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70화
16층 - 왕국의 문
유배자의 이합집산은 언제나 필요에 일어난다. 사냥꾼과 나의 관계도 그랬다.
그러나 초회차이거나 아예 유배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이별이 더 각별한 일이다.
이런 식의 헤어짐에 익숙할 수 없을 테니까.
사냥꾼은 아까부터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 파티의 장비는 튜토리얼 수준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궁답게 판타지스러운 ‘아이템’의 느낌이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우주 시대를 거쳐 온 사냥꾼의 방어구나 무기는 검과 마법의 물건은 아니다.
지극히 현대적인 혹은 약간은 근미래적인 그의 소지품은 차라리 유품 같아 보였다.
총기는 일단 꼬맹이와 꼬마 마법사에게, 가장 자체적 호신 수단이 부족한 둘이다.
난쟁이의 금고에서 털어온 마법적 총기는 꼭 사용하지 않더라도 왕국에서 판매할 경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총탄을 꼼꼼히 세어 나눈다.
사냥꾼은 내가 없는 경우 파티 전체를 지휘하는 역인 서브 리더였다.
그랬기에 구비하고 있던 구급 물품이나 지혈대 등도 나눈다. 전부 자작한 것들이다.
힐링 포션은 만능이지만 소모품이다. 그 이후를 대비하는 것 역시 현명한 유배자의 소양이다.
물론 우리가 보내온 층은 그런 것으로 해결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냥꾼은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혹시 모른다고.
이 신중하고 침착한 남자의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은 정말로 무언가 잘못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물건들이 많았다.
한쪽 주머니에서 연방 전투식량에 동봉된 디저트 초코볼이 잔뜩 쏟아져 나오자 희우가 놀란다.
"이건 비상식량이었는데."
"그걸 가져오셨어요?"
"습관적으로 그만……."
"어쩐지 심연에서 자꾸 어디서 뭐가 나오더라……."
"항상 몰래 가지고 다니니까."
저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심연에서도 그렇게 어디선가 자꾸 먹을 것을 꺼내진 않았겠지.
항상 주웠다고 말했지만 그게 전부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더 이상 전투가 없음을 알면서도, 15층의 수송선에서 회복하는 동안 무심코 대비한 모양이었다.
챙길 수 있는 것은 부피를 고려하여 가능한 잔뜩 챙기는 것.
습관적인 노련함이다.
사냥꾼은 웃으며 그걸 희우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단 것을 좋아하는 이는 희우정도 뿐이니까.
희우는 고개를 저었다.
"애기들이 있다면서요. 단 걸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게 어리진 않은데……, 그래도 뭐, 그럴 것 같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야. 거기까진 생각조차 못 했어."
다시 주섬주섬 초코볼을 챙기는 모습이 우습다. 사냥꾼은 이제 완전히 유배자로서의 독기가 빠진 모습이었다.
그보다는 얼떨떨한 재회를 앞둔 아버지일 뿐이다.
사냥꾼은 항상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고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대비하는 자세였다.
이제는 그 눈가에 힘마저 풀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평범한 남자는 미궁에서 100년의 세월을 보내며 유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물건 정리가 끝났다.
파티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희우는 자꾸만 눈물을 닦고 있다.
막내는 계속해서 그늘이 드리운 표정, 꼬맹이나 영감님도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태도다.
반면 경험이 많은 나와 꼬마 마법사는 상대적으로 덤덤했다. 물론 그것도 완전히 아쉬움을 숨기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긴 세월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어 헤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헤쳐 나온 참이다.
지난 몇 달이, 체감 시간으로는 수십 년은 될 듯이 아득하다.
꼬마 마법사와 나의 아쉬움은 경험으로 절제된 빛바랜 것이다.
사냥꾼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반응마저 우스운 모양이었다.
"리더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요."
"당신은 내 평생 가장 유능한 서브 리더로 꼽아줄 수 있어. 덕분에 자리를 비울 때도 안심할 수 있었지."
"별로 한 것은 없는데 말입니다."
"맡겨두면 똑바로 못하는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지."
"리더 같은 고참이 그런 말을 해주니 참 영광입니다."
