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7화
14층 - Lv. 2200 어둠의 정령왕(4)
본인을 제외하고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이해한 두 명 중 하나.
그 본인의 등에 달라붙어 있는 꼬맹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지는 좀 되었다.
어둠을 몸에 받아들이고 그 속에 푹 잠겨 있었지만 어차피 어둠의 원소는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달고 행복한 꿈이라도 꾸었다면 모를까 좋지 않은 기억들만 산더미였던 삶이다.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꼬맹이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래도 지금이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깨어났음을 알리는 것이 두려웠다.
꼬맹이는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
클랜 마스터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클랜원은 소용이 없다.
필요하지 않은 인원이라면 자비를 베풀어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존재 자체가 짐이다.
뱀파이어 클랜이란 것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그것이었다.
적어도 바르바로이 클랜은 그랬다.
척박한 삶 속에서 영원히 이어지기만 하는 삶은 여러 사람들의 인간성을 마모시켰으니까.
그러한 꼬맹이의 인식 속에서 자신은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불량품이었다.
다른 방식의 삶은 모른다.
그러니까 혼날 것이다.
혼나지 않는다면 더 두렵다.
조용히,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
사랑받기를 포기하고 행복하기를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그 눈빛은 견디기 힘들다.
왜 그런지조차 모르지만 그랬다.
그런 처참한 의식 상태에서 꼬맹이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이 어린 뱀파이어에게 부여한 냉철한 이성은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를 억눌렀다.
어찌 되었건 혼나야 이후가 있다.
외면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극적이고 싶지만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
아직 죽음이 더 편하다고 여기기에는 겪어본 세월이 너무 짧았다.
용서를 빌어야 할까?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할까?
꼭 그런 걱정을 하며 무표정하게 눈을 떴을 때, 그렇게 의식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
꼬맹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 * *
12층의 웅장할 정도로 사치스러웠던 수송선에서 바르바로이가 꼬맹이를 따로 불렀을 때, 그는 우선 사과를 했다.
이미 자신에게는 먼 옛날의 일이다.
그러나 마음에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다.
이 작은 흡혈귀는 클랜 내에서 노골적으로 짐덩이였으며, 흡혈귀로 만든 부모 또한 죽고 나서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내놓은 아이였다.
바르바로이는 그 사실을 외면했다.
당장 모두가 죽게 생긴 상황에서 더 큰 희생을 할애할 방법은 없었다.
그 와중 이미 죽어 있던 눈의 빛이 완전히 사라짐을, 어린아이 특유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런 일은 흔하다.
전쟁고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병으로도 부모를 잃는 아이는 많다.
인간이면 말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뱀파이어며, 바르바로이 클랜의 일원이다.
어찌 되었건 자신의 책임 아래로 들어온 아이를 그런 식으로 외면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본디 뱀파이어들은 어린아이를 함부로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는다.
더 자라지 않는 몸은 삶에 있어, 생존을 위한 투쟁에 있어 크나큰 지장을 초래한다.
한순간의 동정으로 탄생하는 어린 뱀파이어들은 그 본인과 클랜에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된다.
그리고 꼬맹이는 자의로 뱀파이어가 되지 않은 유일한 클랜원이었으며, 동시에 유일한 어린아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바르바로이는 이 꼬마를 새로운 클랜 마스터가 데려간다고 했을 때 기뻐했다.
꼬맹이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과에 그렇게 대답하는 눈에는 여전히 빛이 없다. 500년이 일방적으로 흘렀으나 이 아이에게는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무언가 달라지기에는 너무나도 금방이다.
바르바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며 속삭였다.
"클랜이니 클랜 마스터니 신경 쓰지 말거라. 유배자는 그런 것에서 초월한 존재들이니."
꼬맹이는 의문을 가득 담은 눈망울로 바르바로이를 응시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 흐린 눈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클랜 마스터로서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아직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은 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지. 그걸 결정해 볼 수 없도록 살아왔으니."
그 자상한 목소리를 연방의 다른 이가 듣는다면 일단 꿈을 꾸고 있나 뺨을 꼬집어보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이제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게 분명하다.
혹여 방송에서라도 저런다면 한동안 정신과가 호황을 누리리라.
냉혹한 철혈의 바르바로이 국장과 자상함이라니.
차라리 천체물리학자 트롤이 더 신빙성 있는 소문이다.
"이제 너는 우리 클랜원이 아니다."
꼬맹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버려진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니, 이미 아닌지는 좀 되었다. 네 클랜 마스터는 이제 다른 사람 아니냐. 그분이 싫더냐?"
꼬맹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분이 좋으냐?"
작은 입이 살며시 벌어진다.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잘 모르겠어요."
호의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대충 알 것 같았기에 바르바로이는 다시 그 작은 몸은 안아만 주었다.
"그렇다면 좋아지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이제 스스로 결정하려무나. 그래, 마법을 배운다고 했지. 그건 좋더냐?"
꼬맹이는 이번에도 고개를 움직이지 못했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목소리.
"그것도…… 모르겠어요."
바르바로이는 그저 웃었다.
"좋아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구나."
물론 바르바로이는 알고 있다. 꼬맹이의 입장에서는 미래겠으나 그에게는 과거인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누구보다 마법을 좋아하고 마법에 미쳐 있지만 동시에 즐거움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 아이를.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 등을 살짝 밀어주는 것일 뿐이다.
* * *
꼬맹이의 시야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어둠의 파도가 밀어닥치는 것을,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을 막아서는 방파제를.
힘의 격류가 어떤 식으로 통제되는지도 보였다.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힘이 새아빠의 의지로 부드럽게 휘어들어 주변을 감싸고,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몰려오는 힘들은 아주 아름다운 형태로 재배열된다.
