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61화
????층 - 심연(1)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로딩이 끝나고 부유하던 의식이 제자리를 찾는다.
땅에 발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암흑.
빛 한 점 없는 암흑.
인식에 의하여 빈 공간에 어둠의 원소가 들어찬 우주와는 또 다르다.
그저 암흑일 뿐이다.
심연의 깊은 곳은 마법사의 무덤이라 불린다.
이곳은 마나가 아주 희박하다.
다행스럽게도 떨어진 위치는 좋았다.
활동하는 몬스터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것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수습을 해야 한다.
가장 먼저 흩어진 고블린들과 파티원들을 찾으러 다녔다.
몸 상태가 좋다고는 못 하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
화신으로서 여신님의 주력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후유증이 남을 만한 사용도 최대한 배제했다.
그러기 위해 여신님께 제어를 넘기지 않았다.
사실상 능력치 도핑 외에는 활용한 것이 없을 정도다.
마법으로 불빛을 만들고 조금 돌아다닌 결과 생존자가 많다.
여신님은 정말로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모양이었다.
"혼돈 앞에 영광 있으라!"
곳곳에서 나를 발견하고 뻣뻣해지는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생명만을 구했지 함선들은 죄다 함선 모양 잔해로 변했다.
[추방] 등의 방법을 이용한 정식 루트가 아닌 인위적 서든데스라는 골 때리는 방법으로 심연에 떨어진 것이다.
이 정도의 생존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이 일으킨 일이니 기적이 맞긴 하려나.
고생하신 여신님이 신좌에 축 늘어져 있을 모습이 상상되지만 확인할 방도는 없다.
여긴 네 자릿수 층의 심연으로 추정되며, 그쯤 되면 완전한 심연의 신역이나 다름없기에.
대신격의 신역에서 유배자였던 일반 신격들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여신님도, 자연의 신도.
그 어떤 연결도 남아 있지 않다.
전파가 통하지 않는 권외 지역으로 들어온 셈이다.
대부분의 유배자는 그렇게 되면 큰 곤란에 빠진다. 성직자면 말할 것도 없고 신앙에 의지하는 바가 큰 세팅은 흔해빠졌다.
깊은 심연은 날로 먹기가 불가능한 온전한 실력의 땅이다.
하지만 당연히 우리 파티는 권능으로 꿀을 빨아본 적도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파티원들과의 재회는 어렵지 않았다.
여신님이 최대한 근처에 떨어지도록 노력했던 모양이다. 모두 근방에서 정신을 잃고 있거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심연의 신이 하위신의 월권으로 여기고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는 중 해골 사냥꾼이 보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언데드야?"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라 해도 파티원들의 안위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물론 티 내지는 않았다.
리더란 그런 존재다.
언제나 완벽해야 한다.
속으로는 섬뜩했을지라도, 당신이 이겨낼 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나는 무너질 수 없다.
* * *
서든데스에 휘말렸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많은 병력이 생존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카나 역시 근처 구역에서 헤매고 있기에 주워왔다.
그녀는 일단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은 응답할 수도 들을 수도, 하다못해 신앙을 수확할 수도 없겠지만 정말로 경건한 태도였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별사탕 3개를 달고 있는 대령 고블린 하나도 함께였다.
현재 발견된 생존자 중에 가장 계급이 높으며 제32 연방함대 참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덜덜 떠는 것은 물론이다.
그를 제외한 모든 면면이 전설 그 자체였으니.
일개 대령에게는 충분히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내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병력의 지휘 체계를 빠르게 재편했다.
그동안 아르카나는 본 드래곤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고 한다.
"같이 빨려 들어오지 않았을 리는 없고, 이 안에서 찾아봐야겠군. 시야에 들어온다면 다시 통제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예상외로 많이 남았다고 한들 병력의 규모는 300여 명 정도로 크지 않다. 부상자가 많으니 실제론 더 적다.
그 정도 인원이 신앙 아래 단결되어 있으니 모든 일의 처리 속도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다.
그 과정에서 연방의 생존자들은 전대미문의 재앙에 휩쓸렸음에도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제가 살아서 [심연]에 발을 들일 날이 오다니……!"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었습니다!"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블린들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진다.
곧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말한다.
"저 쟤들 무서워요."
"나도 무섭다."
진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혼돈의 신좌가 [심연]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심연에 떨어졌고, 단지 파티원만이 함께인 것이 아니다.
수족이 되어줄 병력들이 잔뜩 있다.
생존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인원이.
* * *
2일 차.
[심연]의 깊은 층은 어둡다.
당연하지만 빛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암시] 따위의 마법도 소용없다.
이곳의 어둠은 일반적인 어둠이 아닌 살아 있는 어둠이다.
내가 12층에서 샤크마에게 대항하여 만들어낸 그 어둠과 같은 것들.
고로 이 속에 푹 잠겨 있다면 죽는다.
정신적 질식이라 해도 좋다.
감각기의 자극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블린을 포함한 유사인종은 제아무리 다른 감각이 발달하더라도 시각만 한 것이 없다.
빛은 필수다.
마법사들이 고생해 주었다.
함선의 잔해를 뒤적여서 나온 부품들 또한 도움이 되었다.
마력로 자체는 모두 기능을 정지한 상태였으나 마력 배터리는 무사한 경우가 있다.
살아남은 조명기구에 연결하여 어둠을 물렸다.
첫날을 신앙만으로 이겨낸 고블린들은 희미한 불빛에도 기뻐했다.
마법사들의 조명은 드문드문하게만 빛을 발했다. 여기엔 마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회복도 되지 않는다.
체내의 마력과 배터리의 마력이 전부다.
빛은 극히 제한적으로 밝혀졌다.
