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51화
15층 - Lv. 3000 블루 드래곤 아르카(2)
우리 파티가 떨어진 위치가 연방 함대와 아주 가까웠다는 것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제 마음대로인 것 같아도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니는 미궁의 난이도 틀을 생각할 때, 그만큼 큰 고난이 기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미궁의 난이도가 지나치게 뜬금없이 튀지는 않는다는 신뢰도 준다.
나는 이미 이전 층에서 다음 층을 준비할 정보를 얻었으며, 그 정보를 통해 미리 NPC들에게 준비를 시킬 수 있는 권력도 있었다.
이렇게 했다고 갑자기 난이도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 외로 평온한 마무리가 될 수도 있다.
꼭 나쁜 일은 아닌 것이다.
동맹의 배신은 엄밀히 따지면 배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연방은 일방적으로 외교를 단절하고 성전에 나섰을 뿐이다.
사실 선빵을 친 것도 동맹이다.
어느 누구도 일시적으로 연합한다는 문서에 조인하지 않았다.
제국에 대한 적대감만큼은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미 제국과 전쟁을 시작한 이상 결코 돌이킬 수 없었기에 자연스레 형성된 연합전선이었다.
"아니, 그걸 왜 그렇게 처리해!"
"성전에 동맹 따위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자랑이다!"
그렇다. 서기장은 대신관 대리이기도 했다.
냉철한 국가 지도자기 이전에 광신도인 것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각 국가의 디테일은 당연히 알아서 할 것이라 여긴 내 실수일지도 모른다.
「실수는 아니지. 이 친구들이 너무 이상한 거니까.」
‘그리 말해주시니 고맙군요.’
자연의 신은 한껏 낄낄대며 그리 말했다.
"그래도 저쪽은 당신네 신도도 있잖아!"
「요정들도 피해자인 건 알지 않나?」
"함장은 살아 있습니까?"
「최초의 행성이 그때 곧바로 함락되었으니 무사히 생환했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동맹은 신의 영향력이 제국보다도 적은 국가다.
비교적 여러 신앙이 공존하고 있을뿐더러, 애초부터 손익을 따지는 성향이 강한 탓이다.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신앙에 그리 충실한 종족은 못 된다.
요정처럼 순수하지도, 난쟁이처럼 우직하지도, 그린스킨들처럼 아무 생각도 없지도 않으니까 말이지.
그런 와중 규율의 신이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금전의 힘이라는 모양이었다.
교단 자체가 지배적인 거대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면 어쩔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거대한 기업체가 마침내 손해가 막심한 전쟁에 콧김을 뿜기 시작했다는 모양이다.
문제는 그게 전적으로 연방이 잘못한 점이란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다.
"한 전역을 담당하던 함대 빼돌려서 워프에 성공한 게 겨우 그거였다고?"
"대전사님을 위하여! 어둠의 정령왕과 맞서 싸울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연방의 함대는……!"
"알았으니까 진정해. 그러니까 내가 불러서 일개 함대를 갑자기 전선에서 빼돌렸고 그래서 동맹이 잔뜩 뿔이 났단 거구만."
"그 자본주의자 놈들이 이 신성한 의무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
"잠깐 입을 다물어 보도록."
총사령관은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을 하더니 그대로 합죽이가 되었다.
파이브 롤리팝은 과연 딱지치기로 얻은 계급이 아닌지 절제력이 충만한 모습이다.
생각을 해보자. 그렇다고 동맹이 적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뿐이지.
어차피 제국은 파괴 전차와도 같은 놈들이고 후환으로 남겨둘 이유가 없는 녀석들이다.
규율의 신이라면 알 수밖에 없다. 제국은 조져 놔야 한다.
아마 여러 국가로 쪼개지는 걸 원하지 않을까? 뭐 식민착취 같은 걸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알아서 할 일이고.
좋아, 그럼 나한테는 아무 문제 없군.
준비해 둔 퍼포먼스를 본다면 동맹이 뭐 다른 생각을 할 정신도 없을 것이다.
우리 파티가 쥔 주도권의 지분은 미궁이 깔아주는 판을 보면 대강 짐작이 된다. 그쪽에도 유배자가 없진 않지만 그리 유능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럼 그냥 저걸 다 작살만 내면 되는 거 아냐. 심플하군."