"고참 같은 소리 하지 마. 어쨌든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고맙긴 제가 고맙죠. 이런 퇴직금을 대체 어떤 파티에서 지급하겠습니까."
뾰족해진 제 귀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미소 짓는다.
삭막한 인상이라 지금껏 느낀 것은 그가 가진 부담감 혹은 사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둥글어 보일 지경이니.
막내가 갑자기 기도를 시작했다. 사냥꾼은 그 모습에 상당히 기묘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말고 좋게 좀 보내주지."
"그리 말하면 정말 죽는 것 같지 않습니까. 형님."
"유배자는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진짜 죽진 않아. 어딘가에서 다른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지."
막내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멀쩡히 살아 있음을 알면서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 거한의 가족은 모두 좋은 곳으로 떠난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런 이별에 익숙하지 않는 듯했다.
죽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면 헤어질 일이 없다.
뭉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니까.
경력과 외모에 비하면 뜻밖에도 순수한 히스패닉은 정말로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닌데도 다시 볼 수 없다니. 어려운 일입니다. 형님."
"어려울 것 뭐 있나. 난 잘 살 거야. 그리고 자네도. 일단 자네 방패는 평생 잊지 못하겠군."
주로 저 둘이 페어였다. 앞에서 방패를 드는 탱커와 그 뒤의 사수.
서로의 목숨을 가장 가까이 맡기는 사이니만큼 정도 그만치 들었으리라.
그래도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았던 희우는 눈물을 닦으며 축복의 말을 했다.
"늘 행복할 거예요. 아무도 지켜볼 수는 없어도 그곳에서 행복할 거란 사실만은 믿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
사냥꾼은 한 명씩 포옹했다. 꼬마 마법사와는 약간 어색했다.
그 둘은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함께한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았고.
특히 영감님은 그쪽에서 몹시 뜨겁게 포옹했다.
"내 언제나 자네를 기리도록 하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전사야."
"2층에서 절 번개로 구워버리셨지 않습니까."
"그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리고 슬며시 속삭이는 소리가 내게는 들렸다.
"여신님께 들었는데 이미 100년은 끝났다지? 그럼에도 황제의 전기톱 앞에 몸을 던질 수 있다니. 동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은 진정한 전사의 소양이야."
"그걸 여신님께서 말하셨습니까?"
"자네의 헌신을 기억하는 이가 조금이라도 많아야 하지 않겠나. 여신님 역시 전사니 참을 수 없으셨나 보지."
희우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또다시 자책할지도 모르니까.
"오크들은 그런 이를 영웅이라 부른다네. 전 대주술사의 이름으로 명예 오크로 인정하도록 하지."
"전 요정입니다만?"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반쯤은 농담 같은 말이지만 사냥꾼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생의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희생을 생각할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아. 나는 못 그랬을 거야."
영감님은 그리 말하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끝으로 사냥꾼은 여신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나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 * *
언제나 마지막은 아주 간단하며 단순했다.
원래 누군가 떠나는 것은 그런 법이다.
모든 짐을 내어주고 간소한 평상복과, 작은 활 하나만 챙긴 사냥꾼이 시간의 신전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사라졌다.
자연의 신은 약속을 지켰다. 그 역시 사냥꾼이 떠나기 전, 그에게 인상적이었다는 소감을 남기고는 나를 다시 여신님께 돌려주었다.
이제 여신님은 온전히 내게 임하고 계신다.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군.」
‘신도가 죽었을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복구되지 않는 영원한 손실이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그야 입에 발린 축복의 말이지. 뭐 더 할 말이 있겠나.」
진짜로 사라지고 나자 대성통곡을 하는 희우를 달랜다. 꼬맹이도 옆에서 훌쩍이고 있다.
사냥꾼은 이 둘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슬하의 자매가 꼭 이 정도였다고 했던가.
마지막에 몸을 던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겠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하군요.’
「뭐가?」
‘어떻게 시간의 신이 과거의 회차로 되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일까요?’
「그러고 보면 나도 그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너는 소문의 진위여부를 아느냐? 솔직히 말하면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사실인가보다 하고 있었다.」
‘사실은 사실입니다. 게이머가 아니면 모를 사실이겠지만요.’
