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57화
15층 - Lv. 1567 미래 황제(1)
첫 충돌의 시점에서 소녀는 X된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의 기량은 모르겠고 일단 무기에서 극단적인 차이가 났다.
소드 브레이커라는 형태의 무기는 알고 있다.
톱날처럼 삐죽삐죽하게 홈을 새겨서 상대의 무기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용도의 대거다.
물론 진짜로 부러뜨리는 건 정씨 가문 정도의 초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기톱이라면? 그것도 재질을 잘 모르겠지만 한눈에 봐도 일반적이지 않은 비범함을 풀풀 뿌리는 전기톱은?
몸을 뒤로 빼며 날을 살핀다.
10층의 어느 고대 요정의 히어로 유닛이 쓰던 쌍검은 한눈에도 손상이 있어 보였다.
본래라면 아직 내구가 많이 남았을 것인데 말 그대로 갈려 나간다는 느낌.
와, 이런 식으로 위기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황제가 피식 웃으며 두 개의 전기톱을 치켜든다.
그리고 아주 아무렇게나 돌격.
빈틈이 많아 보이긴 했다.
무기를 부딪치지 않고 단숨에 끝장을 낼 수 있을까?
중첩 [대시]에 [충격 강화]를 포함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을 찔러 넣는다.
어지간한 동체 시력으로는 희끗하게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질주한다.
함 내라는 장점을 살려 벽을 치고, 천장을 밟은 후 수직으로 내리꽂는 일격.
황제는 그것을 쉬이 받아냈다고는 못해도 반응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면 충분했다.
부딪히자마자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튄다.
소녀는 최대한의 힘으로 내리눌러 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의 피를 이은 황제는 민첩성은 몰라도 근력으로는 소녀에게 밀리지 않고 대등했다.
다른 쪽의 전기톱이 날아든다.
검 하나를 더 뽑아 오랜만에 쌍수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쪽도 내구도 문제가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에 지켜만 보고 있었다.
"흠, 기술이란 참 좋지 않은가. 더 먼 옛날이었다면 난 너 같은 전사를 상대로 이기기 힘들었겠지."
소녀는 입맛을 다셨다.
무기를 맞대는 것은 무조건 손해.
말 같지도 않은 조건이다.
* * *
사냥꾼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은 날벼락이었다.
소녀가 먼저 나선 것은 대인전에서는 지지 않으리라는 자신 덕분이었다.
리더의 부재중인 현재 서브 리더로서 사냥꾼 역시 그 판단을 긍정했다.
저 하이퍼 크랙은 언제나 별동대로서 운용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나머지 파티원들은 고블린들과 보조를 맞추어 대응했다.
막내는 이제 정말로 너덜너덜한 방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들었다.
사격이 쏟아진다.
그러나 견착하고 조준하는 인간의 사격은 아니었다.
돌격선에 탑승한 정예 오크병들은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다른 손으로 총격을 가하며 달려왔다.
좁은 함선의 복도에서는 충분히 유효한 전략이었다.
지금 고블린들에게는 중화기가 없다.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화망은 어떤 식으로건 돌파당하며, 백병전으로 이행한다.
꼬마 마법사의 전격이 일부 오크들을 극적으로 저지하는가 했다.
하지만 마법을 마구 연발할 정도로 숙련된 마법사는 못 된다.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막내가 아무 둔기를 집어 들고 달려드는 오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 사냥꾼은 잔뜩 인상을 써야 했다.
차라리 공간이 좀 더 넓어야 한다.
영감님은 애병 두 가지를 챙겨 들고 전투에 뛰어들려는 참이었다.
"영감님!"
"왜 그러나!"
"공간을 좀 넓힐 수 있겠습니까?"
마법전과 사격전은 어느 정도는 흡사한 면이 있다.
오크 주술사는 의도를 빠르게 눈치챘다.
주술은 오래 걸리지만 강하다.
