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64화
????층 - 심연(4)
눈물 닦아주고 코 풀게 해주고 얼씨구 화장도 했네.
심지어 제법 노련하다. 재료는 현지조달.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어쨌든 이리저리 정리해 주고 나니까 그제야 소녀는 지금 상황이 실감 나는 모양이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 정말로?"
이거 또 참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다. 그럴 나이긴 하다.
"그래. 뭐 가족놀이였으니 이 정도야."
"놀이요!?"
빼액 소리를 지르는 입을 다시 막는다.
소녀는 버둥거리다가 조용해졌다.
떼놓자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 보인다. 모처럼 소재는 좋은데 내용물이 참 어리다. 그래도 활기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파닥거리는 모습도 귀엽다.
"연애는 오랜만이네. 몇십 년 만인지."
마지막 연애가 언제던가.
어차피 오래 함께할 생각이며 이 아이와 딸내미가 되어버린 꼬맹이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해볼 만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렇게 예쁜 아이가 자기 좋다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소녀는 실실 웃으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학교에서 친구들 연애 이야기 들으면 좀 딴 세상 이야기 같았는데. 진짜로 딴 세상에 와서 해보네요."
"실감이 안 나? 미궁은 실감이 나고?"
"다 꿈이면 어쩌죠?"
유배자가 될 바에야 그것도 좀 좋은 일인 것 같긴 한데…….
워낙 엉엉 울려고 하던 중이라 콧물이 또 주륵 나온다.
"자 자, 코 풀어 코."
"흐으응!"
그리고 소녀는 또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로 고양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들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때까지.
최근에는 특별히 상담이라 할 만한 것도 못했다.
중요 파티원의 생각이 어떤지, 감정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음은 또 다르다.
닳고 닳았건, 지쳐 있건, 세상이 허무하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그래. 여신님의 말이 맞다.
지금까지와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관계의 이름이 약간 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온기는 만약 사라진다면 그 무엇보다 더 차가운 상처로 남아 유배자를 괴롭히게 된다.
받아들인 이상, 나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녀는 자신이 너무 떠들어만 대지 않았나 깨닫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소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런데 이제 그거 알려주면 안 될까요?"
"뭐?"
살짝 수줍게 시선을 피하며.
"이름."
이름.
그렇지. 내 이름.
뭐였더라.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참 유배자일수록 이름을 쓸 일은 줄어든다.
서로 이름을 모르는 채로 지낸다면 다른 회차로 갈라지게 되었을 때, 더 쉽게 잊을 수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서로가 그러한 아픔을 겪다 보면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게 된다.
저년차들은 그저 고참들이 하니까 따라 하다가도 어느 순간 왜 그러는지를 마음 깊이 이해하게 된다.
영원히 볼 수 없으나 다른 곳에서 확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사별보다 아픈 것일지도 모르니까.
기억의 무덤 속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던 내 이름을 다시 발굴해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나를 호칭하던 수많은 이름들은 대부분 직위였다.
마법사님, 하이랭커님, 신이시여, 리더, 마스터…….
수천수만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없다.
그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요정왕으로서 꽃잎 요정을 부인을 맞아들였을 때도 나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 누구에게도 이름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왜일까. 이번을 반드시 마지막 회차로 만들 것이라 여겨서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 아이가 좋아서일까.
지금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아주 어색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비교적 안정되어 살 만한 왕국에서는 곧잘 결혼식에서 그런 일을 하곤 한다.
서로의 이름을 말하는 것.
물론 하객들은 듣지 못하게 단둘이서만.
그리고 그 이름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둘만이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다.
기억의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낯선 울림이 내 입 밖으로 빠져나간다.
"시우, 유시우."
소녀는 그 이름을 몇 번인가 입안에서 굴렸다.
맛있는 사탕을 입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설레고도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나는 가만히 어쩐지 눈을 돌리고 싶은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부시게 웃으며 대답한다.
"저는 희우, 정희우예요!"
그 웃음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 * *
7일 차.
5~6일 차 동안은 먼저 깨어날 것이 분명한 혐오체들의 지도를 그렸다.
고블린들을 포함하여 전 인원이 그 사실을 숙지했다.
형태를 보면 움직임과 행동 방식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녀석들이다. 단지 막대한 체력과 힘을 동원하여 상대를 짓누르고 으깨어 잡아먹을 뿐이다.
그리고 공통된 특징으로 아주 느릿하다. 사실 신체구조부터가 재빠를 수는 없는 녀석들이다.