300명의 병력 중 100명이 부상자였다.
그들 중 절반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나는 아주 바빴다. 약식의 장례도 대신관으로서 치러야 했으며 사소한 지휘도 해야 했다.
군인인 고블린들에게도 기본적인 서바이벌 지식은 있으나 이곳은 심연이다.
하나하나 내가 지시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와중에 정찰 또한 수행해야 했다.
뱀파이어의 박쥐도 이곳에서는 어느 정도 멀어지면 연결이 끊어진다.
직접 두 발로 뛰어야 한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소녀를 대동하고 움직였다.
심연은 생물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다.
그렇다고 무기물이 살기 좋은 곳이란 뜻도 아니다.
이곳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괴물.
이형의 존재이자 정체는커녕 기원조차 알 수 없는 괴이한 존재 그 자체다.
그나마 다행이란 점은 최소한의 행동 패턴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정도로 깊은 심연에는 서든 데스로 무너져 내리는 물건들도 썩 많이 도달하지 않는다.
더 가치 있는 물건들만이 이런 깊이까지 가라앉으며 괴물들은 그것을 먹어치우며 살아간다.
그러니 새로운 물질들이 쏟아져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은 아직 휴면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리라.
곧 아직 잠들어 있는 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녀는 일단 눈을 가리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재주 좋게도 소리 없이 구토했다.
나는 소리를 내어도 된다고 말했다.
소녀는 주저 없이 소리내기 시작했다.
"으. 정말 싫어요. 저런 건."
"기척이 없는 녀석들이라 눈을 가려주는 게 늦었네. 미안해."
"그래도 단둘이 이렇게 있는 건 좋아요."
소녀가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눈앞의 형체를 살폈다.
어보미네이션, 짧게는 혐오체라고 부르는 이것들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슬라임처럼 부정형이라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생겨 먹었다는 뜻이다.
지금 앞에 있는 것은 인간의 팔다리가 수십 개 달린 거대한 공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내장이 드러나 꿈틀거리고 있는.
"다행이다. 아주 깊이는 안 들어왔네."
"그거 세요?"
"레벨로 한 3000 정도 될걸? 드래곤이랑 비슷하지. 그래도 지능이 없고 마법도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하기는 훨씬 쉬워.
"……그 레벨이 안 깊은 거예요?"
"지금은 네 자릿수 층의 초입이야. 기껏해야 1000대 초반. 심연은 9999층까지 있거든."
"어……? 설마 나중에 우리도 거기까지……."
"가야지. 심연은 [메인 던전] 중 하나니까."
소녀가 창백해진다.
"여기 몬스터들은 다 저따위로 생겼고요?"
"음……."
게임 시절의 시스템으로 따지자면 소녀는 [심연]에 데려갈 수 없는 동료다.
하지만 현실에선 극복할 방법도 존재하는 법.
그리고 정 안된다면 소녀는 두고 가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설명하자 소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가, 갈 거예요. 아무튼 갈 거야."
"모든 시련을 꼭 이겨낼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하잖아요."
"내가?"
소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양팔로 제 허리를 짚었다.
그리고 묘하게 따지는 듯한 태도로 말한다.
"유배자들끼리는 그렇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안 하긴 했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요. 물어봐도 돼요?"
생각해 보면 이 아이는 참 말을 잘 듣는 편이다.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주는 소녀가 그렇게 따르니 다른 파티원들도 자연스레 시키는 대로 잘하는 느낌이고.
초회차이니 여러모로 의문스러울 만도 하지만 참아준 모양이다.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어보라고 했다. 기껏해야 이름이나 묻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금 다른 것이었다.
"왜 미궁을 클리어하려고 해요?"
"……음?"
"그렇잖아요. 듣자 하니 다른 유배자들은 아저씨만큼, 아니, 아저씨 반만큼도 능력이 없으면서 랭커니 하이랭커니 하면서 왕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데."
"그건 사실이지. 도전자가 되지 못하거나 결국 포기한 고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을 계급화하거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소녀가 선수를 쳤다.
"다른 도전자들도 알아요. 레벨업과 그로 인해 강해지는 자신, 큰 의미가 없는 죽음, 게임 같은 세상. 무뎌지기 딱 좋지요. 그래서 도전자로서 남을 수 있는 것이고."
성취라. 그렇지.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그렇다. 강해진다는 사실 자체를 목적으로 삼거나, 남들보다 앞서나간다는 명예를 위해 도전하는 자들.
그리고 클리어가 아니더라도 험난한 도전에 성공할 경우에 왕국에서 누릴 수 있을 부귀영화에 대한 생각도 존재하겠지.
저게 내가 하려던 대답이었다.
소녀는 한발 더 나아갔다.
"아저씨가 그런 걸 원하는 거 같지는 않아요. 정말로 클리어만을 노리죠. 다른 도전자들에게는 잿밥이 더 중요한데 말이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소녀가 물었다.
이번에는 약간 머뭇거리듯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이걸 왜 여기서 묻는가.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정말로 누구도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
원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두근두근 쫄깃쫄깃하며 관음하고 있을 자연의 신도 없다.
낄낄댈 여신님은 물론이고.
나는 대답을…….
과거에도 해본 적 있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게이머니까."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
내가 코 쑤시면서도 깨던 게임이 현실이 되더니 갑자기 손도 못될 정도로 어려워졌다.
나는 언제나 게임에 진심으로 살아왔다.
소녀는 순간 멍해지더니 얼굴을 구기면서 대답했다.
"진짜 미쳤나 봐. 진지해서 손해 봤어."
"난 항상 진지한데? 그리고 안 미치고는 미궁에서 못 살지."
"그럼 저도 미쳐야겠네요?"
글쎄, 그건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 말을 했더니 오랜만에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