막내가 맨 앞에서 버텨내고 복도 곳곳에서 고블린과 오크의 백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노련한 주술사는 주의 깊게 위력을 설계했다.
극히 절제된 충격이 함선 내부를 감싸고 약간의 흔들림 끝에 소규모의 개활지가 만들어졌다.
반대편의 고블린들은 당황했으나 곧 마법 지원이 시작되자 기뻐했다.
영감님은 묠니르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번개의 원소를 띄고 있는 무기는 이런 시대에도 백병전에서만큼은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했다.
영감님이 주술 전사로서 한쪽 측면을 어떻게든 막아서자 전황이 비교적 나아졌다.
사냥꾼도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적의 정예병들은 사격할 각도를 쉬이 주지 않는다. 그 움직임에 함 내 백병전의 경험이 엿보인다.
고블린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백병전을 훈련받으며, 체구에 콤플렉스를 가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수들보다는 차라리 사이사이 마법 지원을 넣어주는 꼬마 마법사와 꼬맹이가 더 도움이 될 정도다.
사냥꾼은 곧 소녀에게 생각이 미쳤다.
적들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저들의 수장은 더욱 강할 것이다.
사고가 냉정하게 가라앉는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가장에서 유배자로 사고 회로가 변한다.
이런 느낌은 잘 알고 있다.
가장 강한 전력이 보스전을 맞아 부재.
그 와중에 들어오는 불합리할 정도의 공격.
대체 뭔지도 잘 모르겠는 우주 시대의 어떤 전쟁이 아니다.
미궁이 유배자에게 내리는 시련이다.
그렇다면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일종의 직감으로서 사냥꾼은 불길함을 캐치했다.
그리고 막내에게 외쳤다.
"길을 뚫어봐! 그 아이가 어느 방향으로 갔지?"
막내는 성실하게 그 명령을 수행했다.
무기를 휘두르는 오크들을 방패째로 밀쳤다.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이 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다.
"좋아! 그대로 밀어!"
꼬맹이가 쪼르르 달려와 제 엄마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려주었다.
마력탐지가 퍼지며 정확한 위치가 특정된다.
"무언가랑 일 대 일로 대치 중인데 그쪽으로 다른 병력들도 몰려가고 있어요!"
초회차인 소녀는 아직 있는 그대로의 나이다.
중년이나 되어서 딸뻘의 여자아이에게만 모든 일을 맡겨둘 수는 없다.
꼬맹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엄마보다 나이 많아요."
사냥꾼은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니, 그건 좀 다른 거 같은데. 얘야."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제는 소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오지는 못했다.
최대한 무기를 맞대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교란했다.
[대시]의 변칙적인 움직임과 [강격]을 통한 자세 무너뜨리기.
보유한 스킬을 최대한 활용하여 몸을 비틀었다.
황제는 막아내기에 급급했으나 그 태도는 여유로웠다.
무기를 전혀 부딪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쪽이 더 리치가 짧은 무기이며 신장도 저쪽이 더 크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한 후에 소녀는 [궤적 재생]을 발동했다.
오른손의 검을 큰 동작으로 비틀어 찔러 넣으며 교차하는 쌍수 전기톱을 왼손만으로 흘려낸다.
물론 제대로 흘려지진 않았다.
마침내 왼쪽의 검이 박살 났다.
산산이 부서지는 파편이 크리티컬 판정을 만들어내며 황제를 주춤하게 했다.
아주 좋았다.
찌르기는 빗나갔으나, 다시 재생되는 두 번째 찌르기가 적중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핑하면서 반투명한 방어막이 나타났다.
재생된 검격은 가로막혔다.
황제의 입이 비웃음으로 벌어진다.
날카로운 이가 드러난다.
소녀는 아주 짧은 순간 당황했으며, 다음 순간 상대가 스킬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유연한 사고는 간신히 죽음을 막았다.
[대시]로 들어오는 황제의 공격을 받아내었으나 오른손의 검도 박살 났다.
이번에는 크리티컬 판정도 육중한 돌격을 밀어내지 못했다.