복잡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 * *
마법직은 언제나 그렇듯 지속력이 문제다.
지속적으로 마력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외부 마력을 자신의 것처럼 유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면 이론상 최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뭐 캐스팅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딜레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긴 하지만.
그리고 지속력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냐는 보통 미리 해둔 준비의 정도에 달려 있다.
괜히 여러 가지 매체에서 최종 보스로 배정되는 놈들이 마법사가 많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연방의 힘을 총동원하여 준비를 끝마친 상태다.
단지 마력을 짜내기 위해서만 건조된 기묘한 함선들이 나에게 주어졌다.
사실 저런 형태의 함선은 과거에도 본 적이 있고 대강의 설계 역시 알고 있다.
이 서버의 우주 시대는 유배자의 간섭이 지극히 적었기에 강력한 개인의 존재가 특히나 덜 부각된 편이었다.
그렇기에 강력한 개인을 위한 보조 설비가 발달하지 않은 편이었다.
내가 제시한 개념 자체가 상당히 새로운 무언가였다는 모양이다.
듣기로는 연방의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드래곤이 없다면 드래곤을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하고 감복했다나 뭐라나.
작은 우주정을 타고 이동하는 중 보이는 겉모습은 내게는 나름대로 눈에 익으나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아주 기괴했다.
함선 하나하나는 우주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추진력을 가진 마력로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장갑조차 없이 비대한 노심을 드러낸 모습은 기형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72개의 함선이 기하학적인 형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적벽의 연환계처럼 튼튼한 사슬로 이루어진 저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진이다.
그 형태는 8층에서 그렸던 정령왕의 계약진과도 유사하다. 기능이 흡사하기에 어쩔 수 없다.
저걸 사용하기 전에 점검을 해야 한다. 잘못된 곳이 있다면 내가 죽는다.
이 시대의 마도공학자들은 믿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자문했을 마법사들은 조금 의심스럽기에.
* * *
오우거 사령관들은 대체로 낙관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삼 개월 동안 그들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멍청한 장병들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위협하며 전선에 밀어 넣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타고난 본성은 본성인지라 그린스킨답지 않은 겁쟁이들도 전장을 겪으며 피의 맛을 좀 보자 잊었던 호전성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 무수한 백병전을 시도했으나 원래 함대 결전은 제국이 불리한 전투였다.
대부분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근거리 워프나 돌격을 시도한 다음 일어나는 충각 후 함내 백병전이었다.
연방과 동맹이 치를 떠는 전략이었으나 놀랍게도 유효했다.
어차피 제국의 함선이란 건 오우거 파일럿들만 멀쩡하다면 고철 덩어리로도 어떻게 찍어낼 수 있다.
고블린 기술자들이 마감만 적당히 하면 된다.
그런 함선은 속도만 빠르고 돌파력만 있으면 그만이기에.
충각 돌격을 하는 다수의 돌격함 뒤에 소수의 제대로 된 포함들은 그 뒤에 숨어 쏴대는 식으로 전쟁을 치러왔다.
그럼에도 전황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그 와중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제국의 병사들에게 닥쳐오기 시작한 식량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잠깐 기억에서 잊혔던 오크 황제가 용왕과 함께 등장했을 때는 눈물을 흘린 사령관도 있었다.
없던 충성심도 되살아날 지경이었다.
수도인 최초의 행성 함락 이후 실종되었던 황제였다.
그는 오우거들이 접선하려고 눈물겹게 노력했던 드래곤과 용인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전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충각 돌격하는 바보들 사이에 용기병들이 끼어들었다.
용인들의 와이번은 그들의 원류인 드래곤에 가장 가까운 순혈의 짐승들이었다.
지닌바 마법적 능력과 여러 가지 마법적 조치에 의해 우주를 비행하는 괴물들이다.
크고 아름다운 것만 좋아하는 제국이다.
거기에 부족하던 작고 잽싼 기동함대 역할을 와이번에 올라탄 용인들이 수행했다.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와이번을 타고 하늘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아는 일부 오우거들이 피가 끓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기동 행성요새나 다름없는 드래곤들.
그들을 앞세우기 시작하자 함대전의 양상은 정반대로 변했다.