흔히 레벨 값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몬스터들 중 하나다.
물론 그것은 조건을 맞춰서 상대할 때의 이야기이다.
순수한 전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마법사 집단이 심연에서 혐오체를 상대해야 한다면 오히려 레벨 값 이상을 할 수도 있다.
이건 상성의 문제다.
혐오체와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전사는 아주 드물 것이며 회복되지 않는 마력으로 저것들을 싹 날려버릴 수 있는 마법사도 드물 것이다.
지속 가능한 원거리 공격은 사수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편리한 것은 원거리 물리 공격.
그리고 미래 스테이지의 군대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사수 집단이다.
가장 먼저 깨어난 것들이 어기적대며 기어오기 시작했다.
단지 두 개체였지만 그 둘이 사망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6시간에 달했다.
겹겹이 쌓인 무수한 방벽들이 혐오체의 진격을 아주 오랫동안 저지했다.
물리적으로 막아선 것은 아니다.
그저 지능이 거의 없는 덩어리들이 새로 들어온 먹잇감인 줄 알고 방벽을 하나하나 다 뜯어먹은 덕이다.
마침내 거대한 괴물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와 아르카나가 사망판정을 내리자 총성이 멈춘다.
기나긴 전투가 끝났다.
사실 전투라기보다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단순작업에 더 가까웠다.
병사들도 승리의 기쁨보다는 작업이 끝났음에 대한 안도를 느끼는 듯했다.
단둘을 잡는데 며칠간 수집한 무기가 거의 바닥났다.
그러나 사상자는 없었다. 그것은 기뻐할 이유가 된다.
우리 집단은 이제 200명 이하로 줄어 있었다.
많은 고블린들이 이미 이곳에 떨어진 시점부터 부상자였다.
심연의 가혹한 환경은 여러 생명을 여신의 곁으로 돌려보내었다.
임시로 구축한 것치고는 상당히 그럴싸해진 요새의 가운데에서 다음 계획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누군가 천막 앞으로 다가왔다.
현재 고블린들의 최고 지휘관인 대령이다.
처음에는 벌벌 떨던 대령도 근 일주일간 나에 대해 상당히 익숙해졌다.
"혐오체의 뱃속에서 상당량의 탄약이 나왔습니다! 현재 병사들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좋아 최대한 쟁여놔. 점점 더 많이 몰려올 테니까."
많은 연방군 장교가 그렇듯 그는 나쁘지 않은 지휘를 했다.
내가 지켜봐 온 바로는 이 국가는 인재의 평균적인 질이 높고 편차가 적은 편이다.
영웅이라 할 만한 이는 거의 없으나 그만큼 제 일에는 충실하니 이상적인 공산주의의 낙원인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고블린이란 것이 원래 그런 종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를 지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특징이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변수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대령이 물러가고 소녀가 찾아왔다.
"오빠!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허."
"어허는 뭐가 어허야. 오빠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싫어요?"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그렇게 부르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요. 내가 정신적으로는 몇 살인지 알잖아."
"피이, 아저씨라고 하면 원조교제 같은데."
"어허……."
대충 저런 분위기다.
저렇게 재잘거리면서 다가오는데 걸음걸이에서부터 활기가 넘친다.
심연의 어둠조차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둥실둥실하다.
미소는 이전보다 더 늘었고 더 커졌다.
발걸음마다 꽃이 피어난다고 해도 크게 어색하진 않으리라.
뭐 어쨌건 원하는 대로 근접전에서의 마력운용, 그리고 저런 혐오체를 상대할 때의 요령을 좀 더 봐주었다.
물론 직접 전투에 참가시키지는 않는다.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그리해야 할 때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안전제일이지.
이건 결코 사심이 아니다.
* * *
소문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꼬마 마법사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일이다.
물론 달라진 것은 없다. 어차피 주변에서는 그리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인간 감수성이 부족한 영감님은 아주 직설적이었다.
"했나?"
"아니……, 저 안 섭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혼돈 맙소사! 그거 정말 큰일 아닌가?"
"그리고 뭐, 여러모로 문제도 있긴 하고요. 귀엽고 예쁘긴 한데 이게 또 동하냐면 다른 문제라."
"흠, 그건 그럴 수 있지. 강함이라면 흠잡을 데 없는 신붓감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통통 튄단 말이야. 전사는 전장이 아닌 곳에서는 과묵해야 하는데."
영감님이 오크의 연애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나는 그냥 웃었다.
