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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54화 (15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54화

15층 - Lv. 3211 전쟁의 화신(1)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붉은 신성의 파문을 감지하자 자연의 신은 재밌는 구경 잘하고 있다며 자연스레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잠깐 마법을 짜내는 것을 멈추고 여신님께 물었다.

‘와, 저거 뭡니까.’

「역시 내려온 모양이군. 뭐 이제 슬슬 제국이 어떻게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닐까?」

‘여신님께 원한이라도 있습니까?’

「끌끌끌, 원한은 네놈에게 있겠지.」

흠, 내가 한 것이라고 해봐야 제국 좀 망쳐놓은 것뿐인데.

그것도 500년이나 걸려서 간신히 한 것이니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이 서버만이 유일한 신앙의 텃밭인 것도 아닐 것인데 저렇게 신경 쓰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내가 신이었다면 이미 손절 쳤다.

진짜로 그냥 원한이 찐하게 맺혀 있거나 혹은 내가 모를 꿀단지가 어디 숨겨져 있을 수도.

후자는 쉽지 않다. 내가 모르는 것을 신이 알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전쟁의 신인 게이머 태그를 달고 있던 유배자일 경우의 수도 있지만 배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확률이 희박한 건 무시한다.

그럼 정말로 뭔가 사적인 감정이 개입한 환경이라는 뜻인데.

일단 여신님께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화신 한 번 더 할 수 있습니까? 저 심술궂은 훼방꾼을 어떻게 하긴 해야 할 텐데.’

「못할 것은 없지. 차라리 빨리 왕국으로 도망가 버려야 하는데.」

저쪽이 저렇게까지 해버린다면 출혈이 더 큰 것은 우리 쪽이다.

여신님은 비록 이 서버에서만큼은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으나 결국 일개 서버에 국한된 신앙일 뿐.

본디 제로였던 신앙인만큼 이제 와서 다른 서버에서 신앙이 싹트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서로 권능을 아끼지 않고 내지르는 상황을 유도하여 소모전을 걸어볼 생각인가 본데…….

신앙의 수급이 상대적으로 원활한 쪽이 결국 승리하는 싸움인 것은 맞지만 전쟁의 신 쪽에서도 대량으로 신앙을 소비한다.

이게 수지가 맞냐고 한다면 나는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그 점은 여신님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당장 집어던진 신성력의 덩어리가 유성이 되어 날아오는데 어쩔 수가 있나.

‘몸 상태부터 체크 좀 하죠.’

이전 같은 큰 거 한방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그건 상대 화신체의 상태를 보고 생각해야 하는데 어찌 되었건 내 몸에는 큰 무리다.

그리고 벼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마 제대로 된 대전사를 어디서 구해온 것이겠지.

스펙만 얼추 맞추고 잔기술로 싸워야 한다면 역시 불리하다.

전쟁의 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단단히 준비한 화신체가 기다리고 있겠지.

위험하다. 위험해.

「이미 왕국 이전 구간에서는 기록적인 레벨링이긴 하지만…… 화신의 그릇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 그래도 그 어둠의 정령왕 때려잡고 꽤 폭렙하지 않았느냐.」

‘지금 312긴 한데 잠깐만 있어 보시죠.’

육체 강화에 모조리 투자하는 수밖에 없다.

[피의 군주]는 강력한 유니크 스킬이지만 본체의 강화보다는 독립 행동하는 소환수와 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마법직 계통의 스킬이다.

생존력 자체야 뭐 [피의 샘] 등에도 보정이 들어가니 충분히 좋아지지만 그것이 육체 강도와 관련이 있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이번 회차에서 ‘나’라는 캐릭터의 육성 방향은 모자라는 신체 능력은 재생력과 경험으로 메꾸는 것이었다.

대신 다른 것을 전부 화력에 투자하여 미친 난이도를 균형을 맞추어 왔다.

규격 외의 간섭이 들어와 힘 대 힘으로 붙으라고 하면 곤란해질 수밖에.

「저 미친놈이랑 교섭이라도 해볼까?」

‘그러면 들어줍니까? 이미 죽자고 달려드는 수준인데.’

「전사로선 내가 선배인데 뭐 좀 있지 않을까?」

아 그거 알지. 유배자 전사들 사이에 은연중에 존재하는 그 체육계 동아리 같은 무언가.

