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69화
16층 - 시간의 신전(4)
시간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시간의 신도를 했던 적이 있으며 시간의 대전사였던 적도 있었다.
다른 대신격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은 결코 신언을 내리지 않는다. 메시지조차도 아주 드물게 보낸다.
나는 시간의 대전사였던 회차에서도 시간의 신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었다.
게임 시절의 미궁에도 대신격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플레이어의 상상이 닿을 수 있도록 여백으로 남겨진 공간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현실이 된 미궁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의 신은 실재하니까.
그렇다면 시간의 신은 대체 누구인가?
* * *
2층.
이제 와서 내가 카크리쉬라는 히어로 유닛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을 아껴야 하기에 정신없이 바쁘게 짜둔 계획대로 진행해야 한다.
시간여행은 오래 있으려고 해도 12시간 정도가 한계다. 그 안에 모든 것을 해치워야 한다.
요정들은 착하고 협조적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여신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을 느끼며 발을 디뎠다.
금빛 광채가 사방으로 부서진다.
시간은 낮.
날짜는 아직은 우리 파티가 단출하게 셋밖에 되지 않았던 시기다.
사냥꾼과 희우, 그리고 나.
그립군. 정말.
제일 먼저 한 것은 화재를 진압하는 일이었다.
2층에서 폭발 열매를 별생각 없이 확인하다가 던져서 불이 붙었다.
기후와 계절의 문제로 그 불길은 꽤 크게 번져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진압해야했다.
이곳의 요정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활활 타오르는 숲을 보여주며 ‘저기요 실례합니다.’하고 말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외부인인 유배자가 어떤 시선으로 보일지는 뻔하니까.
화재의 원인도 이곳에 주둔한 폭풍울음 여단이나 나 둘 중 하나거나 둘 모두로 생각되겠지.
물론 그리 속으로 생각하더라도 겉으로는 선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루터기 요정은 그런 생물이다.
하지만 완전한 호의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이 시기의 자연의 신에게 나를 어필해두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8층에서 우리 여신님이 그런 식으로 찡찡댔다고 자연의 신이 훌떡 들어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 진작 좀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있었다.
나였다.
내가 미리 교섭했을 것이다.
일단 잊지 않고 봐두려고 했던 것부터 보러 갔다.
폭발 열매가 터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나와 사냥꾼은 회복의 샘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고, 샘에 남겨진 희우는 조신하게 칼침을 놓아 오크와 요정 하나를 제압하는 중일 터.
아직 [데이 워커]가 아니어서 햇빛이 따갑지만 박쥐로 변해 날아올랐다.
날짐승은 아주 빠르다. 체력이 달려 헉헉대며 쉬어가는 과거의 나를 지나쳐 순식간에 회복의 샘까지 도착했다.
한참 전투 중인 희우의 모습이 보인다.
잘하는군. 정말 잘해.
이 모습을 다시 기억에 담아두고 싶었다.
너무 쑥쑥 커버려서 귀여운 꼬꼬마 시절의 기억이 잘 안 난단 말이지.
고백이 임팩트가 너무 강했던 것일까?
미래의 어여쁜 얼굴이 아니라 아직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동글동글한 얼굴도 좋다.
이런 모습까지 굳이 보러 오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넘어가면 또 쉬운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정말 많이 자랐군. 지금 제압당해 쓰러진 저 요정의 옷이 기억난다.
이때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접어주고 묶어주고 해야 했다.
지금이라면 꼭 맞을 것 같다.
보고 있자니 오크까지 성공적으로 제압한다. 그 후에 포박할 줄을 몰라 고민하다가 때려서 기절시키는 모습까지 나왔다.
잘하는구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한번 보러 왔다. 내가 보지 못했던 장면이기도 하니까.
나무껍질로 만든 밧줄을 주섬주섬 가져와 김밥말이를 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 다시 이동했다.
요정의 마을까지 가야 한다.
* * *
당연하지만 그루터기 요정들은 낯선 뱀파이어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았다.
내가 대놓고 유배자임을 밝히자 더욱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한껏 인상을 쓴 요정 유격대들이 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타고난 선량함은 여전히 뚝뚝 묻어나오고 있다.
인상 쓸 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자기가 화났다며 툴툴거리는 느낌.
"촌장을 불러주겠어?"
미심쩍어하면서도 일단은 불러준다. 정말 재밌는 친구들이다.
사실 뱀파이어를 환영하진 않더라도 박대하기도 애매할 것이다.
인간 출신 뱀파이어는 먹지도 못할 요정의 피에 관심이 없을 테니까.
톡 쏘는 맛이 일품인 기호품 정도지만 호불호가 심해서 말이야.
불려 나온 촌장은 어쩐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고민해본 끝에 8층에서 실피드로 포격을 퍼부은 후, 내게 고맙다고 인사한 요정임을 알 수 있었다.
촌장이었군 그래.
이 양반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한 덕에 시간의 신전이 출현했음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사소한 연이란 것은 다 이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마을을 지켜주시겠다고요……?"