예비 무기는 가지고 다닌다.
한 호흡 만에 손에 든 것이 바뀌고 광선이 솟아올랐다.
난쟁이의 무기고에서 챙겨둔 광선단검.
그러나 빔 병기는 물리적 저지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내구도와 별개로 순식간에 전기톱의 날이 마법적 플라즈마의 집합체를 가르고 몸을 향해 다가온다.
그것을 피한 것은 상당히 아크로바틱한 동작이었으며 소녀로서도 다시 하라고 하면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허공을 가른 전기톱이 함선의 벽을 찢어놓는다.
저 톱의 재질이 무엇인진 몰라도 아직 기능 고장이나 날이 나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더러운 무기빨.
소녀는 이를 갈며 판단해야 했다.
전투 속행은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녀석을 상대하지?
복잡한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묠니르 드는 법 배우긴 했는데. 그걸 써야 하나?
영감님께 빌려와야 했다.
소녀는 우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반대편 복도에 다른 오크 돌격병들이 나타났다.
어느 국지전에서 고블린들이 패한 모양이다.
소녀는 입술을 핥았다.
딱히 건조하진 않았지만 그러고 싶었다.
* * *
한순간에 기체로 이루어진 행성 표면을 모두 잃는다면 그 행성은 어떻게 되는가?
원래라도 기체 행성의 내부는 생물에게는 지옥 같은 환경이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행성의 내부는 더욱 지옥 같은 환경이었다.
그리고 그 환경적인 대미지는 어느 정도 물리 마법 복합적인 무언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물리적 현상도 맞지만 원소가 관여하는 자연현상인 것 역시 사실이니까.
전쟁의 화신과 나는 들끓는 기체 행성의 핵 속으로 이동했다.
중력으로 인한 공간이동의 어려움 정도는 스탯과 경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
빈 공간은 미리 밀쳐내어 확보했다.
전쟁의 신은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아주 짧은 순간 당황했으며 곧이어 해머를 휘두름으로써 응답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멀어졌다.
응 안 싸워. 넌 이걸 신성력과 몸으로 때우겠지만 난 마법으로 때울 수 있거든.
이동능력에서만큼은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크다.
전쟁의 화신은 사태를 파악하고 신성을 아낌없이 퍼부어 권능을 발동했다.
온갖 전투력 보정이 퍼부어지고, 화신의 존재감이 잔뜩 부풀어 오른다.
불타는 신성이 붕괴하고 있는 행성의 내부, 아직 액체인 것들을 밀어낸다.
나는 마력의 보호막에 휩싸인 채, 행성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전쟁의 화신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화신은 다시 한번 공간을 울리는 공격을 사용했다.
이미 안 다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창격으로 받아치며 버티거나 공간이동으로 피한다.
결코 어느 정도 이상으로 멀어지지는 않았다.
서로를 감지하기도 힘든 환경이지만 신성의 압도적인 존재감 덕에 서로의 위치를 놓치는 일은 없었다.
마침내 참을성이 다한 전쟁의 화신이 있는 힘을 다해 망치를 내리쳤다.
공간과 행성이 함께 쪼개졌다.
비슷한 수단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한 타격이나 다름없는 비겁한 속성의 공격이다.
지근거리에 있던 행성의 핵이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단말마를 내지른다.
나는 웃었다.
잽싸게 심연으로 스스로를 추방한 후, 아주 멀리 이동할 수 있도록 공간이동 마법을 미리 짜 올렸다.
여신님께서 혀를 내두른다.
「나보다 저놈이 할 짓을 더 잘 아는 것 같군그래.」
‘사실 전쟁과 야성의 신이란 놈들은 어딜 가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마법 한 줌 쓸 줄 모르는 저놈이 붕괴하는 행성의 핵에서 탈출하고도 얼마나 여력이 남을지 보자고.」
‘밖에서 못 나오게 계속 괴롭힐 겁니다. 아직 실피드를 부를 수는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