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71화
왕국 ? Lv. 116 전사의 나라(1)
"한가하군."
"이제 와서 여기로 넘어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이걸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하여간 윗대가리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서."
"한직에 밀려난 것도 서러운데 하는 일도 없군."
통칭 [왕국의 문]이라고 불리는 장소는 왕국 내에 네 곳이 있었다.
본래라면 아주 중요한 시설이다.
그곳을 통해 새로이 유배자들이 수혈되며 왕국의 힘이 유지된다.
유배자의 후손은 유배자가 아니기에.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의미는 지난 8년간 퇴색될 대로 퇴색된 지 오래였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넘어오는 자가 없다.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수준의 고참이었으며, 튜토리얼의 험난함을 증언했다.
제46서버는 유례없는 수준의 꽝이었다.
"대충 10년에 한 번이니 47서버 열릴 때도 되었지 않나?"
"신들도 기다리고 있을걸. 거기라도 빨리 열려야 하는데."
"피곤하구만. 그래서 그 전설의 파티라는 건 있긴 한 건가."
"그 동네 NPC들이 만든 신화 같은 거겠지. 그런 파티가 어떻게 존재하나. 넘어온 놈들도 다 하나같이 랭커쯤 하던 놈들인데."
"나도 랭커하고 싶다."
길드의 헤드헌터들도 일을 잃은 지 오래다.
본래라면 꾸준히 사람을 토해내어야 할 왕국의 문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넘어온 것도 5년쯤 전의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 같았으면 요직이었을 왕국의 문 관리자는 이제 아무 쓸모 없는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사왕국] 중 가장 호전전적인 전사의 나라, [하드스록]의 길드원으로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솔직히 이제 와서 누가 넘어온다고 해도 대부분 왕고참들이잖아."
"재미도 없어. 선임이 온 기분이니."
다른 회차에서 랭커급의 전력을 지니다가 죽어 재시작한 인원들은 튜토리얼을 막 끝마친 상황에서도 무시 못 할 전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길드에서 조금 밀어만 준다면 랭커급의 전력으로 빠르게 다시 거듭날 수 있다.
왕국의 문지기인 두 사내도 나름대로 짬이 찬 30년 차들이지만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이들이다.
"대체 어떻게 살면 그렇게 되는 거지? 매일같이 꼬라박나? 더 강해질 방법을 찾아서."
"몰라, 우리 대장도 보면 하루 종일 뭔가 연구만 하잖아. 마인드맵 쳐다보면서."
"난 랭커 못하겠다. 그냥 고만고만하게 살다가 가야지."
할 일도 없는 근무라면 잡담에 끝이 날 수도 없다.
챙겨온 간식거리를 씹으며 떠드는 야밤이었다.
철야 정도로 체력이 부족할 리는 없다. 둘의 레벨은 200이 넘었으니까.
따분함이 문제일 뿐.
"어라, 누가 왔는데?"
"뭐지?"
왕국의 문 앞에 세워진 일종의 검문소는 임시 숙박시설의 역할도 하고 있기에 규모가 꽤 크다.
단련된 전사의 시각에 사뿐사뿐 걸어들어오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보였다.
잘 식별되지는 않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미인이다.
보통 인간형인데 희한할 정도로 미인이 있다면 제 종족을 숨긴 경우다.
혹시 모를 전투를 대비하여 무기를 쥐는데 사뿐사뿐 걸어오는 듯한 상대의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정지! 어떤 일로 오셨나?"
금발의 여인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문지기들이 미간을 찌푸린다.
강자의 태도라는 것은 그냥 겪다 보면 알게 된다.
상대가 현재 자신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내비치면 그보다 곤란할 수가 없다.
제지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대체 누군지는 알아야 대응할 것 아닌가.
괜한 시비를 붙었는데 자신들이 몰랐을 뿐 엄청난 고참이거나 했다간 삶이 피곤해지다 못해 다음 회차 구경을 하러 갈 수도 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와서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문지기 둘은 입을 벌렸다.
"오, 온다. 잠시만 빨리 지부에 연락해!"
"으앗."
* * *
왕국의 문을 통과하는 과정은 제법 요란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빛이 번쩍번쩍하고 나는 주제에 열리는 속도도 느리다.
완전히 열리기 전까지는 통과할 수도 없다.
허둥지둥하는 남자 둘이 보였다.
길드에서 보내둔 문지기들인 모양이다.
그 뒤로 단출한 숙소로 보이는 건물도 있다.
자리를 어느 정도 잡은 왕국은 저런 시설이 있다.
그리고 천사도 보였다.
날개와 링을 숨기고 인간인 척하며 지내고 있다더니 감쪽같다.
