정과 어울려 물리적인 방호벽을 형성한다.

거대한 늑대들이 허공에 나타나 내 몸을 가린다.

이 정도로 꼴아 박으면 함포에도 생존만은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저 그렇게만 버틴다면 죽는다.

눈을 감는다. 정신을 집중한다.

세상을 눈 대신 마력으로 보아야한다.

물리적 실체가 내 주변에서 사라진다.

정령계로 이동했을 때와 비슷한 형태의 공간이 주변에 보인다.

어차피 이 주변은 어둠의 정령계나 비슷한 환경이다.

집중하는 와중에도 좋은 생각만 하도록 하자.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 아니, 이게 아니라.

무의식에서 좋았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첫 번째 [메인 던전]을 박살내고 회포를 풀었을 때, 늠름하지만 은근히 귀여운 맛도 있던 여검사와 연애했던 기억, 그 외에도 아주 잘 풀렸던 기억들.

그 와중 살짝 스쳐 지나가는 소녀의 걱정스러운 얼굴.

오, 안 된다. 이건 사망 플래그 같잖아.

그러는 한편으로도 마력을 퍼뜨려 주변 공간을 미리 장악했다.

이미 발동한 마법이라면 내가 저것을 막을 방법은 없겠지만 지금 달려오는 저 어둠의 격류는 구현된 마법이 아니다.

주인 없는 마력이 쏟아지는 것에 더 가깝다.

수량이 엄청나니 밀도도 충분히 높지만 이성이 깃든 형태라고 할 수는 없다.

마법적으로는 술식이라 부를 것조차도 없는 그냥 자연현상.

길가에 바람이 부는 정도의 일.

물론 그 바람이 태풍일 수는 있다. 하지만 태풍을 잠재우고 비를 내리는 것이 마법사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할 일은 무술의 달인이 적의 공격을 쳐내는 행위와도 비슷하다.

게임 적으로 말하자면 매지컬 패링과도 비슷한 것.

나는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사고가 최대로 가속된다.

인위적으로 추구한 정신적 고양이 임계치에 도달하고.

그리고 눈을 떴다. 잠깐이나마 물리적 시야가 사라진다. 대신 세상 모든 것이 마력으로 보이는 마법적 시야만이 남아 내 뇌리에 새겨진다.

닥쳐오는 검은 어둠의 한 올 한 올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인지된다.

세상의 해상도가 달라졌다고 하는 게 이런 것이리라.

다음 순간.

어둠이 나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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