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48화
14층 - Lv. 2200 어둠의 정령왕(5)
워프의 과정은 마법사들에게는 기묘한 감각을 선사한다.
이미 이 세계의 연구는 미궁이라는 것에 대한 진실의 일부까지 도달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워프의 과정에 지나치는 이 위치가 유배자들에게 [심연]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그곳은 말하자면 지옥, 악마들이 득실거린다고 알려진 마계, 죽은 후에 도달한다는 저승.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승되던 어떤 공간의 실체다.
처음 워프가 개발되었을 때부터 위험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심연]을 경유하여 이동하는 것은 제아무리 여신께서 가호하시며 여신께서 임하신 영역이라 한들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수많은 공학자들이 워프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제국과 동맹이라는 적들의 존재 때문에 빠르게 상용화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워프 사고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래도 심연에 적을 두신 혼돈께서 보우하사, 연방의 워프는 좀 더 안정적인 것이 사실이다.
워프 시대 초기의 일부 연방 연구원들은 심연의 얕은 곳에 빠져들었다가 여신께서 인도하여 빠져나오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워프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는 수없이 많으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그만큼 많다.
마법사들은 그 모든 원인과 과정을 느낄 수 있다.
사령술사라 한들 어둠을 다루는 마법사인 건 마찬가지기에 그런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현실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였다가 돌아오는 감각.
그리고 교란, 뒤틀림, 멀미를 유발할 수도 있는 격렬한 마법적 감각.
그래도 리치가 워프 멀미를 할 리는 없다.
아르카나는 현재 그녀가 탑승한 함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워프는 섬세하다. 조금만 틀어져도 큰 오차를 낳는다.
이번에는 목표 지점이 너무 나빴다.
이미 이계라고 불러야 할 수준으로 변형된 우주의 일부는 차라리 [심연]에 더 가까운 환경이었다.
그곳의 밀도 높은 어둠은 정확한 좌표 지점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고 크게 튕겨 나간 좌표는 현실 우주가 아닌 곳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 좌표가 어그러지고 있음을 고블린 리치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퍼져나간다.
갑작스러운 리치의 움직임에 승무원들이 모두 긴장했다.
사실 처음부터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더 큰 긴장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다.
아르카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발생한 오차를 면밀하게 수정한다.
사실 그건 수정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녀의 스승이라도 워프 중에 그 정도로 정밀한 마력 간섭을 해낼 수 있을까 하면 의문이다.
아르카나가 한 행위는 힘으로 두들겨서 강제로 방향을 틀어놓는 것에 가까웠다.
거대한 마력이 함선을 두들겨 패서 방향을 틀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던 알 수 없는 어떤 공간이 닫힌다.
몇 번 더 그런 일이 반복되고 선체가 끊임없이 흔들렸다.
단련된 베테랑 승무원들이 충분히 멀미를 호소할 만큼 격렬한 워프였다.
심지어 한 번에 도달할 거리가 아니었기에 수십 번의 연속된 워프를 반복했다.
아르카나의 간섭이 아니더라도 승무원들은 이미 한계였다.
하지만 그런 과격한 길잡이 덕분에 함선은 무사히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르카나가 파악하기에 도합 7번의 위기가 지나간 후였다.
마침내 기나긴 워프의 통로를 지나, 심연의 괴물들의 위협에서 벗어난 승무원들이 안심했다.
안심은 일렀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채 폭발의 여파를 맞게 된 함선은 크게 흔들렸고 일부 손상을 입은 끝에야 간신히 방어막을 가동했다.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와중 아르카나가 조용히 말했다.
[문을 열어라. 스승님을 뵈러 가겠다.]
그 뜻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언데드 고블린은 우주로 나오자마자 그녀의 충실한 종을 불러내었다.
어둠은 주변에 널려 있다.
그것이 뭉치고 문을 만들어내었다.
둥글고 검은 어둠의 우물 속에서 뼈로 된 날개가 비죽하게 솟아 나왔다.
* * *
미래의 막내는 단단히 주의받았었다.
14층에서 우주선은 작은 거 고르라고.
가능하면 잠수정 수준인 게 좋다고.
왜냐하면 아주 큰 게 터진다고 했다.
다른 모두가 마법적 조예가 없거나, 있더라도 눈앞의 이적에 정신이 팔린 상황이었지만 성실한 막내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빠르기 회피기동, 정확히는 엄폐다. 이미 주변의 가장 튼튼하고 거대한 전함 한 척의 잔해를 봐두었다.
이 역시 들어가서 안에 있을 언데드들을 모두 몰아만 낸다면 문제없이 기동할 수준의 보존 상태였다.
그러니 그만큼 튼튼하다.
어둠의 동심원이 파괴적으로 뻗어 나간다.
영감님이 비명을 질렀다.
"잠깐! 저걸 더 보게 해줘! 어디로 가는 겐가!"
