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53화
15층 - Lv. 3000 블루 드래곤 아르카(4)
의외로 기체 행성, 거대 기체 행성이라 불리는 천체들의 전부가 기체인 것은 아니다.
천체라고 불릴 스케일의 물체면 그 막대한 질량에 의한 인력 덕에 중심부로 수축 및 압축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런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기체가 액체가 되거나 기체인지 액체인지 구분하기 힘든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더 깊이 들어간 내부를 따지자면 그것은 고체다.
그러니 땅의 정령왕이나 물의 정령왕이더라도 이런 매질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는 있었겠으나, 그 경우에는 영 즉각적이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가장 다루기 쉬운 행성 표면의 두터운 대기들은 어차피 모두 기체다.
실피드는 행성 표면의 모든 대기를 긁어모아 적군을 후려쳤다.
그 과정에서 일부 물질들은 거의 아광속에 도달하기도 했으며 격렬한 흐름에 상태변화를 일으켜 기체 이외의 것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람’이 아니게 되어 실피드의 통제력을 벗어난 물질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대기만으로도 연방의 사전 관측에 따르면 대략 2E+22kg, 읽는다면 200해 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질량이다.
그중 상당수가 실시간으로 실피드의 통제를 벗어났으나 위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릿수가 다른 질량이 움직이고 있다. 이 중 1%만이 남더라도 문자 그대로 행성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다.
마법이니 물리니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힘.
압도적인 질량.
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드래곤이건 함대건 따지기 이전 차원의 공격 앞에서 어린 용왕이 보인 반응은 여러 변화를 거쳤다.
처음에는 믿지 못해하는 것이 드러났으며 다음 순간에는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 이후로 정령왕의 계약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세계다.
시대가 흘러 인식이 변할수록 그에 맞춰 강해지는 정령의 힘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니 순순히 이런 함정에 걸려들지.
어린 용왕은 거의 패닉에 빠진 끝에 온 힘을 끌어모아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반복 시전되는 공간이동이 함선에 맞먹는 거체를 빠르게 이동시킨다.
하지만 그 뒤편으로 덮쳐오는 해일 앞에서는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현명한 판단이다.
제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저 모든 질량이 제국의 함대를 휩쓸어버릴 수는 없다.
그 전에 나를 어찌할 수 있다면 중력에 이상을 일으키며 닥쳐오는 저 막대한 질량에 제국의 함대가 휩쓸리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당연히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
지금 나는 모든 마력을 실피드에게만 퍼붓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력의 용량으로만 친다면 가장 클리어에 가까웠고 단순 수치로도 가장 고레벨이었던 직전 회차에 준하는 수준.
활용할 수 있는 마력이 엄청나게 많다면 마법사는 그야말로 신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주체인 내가 아직도 마투사인지라 사정거리는 짧다.
하지만 이처럼 마력이 철철 남아도는 상황이라면 그냥 무수한 투사체를 가까이서 생성하여 쏘아내면 된다.
실피드가 내 눈이요 마법의 매개가 되어주었다.
은빛의 용이 입을 벌리고 그 앞에 찬연한 마력이 피어나 화염의 구체가 되었다.
흑체복사에 의해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그 마법의 이름은 [헬 파이어].
마법사들이 저 밤하늘의 태양을 흉내 내기 위해 만들어내었으며 실제로는 그 온도마저도 초월해버린 불의 마법이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화염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화염은 그대로 탄의 막이 되어 벽처럼 용왕을 향해 발사되었다.
사정거리가 닿는다면 직접적으로 공간이동을 방해하며 시간을 끌 수 있겠지만 마투사라는 클래스의 한계다.
대신 탄막을 찍어내는 속도만큼은 그 어느 클래스보다도 빠르다.
미친 듯이 마력을 소모하며 미친 듯이 수많은 마법을 찍어냈다.
사정거리의 제약상, 탄체를 만들어 사출하는 형태의 마법들뿐이다.
분자 단위로 예리하게 결정화된 마력의 결정체를 발사하는 [레후딥의 수정창].
마력을 매개로 절대영도에 준하는 극저온의 구체를 형성하여 사출하는 [마이너스 K].
대미지가 있는 공격 마법만을 때려 넣는 것은 마법전에 있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디버프 없이 무슨 재미인가.
국지적으로 시간을 생명체를 느리게 만드는 마력장을 두른 구체라거나, 시간 자체가 느려지는 마력장이라거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검은 구멍이라거나.
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의 향연이 어두운 우주를 수놓았다.
탄막 슈팅 게임 나는 좋아해.
너는 어떠니?
* * *
모든 드래곤들이 용왕의 절규를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제압해야 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끔찍한 유배자다.
공포가 되살아날 틈조차도 없었다.