"그리고 자연의 신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해주겠어?"
"아……. 그러시지요."
단지 그 발언만으로도 요정들의 시선이 누그러진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선의로만 대하는 이들이다.
내가 언데드가 아니었다면 기꺼이 대접했을 자들.
어린 세계수는 그 자체로 자연의 신의 신전처럼 기능한다.
그곳에 대고 기도를 올렸다. 신은 본디 쉬이 응답하지 않는다. 모든 곳을 지켜볼 수 있지만 항상 그럴 수도 없다.
시간을 들여 길게, 나를 이곳으로 보낸 시간의 신성이 느껴지도록.
마침내 자연의 신이 의아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신의 껍데기가 아닌 본인이 보낸다는 느낌이 드는 메시지다.
[자연의 신이 당신의 몸에 깃든 신성에 의구심을 표합니다.]
‘자연이시여, 당신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주목할 만한 파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여신님과 다르게 자연의 신은 제대로 된 교단을 거느리고 있다.
왕국에서 온 신도가 동 시기의 어딘가에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마 또 다른 미래의 내가 이 서버의 과거에 나타난 적이 있을 것이다.
신좌는 그 접촉을 적어도 기록으로서는 남겨두었으리라.
자연의 신은 나에 대한 사실을 검색하는 모양인지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곧, 꽃잎 요정의 매끄럽고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여행자로군. 시간의 신전을 발견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곧 당신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될 유배자입니다.’
「내가? 뱀파이어와?」
‘혼돈의 여신을 기억하십니까?’
「……정말이긴 한가 보군.」
자연의 신에게 우리 여신님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민감한 사안을 건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물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언급만으로도 자연의 신은 무언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뱀파이어……. 그래…… 너는 혼돈의 신도인가.」
자연의 신은 원래부터 우리 여신님께 꽤나 호의를 가진 신이었다.
이제는 잊힌 신이던 혼돈이 다시 이 세상에 나올 것임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호감을 사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 * *
시간의 신이 과연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꼼수를 쓸 필요가 있다.
아르카나 자매 때문이다.
자연의 신에게 양해를 구해 세계수의 마력을 조금 사용했다.
이미 거슬러 온 내 시간을 멈추는 술식을 그렸다.
10층, 영웅들의 무덤의 시간을 멈추고 있던 그것과 같은 것이다.
대신격들의 권능은 미궁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유배자에게 뜨는 100년의 타이머 역시 시간의 신의 권능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이다.
즉, 내 시간을 멈춰놓는다면 내게 허용된 시간과는 별개로 이곳에서의 시간을 훨씬 잡아 늘릴 수 있다.
촌장에게는 당부했다.
"나중에 나를 다시 보게 될 거야. 정령왕이 다시 나타난 후에 말이지. 그때 마을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나 좀 해주겠어?"
촌장의 표정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지금 시점에서의 나는 아직 이 마을을 구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정령왕은 또 무엇인가.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시간을 가두었다.
* * *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
요정들 입장에서는 며칠이 흘러갔다는 게 보인다.
내 주관적인 시점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전투를 치른 셈이지만.
역사에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하여 활을 들고 화살에 마법을 실어 요정처럼 쏘았다.
본래라면 함락될 만도 한 공격을 내가 막아주자 요정들의 시선이 더욱 호의적이 된다.
네 번째 전투에는 카크리쉬와 트동트가 있었다.
"네 녀석은!"
신중한 전사의 눈에 의심이 깃든다. 나를 알아본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시간대는 이미 카크리쉬의 추방을 통해 심연으로 도망친 후 겠군.
싸움은 쉽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어렵지는 않았다.
심연의 신의 권능은 변화무쌍하며 굉장한 유틸리티를 자랑한다.
카크리쉬가 전사이면서도 단검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하지만 아카샤의 눈은 이 시간대의 내가 가져갔다.
무기를 잃은 [히어로 유닛]은 강력한 신앙을 가진 것 치고는 별것 아닌 상대였다.
안타깝게도 이 전사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 카크리쉬가 죽음으로서 2차 요정전쟁이 발발하는 방아쇠가 된다.
그것은 구르고 굴러 고블레타리아 연방의 성립과 제국의 패망까지 이어지리라.
망연한 표정의 트동트를 보며 구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래에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는 이 오크는 제자를 인간으로 돌리겠다는 결의를 굳힌다.
이 모든 일이 주관적인 시간으로는 채 1시간이 지나지 않고 일어났다.
스킵버튼을 마구 누르며 퀘스트를 날림으로 진행하는 기분이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려고 한다.
다음에 깨어났을 때는 밖에서 한 달 정도는 지난 모양이었다.
요정들이 이 마을을 떠나간다며 인사해왔다. 이제는 정말로 고마워하는 눈치다.
그 위대한 전사 카크리쉬마저 내 손에 쓰러졌으니 그럴 수밖에.
"자연의 신께서 전쟁을 선포하려 하십니다. 우리는 참전하러 갑니다."
