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58화
15층 - Lv. 1567 미래 황제(2)
미궁에는 온갖 종류의 상성 관계가 존재한다.
클래스부터 해서 특정 스킬, 특정 장비, 특정 종족, 때로는 그저 태생이 카운터 등등 온갖 치명적인 상성 관계가 도처에 깔려있다.
개중에서도 품질이 앞서는 체인쏘는 비슷한 체격끼리의 근접전에서 압도적인 힘을 낸다.
유배자에게 무기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단지 맨손 이상의 문제를 야기한다.
단검 마스터리를 가진 이상 단검을 들지 않는다면 꿀처럼 달콤한 온갖 보정을 누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비 무기를 한 번에 많이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빔 대거가 소모되면 이제 없다.
투척용 단검도 슬슬 그것이 의미 없는 적이 늘어나며 챙기지 않게 되었다.
곤란하다.
우선은 후퇴.
다수의 오크 병력과 황제. 둘 중 어느 방향으로 도망쳐야 할지는 분명했다.
황제는 혼자고 소녀보다 느리다.
이 좁은 공간에서 다수를 향해 달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소녀가 아무리 완력적으로 강하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오크가 붙잡고 내리누른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고블린들 함선의 통로는 떡대 좋은 오크 셋이 나란히 서기만 해도 빈틈이 사라진다.
그래서 소녀는 돌격을 감행했다.
물론 정직하게 돌격하지는 않았다. 아저씨에게 그런 바보짓은 배운 적 없다.
빛을 번쩍이는 열선의 단검을 흔들며 시선을 뺏고, 오크 병사들을 향해 돌격하는 척하다가 [대시]로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황제는 예상대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에 익숙한 남자였다.
소녀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크는 순간적으로 반전하는 소녀에게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러고도 이 좁은 통로에서 빠져나갈 틈은 위로 뛰어넘거나 좌우로 빠져나가거나, 단지 그렇게 세 방향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었다.
소녀가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며 칼침을 놓는다.
고간이 화끈해짐을 느끼며 황제는 분노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으나 분노가 그 고통을 넘어섰기에 쓰러지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거칠게 팩을 잡아 뜯는다.
그 속의 짝퉁 힐링 포션이 고간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상처 입은 수컷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분노를 연료 삼아 황제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합류하려던 오크 병력들은 당황하여 멈춰섰고 곧이어 뒤편에서 들이닥치는 다른 유배자 무리를 맞이해야 했다.
거대한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오는 돌격은 실로 그린스킨다웠으나 안타깝게도 그 주인은 인간이었다.
오크 몇몇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한다.
방패끼리의 격돌에서는 오크들이 크게 밀렸다.
넘어진 오크들의 머리를 방패 뒤에서 튀어나온 총구가 겨누었다.
빛이 번뜩인다.
두 전사가 그렇게 죽은 후에, 오크들은 방심하지 않게 되었다.
좁은 통로에서의 공방이 조금 더 길어졌다.
* * *
용왕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후 드래곤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고양되었던 기분은 나락으로 처박혔다.
모두 어린 드래곤들이었다.
더 나이 많은 드래곤은 연방의 전설적인 유배자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후다.
일부는 아직도 그들을 놓아주며 지껄인 사내의 말을 잊지 못했다.
"애기들 잡는 건 남획이라 좀 그렇지."
치욕적이다 못해 미쳐버릴 것 같은 그 발언.
하지만 더 큰 공포가 그들을 옭아맨다.
망연자실한 드래곤들은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 종족 역사에 다시는 없을 행위를 저질렀다.
항복이었다.
연방의 고블린 리치 또한 악명 높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리치가 부리는 본 드래곤이 악명 높다.
선대 용왕의 아들이자 조금 전에 유명을 달리한 당대 용왕의 오라버니였던 본 드래곤은 언데드가 되었음에도 무시무시한 위용을 유지하고 있었다.
드래곤들이 긴 세월 제국의 그늘에 움츠리고 있도록 한 공포의 근원이다.
아르카나는 완전히 의욕을 꺾인 드래곤들을 보며 웃었다.
수십이 하나를 보고 이렇게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지금 싸운다면 아르카나가 진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은 언제나 필요한 순간 나타났다.
그리고 모든 골칫거리를 제거해 주었다.
이번에도 당대 용왕을 파격적으로 찢어버렸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는 것보다 과거에서 온 스승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는지는 모른다.
이건 아주 먼 과거부터 조금씩 옭아매온 사슬이었다.
긴 세월 간 공포와 무기력을 학습한 드래곤들은 마침내 연방에 굴복했다.
용들이 가질 공포의 상징으로써 은연중에 장막을 드리우던 그녀의 역할도 이제 끝났다.