일단 뭐 아직도 반 이상이 여동생 같은 느낌인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아이고, 그래서 귀여운 거니까.
하지만 정말 웃긴 게 뭐냐 하면.
"하기야, 그 아이는 좀 심하게 순수한 것 같더군."
만화로만 연애를 배웠다고 하는 우리 희우는 생각 이상으로 새하얀 도화지 같은 녀석으로, 정말로 만화나 소설에서 묘사된 것 이상으로 무엇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수위가 좀 높은 창작물을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이번 정씨 집안은 굉장히 뼈대 있는 가문이긴 했다. 그런 방면으로는 귀한 집 딸내미 티를 풀풀 내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씨 가문은 그쪽 한국사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모양이었다. 무관을 자주 지냈다고.
선비 중의 선비 집안이니 자식들에게 엄격할 수 있지. 이럴 때만큼은 유교 만세다.
그나저나 초인이 실존하던 역사를 가진 지구이니 그 동네 삼국지는 도대체 어떤 지옥이었을지 궁금하군.
어쨌든 나는 가장 급발진할 위험이 높은 영감님께 당부했다.
"모르는 게 편하죠. 모르니까 그 이상으로 갈 일도 없고. 앞으로도 모르게 둡시다. 본인의 행복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허어. 그걸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군."
영감님은 오싹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진짜 대단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긴, 미궁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유배자들도 참으로 힘겹겠어."
"죽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은 없지 않습니까?"
"영혼이 함께한다고 믿을 수도 없지 않은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미궁은 영혼이 실재한다.
"유배자는 영혼이 없지. 다음 회차로 넘어가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없습니다. 바깥에서 온 거라 그런 걸지도 모르죠."
본디 불길함은 언제나 징조만을 남길 뿐이다.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 * *
10일 차.
몰려드는 혐오체들은 멀리서 관측하고 대비할 시간이 있을 만큼 느릿했다.
하지만 그 물량은 점점 늘었다. 고블린들은 과로로 지쳐 갔고 일부는 미쳐갔다.
심연의 어둠은 정신을 좀먹는다. 아무리 투철한 신앙무장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게 된다면 쉽지 않다.
나는 신의 역할을 대행해야 했다.
고블린 병사들을 위문하고 때로는 신의 기적을 보여주며 다가오는 혐오체들을 차분하게 사냥해갔다.
밤낮없이 교대로 쪽잠을 자며 적을 물리쳤다.
혐오체를 잡아 얻는 전리품 격으로 드롭되는 여러 가지 장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씩 병사들의 장비는 질이 좋아지고 있었다.
우리 파티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아르카나마저 새로운 스태프를 하나 맞추었다.
지나치게 몰려들면 단숨에 함락되기에 기동력이 좋은 인원들을 필두로 교란 작전도 펼쳐야 했다.
칙칙하면서도 숨 가쁘고 꽉 조여진 전투였다.
* * *
15일 차.
주둔지 주변의 혐오체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한결 여유가 생겼기에 정찰에도 여유가 생겼다.
심연에서의 계층 이동은 미궁의 다른 많은 곳과도 같이 계단으로 이루어진다.
포탈이 중간에 몇 번 나타났으나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더 깊은 곳일지 어디일지 알 수 없다. 미지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신님의 권능이 닿는 곳까지만 가면 확실하게 탈출할 수 있다.
계층을 완전히 청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혐오체는 끊임없이 심연의 어둠 어딘가에서 태어난다.
근방을 정리한 시점에서 계단의 수색이 메인이 되었다.
그 수색은 주로 우리 파티원이 맡았기에, 병사들은 적어도 만 하루의 휴식시간은 가질 수 있었다.
위로 향하는 계단이 발견되었다.
"좋아. 도착하자마자 혐오체 무리와 마주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 악마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계단을 이용하는 상황에 흥분했다. 연방은 이상할 정도로 유배자를 좋아하고, 심지어는 동경하는 분위기라 그런 모양이다.
일사불란하게 다음 층으로 이동한다.
로딩창의 팀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들! 방벽을 친다!"
마력 소모를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는 남은 마력을 동원해 냉각했다.
뜨거웠다. 이상할 정도로.
심연의 계층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이 심연의 잔해가 융해된 마그마로 끓고 있다.
"와, 미치겠네. 여기 떨어진 건 붕괴한 행성의 일부 같은데?"
심연이 이런 초고온의 지옥이 되어 있는 꼴은 귀한데.
이걸 예상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