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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63화 (163/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63화

????층 - 심연(3)

"지금 잘 실감이 안 나나 본데."

꼬마 마법사는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둠 속에서 빛이 좀 더 잘 드는 곳으로 이동한다.

작업 중이던 고블린들이 슬쩍 보더니 허리를 꺾으며 인사한다.

"실례합니다. 잠시만 빛을 좀 혼자 써도 될까요?"

고블린들은 그리 하였다. 작업이라고 해보아야 온갖 잔해들을 쌓아 올리는 일이다.

그것에 마법적 처리를 하는 것은 마법사들의 일이며, 꼬마 마법사는 대전사 파티의 일원이자 마법사로 존중받는 위치였다.

고블린들이 잠깐 비켜주자 얼마 안 되는 조명을 오롯이 둘이서 독점하게 되었다.

꼬마 마법사는 약간의 마력을 사용하여 거울 같은 것을 만들어내었다.

"거울을 보고 살지 못하니까 모르는 거 같은데. 그렇게 자신감이 없을 얼굴은 아닌데?"

꼬마 마법사가 빙긋 웃는다. 그리고는 소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했다.

거듭된 전투로 꾀죄죄하다는 문제점은 있으나 그럼에도 돋보이는 미모다.

그렇다. 소녀도 지금 깨달았다.

거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키가 좀 더 자란 것은 알고 있었다. 몸의 균형이 어긋나서 다시 맞추는 일을 했으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본 자신의 모습은 제법 낯설었다.

"이게…… 나?"

꼬마 마법사가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뒤통수를 퍽하고 쳤다.

"질풍노도의 꼬마들도 그런 말은 안 하겠다."

"히잉."

꼬마 마법사는 하나하나 짚었다.

어떤 점에서 예쁜지. 어떤 점이 매혹적인지.

듣는 소녀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처음엔 너무 어려 보였지만 이젠 나이보다 성숙해 보일지도?"

그렇게 마무리한 꼬마 마법사가 두 손으로 소녀의 양 뺨을 잡았다.

둘의 시선이 거의 비슷하다.

소녀는 그 사실도 처음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는 약간 올려다 봐야 했다.

"미궁에선 꾸밀 수가 없어서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사기야. 제대로 씻지도 못 하고, 화장도 못 하고, 옷도 변변찮고. 그러면 사람은 꼬질꼬질해져야 하는데."

수통에서 물을 조금 흘려 적신 다음,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손으로 슥슥 문질러 닦아준다.

"그냥 좀 닦기만 해도 빛이 나는걸?"

"그 그런가요?"

"할 수 있는 단장을 해볼까? 잠깐은 시간을 써도 될 거야."

이어진 화장술과 주의할 점에 대한 썰 풀이에 소녀는 마음속으로 굴복했다.

이분은 언니님이 맞으시다.

과연 현해탄 너머의 그 나라는 성진국이었다.

* * *

5일 차.

여전히 바쁜데 소녀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고블린들은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 중인데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혐오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전체적인 규모를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그럼 데려갈 필요가 있다.

전투를 벌일 생각은 아니고 기동력의 문제다.

마력이 회복되지 않으니 마법을 함부로 구사할 수 없다.

그럼 비상시에는 발이 빨라야 하는데 나를 들쳐 메고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소녀다.

그래서 찾으러 갔더니.

"음?"

딱 저렇게만 입에서 새어 나오고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녀가 쭈뼛거리며 나타났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거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파괴력이 있었다.

"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 그……. 그러니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나 의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나는 그거보단 얘가 이렇게 괜찮았나?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솔직히 그리 여자아이다운 행동거지를 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방글방글 웃으면서 초등학생 남자아이마냥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바보였지.

귀여운 바보라는 생각은 했지만 꾀죄죄한 몰골을 좀 씻겨두니 백조가 따로 없다.

"지금 봤죠? 헤벌레했죠? 그렇죠?"

이러니까 갑자기 현실로 되돌아오는군. 내 눈이 짜게 식자 소녀가 흠칫한다.

"이 이게 아닌데."

"흠, 유혹하는 거냐? 아직 십 년 이르다 애송이. 1,000회차는 더 겪고 오도록."

짜식이 말이야. 내 마지막 연애는 요정이었다.

그것도 꽃잎 요정.

어디서 얼굴로 사람을 후리려고 들어.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 있자 소녀가 계속 쭈뼛거린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다시 정찰하러 갈 준비나 하자. 이번엔 눈 가려줄게."

자체적으로 달려 나오는 태그를 무마하는 법은 게임 시절에도 존재했다.

현실이 되고 나서는 좀 더 다양해졌다. 극적인 상황에서 스스로 이겨내는 경우도 있고…… 정말로 다양한 일이 가능해졌다.

게임이 아닌 현실의 미궁에선 말이다.

소녀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입술을 꾹꾹 씹으며 말한다.

"좋아,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뭘?"

눈빛이 돌아왔다. 평소의 이 녀석이군. 백조긴 했지만 백조가 어울리는 애는 아니다.

아무리 봐도 그거보단 맹금류 아닐까?

