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60화
15층 - Lv. 3211 전쟁의 화신(4)
전쟁의 신은 자신이 아주 어이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전사의 가장 큰 단점은 기동력이다.
단순히 달려가 적의 머리를 깨부수는 그런 기동력이 아니라 먼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이동 수단의 이야기다.
붕괴한 행성의 핵은 머금고 있던 에너지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죽을 일이야 없겠다만 소모는 중대한 문제다.
트롤의 육신에 내린 신성이 끊임없이 깎여나가고 있다.
화신이라 하는 것도 결국 신좌가 제공하는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 와서 더 많은 신성을 불어넣는 일은 힘들다.
전쟁의 신답게 육체를 강화하고 죽음을 유예하는 여러 가지 권능을 내려 버티고는 있으나 여러모로 좋지 않다.
단지 달려 나가기만 하더라도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런데 혼돈의 화신은 바깥에서 다시 정령왕을 불러내 신나게 붕괴중이 행성을 휘저어대고 있다.
그게 또 절묘하다. 붕괴하고 있으니 그 흐름에 따르면 더 빠르게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리하였음에도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달려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령왕이 움직이는 바깥의 거대한 원소들이 일종의 진을 이루고 있는 듯 했다.
붕괴하는 행성의 물질을 매개체로 화신을 가둘만한 봉인을 그려내고 있다.
마력이라면 지금 이 속에 넘쳐나고 있으니 작동에 어려움은 없으리라.
겪어본 것 중에서도 최악으로 끔찍한 마법사다.
전쟁의 신은 하염없이 깎여나가는 신성의 보호막을 보며 그의 애병 [라그나로크]를 고쳐 쥐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갈 수 없다면.
완전히 으깨버리는 수밖에 없다.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행성이 닥쳐올 파괴를 예감한 것처럼 요동친다.
* * *
사냥꾼이 몸을 날린 순간, 소녀는 아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마스터리 보정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미궁의 보정에 익숙해졌는지를 깨달았다.
있을 때는 몰랐으나 전투 중에 자신이 이렇게 느렸던가 이렇게 약했던가 의문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길쭉한 잔해를 주워든 것이지만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부분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힘에 밀렸다.
움직이는 속도, 반응속도, 동체시력, 그리고 심지어는 체력까지.
모든 능력치에 영향이 왔다.
일종의 연쇄작용이었다.
방어가 정말로 불가능해지니 체력 소모도 커지고 그러다보니 회피도 힘들어진다.
이렇게까지 되자 의지할 것은 정말로 타고난 감각과 훈련으로 쌓아올린 기술과 요령들.
스펙에서 밀리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오히려 낯선 경우였다.
황제는 거칠고 우악스럽게 밀어붙였지만 그 안에는 나름대로의 무기술이 엿보인다.
가능한 효율적으로 직선적인 움직임과 그에 힘을 싣기 좋게 휘두른다.
발걸음도 그렇다. 이곳저곳 부서진 함선은 고레벨 전사의 발구름에 흔들리거나 기울었다.
그에 맞춰 능숙하게 중심을 잡는다.
호흡도 마찬가지다. 연료가 타며 발생하는 유독가스, 그리고 열기.
연료가 타는 것이기에 옮겨 붙으면 끌 방법도 없다.
점점 협소해지는 공간 속에서 절제된 최소한의 호흡만으로 힘을 유지한다.
맨손으로 힘겹게 피하고 밀치고 도망치는 와중 소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 했는가?
단지 우위에 있는 움직임의 속도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가.
낯선 무기에 당황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후 대응은 엉망이었다.
지금처럼 최대한 거리 유지를 하며 기회를 노리거나 아니면 도망친다.
도주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상대하지 말아야 했다.
거기서부터 이미 좀 방심이었다.
아저씨라면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후 마법사와 사수를 대동하고 찾아왔을 것이다.
이길 수 있겠지 하고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 아닐까?
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딱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괴감이 몰려온다.