전사란 게 원래 좀 그런 걸 좋아하는 놈들이 택하는 길이기도 해서.

상호존중이나 리스펙트가 가장 활발한 직업군이기도 하다.

‘안 먹힐 것 같으니 그만두죠. 화신을 하긴 하되 이번엔 주도권을 제게 주십쇼.’

「네가? 넌 마법사잖아.」

‘마법을 제일 잘할 뿐입니다.’

여신님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순순히 그렇게 했다.

* * *

전쟁의 신은 전사로서 혼돈의 여신을 존경했다.

그가 일개 유배자로서 아직 개척의 시기였던 왕국에 도달했을 때도 혼돈의 여신은 신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신은 잠깐이나마 그녀의 신도였다.

고참급 유배자가 모두 그렇듯 처음엔 전쟁의 신 또한 신앙을 그저 비즈니스 관계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어느 서버에서의 왕국 침공 당시였다.

왕국 방어를 위해 강림한 혼돈의 화신은…… 단숨에 아직 신이 아니던 트롤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당시 혼돈의 대전사는 마법사였으며 종족도 요정이었다.

순수하게 전사인 여신과는 답도 없는 상성이며 만족스러울 정도의 육체적 능력도 보유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혼돈의 신전에 성물로 모셔져 있던 창을 하나 꼬나들었다.

그리고 혼돈의 화신은 마법사의 육체로 침입자들을 갈아버렸다.

그 방어전에 참여했던 전쟁의 신은 그 모습에 전율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시체의 산 위에 앉아 있다. 아무렇게나 꽂아둔 창에 기댄 채, 무료하게 다음 적을 기다리고 있다.

저 육신이 그야말로 전사에 걸맞은 그린 스킨이었다면?

육체적으로 강대하기 그지없는 트롤이었다면?

선망과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다.

요정이고 마법사인 육체로도 저런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다면 신 본체는 어떻단 말인가?

그리고 여신의 종족이 악마임을 알자 그것은 또 다른 결심이 되었다.

질 수 없다는 호승심이기도 했으며 같은 곳에 도달하고 싶다는 소망이기도 했다.

트롤로서 악마에게 전사로서 뒤질 수 없다는 마음도 상당히 컸다.

그 날부터 전쟁의 신의 목표는 혼돈의 여신이 되었다.

기실 그 당시엔 미궁의 클리어라는 목표 의식조차 흐려진 후였다.

이제 가망이 없는 클리어 대신 새로운 목표는 그가 본 가장 위대한 전사인 혼돈의 여신에게 인정받는 것.

슬금슬금 찾아오고 있던 회의와 무기력이 모두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랬기에 전쟁의 신은 단순히 랭커로 만족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도전했고 수명이 다하기 전에 그가 엿보았던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시점에서 이미 그의 유배로서의 유통기한은 다한 후였다.

진정한 죽음을 다시 찾게 된 그가 온갖 차원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다른 랭커들은 모두 미쳤다고 했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열망 혹은 야망, 전사로서의 자부심과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 그 모든 것이 범벅이 되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추진력이 되었다.

고장 난 트롤이란 말이 랭커들 사이에서 별명이 되었을 무렵 마침내 위대한 전사가 되고 싶었던 트롤은 신좌에 도달했다.

트롤로서의 육체나이 예순, 슬슬 은퇴하거나 더 수명이 긴 종족으로 갈아타야할 나이였다.

전쟁의 신좌에 이미 앉아 있었던 바보는 쉽게 처리했다.

그것은 더 이상 전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늙어빠진 오크에 불과했다.

혼돈의 신좌를 찾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트롤인 그에게 전쟁의 신좌가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이제는 수명에서도 자유롭고 동등한 지위를 손에 넣었으니 언제 건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이 된 트롤은 쉬지 않고 여신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모든 도전을 기억하고 있다.

0승 796패.

그러나 저 숫자가 더욱 늘기 전에 여신은 사라졌다.

교단조차 스스로 해체하고 모든 간섭과 연락을 멈추고 칩거했다.

여신이 미쳤다는 소리가 도는 것도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혼돈의 여신은 오래 산 랭커들이나 신들만이 기억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혼돈은 나타나지 않았다.

만신전에도 제단이 아직 존재하는 것을 보며 소멸은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전쟁의 신은 일단 화가 잔뜩 났다.