그리고 맹금류는 병아리 같은 목소리로 사자후를 내질렀다.

"결투다!"

"뭐요?"

* * *

가까운 곳에 숨어 지켜보던 꼬마 마법사는 그만 얼굴을 감싸 안고 말았다.

저 저 저 저 바보 멍청이가!

꼬마 마법사로 말할 것 같으면 바깥에서는 중학생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괜찮은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적극성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 풋내 나는 연애였지만 바깥에서 제법 많이 했다.

그러던 것이 미궁에 와서는 좀 더 절실한 무언가가 되었다.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성별조차 무기가 될 수 있다.

어린 여자아이 상대로 쉬이 방심하는 저년차 유배자는 제법 흔했다.

어느 정도 마법사로서의 존재 가치가 확보되기 전에는 그렇게 버텼다.

지능 스탯이 어느 정도 찍히기 전까지는 냉정하기 힘들었기에 약한 척 연기할 필요 없었다.

여궁수의 파티는 그래서 좋았다. 처음부터 활용가치를 따져 데리고 다녀주었으니까.

고마운 사람이다.

그 덕에 이런 트럭 파티에 낄 수도 있었으니 정말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꼬마 마법사는 자연스레 미궁에서의 경험도 많아졌다.

어차피 예쁘장하게 생겼으면 벌레가 꼬인다. 꼬이기 전에 내가 선별해서 붙는 편이 좋다.

생존이란 건 그런 문제니까.

그러니 그걸 활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용모를 가꾸는 법도 터득했다.

마법사 원툴인 그녀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다.

어제부터 그 모든 노하우를 동원했다.

소재가 하도 좋다 보니 절로 흥이 나서 아까운 마력도 좀 써가며 단장했다.

보통은 좀 더 깨끗하기만 해도 난민 떼 사이에서는 돋보일 수 있다.

소녀는 더러워도 돋보일 만큼 훌륭한 용모로 자랐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별로 한 것은 없었다.

미백은 필요도 없었다. 그냥 둬도 하얘서.

심연에서도 구할 수 있는 대용 화장품은 있었으나 크게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활발한 느낌을 조금 살리는 정도로 살짝 먹인다. 화장은 어찌 이리 잘 받는지.

소녀가 항상 치기 어린 표정이어서 그렇지 의외로 정통파 여신계의 얼굴이다.

젖살이 있을 때는 어찌해도 장난꾸러기 같지만 쑥쑥 자란 지금은 입만 다물면 청초한 한 떨기 꽃.

물론 그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없을 테니 그걸 감안해서 분위기를 잡는다.

밝고 쾌활하고 통통 튀는 듯한 발랄함을 강조하는 가벼운 화장.

그리고 옷을 깨끗하게 세척.

옷이라고 해봐야 뱀파이어용으로 만들어진 연방 강하병의 백병전용이지만 꼬질꼬질함만은 없애보자.

전신을 보아도 완벽하기에 코디랄 것도 필요 없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옷걸이가 날개다.

평균 신장을 약간 밑돌던 시절의 짜리몽땅한 느낌은 장신으로 자란 지금에야 흔적도 없다.

머리카락도 조금 정돈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었다.

따로 관리는 하지 않으면서 불편하면 적당히 잘라버리니 거지꼴이다.

깔끔한 단발로 다듬기만 해도 좋다.

새하얀 목덜미가 살짝 보일 정도로만.

머리를 못 감아 기름지더라도 예쁘면 윤기로 보이는 법이다.

꼬마 마법사 본인이 이런 용모를 가졌으면 미궁 초기의 삶이 더 편해졌을까?

아닐 것 같다.

이 정도로 예쁘면 그건 오히려 독이다.

적당히 봐줄 만한 정도가 훨씬 낫다.

이 아이는 태생적인 강함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이 아이는 NPC일까?

너무 완벽해서 NPC일 것도 같지만 동시에 그러니까 주인공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질투 같은 건 일지 않았다.

미궁에서의 삶은 온전히 각자의 자신이 주인공인 법이니까.

사냥꾼과 막내에게 보여주었더니 오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영감님은 미심쩍게 고개를 기울이지만.

"이젠 불법 같진 않군요."

슬럼의 신부 같은 막내가 그렇게 단촐하게 평했다.

소녀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깐 고민을 해야 했다.

그래도 가능하면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비주얼은 대합격!"

소녀의 뺨이 발그레해진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 그런가아."

이제 중요한 것은 정신 개조.

겪지 않은 걸 주절주절 설명해 봐야 소용없으니 코딩을 한다.

몇 가지 상황에 따른 대처를 외우게 했다.

버그가 날까 봐 반복 연습도 좀 시켰다.

물론 주어진 일 사이사이에 슬쩍 만나서 했던 일이다.

완벽하다고는 못해도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그게 방금 박살 났다.

역시 버그는 반드시 일어나니까 버그다.

망가져버린 채, 결투를 외치며 전투로 돌입하는 소녀를 보며 꼬마 마법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신들이 있었다면 동조했으리라. 아니 그냥 꼬맹이를 옆에 세워놔도 아련한 눈빛이 되지 않았을까?

