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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52화 (152/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52화

15층 - Lv. 3000 블루 드래곤 아르카(3)

드래곤은 오만하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당대 용왕 아르카는 자신의 강함이 용왕이라 불리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전함 따위의 고철 덩어리는 상관없다. 행성요새라 한들 쉬이 박살 내지 못할 뿐 끊임없이 치고 빠지며 싸우면 문제없다.

마도공학의 결정체라 한들 먼 옛날부터 강자로 군림하던 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쌓아온 세월이 다르단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시대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적이라면 조금 달라진다.

드래곤은 틀림없는 최강의 생명체지만, 최강과 무적은 다른 개념이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다대일이 된다면 언제 건 용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

그 옛날의 대성녀.

그 옛날의 인간의 용사.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게 분명한 가증스러운 아르카나라는 이름의 고블린 사령술사.

어찌 된 게 하나같이 어떤 유배자의 입김이 듬뿍 묻은 녀석들이다.

뱀파이어 클랜 하나를 내쫓은 것이 어찌 이렇게 굴러온단 말인가.

이전 용왕은 죽었다. 저 간악한 유배자의 손에.

저것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드래곤들의 반응은 분노나 복수심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드래곤들을 그 사실에 강렬한 수치심을 느꼈다.

분노 또한 느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이자 가장 오래된 생명체로서 어찌 태생은 한낱 인간에 불과한 것에게 이리도 겁을 먹는가.

당장은 나서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분노는 속에서 곪아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때 나타난 것이 제국의 황제였다.

드래곤들은 마침내 공포를 떨쳐낼 핑계를 찾았다. 합리적인 모범 답안 또한 찾아냈다.

"용왕이 죽었을 때보다 훨씬 과거의 시점이라고?"

전쟁의 신이 보증했다.

신이라 해도 결국은 오래 묵은 곰팡내 나는 유배자에 불과하지만 본디 유배자의 적은 유배자인 법이다.

그렇게 결코 전쟁의 신앙에 호의적이지 않던 용들과의 극적인 협상이 체결되었다.

전쟁의 신과 황제는 제국을 구하고 싶었고 드래곤은 자신들의 공포를 이 자리에서 제거해 두고 싶었다.

사실 확인은 드래곤의 강대한 마법을 쉬이 이루어졌다.

지금의 그 괴물은 멀리서 관측하는 것을 탐지하지도 못했으며 [예언]의 낌새를 느끼고 역탐지를 걸지도 못했다.

곁에 있는 인물들도 달랐다.

양손에 든 도끼로 무심하게 두개골의 두께를 측정하던 커다란 근육질의 인간도 없다.

용사와도 같은 마법의 갑옷을 두르고 빛나는 마검을 휘두르던 기사 또한 없다.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어떤 적 역시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약하다는 것은 진실인 듯했다.

곁에 있는 조그마한 인간 계집 역시 날개를 달고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드래곤이 나설 차례다!"

용들의 전당에서 그 모습을 본 황제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음에도 드래곤들은 그에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부끄럽고 추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이 우주 최강의 생물이었다.

전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석 달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드래곤은 여전히 최강의 생물이었다.

우주 함대를 상대로 마법 폭격을 가하며, 행성 요새를 상대로 [용의 숨결]을 내뿜으며, 드래곤들의 상처입은 자긍심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들은 오만함을 되찾았다.

저희들 스스로도 미심쩍어했던 승리가 눈앞에 온 듯했다.

남은 것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종족 전체의 트라우마를 심어준 유배자를 제거하고, 그리하여 파생될 또 다른 미래의 드래곤들이 행복할 수 있기를.

생존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용왕이 되었을 뿐인 아르카는 평생 해보지 않았던 기도마저 해보았다.

"비나이다. 부디 우리가 드래곤 슬레이어 슬레이어가 될 수 있기를……."

전쟁의 신이 아주 어처구니없어했다.

「왜 나한테 기도를 하는 거지?」

"신이란 게 그런 거 아니었나?"

「그렇기는 하다만.」

"그럼 내 소원도 좀 이루어 봐!"

전쟁의 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딴 것도 기도라고.