어떻게 맨손이어서 보정이 빠져나간 이후에도 생존이라는 면에만 집중하자 버틸 수가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가문에서 배운 기술, 그리고 이후에 올라가는 스펙에 맞춰 아저씨가 미세조정해준 여러 테크닉.
불리한 상대로도 충분히 먹힐만한 능력을 연마해왔다.
내던진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구하러 온 동료들은 고스란히 위기에 처했다.
막내 아저씨가 너덜너덜한 꼴이 되어 엎어져있고, 최근 들어 푼수마냥 늘 싱글벙글하던 사냥꾼 아재는 죽기 직전의 순간에 꼬맹이의 재치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 꼬맹이는 지금 바로 뒤에서 어떻게든 불길을 빨아들여 [파이어 볼트]를 찍어내고 있다.
흐릿하고 흔들리는 것에 당황과 공포가 느껴진다.
소녀가 만든 참상이다.
그 침통함 속에서 회복된 몸으로 황제와 대치했다.
전기톱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나 남은 하나를 양손으로 쥐고 휘두름에 어색함은 없다.
황제는 백전노장이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처음에 했던 말.
무기빨이 아니라면 이길수 없었겠지 하고 하는 말.
그것조차 기만이 아니었을까?
그때 이미 생각을 유도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렵다.
다음 회차에서는 혼자일까? 또 이렇게 함께할 사람이 생길까?
NPC인 우리 꼬맹이는?
촤르륵 흘러가는 생각과 동시에 눈앞의 상황은 계속 달려 간다.
소녀의 손을 벗어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까지.
그렇게 사고 속에서 수없이 쪼개진 무수한 순간 중의 하나였다.
황제가 휘두른다.
결코 피할 수 없는 각도다.
생각하기 이전에 본능이 그 사실을 깨닫는다.
죽었다.
그리고 사냥꾼이 뛰어들었다.
한 인간의 육신은 제 아무리 뛰어난 재질의 전기톱이라하더라도 걸려든다면 저지력을 발휘한다.
피가 튀고 고기가 튀고 뼈가 튀었다.
틈이 생겼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달려들었다. 황제는 피로 칠해진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 날아온 것은 톱이 아니었다.
녹색의 커다란 주먹이, 거의 소녀의 머리통만한 크기의 거대한 주먹이 복부를 가격한다.
"이제 끝났군."
꼬맹이의 마법이 날아들지만 소용없다.
엎어진 소녀를 들고 방패처럼 세우자 마법이 자연히 옆으로 피해간다.
"후. 힘들군."
함성을 지르던 모습과는 상반되게, 그저 해야만 했던 일을 성취했다는 듯한 모습.
전투의 흥분조차 없다.
그 서늘하게 식은 눈빛은 일반적인 오크의 모습은 아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폐에 들어찬 공기가 없다.
성대를 울리지 못하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끄윽거리는 신음만 흐를 뿐.
황제는 전기톱을 꺼버렸다.
그리고 소녀를 들지 않은 팔로 주먹을 쥐고, 머리를 향해.
퍼석하고 으깨진다면 끝이다.
그 행동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커다란 충격이 함선을 뒤흔들었다.
고개를 돌린 황제의 눈에 꿰뚫린 도크의 문짝이 보였다.
도크에 처박은 것은 작은 우주정 수준의 물건이다. 하지만 눈에 익다. 저것은 한 개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절반 정도만 도크를 뚫고 들어온 함선의 앞부분에 날카롭고 예리한 소음이 울린다.
철판이 종잇장처럼 썰려나가고 찬연한 빛을 품은 검이 나타났다.
그리고 작은 고블린 하나도.
황제는 저게 누군지 안다.
빛살처럼 날아드는 고블린을 보며 전기톱을 다시 집어든다. 마무리할 수 없다. 그랬다간 죽는다.
번쩍이는 섬광과 빛이 몇 번 교차한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분명 강력하지만 고룡의 육신을 재질로 만들어진 톱은 버텨낸다.
