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68화
16층 - 시간의 신전(3)
종족이 변한다는 것은 처음 겪는다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는 기묘한 경험이다.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희우는 설레는 몸짓과 동작으로 카드를 찢었다.
반짝이는 빛이 몸을 감싸고 내가 보아서 기억하고 있던 모습이 되었다.
홀로그램 핀 같은 기계적 형태의 날개, 그리고 마찬가지로 무기질적인 느낌의 헤일로.
은은하게 빛을 낸다는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빛이 나지는 않는다.
언뜻 보면 원래 모습 그대로에 날개와 헤일로만 추가된 모습으로 보였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고블린이 되었을 때랑 비교하면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체격과 체형은 거의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뭔가 토할 것 같다거나 위화감이 느껴지거나 그러진 않아?"
손가락을 열심히 꼼지락대며 대답한다.
"조금 뭔가 몸 어디가 변했다는 감각은 있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적응을 잘하는 편이구나. 카드를 쓰면 몇 날 며칠을 드러눕는 사람도 있거든."
사냥꾼의 경우는 드러눕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를 상당히 불편해했다. 걸음걸이가 로봇 같아져서 아주 우스웠지.
"일단 좀 더 움직여 볼게요!"
그러며 몸을 움직인다. 걷다가 쪼그려 뛰기도 해보고 백 덤블링에 전력질주까지 운동능력을 체크한다.
왕국의 문이 위치한 이곳은 무한하게 이어진 백색의 공간으로, 고위 종족의 신체능력을 테스트하기도 무리가 없다.
단지 달리기만으로도 시야 바깥까지 달려갔다 돌아온 희우가 말했다.
"달라진 걸 모르겠다는 말 취소! 이거,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만화 캐릭터가 된 기분이에요."
"처음부터 그랬던 거 같은데."
"예쁘단 거죠?"
"아, 그럼. 얼굴 뽀얘진 거 봐. 천사는 따로 몸 관리도 필요 없어.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니까."
"그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최소한의 마력만 존재한다면 식사도 필요 없지. 당연히 배출도 필요 없고."
"최고인데요?"
심연에서 겪었던 식량 부족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몸을 만질 수는 없으니 눈으로만 구석구석 체크한다.
신체능력이 갑자기 너무 향상되어 본인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체형 자체도 좀 변했다.
좀 더 이상적인 형태로 근육이 자리 잡았다는 느낌.
부피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아마 체중도 조금 늘었을 것이다.
본래부터 저 가느다란 팔의 근섬유가 뿜어내던 비정상적인 괴력을 감안하면 얼마나 물리적으로 강력할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아주 이상적이다. 파티에서 내가 바라던, 그리고 상정해두었던 역할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조합으로 세팅되었다.
아마 조금 지나면 스스로도 인간과 달라진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힘을 주는 방법부터 천사적으로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단지 주어진 종족적 스펙에만 의존하고 개발을 게을리한다면 금방 한계가 찾아온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왕국 이후에도 펼쳐질 험난한 길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지근거리에서 말없이 눈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희우가 몸을 배배꼬기 시작했다.
"어허, 가만히 있어봐. 지금 팔에 힘줘 볼래?"
"아니, 부끄러워 죽겠는데요!"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만져도 되는데! 전 이미 아저씨 거잖아요."
그러며 부주의하게 내게 손을 뻗는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희끄무레한 불길이 내 몸에 번진다.
"으아아아악! 무슨 짓이야!"
"어, 아 아니.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떡하지?"
"마력을 다루듯이 신성을 통제해! 지금 몸이 멋대로 언데드를 멸하려고 하잖아!"
"흡혈귀 퇴마는 해본 적 없었는데!"
"너 가서 절대 나 만지면 안 된다! 12층의 나는 죽다 살아난 거라고!"
* * *
그 촌극을 지켜보며 영감님이 껄껄거렸다.
"저 바보들은 참. 바보들이군."
"지금 리더, 은근히 사심도 있어 보이지 않아요?"
꼬마 마법사의 말에 영감님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무기를 손질하는 전사의 눈빛이야. 그것도 사심이라면 사심인가?"
"어휴, 그래도 천사가 되니 정말 확 변하긴 하네요. 이젠 화장도 필요 없겠다."
아직 인간감수성이 부족한 영감님은 이해에 시간이 필요했다.
"아하. 외모 이야기인가?"
"피부톤이 달라지는데요? 조명도 필요 없겠어요. 나도 천사나 해볼까."
"저거 아주 귀한 건데."
"농담이에요. 저는 그냥 인간으로 살다가 갈래요."
"수명 계산 잘하게."
"늙어 죽은 후에 눈을 떠보니 다시 열다섯인 것도 꽤 괜찮은 일 아닐까요?"
