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50화
15층 - Lv. 3000 블루 드래곤 아르카
서기장은 나이 지긋한 고블린이었다.
본디 그린 스킨의 일부인 만큼 짙고 건강했을 녹색의 피부는 세월에 바라져 희끗하다.
하얀 눈썹과 수염도, 자글자글한 이마에 주름살도.
실제 이상으로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
고블라초프 서기장은 올해 쉰 넷이다.
의학이 충분히 발전한 지금도 일흔을 살면 뉴스에 나올 정도인 고블린으로서는 노인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이보다 강렬하다.
서기장이 다른 이들처럼 감격에 겨워 몸을 떨지 않은 것은 아니나 훨씬 의연했다.
"제 대에 당신께서 찾아오셔 얼마나 다행이라 여기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나?"
"그래야 제국을 뿌리 뽑을 수 있으니까요."
신도 유배자도 임하지 않았던 짧은 공백의 시간.
연방의 인민들에게는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이미 수백억 인민들을 책임져야하는 입장에서 전쟁의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을 보지만 또한 결코 양보할 생각은 없는 대치상황.
무수한 국지전이 있으나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방은 웅크리고 기다렸다.
노쇠한 제국의 숨통을 물어뜯을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수백억 인민들의 목숨을 도박판에 배팅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 말은 원래라면 내 생각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유배자는 분명 강하지만 한 줌이다.
전투 한번을 승리로 이끌 수는 있으나 전쟁 전체를 일구어 가는 것은 승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무수한 장병들과, 본국의 생산 인력들이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했다.
서기장 정도나 되는 지위의 인물 앞에서 젠 척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
서기장은 실망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전쟁은 이미 너무나도 거대해졌고, 전설 속의 대전사님이라 할지라도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지요."
나는 일단 그 냉정함에 놀랐고 동시에 반가웠다.
아니, 나만 보면 껌뻑 죽는 놈들이 너무 많아. 좀 그래.
연방 입장에서야 가장 중요하게 내세울 프로파간다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말이지.
결국 이 세계에 소속되지 않은 이로서의 죄책감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여신님께서 굽어보신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사기 진작만큼은 내가 어이없을 정도더군."
"그리고 실제로 저번 전투는 꽤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군의 사기라는 것은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린 스킨들은 본디 자신의 욕심을 위해 싸우는 것들이지 더 큰 대전략이나 대국적인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아니다.
단지 본성이 눈앞의 적을 용납할 수 없기에 유지되어 왔을 뿐이다.
하지만 긴 세월 간 그런 야성도 많이 희석되었다. 전쟁과 야성의 신에 대한 신앙이 흐려질수록 그것은 점점 가속되었다.
한때 동맹과 연방을 최초의 행성에서 몰아낸 제국이지만 지금은 이미 늙어 죽어가는 사자다.
11층에서 처음 보았던 물렁살 오크와 겁쟁이 오우거가 떠오른다.
지구에서 지역색이나 국가색이 갈수록 흐려졌던 것처럼 이 시대의 종족들도 종족색이 흐려지는 일을 겪는다.
라떼는 거리는 나이든 그린스킨들이 얼마나 많을까?
전투와 야성은 분명 그린스킨의 본능이지만 이제는 슬슬 아니게 되었을지도.
서기장이 한 말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제국의 군기는 대체로 그 꺼져가는 본성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존심을 자극하고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자는 식으로 말이죠."
그랬기에 13층에서의 전장은 제법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행성 요새까지 끌고 나와 전선에 구멍을 만들면서까지 다시 영향권에 넣고 싶은 행성.
"그럼 슬슬 제국의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단 뜻이겠군."
"그렇게 된다면 끝이겠지요. 제 아무리 오우거들이 머리를 굴린다 하더라도 굶주린 그린 스킨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서기장이 경멸하듯 내뱉는다. 거의 영혼에 새겨진 그린 스킨에 대한 혐오다.
뿌리부터가 그럴 수밖에 없다.
제 자신들도 피부가 녹색이라는 점을 애석하게 여길 정도니.
"당시 사령관들은 그걸 모르던데."
"이후에 이상함을 여겨 조사한 결과입니다. 기근이라더군요. 어찌나 잘 숨겨왔는지."
그럼 정말로 아주 중요한 전장이었다. 미궁은 나를 아주 중요한 곳으로만 이끌고 있다.
15층도 그렇겠지.
본래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면한 참이다.
"조만간 함대결전이 있겠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5층이 그 한 가운데다.
드래곤들조차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나서게 될 수밖에 없는 대회전.
"나도 거기 있게 되겠군."
"아직 한 계층 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보스 층이라면 틀림없습니다."
서기장은 끝까지 냉철했다. 한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라는 면에서 나조차도 저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8층의 그 대장 고블린을 다시 볼일 있다면 후손에 대한 칭찬을 해도 되겠군.
다만 마지막에 모든 이야기가 정리되고 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결국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신님 뭐 신성력으로 세뇌했습니까?’
「내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블린이라는 종족 자체가 본래 위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더 편히 여기는 종족인가 싶긴 해.」
세월이 씻어내지 못하는 종족색이란 것도 있는 법이다.
* * *
서기장은 계속해서 머물겠다고 했다. 국정은 괜찮냐니까 제비뽑기 끝에 자신이 직접 올 수 있었고 일종의 휴가니까 상관이 없단다.
평생에 한번 대전사를 볼까 말까하는 고블린의 수명으로는 이 은총을 양보할 수 없었으나 대업 역시 달린 문제기에 눈물을 머금은 희생자가 탄생했다고…….