신이라는 것이 명확한 실체를 가진 채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신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아직도 인간 시절의, 미궁 바깥의 신앙을 기억하는 전쟁의 신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장난 같았다.

가끔은 서버의 패권을 노리는 자신마저도 그렇게 느껴지긴 한다.

신이란 게 괜히 죄수라고 하겠는가.

* * *

전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동맹은 노골적으로 방관하겠다는 스탠스를 취했다.

이곳에서 제국을 막아서기로 같이 결의했을 때만 해도 순순히 동의하는 듯했지만 막상 시작이 되려 하자 저런다.

연방이 그것을 명백한 이적 행위로 규정하고 성토하기에는 또 찔리는 구석이 참으로 많았다.

사실상 그들은 제대로 된 연합으로서 함께하였다기보다는 각자 같은 전선에서 제각각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뿐이다.

적의 적은 나의 아군.

꼭 거기서 끝날 정도의 관계였다.

연방의 지휘관들은 그 사실에 불편함을 표했지만 그렇다고 큰 낭패로 보지도 않았다.

성전은 기필코 승리할 것이며 위대한 대전사께서는 연방의 드래곤을 만들어내셨다.

물론 그것이 단지 실피드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오는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때때로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이미 몇 개의 행성 요새를 작살 내고, 워프로 도주하는 함대의 꽁무니를 쫓아와 수 없는 손실을 낸 존재다.

백병전의 트롤과 오우거가 그랬듯이, 함대전 드래곤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포스러운 상징으로서 존재한다.

그러한 공포의 대상이 우리에게도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전쟁이라는 환경하에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병사들의 사기가 다시 한번 극적으로 뛰어올랐다.

광신도 무엇도 아닌 본능적인 반응일 따름이다.

열광적인 태도로 진군하기 시작한 함대의 최후미에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며 사냥꾼이 미소 지었다.

"영화에선 많이 보던 거였는데. 삶이란……."

15층에서 파티원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유배자가 이런 대규모 전역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상전조차도 아니니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파티 리더도 본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낸다기보다는 이런 미래 스테이지에서조차 전략 병기로서 취급받는 정령왕의 계약자여서 나설 수 있을 뿐이다.

리더는 그 사실을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인식시켰다.

"어둠의 정령왕은 분명 이 전역에서조차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괴물이겠지만, 그래도 좀 커다란 일개 개인이란 말이지."

적은 나를 보고 나도 적을 본다.

일대일이다.

유배자로서 살아가며 가장 골치 아픈 때는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을 마주한 순간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눈먼 총알을 맞을지 모르는 전장의 한가운데가 더욱 곤란하다.

미궁은 결국 유배자가, 아니 꼭 유배자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이 승리하도록 유도한다.

승리할 수 있는 방안만은 존재한다.

하지만 막대한 개인들이 싸움을 벌이는 전장은 그렇게 은연중에 존재하는 미궁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미궁조차 내팽개친 변수의 덩어리.

유배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늘 그렇듯 변수니까.

"양 앞에는 장사가 없어. 드래곤들도 화력대비 기동성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니 활약할 수 있는 거지 정말로 정면으로만 맞섰다면 걸레가 되어 우주 쓰레기가 되었겠지."

소녀가 반박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지금 이 전장을 엎어버리려고 가는 것 아니에요?"

"이런 걸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희한하게 엮여들었으니 끼어드는 것이지 가장 사망률이 높은 건 원래 이런 전장이라고."

이게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이 되는 모습을 본 리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단과의 싸움은 가능하면 피할수록 좋다. 왕국에서는 더욱더 그게 심해질 테니까 조심하자는 거지. 지금 이건 엄청나게 이례적인 상황이라니까."

"길드 같은 게 있다면서요? 우리도 만드는 거 아닌가요?"

"소규모로만 운용할 거야. 대규모는 해봤는데 분명히 한계가 있더라고."

그런 말을 하며 리더는 작은 우주정을 타고 밖으로 나섰다.

소녀는 이제 꼬맹이와 꼬마 마법사와 함께 영감님께 마법 수업을 받고 있다.

정확히는 마법 그 자체라기보다는 리더가 말하고 간 유배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마력적 소양에 대한 가르침이다.