로그라이크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보통 이리저리 조각난 메시지를 통해 이루어져 있다.
아이템 설명이나 NPC 설명, 혹은 랜덤 인카운터의 상황.
이런 것에 적혀 있는 약간의 정보를 취합하다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식으로.
그렇게 유저들이 추측하여 짐작하게 만드는 형태다.
그중 꽤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과거를 그리워하여 과거로 돌려보내 달라고 시간의 신에게 요구한 어느 유배자의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의 결말은 썩 좋지 않았다.
시간의 신이 돌려보내준 과거는 정말로 그때의 그 과거가 아니었다.
단지 모양만이 그럴싸한 모형의 세계.
어느 유배자도 찾아오지 않고, 어느 왕국과도 이어지지 않았으며 형성된 범위조차 제한적인 작고 닫힌 세계.
하지만 그 유배자의 결말이 좋지 않았던 것은 그의 소원이 사냥꾼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유배자 동료들을 만나 다시 모험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닫힌 세계에서는 그게 불가능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그는 절망했다. 그 기록은 오랜 세월이 흘러 심연에 떨어지고, 플레이어의 손에 들어온다.
그러나 사냥꾼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곳에서 가족들과 지내는 것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그가 특별히 모험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일은 없다.
아니, 어쩌면 의심을 하건 말건 그는 그저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여신님 역시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너나 나나 모두 데이터 쪼가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지.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러게 말입니다. 사냥꾼은 이제 차라리 자신 역시 데이터 쪼가리이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가족들과 진정 똑같아지는 것일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맞습니다. 그가 행복하면 좋겠군요. 아니, 행복할 겁니다. 분명히.’
* * *
무슨 일이 일어나건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
다들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출한 식사가 시작된다.
왕국에 진입한 후여도 좋겠지만 뜻밖에 바빠질 수도 있기에 미리 쉬어가기로 했다.
"왕국에 도달하면 이제 우리에게 접근하려는 녀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야."
"왜죠?"
"이 서버는 생존자가 거의 없는 서버거든."
"아, 왕국에서 이 서버로 들어서려면 이곳 출신을 파티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했죠?"
"맞아, 그러니 신규 서버의 자원을 캐내기 위해서는 신규 서버에서 살아남아 왕국에 도착한 유배자가 필요하지."
"그게 거의 없고 말이죠?"
"아마 이 서버가 노다지로 보이고 있겠지."
천사에게 미리 연락을 했다. 우리 마중을 나오라고.
그래야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랭커나 하이랭커가 바로 출발하여 우리를 잡으려고 들 리는 없겠지만 다수의 유배자가 억류하려고 들 수는 있다.
그러면 아주 피곤해질 수도 있다.
처음에는 몸을 숨길 필요가 있다.
왕국에 막 진입한 유배자가 아주 유명해지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아저씨도 밥 먹을래요?"
"천사의 피를 빨았다간 죽어버릴 거야."
"헉, 전 이제 아저씨에게 밥도 주지 못하는 건가요. 천사 때려치울래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희우가 손을 살짝 뻗으나 닿지 않는다. 까딱까딱하다가 멈춘다.
"만질 수도 없다니."
"계속 뱀파이어 하진 않을 테니 조금만 참아."
"손도 못 잡아! 고백해서 손해 봤어!"
"찡그리지 마. 예쁜 얼굴 못생겨진다."
의외로 희우는 그런 말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저씨."
"왜?"
"왕국에선 좀 더 여유롭게 지낼 거죠? 여기까지의 여정은 불가항력이었지만, 이젠 고를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다. 왕국에서는 주어지는 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을 골라서 갈 수 있다.
"많이 지쳐 보여요."
"그래? 사실 난 항상 지쳐 있단다."
"그런 것 말고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아닌데.
"항상 너무 바쁘잖아요. 언제나 다음 일 생각, 해야 할 일 생각, 준비해야 할 일 생각. 그러면서 파티원들 챙겨주기까지."
"그야 내가 리더니까."