사냥꾼이 눈치를 슥 보더니 영감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오크의 강인한 목 근육은 노쇠했음에도 뇌진탕을 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영감님은 공격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사냥꾼이 소녀를 보았고 기절한 근육이 하나 늘었다.
"아이고 이런, 영감님이 좀 방어를 쳐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주 먼 곳이었기에 그 어둠의 동심원은 파티원들이 탑승한 우주선의 위치까지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우주는 넓었고, 어둠의 정령왕이 머무는 유사 정령계는 더욱 넓었다.
"이거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이미 미궁을 슬슬 현실이라기보단 게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소녀가 말했다.
그 침착함은 그런 인식에 기반한다.
사냥꾼은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다.
대답한 것은 미래 막내였다.
"좀 위험할 수는 있지요. 그때를 대비해 마법사가 한 명은 깨어 있어야 하는데."
꼬마 마법사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저는 지금 마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라……."
미래 막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힐링 포션이었을 병이지만 조금 다르다. 푸르스름하고도 선명한 빛. 단지 함유하고 있는 마력과 신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지극히 농도 짙은 순수한 마력을 휘감고 있다. 원소로 변화되지조차 않은 가장 근원적인 마나.
"그렇다고 해서 챙겨왔습니다."
"아, 이것은."
꼬마 마법사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 휘말려 사망했던 회차가 있었다.
일부 귀한 생물의 혈액은 도핑뿐만 아니라 마력을 회복시키는 기능도 있다.
마법사를 보유했다면 아주 중요해지는 회복 수단이다.
"마나 포션이군요."
귀한 물건이다.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며 오로지 미궁의 은총이다.
마력을 회복할 수단이 널려 있다면 미궁에서 마법사보다 강한 클래스는 없게 되기에.
붙잡는 손이 파를 떨린다. 그 가치를 알기에 그렇다.
소녀가 답답한지 빼앗아 들었다.
"앗!"
손날 치기로 병의 뚜껑이 날아가고 꼬마 마법사의 입에 꽂혔다.
"우읍."
꼬마 마법사는 그 순간 이것이 단순히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것보다 훨씬 굉장하고도 어마어마한 무언가다.
몸에 힘이 끓어오른다.
마법적 스탯만이 폭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무지 그러지 않을 수 없었기에 꼬마 마법사는 마인드맵을 열어 자신의 스탯을 확인 해야 했다.
세상에!
모든 스탯이 네 자릿수였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스탯보다 단지 도핑으로 끼얹어진 숫자가 훨씬 크다.
이거 드래곤……?
폭주하는 지능 스탯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사고능력을 부여했고 꼬마 마법사의 생각은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했다.
시간의 신전은 15층 이후다.
그건 바로 다음 층이다.
그런데 용혈 도핑이 존재한다면.
다음 보스는…….
그러는 도중에도 미래 막내가 안절부절못하며 꼬마 마법사를 보고 있다.
머리를 붙잡고 포션을 구겨 넣은 소녀도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미래 막내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이다.
꼬마 마법사는 해야 할 일을 깨달았고 수행했다.
유배자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루어보지 못한 수준의 마력이 움직인다.
제 몸에 회복된 마력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손과 발처럼, 신체의 일부를 움직이는 것처럼 주변에 맴도는 어둠의 원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도달했을 때, 작은 잠수정을 두르고 있었던 것은 기함급의 마법 장벽이었다.
* * *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어둠의 고리를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노심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 힘을 전면에만 집중하면 된다.
폭발의 여파 덕분에 배의 무덤이 깨끗해진다.
무수한 함선들의 잔해가 조각나고 박살 나 흩어졌다.
어둠의 정령왕은 제 영지의 중심부에 있었고 그 중앙에서 뻗어 나간 장엄한 힘은 모든 것을 바깥으로 밀어내었다.
안타깝게도 경험치가 차오르는 짜릿한 기분은 없었다.
거체를 들썩이며 단말마를 내지르는 듯하지만 어둠의 정령왕은 살아 있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건 제 속성으로 타격을 입고 단번에 소멸하는 정령은 없는 탓이다.
저놈 또한 반푼이일지언정 어둠의 화신인 셈이니.
하지만 이것으로 굉장한 시간은 벌었다고 할 수 있다.
제정신이 아닌 것같아 보이는 우주 괴물은 이제 완전히 제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짙고 검은 물질들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려주던 장막은 더 이상 없다.
완벽한 그로기 상태.
사이의 장애물마저 모두 날아간 지금이 최적의 포격 상황이다.
자연의 신이 내가 볼 수 없는 상황을 전당하며 제 역할을 다했다.
「방금 있었던 일들에 경의를 표하지. 혼돈의 함대가 도착하고 있네.」
사실이었다.
속속들이 함대가 도착하고 있다.
소속도 제각각, 도색된 마크도 제각각, 함종조차 제각각이지만 본래 거대한 함대의 일부였음이 분명한 것들이다.
개중 좀 별난 것이 하나 있었다.