막내는 그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냥꾼 역시 마찬가지다.

몸에 지닌 다양한 총기를 만지작거린다.

이걸 우리 마을에 들고 갈 필요는 없겠지.

사냥꾼은 어찌 되었건 이렇게 후방에 앉아 구경이나 하는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제 끝났다.

여기서 죽는다면 다음은 없다.

그러니 안전하게.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을 성취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썩 괜찮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될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 가장으로서의 그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유배자니 뭐니 모두 지긋지긋해질 만큼의 세월이었음은 분명하다.

그 따뜻한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이제 곧.

* * *

서로의 유효 사거리 내에 들어오자마자 포격이 개시되었다.

제국의 작은 용기병들이 이미 한참 전부터 크게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해졌다.

마찬가지로 백병전을 시도하는 돌격함들 역시 전면뿐만 아니라 퍼져서 덮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드래곤 역시 하나가 아니다. 텅 빈 우주에서는 공간이동 계통의 마법을 사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단거리 워프보다 훨씬 효율 좋고 빠른 움직임으로 사방에 ‘숨결’을 흩뿌릴 것이다.

동맹이 이탈해버린 것은 고까운 일이지만 연방의 대전략은 변하지 않았다.

지극히 대전사에 의지하는 방식이지만 오히려 대전사가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막대한 마력을 바탕으로 현현한 바람의 정령왕은 오히려 정령계에서의 모습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모습이었다.

바람은커녕 공기 한 줌 없는 진공 상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용을 보며 용왕이 포효했다.

우주에 충분히 존재하는 어둠의 원소를 매질로 그 마력적 포효가 모두의 귀에 울려 퍼졌다.

[이 우주에서 바람의 정령 따위로 무엇을 하겠다고!]

반면 드래곤의 마력은 [드래곤 하트]에서 나온다.

이 유명한 천연의 마력로는 현재까지 그 어떤 마도공학도 흉내 내지 못한 말 같지도 않은 출력을 낸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제 근간의 원소조차 없는 이 우주에서 바람의 정령왕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바람의 원소란 결국 기체…….

용왕, 아르카는 그 순간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전투를 결의했음이 분명한 연방의 함대들은 전장을 고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유인하는 모습.

하나 동맹은 이미 제국에 자신들은 이 전투에 연방의 편을 들지 않겠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아주 멀리서 이쪽을 보고만 있다.

워프를 하기엔 지나치게 가까우며 추진하여 합류하기엔 지나치게 멀다.

정말로 방관자가 맞다.

함정이 될 만한 요소는 없었다.

애초에 그린 스킨은 함정을 알고 피해 가는 녀석들도 아니다.

드래곤 역시 그렇다.

다시 차오른 자긍심은 무슨 함정이건 기꺼이 돌파해주마 하는 정신적 고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왔다.

적의 주력이 기체 행성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해 그 뒤편에 숨었을 때는 오히려 중력의 영향권 덕에 워프가 느려질 테니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도주할 수 없다면 여기서 모두 섬멸한다.

그렇게 두들겨 박살 내고 다시 세상의 모습을 바로잡으리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든 위화감은 저 거대한 기체 행성 또한 바람의 원소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번뜩여서다.

아니, 알고 있다. 맞다.

하지만 정령왕으로 저걸 움직이는 게 가능…… 한가?

가능이야 한다 쳐도 어느 정도 규모로?

오랫동안 정령왕의 계약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서버의 드래곤은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거대한 행성의 형태가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더 나이 많은 드래곤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정령왕이라는 것은 그 원소의 주인이라는 것을.

일반적인 마법사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원소를 움직이는 원소의 화신이라는 것을.

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코스트가 필요한가?

정령왕이 잡아먹는 마력은 단지 현현하기 위한 코스트일 뿐.

그다음에 필요한 것은 단지 어디까지가 바람인가에 대한 인식뿐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바람의 원소에 대한 정의가 ‘모든 기체’로까지 확장된 시대.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현현한 실피드는 계약자의 의지에 호응해 있는 힘껏 제 팔을 휘둘렀다.

드래곤은 비로소 왜 정령왕이 시대에 관계없이 전략 병기라고 불리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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