함대결전을 원하는 것은 오히려 제국이 되었다.
그동안 끈질기게 잔존 함대를 추격하던 동맹과 연방의 연합군은 이제 드래곤을 피해 달아나게 되었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상황이었다.
잃은 성계 일부를 다시 수복하고 치고 나갈 길이 열렸다.
물론 연합군은 잘도 빠져나갔다.
하지만 한계가 오리라.
그 사실만을 기대하며 전선을 밀고 또 민 결과, 마침내 연합군도 남은 모든 함대를 끌어모아 회전에 응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전의 장소는 세 국가의 정중앙에 존재하고 있는 무인 성계.
다섯 개의 행성이 항성을 맴돌고 있으나 모두 기체 행성이기에 거주할 수 없어 개발되지 않은 무인 성계다.
동시에 더 물러섰다가는 제국 역시 한 번의 워프를 통해서 게릴라가 가능해지는 구역이다.
제국의 무자비한 약탈은 이런 시대에도 유명하다. 굶주린 그린스킨들이 저들의 영토를 유린하리라.
끝이다.
끊임없이 호전되어온 전황에 모두가 낙관적이다.
당대 용왕인 에이션트 블루드래곤이 기함과도 맞먹는 거대한 체구를 드러내며 날개를 펼친다.
그 장엄, 장대한 모습에 가슴이 벅차지 않은 그린스킨은 없다.
크고 아름다운 것. 드래곤은 그린스킨들이 좋아하는 파괴적인 힘 그 자체인 생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제국을 수호해 온 전설과도 같은 존재 그 자체다.
오우거들은 이 전장에서의 승리를, 그리고 주제 모르는 고블린들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에 대한 결말을 확신했다.
* * *
연방의 기술자들은 과연 뛰어났다. 난쟁이가 만들어도 이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완성도를 보아 과로사한 공돌이들이 좀 있지 않을까 의아하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내 의문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저게…… 용왕?"
"무엇이 의문이신지……?"
치를 떨던 고블린들이 의아함을 표했다.
아니, 하지만. 저거.
"기껏해야 3천 살 정도 먹은 녀석 아닌가? 용왕을 할 짬이던가 저게."
주변의 술렁이는 반응과 무관하게 나는 진심으로 당혹했다.
물론 드래곤은 나이에 관계 없이 무시무시한 생물이지만 내가 상정했던 것은 1000렙 정도는 더 높을 나이의 괴물이었다.
용왕이란 것은 그런 존재다.
저런 에이션트 드래곤의 격에 도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적당한 드래곤이 아니라.
"저게 용왕이면 다른 놈들은 더 어리단 거 아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만한 결론이 있었다.
그렇군……. 내가 때려잡았나!
자연의 신이 그 추측을 긍정한다.
「역사에 기록이 없는 것 보니 어디 으슥한 곳에서 일어난 일인 모양이군. 미래의 네놈이 뭔가 한 게 맞는 것 같다. 오만한 드래곤 특성상 선대 용왕이 어찌 되었는지 알리지도 않았겠지.」
이번 회차가 순항할 확률이 아주 높다는 증거니 기쁜 일이군.
어쨌든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단 지금 기준으로는 저 정도 나이의 드래곤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지만 말이지.
김이 좀 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72개의 마법진과도 같은 함선에 탑승한다.
정중앙의 내 자리는 거대한 마력로 따위가 달려 있지 않았다.
수백 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신선한 혈액.
엄청난 마력은 유통하면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할지 모르는 내가 연명하기 위한 준비다.
그야말로 피의 바다나 다름없는 광경 한가운데에 붉은 옥좌가 빛나고 있다.
저렇게 신경 써서 디자인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어이없어하며 피의 바다 위를 걸어 옥좌에 앉았다.
주변에 충만한 마력이 나와 이어짐이 느껴졌다.
그리고 옥좌가 핏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래서는 밖이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실피드를 불렀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무수한 성계 사이에 연결된 바람이라는 원소의 집합체가 우주에 들어찬 어둠을 밀어내고 출현한다.
그 모습은 실버 드래곤.
그 어떤 함선보다도 거대한 드래곤이 연방의 선두에 출현했다.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빨리 왕국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내 회차를 끝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