해일의 힘을 누그러뜨리고, 주변으로 흘려내고, 그 일부를 모아서 새로운 힘으로 만든다.
그 힘을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꼬맹이는 홀린 듯이 보고만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입도 다물 수가 없다.
태풍이 들이닥친다면 도망쳐야 하는 것이 꼬맹이의 삶이었다.
용인들의 압제와 횡포는 인간 시절의 꼬맹이를 평화와 안락에서 밀어내었다.
뱀파이어가 되어 연명하게 된 후에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클랜 전체가 결국은 도망쳤다.
동방의 땅을 떠나 머나먼 서쪽으로, 인간들의 나라와 이미 존재하는 뱀파이어의 사회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쫓기고 도망치고 패퇴하고.
맞서본 적이 없었다.
지금 눈앞에 다른 것이 펼쳐진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라 여겨지는 거대한 어둠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고, 그것을 이겨낸다.
그 굳건한 의지도.
그 아름다운 기술도.
결과적으로 펼쳐진 마법적 위업도.
모두 꼬맹이에게는 눈부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세상의 색이 달라졌다.
조금 더 어둡고 칙칙하지 않았던가 하고 여겼던 이 어둠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두 눈으로 보아왔던 마력의 흐름이 갑자기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저 흘러만 가던 배경이 아니라 두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빛나는 힘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위업을 자신도 재현할 수 있을까?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난다.
죽은 후에 다시는 뛰지 않았던 심장이 움찔하고 쑤셔오는 것 같다.
마음 안쪽 깊숙한 곳에서 어떤 불길이 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매달려 있는 등도 너무나 따스했다.
좋아하는 것을 찾으라고 했던 헌아빠의 말이 생각난다.
꼬맹이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 * *
어둠의 격류를 수집하고 있는 시스템의 크기를 조금씩 키워나간다.
스스로 이미지하는 마력 장악의 가동률도 점점 내려갔다.
이미 10% 미만.
이대로 이 격류가 유지된다면 계속해서 알아서 작동할 수준까지 왔다.
그 와중에 마침내 뒤편에 생성되도록 유도한 두 개의 노심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순수한 어둠의 원소만으로 만들어진 어둠 노심.
새로이 공급되는 힘에 더해 원래 없던 힘마저 그 주변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뭉클뭉클한 어둠은 제가 가진 큰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빛으로 내뿜기 시작한다.
빛은 원래 마력의 가장 기본 된 형태다.
어둠 빛이라는 것은 수사적으로는 모순일 수 있으나 마법적으로는 실현 가능한 것이다.
저 마력으로 실피드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엄청나게 싫어하겠지.
나로서도 시커메진 실피드를 보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저 마력을 활용할 수단이 극히 제한된다.
스탯과 패시브 스택이 부족하니 저 정도 규모의 마력을 직접 활용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자멸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그리고 어차피 저 노심을 무한한 마력의 보고로서만 활용한다면 원주인인 괴물에게 타격을 줄만큼의 출력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임시로 내 마력을 보충하는 데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당장 저놈 배 속에 쑤셔 박아야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어둠의 세례가 끝이 난다.
저 뒤편 어느 머나먼 공간으로 사라진 어둠을 제외하고도 주변의 마력 밀도가 극도로 높아져 있다.
괴물은 내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에 큰 의문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둠의 정령이 포효한다.
소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어떤 마력 탐지보다도 충격적이고 강력한 어둠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제는 이쪽도 넘치는 마력은 있다.
피어오른 어둠이 쉬이 그 타격을 막아낸다.
맹렬히 회전하는 두 개의 노심 중 하나를 장전했다.
어둠의 격류를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진 뾰족한 형태의 첨단은 동시에 포신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마법은 참으로 개념적인 존재다.
내 의지에 따라 형태가 변하며 가속기 형태의 포신이 된다.
이미 맹렬한 회전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노심 하나가 장전된다.
괴물은 아직 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분노하며 팔을 치켜들기 시작한다.
물리적 공격수단을 동원하려는 셈이다.
거체가 다가온다. 앞으로 점점 움직인다.
좋은 일이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이 노심은 극도로 불안정하다.
멀리까지 보내긴 힘들다.
그대로 보낸다면 괴물이 고스란히 흡수하겠지만…….
아무것도 누군가에게 배우지 못한 무지한 정령왕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심는다.
노심의 회전을 안쪽으로 수렴하는 것 역시 술식이다.
그것을 단 한 순간에 해방하는 것 역시 술식이다.
정밀하게 짜인 시한폭탄이 노심 속으로 스며든다.
다른 하나의 노심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통해 가속한다.
제자리에 선 채로 발사 준비를 마친 탄환이 점점 가속되기 시작한다.
회전과는 별개로 앞으로 향하기 위한 힘이 축적된다.
아,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나는 몰라도 우리 꼬맹이에게는 진짜로 위험할지도.
발사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둔 시스템에서 벗어났다.
바깥에서 기폭 한다.
응축될 대로 응축된 마력은 미친 듯이 회전하는 노심, 즉 마력의 소용돌이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사출했다.
포신을 통과하면 그 속도는 더욱더 가속된다. 제가 가진 힘마저 추진력으로 사용하여 뻗어 나간다.
지나친 마력의 행사에 시간의 흐름이 순간이나마 이상해진다.
고무줄처럼 주욱 늘어나는 탄환의 궤적이 우주에 그어진다.
거대한 어둠이 빨려들 듯 팔을 뻗는 괴물의 거체 속으로 사라진다.
어둠의 정령왕이 육신에 두르고 있는 짙은 장막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뚫린다.
그리고 잠깐 동안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지나친 출력에 시간의 흐름이 이상해진 탓일까?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찰나가 지났다.
괴물의 몸체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진 저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별의 탄생처럼 거대한 폭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