천사가 손을 흔들기 시작하자 급하게 연락하고 있던 두 남자도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서로 뭐라 대화를 더 나누더니 우리를 보기 시작했다.
소속된 길드에 연락은 보낸 모양.
하지만 득실득실할 길드 스카우터들은 보이지 않는다.
천사를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하도 뉴비가 들어오지 않아서 왕국의 문에 대한 기대가 이미 없다고 했던가.
스카우터들도 다들 본업이나 하러 가 있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좋다.
대단한 주목을 받기는 해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운신이 어려워진다.
튜토리얼이 괜히 튜토리얼이겠는가.
홀수 층이 유배자들끼리의 협력 혹은 전투를 강요하는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홀수 층은 결국 왕국의 축소판이다.
힘만이 전부인 세상.
어떤 의미로는 왕국 이전보다도 비정한 공간일 수 있다.
특히나 어중간한 랭커라면 모를까, 하이랭커급이 넘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왕국이 들썩인다.
기존의 권력자들은 새로운 하이랭커를 환영할지 배척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단순히 연차로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왕국에 도달하면 튜토리얼에는 없던 새로운 시스템이들이 생겨나니까.
문이 완전히 열렸다.
희우가 희뿌연 막을 의심스레 쳐다본다.
"이거 그냥 지나가도 되는 거예요?"
"여길 지나면 다시 왕국 이전으로는 갈 수 없게 되는 거야. 왕국 이후의 시스템이 통용되는 세계로 가는 거지."
요정 마법사는 이 문을 지나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 대신 문을 반대로 열어 서버에 남는 것을 골랐다.
보통은 그런 방법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걸 아는 시점에서 요정 마법사는 랭커급이거나 그보다 조금 모자란 수준의 고참은 맞았을 것이다.
애초에 어지간한 운으로는 통과할 수 없는 튜토리얼이다.
우리만큼 힘들진 않더라도 우주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솎아내었을까.
"다들 일단 통과하자마자 겁나게 뛰어야 해. 우린 거대 길드랑 엮이고 시작할 이유가 없어."
나 이외에는 왕국의 경험자조차 없는 파티다.
다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마법사들이 [헤이스트]를 캐스팅한다.
단순히 달리기가 빨라지는 마법이지만 이럴 때는 유용하다.
"가자고!"
문을 통과했다.
그 순간 폭죽이 터진다.
정확히는 조금은 다른 것이다.
수많은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그게 너무 많아서 마치 폭죽 같아 보인다.
[드래곤 슬레이어]
[정령왕 살해자]
[화신의 대적자]
[신의 화신]
[혼돈의 대전사]
[행성파괴자]
[그린스킨 학살자]
[고블린의 친구]
[요정의 동반자]
[경외 받는 자]
[위대한 수령 동무]
[성녀의 구원자]
얼른 눈에 띄는 것만 해도 이런 수준. 그러고도 여러 가지 칭호들이 펑펑 터져 나온다.
칭호는 왕국에 도달하면 열리는 시스템이다. 귀한 칭호는 왕국에서의 신분증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동시에 레벨 이외에도 간접적으로 상대의 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나 이외의 다른 파티원에게도 폭죽이 펑펑 터지고 있다.
유배자가 아닌 인원들에게도 그렇다. 어쨌든 모두 튜토리얼을 통과한 셈이기에, 그 수혜를 받는 모습이다.
낯선 메시지들에 꼬맹이의 눈이 핑핑 돌기 시작하기에 들쳐업었다.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천사가 길을 선도하며 인사를 한다.
그동안 어찌나 잘 지낸 모양인지 얼굴에 윤기가 좔좔 흐른다.
나는 여신님께 빌어 천사의 레벨을 확인했다.
"이배애애애액?"
"네? 아니. 아 레벨 말씀이구나."
"너 정말 놀기만 했어? 왜 나보다 레벨이 낮아?"
"어? 그럴 리가. 아니, 정말이네. 어떻게?"
"딱 대 임마. 한동안 굴려주지."
천사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 바람에 날개와 링을 숨기는 마법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게 되었다.
날개와 링이 드러난다.
"천사? 아니, 둘이다! 천사가 둘이야!"
"칭호가 수십 개는 되는 것 같습니다! 네? 잡으라고요? 아니 우린 못 잡아요! 천사가 둘이라니까?"
문지기들이 허둥지둥하는 소리가 들린다.
곳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왕국의 문 근방에 길드의 거점을 두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서 멀어져야 한다.
잡히면 너무 피곤해질뿐더러…….
솔직히 말해 여기서 이번 회차가 끝나는 수도 있다.
기존에 자리 잡은 이들의 눈에 이 미친 듯한 칭호의 목록이 어찌 보일까?
누가 봐도 미리 짓밟아야 할 싹으로 보이지 않을까?