생명이 경각에 도달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에 무뎌지게 된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던 종족적 자부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마법에 능한 드래곤들은 제국군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현 상황을 파악했고, 용왕이 그러했듯 해결법 역시 깨달았다.
저 현상은 정령왕이 일으켰으며 정령왕은 계약자가 사라진다면 현현할 수 없다.
죽여야 한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건.
드래곤들이 재빠르게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모든 이동 수단을 동원하여 공간을 번뜩이며 모여들었다.
수십의 드래곤들이 저 멀리서 한 행성의 대기를 조작하고 있는 정령왕을 향해, 그 계약자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탄막의 구름과 마주해야 했다.
맞고 버티기엔 지난한 것들뿐이었다.
마력장벽으로 어떻게 뚫어내려고 하지만 마법을 구성한 술식이 아주 악질적이었다.
단순히 마력을 쏟아붓기만 한 장벽은 간단히 돌파되었다. 몇몇 드래곤들이 피격당하여 몸을 비틀며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한 장벽은 흡수하며 관통하는 킬러 코드가 마법마다 새겨져 있다.
드래곤들은 육탄으로 돌격하는 대신 그것을 하나하나 마법적으로 해체하여 무력화하며 돌격해야 했다.
성급하게 앞으로 공간이동을 구사하다가 [심연]으로 사라지는 드래곤도 몇몇 발생했다.
마력적 시야로는 온 세상이 다양한 마법으로 물들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온갖 색이 뒤섞인 그 시야에 비치는 탄막의 해일은 마치 닥쳐오는 황혼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어떻게든 돌파해야만 했다.
* * *
전쟁의 신은 그러면 그렇지 하며 혀를 찼다.
유배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그는 대충 이렇게 흘러갈 것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도마저 무너진 마당에 전쟁의 신이 제국군의 수뇌부에 영향을 미치긴 힘들었다.
오우거 사령관들은 분명 똑똑하지만 그 똑똑함이 자신들의 판단을 고집하게 만든다.
차라리 우매하던 시절이었다면 신이라는 이름값에 눌려 순순히 말을 들었겠거늘.
왕국에서 전쟁의 신도인 유배자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통과한 자가 적은 튜토리얼이다.
이 서버로 이어지는 신참을 손에 넣은 길드는 아주 적었으며 미래로 통하는 [키 아이템]을 손에 넣은 이들은 더더욱 적었다.
결국 왕국에서 이 미래에 침입할 수 있는 유배자는 거의 없다.
규율신의 신도 일부가 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쪽 역시 제국의 파멸을 바라는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교단의 내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시대에나 종교에 심취하는 자들은 있었으며 그런 이들 중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는 있기 마련이다.
오우거들은 대부분 전쟁의 신앙을 버렸고 오크들도 상당수가 이탈하였으나 트롤들은 조금 달랐다.
야성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우며, 신이 사실은 유배자였다는 사실에도 그게 뭐 어쨌냐며 낄낄대고 마는 바보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전투에 진심이며 전쟁과 야성에 충실한 녀석들.
전쟁의 신은 바로 그 점이 좋았기에 다른 모든 상위 종족 카드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트롤로 남았으며 트롤인 채 전쟁의 신좌에 앉았다.
그리고 교단에는 그의 마음에 충분히 드는 강력한 전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전쟁의 신앙을 아직 간직한 이들은 군문에서의 출세에 불이익을 받는다.
꼭대기를 장악하다시피 한 오우거들이 미개한 신앙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승승장구하며 진급할 만큼 똑똑한 트롤은 유난히 드물다.
장성급에 도달한 트롤은 많지 않으며 있다 한들 한직이다.
전쟁의 신도이며 트롤인 장성은 더욱 드물다.
그 모든 불이익을 이겨낸 트롤이 하나 있었다.
백병전 사령부의 사령관을 지내고 있는 대장 계급의 전쟁의 신도는 이 시대의 전쟁의 대전사였으며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육체를 지닌 트롤이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동시에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전쟁의 신에게 바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회차 최강의 트롤이 이 시대 최강의 트롤의 몸에 강림하였다.
* * *
아이러니하지만 이 시대의 황제는 비록 실권은 없을지언정 충분히 강인한 전사였다.
애초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로 추앙받는 알타이르 대제의 핏줄을 이은 만큼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국정과 멀어진 만큼 더 전사로서의 역량을 기르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 있었다.
과거처럼 무력이 중요한 시대였다면 충분히 [히어로 유닛]이다.
또한 과거와 다르게 황제는 정정당당한 정면 돌파만이 최선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제힘을 신뢰하는 것과 더 편한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황제는 오우거 사령관들과의 협상 결과 돌격선에 탑승하여 별동대를 이끌게 되었다.