기나긴 역할극이었다.
이러니 어찌 스승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 등을 보고 따라만 가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
단지 그녀의 스승이어서만이 아니라 정말로 모든 인민이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영웅이다.
나아가 그 대전사를 간택하고 내려보내어 그들을 보살피는 여신님은 어떠한가.
역할을 마친 리치가 바치는 찬미에 여신님께서 응답하셨다.
「후방이 습격받았다. 전쟁의 화신이 문제가 아니다. 어서 빨리 돌아오도록 해라.」
표정 없는 해골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그 사실을 나타낼 근육이 없음에도 드래곤들은 마력의 요동으로 그 사실을 느꼈다.
본 드래곤만이 자리에 남은 채 리치가 사라졌다.
번뜩이는 어두운 공간의 균열이 리치가 급히 이동할 일이 생겼음을 알려주었다.
드래곤 몇몇은 눈치를 보았으나 거대한 본 드래곤이 으르렁대며 숨결을 머금자 곧 얌전해졌다.
그 신언은 또 다른 이에게도 전해졌다.
백병전에 대비하여 기함에 자리 잡고 있던 고블린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달려 자신의 개인 함선을 발진시켰다. 그 어떤 승무원도 없이 직접 운전할 정도로 서둘렀다.
연방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기술과 자원을 때려 박아 만든 소형 쾌속선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주인은 고블린으로서 유일하게 소드 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한 인민의 영웅이다.
* * *
그런 구원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소녀는 정신없이 달렸다.
황제를 끝장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그런 식의 동귀어진은 좋지 않다.
저쪽은 누가 보아도 힘 계열 전사이며 그렇다면 맷집만큼은 소녀보다 좋을 것이다.
제국 병사들이 애용하곤 하는 가짜 힐링 포션까지 생각하면 확률이 너무 낮은 도박이었다.
문제는 소녀가 향한 방향에서 발생했다.
도크였다.
복도는 좁으나 작은 우주정들을 싣고 있는 공간은 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곳은 막다른 곳이었다.
황제가 달려온다.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블린들의 함선 구조는 이제 참 익숙하지. 나 또한 황위를 물려받기 전에는 돌격함에 자주 올라타곤 했으니."
제국의 황위 계승은 어렵게 진행되지 않는다.
잔뜩 낳은 황자와 황녀들을 끊임없이 전쟁에 내보내고 살아남은 녀석이 선택될 뿐이다.
죽은 놈은 그것에 불과한 놈이기에.
소녀는 아예 우주정을 타고 탈출할 수 있을지를 잠깐 고민했다.
불가능했다. 조종법은 그렇다 치고 잠금장치를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황제는 사납게 웃으며 돌진해왔다.
그 속도가 순간 가속한다. [대시]? 아닌 것 같다. 더 빠르다.
하지만 같은 원리의 스킬임은 분명했다. 방향 전환은 어렵다.
몸을 숙이는 척하고 반대로 뛰어올라 황제를 넘어갔다.
순간적으로 아래를 잔뜩 경계한 황제는 멋쩍은 듯 뒤돌았다.
"이거 참, 평생 못 잊을 기억이라."
"냄새나는 입 닥쳐. 오크가 언제부터 입으로 싸웠지?"
"맹랑한 계집아이로군."
최대한 회피하려 하나 검을 전혀 맞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빔 대거는 아주 위태로운 수준의 저지력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방어가 불가능하니 전투도 지극히 불리하다.
소녀는 도박을 감행했다. 시간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전력으로 찌르고 죽인다. 병 속의 포션을 머금는다.
황제는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았고 마찬가지로 팩을 뜯어 입에 집어넣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질주했다.
충격파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황제는 소녀를 제대로 포착하기엔 느렸고, 충돌이라기보다는 서로 스쳐 지나가는 형태였다.
교차하며 지나간 공간에서 우주정들이 제각각의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소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워낙 빨랐기에 여기저기 부딪히며 구르고 구른 끝에야 멈춰섰다.
굴러온 바닥에 현대 예술마냥 피가 제멋대로 튀어 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짚이지 않았다.
소녀는 무참하게 뜯겨나간 후 다시 재생되는 오른팔과 왼쪽 손목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전기톱은 고통이라는 면에서도 효율적인 무기다.
생살이 잡아 찢기는 고통은 순간이나마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무기가 사라졌다. 단검 마스터리의 보정이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소녀의 신체 능력은 초인적이겠으나 이젠 조금 더 느리고 약할 것이다.
물론 무기도 없다.
뒤를 보자 황제는 멀쩡한 듯해서,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으나.
곧 오른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진다.
죽었나?
안타깝지만 아니었다.
피를 토하고 있지만 재생 중이다.