갑자기 사라진 것부터 화가 난다.

다시 나타난 것도 화가 난다.

상대가 자신을 기억 못하는 것도 너무 화가 난다.

웬 놈팽이 같은 이상한 놈 하나가 달라붙어 있는 것도 화가 난다.

우리는 철의 대화를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나.

일단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할 위대한 전사가 어떤 뱀파이어 마투사와 쿵짝이 맞아서 저러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왜 여신의 대전사는 언제나 마법사인거지?

여신은 나와 합을 겨루어야 한다. 나와 싸워야 한다.

나만이 그녀의 라이벌이 될 수 있다.

처음에 그런 동경을 내게 줬다면 적어도 내가 한 번은 이길 때까지 기다려 줘야지!

실로 오랜만에 감정이 폭주했다.

신좌를 다 때려 부술 뻔도 했다.

물론 주먹만 아프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서 어쨌든 그가 도달한 결론은 꽤나 뒤틀린 것이었다.

오냐, 일단 새로 꾸린 교단을 다 때려 부숴야겠다.

내가 너를 정복하겠다!

그야말로 전쟁의 신답게!

그때부터는 신좌에 오른 트롤답게 교활하게 굴 수 있었다.

오우거 중장의 몸에 화신하여 혼돈의 화신을 불러내었을 때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화신체의 성능이 미묘하여 단방에 끝장이 났으나 실로 오랜만에 겨루는 합이 아닌가.

전사는 주먹으로 말하는 법이다.

지금부터도 그리할 것이다.

하는 김에 저 뱀파이어를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면 마법사 따위가 아닌 실로 전사다운 다른 대전사를 구할 수도 있지 않겠나.

전쟁의 신에게 어느 순간부터 제국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죽은 오우거 준장의 말이 옳다.

신이란, 유배자란 원래 제 욕망대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 * *

마인드맵을 열고, 필요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능력치를 투자하고.

다행스럽게도 마투사는 명목상이나마 힘과 지능 두 라인을 모두 타는 듀얼 클래스다.

엄청나게 마법사에 가깝긴 하지만 최소한 전사 쪽으로 더 투자할 루트 자체는 뚫려 있다는 말.

필요한 것은 죄다 신체 능력에 관련된 힘 쪽의 패시브다.

가능하면 창 마스터리도 노려보기 위해 피를 예쁘게 창 모양으로 다듬어 미궁에게 어필도 좀 하고.

하지만 여러 가지 확률 보정을 따지더라도 지금은 포인트가 많다.

이미 100레벨쯤 올라간 마당에 그냥 포인트 폭격만으로도 구색은 갖출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마스터리는 뜨지 않았으나 얼치기 마검사스러운 느낌은 낼 수 있었다.

창잽이니까 마창사인가? 아무튼.

여신님은 내게 임하셨고 동시에 우려했다.

「싱크로가 너무 낮군. 이래서 저놈이랑 챙챙챙이 되겠나?」

‘여신님이 보유한 스킬 체크하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그리고 어차피 승부는 마법으로 낼 겁니다. 몸뚱이가 마법이니 별수 있나요.’

「난 마법 쪽 스킬은 아예 제로인데.」

그건 스킬 구성만 봐도 알 것 같다. 마인드맵을 지능 쪽 트리 근처도 안 가고 힘 민첩에만 꼬라박았다.

굳이 따지자면 민첩 전사에 해당하는데 탱킹보다 극딜에 치중한 변태 같은 루트로 보인다.

이건 안 좋은 소식이다.

여신님도 소녀마냥 압도적인 물리 화력으로 딜찍누를 하는 계통이라는 소리니까.

지금 내 캐릭터와는 싱크로가 엄청나게 안 맞다.

동급의 화신 대결이라면 치명적인 디메리트다.

‘정면으로는 못 받아내겠군, 같은 소리를 제가 한두 번 합니까.’

「좋은 꼼수라도 있나 보군. 내 기대하도록 하지.」

사실 꼼수는 없는데.

기술이 있을 뿐이지.

그게 꼼수인가?

관점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긴 해.

신좌에 앉아 미궁의 클리어를 노려보았던 회차에서, 나와 싱크로가 안 맞는 대전사에게 화신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필요에 따라 급하게 대전사 돌려막기도 했었으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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