"맞아요, 책임 있는 자리니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너무 과해요. 대체 몇 년을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그러게. 한 97년 그렇게 살았나."
"아저씨가 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그러려고 언데드가 되는 거니까."
"쉰다면서도 항상 뭔가 메모하고 계산하고 고민하고 있는 거 다 보여요. 진짜로 쉬어본 적 있어요?"
둘러대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없는 것 같긴 하네."
시간의 신전으로 2층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 줌이라도 더 쥐어 짜내기 위해 꼼수마저 동원했다.
그땐 정말 어질어질하긴 했다. 체력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말이다.
"이제 사냥꾼 아저씨도 없잖아요. 그럼……."
희우는 알고 있다. 꼬마 마법사도 막내도 계속 파티원으로서 함께할 정도의 동료는 아니다.
영감님은 말할 것도 없다. 전투를 위해 우리를 따라나선 것은 아닐뿐더러 유배자조차도 아니니까.
왕국부터는 희우와 꼬맹이. 그리고 임시로 천사.
그 정도로 파티가 개편될 것이다.
"지금까지 저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저씨가 혼자서는 어차피 미궁을 클리어할 수 없다고 했지요? 그게 혼자서 모든 짐을 지는 것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긴 하지."
내가 구상한 이상적인 소수 정예 파티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
상성의 문제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극복해낼 의지와 지혜 역시도.
"97년 동안 그랬으면 되었어요. 이제 짐을 나눠 주세요.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로. 제가 부족하면 공부할게요. 가르쳐만 주세요. 그, 암기 같은 건 싫어하지만 그래도 노력할 테니까요. 전투 말고 다른 것도 가르쳐 주세요."
그러고 보면 그랬다. 희우에게는 전투 기술 이외에는 뭔가를 가르친 적이 없다.
사냥꾼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냥꾼이 없다. 희우는 그 빈자리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 * *
희우는 생각했다.
아저씨는 언제나 후다닥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보였다. 언젠가 무언가 해야 한다.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홀로 있을 때도 끊임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며 계산하고 예측하는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에서 그렇게 압박을 받는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생각에는 미궁의 클리어를 실패하고 100년이 다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같이 행복할 수 있다면 되는 것 아닐까?
사냥꾼의 가족은 NPC다. 하지만 그가 행복하지 않아 보이냐고 한다면,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 보이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하며 아저씨의 강박 중 하나는 알 것 같았다.
NPC다.
3층에서 한 번 터져 나온 이후 다시 그 흔적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때 그것은 분명 폭발이었다.
쌓여온 자기 의심과 불안의 폭발.
정신적으로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그런 대폭발.
그것은 평소의 태도로도 드러난다.
처음에 설명하기 위해 몇 번인가 NPC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후로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말한다. 본인이 NPC임을 아는 영감님조차도 굳이 그 단어를 거부하진 않았다.
게임으로 이 세계를 이미 접해본 바 있다고 했다. 여신님을 통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게임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처음에 그 의문을 떠올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살아 있고 숨 쉬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 아닌가?
데이터 조각이 뭐 어쨌다고.
희우가 두려운 것은 그것이었다.
아저씨가 자신을 보는 눈이 가상의 캐릭터를 보는 눈이 아닐까 하는.
사냥꾼처럼 진심일 수 없는 어딘가 거리감을 두는 눈.
행복을 찾아 떠난 사냥꾼을 보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아저씨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미궁을 공략하는 모습은 빈말로라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클리어한 이후가 걱정될 정도다.
그 끝엔 과연 아저씨의 행복이 있을까?
그 끝에 무엇이 밝혀지건 완전히 연소된 끝에 재만 남아버리는 것 아닐까?
광기어린 집착 같은 목표는 그런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오히려 그런 것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언젠가부터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다.
"저를 사랑하세요?"
"그럼."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마세요. 나를 위해 대답하는 것 같잖아요.
저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사랑함으로써 정말로 더 행복하면 좋겠어요.
"정말로요?"
"물론이지. 안 그러면 안 받아준다고 철벽을 치다가 결국 함락되었겠니?"