그런 잡담이 오가는 가운데 날카로운 눈빛의 요정이 된 사냥꾼은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 웃음이야말로 사심이 가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전의 방향에서 눈이 떠나지를 않는다.
당장 떠나가지 않는 것은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에게 무엇보다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마침내 원하던 바를 이루게 해 준 이 파티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다.
이미 수십 년을 기다려 왔다.
그것을 위해 조금 더 달콤한 인내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깝지는 않았다.
* * *
비행 연습을 집중적으로 시키고, 어느 정도 초기화된 마인드맵을 다시 세팅하고.
아주 기본적인 요령만을 급하게 가르친 후 12층으로 보냈다.
데미 리치가 천사를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비행만 할 줄 알아도 질 리는 없다.
오히려 가장 걱정이 되지 않는 편이다.
예상대로 아주 무사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뭐야, 결국 또 길 잃었니?"
"아니거든요! 제대로 찾아갔거든요!"
화내는 것 같지만 시선이 묘하게 나와 맞지 않다.
이건 거짓말이군. 분명히 어디지 어디지 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역사는 반복될 확률이 아주 높지.
희우가 내게 주머니를 넘겼다. 12층에서 가지고 온 금붙이들이다.
나는 그것을 다시 막내에게 넘겼다.
내가 왕국의 천사에게 시킨 일은 별것 아니다.
그냥 여럿이 거주할 자택을 하나 마련하고 유지할 것.
최소한의 생활비는 벌고 저축해 둘 것.
천사라는 종족이 왕국에서 작정하고 돈을 벌려고 한다면 장난이 아니겠지만 아무리 봐도 그럴 의지는 없어 보였다.
정말 가끔씩 밖으로 나가 한탕하고 돌아오는 식으로 축재를 해온 모양이다.
그런데 너무 게을러서, 아무리 그래도 너무 돈이 없다는 사실을 여신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연방과 접촉할 수 있는 층으로 떠난 희우에게 금붙이를 좀 챙겨오라고 할 수밖에.
사소했던 일도 나중에 보면 그랬군 하고 고개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돈주머니를 받아든 막내가 눈을 껌뻑인다.
"이건 어쩐 돈입니까?"
"왕국에선 어떻게 지내려는 생각이야?"
"두목님을 따르겠습니다."
"두목이란 말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하하하."
막내는 분부를 기다리는 신하처럼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걸로 혼돈의 신전이나 하나 차리자고. 왕국에 남은 신전이 없거든. 그 신전장을 맡기고 싶은데."
막내는 말없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 * *
꼬마 마법사에게 물었다.
"넌 어디 돌아가고 싶은 곳 있어?"
"네?"
"정신력 때문에 올 지능 찍는다고 말하고 다니는 그거 거짓말이잖아?"
내가 그걸 안다는 사실이 정말로 의외였는지 눈만 깜빡인다.
"와, 들켰나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똑똑하게 처신하니까. 진짜로 올 지능 찍는 사람은 드물고, 좋은 핑계겠지. 질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올지능의 부작용이랍시고 둘러댄 적도 있지 않아?"
"정말 정확하게 아시네요."
이 친구는 우리 파티에 합류한 시점이 9층이다.
그 이전에는 경험한 짝수 층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니 내 판단으로는 딱히 보낼 곳이 없다.
사실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그렇다.
사냥꾼이야 전투력 외적인 면에서 아주 유능했기에 문제없고, 막내는 전사로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꼬마 마법사는 전투원으로서는 단지 마법사라는 점 외에는 큰 장점이 없는 친구다.
몇 번이고 마법을 가르치며 느꼈지만 올 지능을 찍는 것 치곤 마법의 재능은 미묘하다.
그저 정신력 보정만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마법사를 선택한 케이스다?
아주 가끔 드러나는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아이의 장점은 다른 곳에 있다.
"사실은 제가 선배님께 다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배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우리 희우랑은 다르게 정말로 농염한 미소.
봐줄 만한 정도 이상은 아닌 얼굴에 색이 깃든다.
이 아이는 마법사로서, 동시에 여자로서 이 미궁에서 생존해왔던 것이리라.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유배자로서는 그게 보통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질이 좋다는 느낌은 아니다.
유배자는 살기 위해 무슨 수든 쓸 수 있겠지만, 동시에 죽음 자체가 끝이 아니다.
어느 정도 미궁에 적응한 유배자라면 이제 스스로 고를 수 있다.
미궁의 환경은 꼭 사람을 악으로만 만들지는 않는다. 여벌 목숨이 널려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내던질 목숨도 여럿이란 뜻이니까.
상대적으로 고결해지기도 쉬운 조건이다.
하지만 꼬마 마법사는 아니다.