달려가서 마무리해야 하는데!
재생은 진짜 포션인 이쪽이 훨씬 빠르다.
부서진 우주정의 잔해는 쇳덩이다. 아주 날카롭게 조각나있다.
갓 재생된 팔로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집어 들고 던졌다.
조금 늦었다. 의식을 찾은 황제가 몸을 살짝 비틀며 그것을 받아내었다.
잠깐 멈췄던 전기톱이 다시 울기 시작한다.
쇳조각을 날리며 갈려 나간다.
쳇, 뭔가 무기로 쓸 만한 것은…… 없다.
이건 정말 아닌데.
무기 없는 체술은 오랜만이다. 가능할까?
완전히 회복한 황제가 고개를 든다. 오크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기품이 느껴지던 얼굴이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얼굴.
"전설 속의 천사만큼은 아니어도 정말 더럽게 강하군. 대체 뭘 먹으면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이냐?"
그 뒤론 말이 없었다.
저 입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도 여유를 잃었다.
소녀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 * *
사냥꾼이 막내와 꼬맹이를 데리고 들이닥쳤을 때, 도크는 피로 칠해져 있다는 말을 해도 될 지경의 상태였다.
소녀는 포션도 다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채로 구석에 몰려 있었다.
한눈에도 부상이 크다. 왜 진 거지?
무기가 없음을, 그리고 전기톱을 보고 깨달았다.
사냥꾼은 전기톱을 사용하는 적을 본 적은 없지만 내구도를 갈아버리는데 제격임만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귀가 착착 들어맞는다.
황제가 전기톱을 내리치려는 순간 총구가 빛을 뿜었다.
쿨다운이 돌아온 실드가 사격을 막아낸다.
황제는 급한 대로 소녀를 발로 차버리고 굴렀다.
엄폐할 잔해는 많았다.
막내가 달려들었다.
전기톱이 운다.
방패가 마침내 산산조각 났다.
"물러나!"
괴력이 있다 한들 맨손으로 상대할 녀석은 아니다.
사냥꾼은 침착하게 판단해야 했다.
저런 타입의 적이 있다.
근접전이 아주 불리하고, 유배자 본인보다는 그 장비를 노려 공격하는 적들.
이번 회차에선 심연이 아니고는 슬라임 계통을 만날 일은 없었지만 보통 슬라임들이 그런 식으로 전사를 괴롭힌다.
전사는 슬라임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건 사수와 마법사의 사냥감이다.
사냥꾼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흉악한 쌍수 전기톱의 오크 전사를 슬라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건 레벨 1000이 넘을 것 같은 괴물이 아니다.
슬라임이다. 그냥 오크 모양 슬라임. 내가 처리해야 하는 적.
나는 할 수 있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꼬맹이가 마법을 캐스팅했다.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 이 작은 흡혈귀는 놀라운 속도로 마법을 습득했다.
응용의 여지가 적은 대신 다루기 쉽고 직관적인 불 계통을 중점적으로 연마했다.
폭발을 일으키지는 않을 수준의 작은 불덩이들이 잔뜩 떠오른다.
기교는 대단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스펙이 좋으니 저급 마법을 수십 단위로 찍어낸다.
[파이어 볼트]들이 불티를 흩뿌리며 날았다.
사냥꾼은 플라즈마 라이플을 내던졌다.
보조 무기 메이스도 집어 던졌다. 이걸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그리고 병을 머금는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후."
리더가 알려준 미래 스테이지 전사들의 약점.
혹시 모를 자신이 없을 때 찾아올지 모르는 위기를 대비해 알려준 비방.
이 시대의 전사들은 예전처럼 마법 저항력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마법사가 너무 드물어진 시대다.
그리고 저 쌍수 전기톱 전사의 장비는 한눈에도 개박살이 나 있다. 소녀가 결코 그냥 져주지는 않았다.
난쟁이의 무기고에는 귀중한 무기가 많았다.
총기 그 자체에 마법이 깃들어있는 무기들.
그 총기들이 귀한 이유는 전사로서 뛰어난 적에게도 마법이 잘 먹히기 때문이다.
왼손의 냉기를 머금은 리볼버는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한 것.
오른손의 화염을 머금은 자동 권총은 불길과 고통으로 집중력을 흐리게 하며 딜을 누적하기 위한 것.
리더의 말에 따르면 왕국 이후의 총기 레인저들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수단이라고 한다.
전후열이 무의미해지는 적을 상대로는 원거리 클래스도 근접전을 피할 수 없기에.
즉, 사냥꾼이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팔자에도 없는 아킴보다.
엄폐한 동안 마법을 쳐내며 사태를 파악한 황제가 분노했다.
"내 병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막내가 잘 다져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