"오, 그쪽에 있는 나도 잘 부탁해."
"유배자란 참 어려운 존재군요. 여러 시간을 지니다니."
"하하하. 난 시간이 없으니 다시 멈출게."
그리고 다음에 깨어났을 때는…….
「아니, 너는 왜 또 여기에 있는 거냐? 나랑 연결이 없군. 자연의 신의 문제도 아니네. 이거 시간의 신전이군?」
고블린 신도를 통해 내게 신언을 전달하는 여신님이 반겨주었다.
"바쁘니까 빠르게 설명하겠습니다."
여신님은 번갯불에 콩을 볶아먹는 설명을 들은 후, 과연 신좌에 도달한 짬으로 어찌 된 일인지를 이해했다.
「현재의 너에게는 알리지 않는 것이 더 좋겠느냐?」
"한참 의아함과 심란함이 많을 때니 생각할 거리를 늘리지 않도록 하지요. 그리고 사실 제가 몰랐습니다. 이래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한 건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거든요."
「그럼 역사의 순리대로 흐르는 게 낫겠군. 난 입 다물고 있으마.」
그리고 내가 고블린 암살자인 척하며 혁명을 이끌 때, 속성으로 사령술을 가르친 자매를 보내왔다.
아직 어린 아르카나와 아르주나는 제법 귀여운 고블린이었다.
다만 그 마법적 재능만큼은 상당하다.
"케륵, 스승…… 님?"
아직 저 케륵거리는 말버릇이 남아 있던 시기의 고블린들이군.
나는 15층에서부터 틈틈이 만들어둔 사령술 교과서를 꺼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숙제 검사를 하는 구몬 선생님의 심정으로 쑥쑥 커가는 고블린 자매를 가르쳤다.
저들 입장에서 나는 숙제를 다 할 때마다 깨워서 검사 받아야하는 오브젝트 같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바르바로이도 찾아왔다. 그는 황망하게 나를 깨웠다.
"왜, 여기도 있습니까?"
"유배자는 원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
"그래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 됐고. 그 고블린 자매 알지? 마법의 기본 좀 나 대신 가르쳐. 난 응용 심화만 다룰 테니까."
바르바로이는 질색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대로 따랐다.
계절이 두 번 변하였을 때쯤, 마침내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했다.
"좋아, 이제 그럭저럭 스켈레톤을 일으킬 수는 있겠군. 나는 이만 가볼 테니 열심히 하도록 해."
"스승님? 케륵.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몇 시간 보지 못한 제자들이지만 자매 입장에서는 반년은 보아온 스승님이다.
그것도 여신님께서 주선해 준 스승.
열 몇 시간 만에 속성으로 정이 든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유배자니까. 알겠지? 그러니 그때까지 이거 다 해놔."
구몬 선생님이 왜 그렇게 싱글벙글하며 숙제를 내는지 알 수 있었다.
전공서적 수준의 과제에 실망을 넘어 절망하는 고블린 자매가 제법 귀엽다.
"한동안 못 볼 테니까 선물을 주도록 하지."
이 시대의 고블린들 대부분은 이름이 없다. 유배자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없다.
전쟁과 야성의 신 아래의 고블린은 노예계급이나 다름없기에.
그러니 이름을 주는 것은 아주 인상적인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준다면 결국 여신님께서 주는 이름이 되니까.
"너는 아르주나. 너는 아르카나. 어떻게 쓰는지를 가르쳐 줄게."
어린 고블린 자매는 신기한 듯 자신의 이름을 말해본다.
"다음에 나를 만나면 이름을 대도록 해."
"알겠습니다. 스승님. 케륵."
언제일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여신님께 기록을 뒤져달라고 하면 되긴 하지만 역시 내 자신의 미래를 너무 자세하게 알려고 드는 건 좋지 않다.
그렇게 황금빛 광채에 휩싸여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 * *
희우가 반갑게 맞아준다. 과거로 가서 몰래 보고 있었단 말은 하지 않도록 하자.
"하, 지친다."
"아저씨도 지칠 때가 있어요?"
"그럼. 내 유일한 적은 정신이지. 언제 나를 좀먹을지 모르거든. 절망, 회의, 염세…….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감정인데도 내 곁에서 떠나질 않으니."
모든 유배자들이 그럴 것이다.
어마어마한 속성 퀘스트를 하고 나니 정신적으로 지쳐 그런지도 모른다.
피로를 느끼면 동시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어둠이 느껴진다.
"그럼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죠!"
"그딴 말 하면 안 부끄럽니?"
"사실인걸요. 그리고…… 사례가 있잖아요. 사람의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는 산 증거."
소녀가 눈짓했다.
막내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의 요정을 향한 눈짓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사랑의 힘만으로 유배생활을 버텨온 놀라운 순정남이 말이다.
그는 이제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그리곤 멋쩍게 웃었다.
"우리 파티에서 졸업할 시간이야."
"제 업이 끝날 시간이군요."
무덤덤하지만 어딘가 섭섭하게.
그는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