더 끈적하고 질척한 방식의 삶을 택했다. 스스로 말이다.
일단 여궁수는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녀는 참으로 건실하게도 선을 추구하는 파티 리더였다.
살인의 금기만큼은 어쩔 수 없는 곳이지만 미궁의 살인은 또 어찌 보면 제대로 된 살인은 아니니까.
동시에 여궁수는 충분히 유능했다.
인간 사냥을 대비한다는 핑계로 굳이 마법사를 파티에 넣지 않더라도 대응할 수단은 있었을 것이다.
아마 꼬마 마법사가 처음부터 잘 접근했을 거다.
아직 몸이 자라기 전, 동정을 사기 좋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어필을 했겠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다.
그런 머리가 정말 좋다. 마법의 재능과는 별개로 약아빠진 방향으로는 이 파티에서 가장 음험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결코 선은 넘지 않으니.
그리고 나를 배신할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위업을 보여주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쓸모를 아는 꼬마 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백했다.
"12층에서 저는 주로 마력탐지만을 담당했잖아요."
대체로 영감님의 보조였지. 나를 제외하고 우리 파티의 주력 마법사는 일단 영감님이니.
"마지막에 어떤 계단으로 내려가는 누군가를 발견했었어요. 탐지의 끝자락에 간신히 살짝."
"그래? 그럼 거기 누가 또 하나 더 나타났겠군."
"네."
"이길 수 있는 거지?"
"그 요정 선배님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제가 시간의 신앙을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혹시 마지막 시간 정지를 짜내더라도 대응할 수 있겠군. 좋아. 갔다 오도록 해."
꼬마 마법사는 시간의 신의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12층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그동안 알리지 않은 것은 아마도 보험.
내게 들어서 시간선마다 일어나는 일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요정 마법사와 샤크마가 무사히 왕국으로 향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혹은 아예 자신이 살려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우리 파티에서 자신의 입지가 이상해지거나, 혹은 그냥 쓸모없다고 버림받을 낌새가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확률이 높다.
꼬마 마법사는 어떤 방식으로건 비빌 언덕을 더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건 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유배자이자 시간의 신도로서의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가치를 가질지 정확하게 안 것이다.
까마득한 선배 유배자 요정 하나와 히어로 유닛이던 데미 리치 하나를 상대로 말이지.
보통은 그 힘에 질려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다.
세뇌된 유배자 하나를 앞세워 유배자의 왕국에서 지내기에는 요정 마법사도 불안이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꼬마 마법사가 협력하겠다고 하면 그 둘로서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된다.
9년 차 유배자가 저런 발상에 도달한다? 이 녀석도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뻔히 볼 수 있는 여신님이 알려주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로 9년 차가 맞다.
암만 그래도 사냥꾼 같은 사연이 있진 않을 테니.
그럼 정말로 9년 차라는 건데.
다른 의미로 재능이 충만한 꼬마다.
* * *
꼬마 마법사는 말한 것과 다르게 아주 정확하게 그 위치를 탐지했었다.
그랬기에 시간의 신께 기도하며 이동할 위치를 잡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기억에 있는 어둠 속의 도시.
그리고 눈앞에는 어느 유배자와 계단을 내려가려 하고 있는 요정 하나.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중얼거렸다.
"시간의 신이시여……."
세상의 시간이 급격하게 멈춰 선다.
계단을 향해 뻗은 발이 그대로 정지한다.
잿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꼬마 마법사는 천천히 걸어갔다.
요정 마법사가 정지한 시간을 인지했다.
마지막 마력을 짜내어 그 속에서 고개를 돌린다.
"너는……."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상대가 멈춘 시간 속으로 같이 들어와 있다면 물리적 공격도 통한다.
푹 하고, 천사가 된 여동생에게 빌려온 단검을 목에 쑤신다.
요정 마법사는 황망하게 입을 뻐끔거리고,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려고 하다가 쓰러졌다.
그가 쥐고 있던 붉은 보석 같은 것이 허공에 그대로 정지한다.
꼬마 마법사는 그것을 집어 들고 단검을 내리쳤다.
아다만타이드 재질은 라이프 포스 베슬을 아무렇지도 않게 갈라 버렸다.
* * *
"여기 있어요."
갈라진 보석은 확실하게 샤크마의 LFV가 맞았다.
"잘했어. 왕국에서도 잘해보자고."
"최선을 다할게요. 어차피 이제 다른 마음 먹을 구멍도 없고……. 저도 이왕이면 잘생긴 사람이 좋거든요."
나는 피식 웃으며 희우를 가리켰다.
"난 쟤 거야."
"첩은 싫어하세요?"
"응."
"그럼 어쩔 수 없죠."
꼬마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