그래서 당신이 저로 채워졌으면 좋겠어요. 목표를 이루건 이루지 못하건 텅 비어버리지 말았으면 해요.
지금도 짓고 있는 사람 좋은 따뜻한 미소.
하지만 어딘가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언젠가부터 그 불안감이 보이게 된 미소.
계속해서 흠모하고 지켜보았으니 알 수 있는 그런 뒤편의 미묘한 감정들.
이 사람은 생각보다 약한 사람이다. 너무 굉장하고 대단한 능력이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
그래서 여신님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의 뒤를 따르는 동료로 끝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인생의 동반자가 되고 싶다.
처음 반했던 계기는 이제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곁에서 함께하며 서로를 지탱하는, 그런 것이 부부라고 했던 것 같다.
아직은 가족 놀이 비슷한 것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정말로…….
그래서 아저씨의 결말을 행복으로 만들고 싶다.
* * *
희우의 묘하게 걱정스러운 어딘가 불안감 있는 표정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슬슬 그걸 알려줘야 하는데.
정씨 집안에 대한 이야기.
희우는 슬프지만 NPC일 확률이 너무나도 높다.
왕국에 가면 알아보는 고참들도 많을 것이다.
정씨 성을 가진 채로 초인의 가계로 태어나는 한국인.
이 아이가 그것에 상처를 받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흔들린다면 받쳐줘야 한다.
아니, 사실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그게 중요한 일인가요? 하면서 나를 향해 웃어줄지도 모른다.
그래, 문득 깨달았다.
그렇게 인연을 거부하려고 하다가도 이렇게 빠져들고만 이유를.
한없이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 넘치는 사고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왔던 불길한 감정을 녹여준다.
보고 있자니 고민은 다 사소한 게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 긍정으로 가득한 아이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97년간 쌓아온 어둠을 밝혀줄 태양 같은 아이다.
초회차여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미궁에서 쌓아올리더라도 이 아이는 그대로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그것을 내 믿음으로 삼고 싶다.
게이머로서의 자존심이라거나, 클리어를 향한 희망이나, 내가 인간이라고 믿는 그런 사소한 것보다도.
이 아이를 내 믿음으로 삼고 싶어졌다.
태양신앙은 흔한 것이었지. 왜 그런지 알겠다.
내겐 참으로 눈부신 아이다.
그래, 나는 지금까지 고독했던 모양이다.
* * *
어떤 두 바보의 순수한지 풋풋한지 모를 생각이 엇갈리고 있을 무렵, 사냥꾼은 풀내음이 나는 숲속에 도착했다.
이젠 흐려졌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쉬이 되살아난다.
이곳은 그가 살았던, 그리고 묻히고자 했던 땅이다.
익숙한 오솔길을 통해 숲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요정의 마을이 보였다.
요정들은 모두 마을 중앙의 광장에 모여 있었다.
차분하고 침체된 분위기가 그곳에 맴돌고 있다.
어째서지?
그리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한 노인이 요정들의 중심에 누워 있다.
편안하게 미소를 짓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뒤에 있었던 것은 절망.
100년을 미처 채우지 못했기에 생겨난 구렁텅이.
이것은 그의 장례식이었다.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없었다.
사냥꾼이 가까워지자 요정들이 하나 둘 낯선 이의 방문을 깨달았다.
아니, 낯설지는 않았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이 잘 모르겠는 요정의 얼굴이 누군가와 겹쳐졌다.
지금 눈을 감은 이 노인이 더 젊었던 시절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알아본 것은 식장의 가운데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딸도.
세 요정의 눈이 커졌다.
사냥꾼은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요정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어떻게?"
사냥꾼은 지금에야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이 인연을 만들어준 처음의 원인, 헤어지게 만든 또 다른 원인, 그리고 다시 여기서 이어준 다시 또 다른 원인.
결국 같은 단어 하나를 말했다.
"나는 유배자잖아."
그 덕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덕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달려와 안겨드는 가족의 온기가 너무나도 따뜻하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
미궁이 언제나 비극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죽은 자를 되살려 돌려보내주기도 한다.
그렇게.
한 유배자의 여정이 지금 이곳에서.
결말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