도리어 상대의 오러를 어느 정도 깎아낸다.
이것마저 이겨내야 하나. 참으로 힘든 과업이로군. 전쟁의 신이여.
그쪽 전투는 잘 되어가는지 모르겠어.
고블린 소드 마스터는 철저하게 소녀와 꼬맹이를 보호하는 형태로 자리잡는다.
합을 겨루는 것도 지쳐가는 마당에 너무 강적이 등장했다.
황제는 이제 몸이 지쳐감을 느꼈다.
잔부상도 누적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도래했다.
검은 어둠이 휘감는다. 선내의 불길이 누군가 훅 불어버린 촛불처럼 꺼진다.
공간이 갈라지며 마찬가지로 고블린의 작달막한 체구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골.
"전설도 왕림했군. 좋아 항복."
황제는 껄껄대며 전기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 * *
사냥꾼은 눈을 떴다. 천장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 기대했던 것은 그 최초의 어둠.
다시 돌아가 시작할 때마다 보게 되는 완전한 암흑.
달갑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달가운 무언가.
그렇지만 익숙한 홀로그램 수치가 뜨지 않음을, 그리고 어둠이 아니라 밝은 빛의 가운데임을 곧이어 깨달았다.
여긴 그럼 어디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소녀가 보였다.
걱정스러운 막내의 얼굴과 반짝반짝하는 대머리도.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리자 이상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왜 살아있지?
그리고 제 손을 내려다본 순간 깨달았다.
해골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갈비뼈가 앙상한 안쪽에 살점이라고는 없다.
해골 고블린 하나가 다가온다.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연방의 전설적인 사령술사라고 했던가.
마력적인 울림이 들려온다.
[사망 후에 손상이 너무 심하여 스켈레톤으로 밖에 되살릴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 샤크마 이상으로 강력해 보이는 리치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사냥꾼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자 저절로 이가 딱딱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이래서 해골바가지들이 이를 딱딱거리면 웃는다고 인식하는 게군.
우습지만 썩 나쁘지는 않았다. 몸 상태는 괜찮아 보였으며 심지어 자잘한 관절의 아픔이나 근육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데드라.
사냥꾼의 유배자 평생에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 * *
"이런 젠장. 공간 부수기를 지나치게 잘하는거 아닙니까?"
「내 최대한 많이 살려보지. 모아둔 신앙이 다 털리겠군. 후.」
공간이 찢겨나갔다.
반복하여 여러 번을 거대한 힘에 두들겨 맞은 공간은 마침내 단말마를 토하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공간계 마법을 통해 잠시나마 열었다가 다시 닫는 그런 수준의 균열이 아니다.
한 전사의 힘이 오롯이 일구어낸 공허는 금방 아물지도 않을 것이다.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한 마법적 공간균열처럼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갈라진 공간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주변 우주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전쟁의 화신은 이미 사라졌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이런 재앙을 남기고 가버린 모양이다.
그의 대전사가 이 최후의 싸움에 만족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승자도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석 달은 이거였나?’
주변을 살펴본다.
연방의 함선들이 물러나려 하고 있지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저 속은 [심연]이다.
지금 전쟁의 신은 인위적인 서든데스를 만들어두고 가버렸다.
저렇게 강제로 열어젖혀진다면 심연의 아주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번에 가보았던 그런 귀여운 곳이 아니다.
혼돈의 신성조차 닿지 않는 완전한 심연의 신의 영역 속으로.
안타깝지만 이 거센 폭풍에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공간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붕괴하는 행성과 함대, 이미 죽어버린 잔해들.
나도 빨려들어갔다.
잠시 후에 로딩 화면과 메시지가 떠올랐다.
[TIP : 심연은 언뜻 보면 편안해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위급할 때는 탈출구로 사용할 수도 있을 정도지요.
물론, 어디까지나 저층이라면 그렇습니다.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어디까지 빨려 들어갈지 모르니까요.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심연의 신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