그래서 꾸준히 늙은 고블린과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눠주면서도 나는 휴식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배의 무덤을 수색했다.
함대들 일부는 돌아갔지만 호위라는 명목으로 남은 병력들은 미지의 영역이었던 어둠의 정령계를 탐색하는데 일조했다.
곧 몇몇 마도공학자들도 파견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보며 감격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어서 난파한 고대의 함선들을 들쑤셨다.
마법적인 힘을 지닌 유물들 여럿이 발견되었다.
다만 그 힘이란 것은 좀 애매하게도 보일 수 있는 것들인데, 대부분 당장 효용성은 없었다.
이것들은 [키 아이템]으로서 왕국 이후에 효과를 발휘하게 되리라.
얌전히 막내의 배낭에 그것들을 쑤셔 박고 당장 쓸모 있는 물건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당장 쓸만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건 바람의 결정인가?"
"대전사님께 보여드려!"
실피드와 처음 계약할 때 썼던 그게 맞았다.
결정화된 원소.
실체화된 어둠의 정령왕의 육신 역시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둠의 파편은 엄청나게 많이 수확했지만 바람은 이런 우주에서 찾기 힘든 원소다.
공기가 없으니까.
"아주 대량이군.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그리고 대량의 바람결정과 함께 발견된 것도 있었다.
"이건 나이트 크로우의 문장인데."
확인 결과 아직도 존속중인 단체는 아니라고 한다.
뱀파이어 헌터들의 단체였던 만큼 초기의 연방과는 어느 정도 마찰을 빚었던 모양이다.
어느 가문의 배였던 모양인데…… 아펠타인?
이거 좀 낯익은데.
"과거, 최초의 행성에 있었던 인간 왕국의 왕가입니다."
이제는 유명무실한 과거의 흔적일 뿐이라고 한다.
좋아. 기억해두자.
인간 중에선 자연의 신도나 혼돈의 신도가 없다시피 했기에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후 대성녀 메이릴리스의 흔적 또한 발견되었다.
천수를 넘어 무지막지하게 장수하다가 떠난 모양인데 규율의 신이 아주 뽕을 뽑았단 사실은 알겠다.
교단의 함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3일은 이 넓은 지역을 모조리 털어버릴 정도로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 파티 전용 수송선이 중간에 합류한 덕에 마법사들의 마력은 넉넉하게 회복되었다.
그곳에 있는 마력이 흐르는 온천은 최초의 행성에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마력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만전의 상태가 되었고, 고블라초프 서기장 역시 내가 주문한 것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무렵 계단도 발견되었다.
"개 거지같은 곳에 있네."
어둠의 정령왕의 파편을 잘 수집해서 다행이지 원.
아무래도 육신 안쪽의 어딘가 였던 부위에 계단이 붙어 있다.
너무한 거 아니냐.
설마 정상적인 공략법은 그 괴물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거였나…….
그걸 정상이라고 부르는 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정상적인 것들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싶었다.
* * *
파티원들은 삼 일간 잘 먹고 잘 쉬어서 피부가 반질반질해졌다.
꼬맹이는 그 짧은 시간동안 아주 일취월장을 해서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대로면 확실히 시간의 신전을 통해 과거로 보내었을 때의 그 정도 퍼포먼스는 무리 없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나 다음으로 마법에 조예가 깊은 영감님에게 달라붙어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쫑알거리는데 그동안의 멍하고 조용하던 이미지가 순식간에 벗겨진다.
소녀가 가장 기뻐했다.
그리고 여신님이 화를 냈다.
「저거 봐라, 애가 저렇게 활발하고 얼마나 좋느냐. 진작에 좀 알아서 할 것이지.」
‘언질 한 번 안 주셨지 않습니까?’
「네놈이 해놓은 게 하도 많아서 이번에도 뭔가 생각이 있나 했지.」
너무 신뢰를 과도하게 받는 것 또한 문제다.
마법에 관해서는 아주 적극적이게 된 꼬맹이는 당연히 여유가 될 때마다 나에게도 찾아왔다.
그리고 세트 메뉴로 소녀도 꼬맹이의 손을 잡고 뛰어온다.
어째 둘 다 비비적거리는 빈도가 크게 늘었다.
"절 과부로 만들 생각은 아니죠?"
"절 다시 고아로 만들 생각은 아니시죠?"
아니 왜 이중주야 이제.
그래도 확실히 미래 꼬맹이에게서 보였던 앙큼함이 드러나고 있다.
자연의 신은 과감하게 나섰다.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마법만 잘 하면 다냐. 어서 가서 안아줘라.」
‘전 그냥 파티리더일 뿐인데…….’
「파티원의 정서적 안정 또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아니었나? 저 꼬마가 너를 완전히 가족으로 여기니 자네 또한 그리 해야하지 않겠나.」
문제는 소녀도 완전히 엄마라 부르면서 잘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녀에게는 주로 마법 외적인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 모양인데 가족이란 것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던 꼬맹이에게는 이런 가족놀이가 너무 즐거웠던 모양이다.
"할 수 없지."
대충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가족놀이다.
어디까지나 놀이.
* * *
계단을 넘어가자 예상했던 부유감이 고스란히 찾아왔다.
산소는 각자 확보했다.
두둥실 떠오르는 우주 공간에서 주변을 살펴보자 대량의 함대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궁이 양심은 있는지 전장의 한 가운데에 내던지진 않았다.
그런데…… 어찌 함대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연방과 동맹 함대 사이의 간격이 이상하게 넓다.
다행스럽게도 제국과 붙어먹은 것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