유난히 호화스러워서 마치 바르바로이가 몰고 온 우리 파티 전용 수송선 같은 느낌이 드는 함선 하나.
그곳의 문이 열리고 무언가 밖으로 나왔다.
곧 해골로 이루어진 드래곤이 솟아났다.
알 것 같군.
이런 시대라도 샤크마처럼 마법사는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하물며 연방은 내가 그러라고 사령술을 가르쳤다.
연방의 초기는 주로 사령술을 이용한 네크로맨서들의 국가였을 것이다.
거기에 보나마나 내 기준으로는 미래에서 그때 그 쌍둥이 고블린을 만날 때마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쳤겠지.
처음 혁명이 일어났던 그 요새. 이렇게 고블레타리아 연방이라는 스노우볼이 굴러갈 줄도 몰랐던 때에는 단지 최소한의 방위수단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굴러오니 게임으로도 현실로도 오랫동안 미궁을 겪은 나 역시 감개무량할 지경이다.
저 친구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리치겠군그래.
사령술사라면 더욱더 말이지.
날아드는 본 드래곤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차오를 때 드래곤의 머리에 타고 있던 고블린의 해골이 보인다.
용도 잡은 걸 보면 아주 고렙이겠는데.
1000은 가볍게 넘겠군.
고블린의 작은 해골, 하지만 내재된 마력만은 불타는 검은 태양처럼 보이는 리치가 드래곤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등에서 움찔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슬쩍 보니 꼬맹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언제 깨어난 거지, 요 녀석은?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니 저 드래곤과 그 주인의 힘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부디 명을…….]
[오랜만이라면서 바로 본론인가?]
[저는 과거에도 많이 뵈었으니까요. 제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이 한 몸 다할 때까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보고 있자니 그 조그맣던 고블린 자매가 어찌 이리되었나 싶군.
[언니냐? 동생이냐?]
[언니는 죽었습니다.]
[리치가 되진 않았나 보군.]
[후후후.]
또 뭔가 사연이 있나 보다. 그보다는 아직도 그로기 상태인 어둠의 괴물을 보았다.
[노심이 하나 남았는데 이걸 어떻게 쓸까 했더니 방법이 찾아왔군.]
플랜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기함급 전함이 나타난다면 거기다 처박고 내가 만든 야매 포탑보다 훨씬 강력하게 날려 완전히 끝장을 낼 생각도 했다.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는 편이 당연히 훨씬 낫다. 그 전함은 영영 못 쓰게 되어버리겠지만.
혹은 이렇게 강력한 사령술사가 찾아오길 바라는 것.
내가 해둔 일이 있으니 여기까지 지원 오는 함대에는 분명히 사령술사도 있으리라 여겼다.
강력하지 않아도 어둠의 전문가인 사령술사가 그 숫자가 많다면 그것대로 노심으로 뭔가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자가 찾아온 이상 맡기는 것이 스승의 도리지.
본 드래곤이 노심을 꿀떡 삼켰다.
[용의 숨결]이라.
언제나 마음이 뛰는 단어다.
[그런데 그 녀석이 그걸 쏜다고 버틸 수 있나?]
본 드래곤은 귀중하다.
드래곤을 잡는 난이도를 생각하면 다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수하.
[용왕의 아들내미입니다. 그 정도 능력은 되겠지요.]
걸작이군 그래.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지?
어차피 경험치는 기여도로 계산된다.
누가 봐도 첫 타도 내가 쳤고 막타도 내가 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이제 지쳤으니 지원군에게 마무리를 맡기자.
고블린 리치가 나온 호화로운 우주선이 다가왔다.
탑승하자 모두 무릎을 꿇고 이적을 찬미한다. 이것도 이제 슬슬 지겹네.
함선 내부에 꼬맹이를 턱하고 내려놓자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왔다.
「마법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르는 짓거리를 성공했는 데 무리가 올 만도 하지.」
‘처음 해보는 건 아닙니다.’
「그 회차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었겠군?」
‘[메인 던전]에서 [달의 군주]에게 써먹었죠,’
「그걸 잡으려면 그 정도 화력은 필요하겠군. 그래서 성공은 했나?」
‘걘 꽤 자주 잡았습니다. 문제는 더 작은 놈들이죠.’
「[달의 군주]를 직접 목도했다면 누가 그렇게 가볍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싶군.」
* * *
자연의 신은 생각했다.
정말로 미궁이 클리어될지도 모르겠다고.
신이 된 이후로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궁이 해방되면 미궁의 죄수들은 어찌 되는가?
잊고 있던 오랜 생각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신의 가슴에도 불을 지피는 유배자라니. 아 이 어찌 즐겁지 않으리.
랭커니 하이랭커니 하는 녀석들도 죄다 따분한 놈들뿐인데.
요즘 것들은 말이야. 쯧쯔.
도전자 시절을 생각하니 혼돈이 보고 싶어진다.
얼마 전에 화신의 모습으로나마 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