이 별동대의 역할은 최후방을 습격하여 저 강력한 유배자의 동료들을 제거하는 역할이다.
인질로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거에도 이 우주에 출현한 적이 있는 인간 계집 하나와 뱀파이어 계집을 여기서 제거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역사를 바꾸는 일이 되리라.
수치?
그런 것은 이미 오우거들이 실권을 쥐게 된 이후 남아 있지 않았다.
황제는 단지 승리를 바랄 뿐이었다.
두 군대의 중앙에서 온갖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황제는 묵묵히 먼 후방까지 쉬지 않고 워프를 반복한 후 돌격했다.
과정은 부끄러울 수 있겠으나 결과만은 영광스러우리라.
덮쳐오는 물질의 해일을 뒤로한 채 무수한 돌격함들이 쏟아지는 포격을 뚫으며 전진했다.
* * *
드래곤들의 노력이 덧없게도 마침내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진 정령왕의 팔이 제국의 함대에 부딪혔다.
그 이전에 워프를 통해 탈출해보려고 했던 대부분의 거함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막대한 질량의 급격한 이동은 중력의 이상을 만들어내었고 지극히 민감한 함선의 워프는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와 있었던 행성요새는 비록 그 규모가 거대하기에 즉시 산산조각 나는 것만은 피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행성, 엄밀히 따지면 위성에 불과한 크기의 요새는 휩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드래곤과도 대적할 만하다고 평가되는 거대한 요새는 그 중심부에 있는 행성의 핵과도 같은 규모의 마력로를 가동하여 마력 방벽을 펼쳤다.
압도적인 물리력에 일부는 구역은 우주로 흩뿌려졌다.
방벽이 갈려 나간다.
기괴할 정도로 압도적인 굉음이 요새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잠깐이라면 버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대한 질량은 휘둘러지는 시간도 지극히 길었다.
마침내 행성요새들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공행성의 지각이 들고 일어난다.
껍질이 사라지자 그 속에 들어찬 기간시설들이 날아오른다.
수천 킬로미터 단위로 찢어져 펼쳐진 시설들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비명을 오래 지를 수 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행성의 대기를 이루고 있던 고온의 물질들이 그들을 지워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행성이 깎여나갔다.
핵의 역할을 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력로가 드러났다.
행성요새의 핵은 생애 최후의 마력을 토해내며 찢겨나갔다.
으스러지고 찢어지고 뭉개지며.
점점 작아진 제국의 요새들은 모두 우주의 먼지로 돌아간다.
온갖 물질이 미쳐 날뛰며 서로를 때려 부수고 갈아버리는 지옥 같은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마지막 순간 간신히 워프에 성공하여 살아나간 함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거함거포주의 우주에서 거함들과 행성 요새를 잃은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질의 가운데에서 무수한 그린스킨이 죽었다.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도 여력이 남은 기체들은 이제 방향을 틀었다.
전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드래곤들을 향해 다시 또 다른 파도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동맹군은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저곳으로 돌격하여 제국군의 잔당을 섬멸하고 전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몇몇 사령관들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본국에서 요구한 것도 딱 그 정도의 전과였다.
하지만 차마 저 우주적 재앙 속으로 돌격하자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지휘관은 없었다.
그들도 목숨은 하나다. 하급자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동맹은 결국 끝까지 방관자로 남기로 했다.
* * *
도전하는 유배자라면 결국 언젠가는 우주전을 겪게 된다.
비록 남의 육신이지만 잘 단련된 트롤의 육신은 만족스러웠다.
물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의 화신은 무기조차 내던졌다.
어차피 힘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 주먹이 더 낫다.
유배자로서 쌓아온 스킬들이 하나하나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위아래조차 없는 허공을 대지가 있다는 듯 천천히 걸으며 전쟁의 신은 지나가던 잔해 하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뭉치기 시작했다.
온 사방이 고속으로 움직이는 잔해투성이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깎여나가면 다시 새로운 것을 붙잡아 뭉친다.
우악스러운 악력으로 압축되는 강철과 암석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 결과 비정상적으로 밀도가 높은 구체가 하나 탄생했다.
압축열에 의하여 맹렬하게 달아올라 있지만 밀도 덕에 고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 그 유배자를 향해 날고 있는 드래곤들이 보였다.
우주전은 영 별로다.
우렁찬 함성을 내지를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주변을 휘도는 물질을 코로 흡입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빨려 들어간 기체들이 성대를 통해 다시 나온다.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전투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죽어라아아아아아!"
타오르는 화마같이 붉은 신성이 구체를 감싼다. 전쟁의 신은 온 힘을 다해 구체를 집어던졌다.
공간이 찌그러진다. 붉은 섬광이 우주를 가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