숨이 턱 끝까지 닿은 후에 겨우 추격을 따돌렸다.
사실 따돌릴 것도 없었다. 왕국의 문은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라 주변에 대기하는 길드 병력조차도 없었다.
"허억, 허억."
가장 체력이 약한 꼬마 마법사가 눈이 빙글빙글 돌더니 쓰러졌다.
희우가 탁 하고 받쳐 든다.
무수한 골목길 사이를 달리고 달려 도착한 이곳은 그야말로 저택.
위치는 으슥하지만 답지 않게 화사하다. 정원에 분수대라니 정말 럭셔리하게 살고 있었군.
천사는 조금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소개했다.
"선배님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린 집입니다!"
"잘했어. 시킨 건 똑바로 잘해."
"헤헤."
* * *
전사의 나라 하드스록에 비상이 떨어졌다.
"이런 제기랄, 그러니까 마법사 인구를 좀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했잖아!"
"뉴비가 없는 걸 어떡하오! 그렇다고 멀쩡한 전사를 마법사로 만들어?"
"사나이의 나라에 비겁한 마법쟁이들을 끌어들이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전사의 나라는 애초에 전사 길드 연합체이며, 마법사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은 것이 그 시초다.
미궁의 상성상 순수 전사에 가까울수록 마법에 취약해진다.
그러니 이들이 마법을 좋아할 리는 없다.
"마법사가 없으니 그냥 달려서 도망쳐도 잡을 수가 없지 않나!"
"잡는다니 말조심하시오. 46서버를 통과해 왕국에 도달했다면 이미 즉시 전력감이라 볼 수 있는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화는 해봐야 할 것 아냐. 대체 왜 그렇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친 거야."
"마법은 안 된다!"
사실 애초부터 문지기 둘만 남기는 게 아니라 정상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다.
왕국의 문을 넘어오자마자 깽판을 놓으려는 불한당도 많았기에 원래 같았으면 그랬으리라.
그런데 5년은 새로운 유입이 없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공감이 되긴 하는군. 8년, 8년을 그 안에서 보낸 것 아닌가."
"거기에 문지기가 목격한 칭호 목록만 해도 이미 몇 줄일지를 모르니."
"그중 반의반의 반만 사실이라도 도망치긴 하겠지. 당장 일그림 같은 놈들은 새로운 하이랭커를 두 눈 뜨고 못 볼걸."
"마법은 안 된……! 그건 그렇군. 일그림이 제 놈의 경쟁자를 살려둘 리가 없지."
"마법무새는 그만둔 거요?"
"그거랑 뉴비 사다리 걷어차기는 별개지. 나는 랭커가 되었다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 아주 별로야. 물론 마법사는 안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자리의 셋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떡해야 하지?
각자 이 회차에서 랭커라 불릴 만큼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번 왕국에서 유배자로서의 마지막을 겪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이 왕국이 무너지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기대를 놓고 있었던 46서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일단의 무리들은 랭커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마저 초월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개방되는 칭호의 목록은 모든 이들이 목격할 수 있다.
애초에 칭호는 왕국 이후의 중요한 신분증 중 하나니 당연하다.
일반적으로는 다섯 개 남짓이나 겨우 뜬다. 거기에 긍정적이며 유의미한 칭호가 하나 정도만 있더라도 유망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문지기가 목격한 것들은.
"그야말로 위업들뿐인데."
"튜토리얼에서 드래곤을 어떻게 때려잡는 건가? 그보다 만날 수는 있고?"
"하, 랭커들에게 협조 요청을 해야겠소."
일단은 찾아야 한다. 해를 끼칠 생각이 없음을 알리고 보호해야 한다.
최소한 의도라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그 파티원 6명이 전원 다른 회차에서 하이랭커를 하다가 온 경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8년간 느릿느릿 움직인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다.
하이랭커 수준이면 아무리 그래도 100년 직전에 모종의 이유로 다음 회차로 떠난 것이다.
하나뿐인 목숨은 소중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중 나온 동료가 하나 있다고 했는데?"
"천사였다고 하더군."
"이 왕국에 천사가 몇 명이나 있다고……."
튜토리얼과 왕국이 소통을 하려면 신이 직접 중개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신도에게 관심이 많은 신은 드물다.
애초에 소규모 교단이 아니면 불가능하기도 하다.
"일단 규모가 작은 교단은 전부 확인해 봐야겠군."
"신께서 노하지 않도록 공물도 바치며 여쭈어야겠어."
그렇다 하더라도 암담하다.
현재 전사의 나라를 이끌고 있는 삼의회의 세 명은 암담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의 미궁 평생 어떠한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수준의 뉴비이기에.
어떤 파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어쨌건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바로 당일 새벽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