* * *

소녀는 일단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얼마나 강하냐와는 별개로 여기서만큼은 그녀가 유리하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부끄러움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정신이 심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제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소녀의 순정은 힘으로 쟁취하는 것.

그때 시도해 본 벽쿵이 떠오른다.

물어보았더니 남자가 하는 거란다.

하지만 이런 것도 좋지 않나?

"뭐, 뭐야 대체 잠깐만."

"항상 하던 거잖아요."

"그건 맞는데!"

피로 만들어진 검이 생겨난다. 대거라기보다는 그저 한손 검이다.

리치에서라도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녀는 자신의 유리함을 알았고 지금까지 배운 것을 유감없이 펼치기 시작했다.

엇박자로 파고드는 타이밍 재기, 의도적으로 빈틈의 위치를 조절하는 심리전, 그리고 필요한 순간에는 과감하게 상처를 감수하는 육탄 공세.

아저씨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쁘게 움직이며 받아낸다.

무기와 무기가 교차하고 불똥이 튀어 심연의 어둠을 잠깐이나마 밝힌다.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공방이 오간다.

대거로 정면 찌르기.

아저씨는 틀림없이 한 박자 늦었으나 그럼에도 검면을 가져다 댄다.

그 후에는 기묘한 인력이 힘의 방향을 왜곡한다.

소녀도 맞서서 마력을 운용하며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술적으로는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대로 검의 방향을 축 삼아 회전.

땅을 짚고 몸통을 노리는 발차기.

아저씨의 다른 손이 정확한 순서로 킥에 접촉한다.

손가락, 손바닥, 손목, 팔꿈치, 순차적인 힘의 분산에 어느샌가 실려 있던 힘이 모두 다른 곳으로 새어나간다.

원래 같으면 여기서 끝이다. 붙잡히고 마법의 접촉공격, 맨몸으로 그걸 버틸 수 있는 스킬셋이 아니기에.

하지만 역시 아저씨는 마법을 쓰지 않는다. 정확히는 쓰지 못한다.

그저 대련에 귀중한 마력을 낭비하는 건 참을 수 없을 테니까.

그 점이 유일한 승기였다.

제일 위협적인 대거의 날을 오히려 미끼로 쓴다.

그러며 다리 후리기, 피해내면 다시 올려 차기.

뒤돌려 차기.

붙잡아 메치기.

오랜만이었다.

마법으로 농락당하지 않고 몸으로만 싸우는 것.

그리고 마침내.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모조리 흘리고도 틈이 생겼다.

아저씨의 가슴팍과 복부가 열렸다.

하지만 소녀의 팔다리도 방향을 제어하기에는 다른 쪽으로 쳐내어졌다.

억지로 틀면 몸이 상한다.

그러니 그대로 어깨로 들이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잔해로 처박힌다.

심연은 의외로 깨끗한 곳이다. 대부분의 균들은 여기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니 부패도 없다.

잔해들은 오랜 세월에 풍화된 건물이나, 장비나, 때로는 함선들일 뿐이다.

낡아빠진 몇 개의 벽을 부수고 돌진하여 작은 방까지 도달했다.

아저씨는 벽에 몰렸고 꼼짝 못 하게 붙들렸다.

소녀는 왼손으로 힘차게 벽을 치며 선언했다.

"이겼다!"

아저씨가 황당하다 못해 황망하게 대답한다.

"어, 그래. 이겼네. 대체 무슨 일이야."

소녀는 전투와 승리로 달아오른 흐름에 냅다 탑승했다.

"아저씨가 고백하게 만들 거랬잖아요? 제가 졌어요."

"뭐?"

"키가 자라서 다행이야."

원래라면 버둥거리며 올라가야 했을 높이다. 지금은 까치발을 하면 닿는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처음이지만 딱히 색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어딘가 뭉클함이 차오른다.

그리고 눈물도.

"아니. 임마. 왜 울어. 어이가 없네. 당한 건 난데."

아저씨는 당황의 연속인지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그치만. 얼마 전부터는 계속 죽을락 말락만 하고. 나는 도움도 안 되고. 옆에 있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나도 죽을 뻔하고. 다음 회차에선 아는 사람도 없을 거고."

사소한 것부터 미묘한 것까지 조금씩 쌓여 있던 불안이 다 녹아내린다.

거기에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그게 승리인지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온통 뒤섞여 비가 되어 내렸다.

난처한 듯 바라보던 아저씨는 흐어엉으로 시작해 대성통곡으로 발전하려는 소녀의 모습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야. 방금 그건 카운트에 안 들어가. 입술 박치기는 뽀뽀지 키스가 아니란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더 발전하지 못했던 소녀의 지식은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소녀는 그대로 입이 막혔다. 울음을 뚝 그치고 눈만 동그랗게 뜬다.

* * *

마법까지 동원해 관찰하고 있던 꼬마 마법사는 좋은 결과로 끝나자 안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타올랐다.

"하아, 커플들 다 폭발했으면……."

사랑은 미궁에선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다.

이 파티는 아주 사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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