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73화
왕국 - Lv. 116 전사의 나라(3)
천사가 알려준 이야기 대부분은 정말로 그냥 신문을 보거나, 이웃들과 수다 떨며 알게 되었거나, 그런 종류의 상식이었다.
그래도 천사는 자신이 이것을 위해 8년간 신문도 구독해 왔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뭐 어쩌라고 싶지만 본인은 스스로의 노력을 뿌듯하게 여기는 모양이니 내버려 두었다.
확실히 중요한 정보라도 캐라거나 천사라는 종족을 이용하여 어느 길드의 중진이 되라거나.
그런 식의 어려운 지시를 내렸으면 큰일 났을 게 분명하다.
나는 딱히 한숨을 쉬지는 않았다. 아무런 야망도 없이 소박한 성격이니 8년간 조용히 지낼 수 있었고, 그랬기에 꼬마 마법사가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언제 건 뒤통수를 칠 시간은 있었다.
내 예상대로 천사는 그냥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7층에서 울며 절규했던 내용은 온전한 사실이었단 말이지.
어쨌든 그 완전히 일상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하드스록은 꽤나 허술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왕국에 존재하는 ‘왕국’들은 제대로 된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길드의 연합체.
그리고 길드 연합체의 수장은 강력한 유배자.
현대국가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는 행정 체계를 기대할 수는 없다.
물론 그쪽 일에 종사하다 온 유배자들이 관료로서 종사하며 어떻게든 틀을 잡기는 하겠다.
그러나 결국 그 근본은 어설픈 초인 통치의 유사국가다.
그나마 비슷한 급의 랭커들이 균형을 이루기에 독재가 되기는 힘들다 정도는 다행일까?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유배자들이 국가의 체계에 대해서 배우는 곳도 결국 이전 회차의 어느 왕국이다.
돌고 도는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대부분의 왕국은 비슷한 형태의 국가가 성립해 있다.
그랬기에 나는 일을 묶어서 처리하기로 했다.
일이 지속되면 결국 하이 랭커들의 귀에도 이 우리의 존재가 알려질 것이다.
그 전에 차라리 하드스록의 수뇌와 접촉한다.
희우와 놀러 다니는 것은 겸사겸사.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있는 와중, 건너편 요정 부부의 테이블에 누군가 나타나 합석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장비도 평범하고 저 노부부와도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공개해 둔 칭호도 아주 평범하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평범함과 대비되는 걸음걸이, 그리고 몸짓.
저건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그다지 자신이 없다.
따로 위장 스킬이 없다면 몸에 밴 기술을 감추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으니.
희우는 파스타를 흡입하며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도 계속 새어 나오는 모양이다.
"저, 그냥 파스타가 이렇게 맛있는 건 줄 처음 알았어요!"
"그래. 그래. 이제 식자재 수급이 쉽고 설비도 있으니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사실 내가 이 레스토랑보다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아저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요."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고."
일단 한 그릇 더 시키자. 아니 두 그릇, 곱빼기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옆에 에이드도 쪽쪽 빨아 먹고 스테이크도 천사의 손놀림으로 흡수하고 있다.
피자는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입속에 구겨 넣어진다.
바위 난쟁이로 보이는 종업원이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며 새 주문을 받아갔다.
사실 꼭 종업원이 아니어도 시선이 많이 쏠리고 있다.
일부러 잔뜩 꾸미고 나온 덕분이다.
원판이 좋은 데다 종족도 좋다 보니 한껏 메이크업을 빡세게 한 희우는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다.
눈물 줄줄 흘리며 음식을 입에 구겨 넣고 있는데도 그렇다.
마주 앉은 나도 주변을 의식하는 젠틀한 미소.
주로 귀족이나 왕족을 상대할 때 취하는 태도다.
기품과 귀티가 좔좔 넘쳐흐르니 적당히 소문은 날 것이다.
그리고 그 어그로에 하이 랭커는 끌리지 않는다.
하이 랭커는 더 강해지는 법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힘의 망자들이니까.
외모에 신경 쓰는 하이 랭커? 참 웃긴 소리지.
그렇게 배가 볼록 나와 체형이 변할 정도가 된 후 계산하고 나왔다.
희우가 내 눈치를 보더니 최대한 소리 죽이고 트림을 한다. 쯧쯧. 다 들린다. 다 들려.
요정 부부와 합석한 척하던 사내도 따라서 일어섰다.
일부러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간다. 미행하던 사내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선배님? 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두자고."
힘이 곧 정의.
연차가 곧 힘인 것은 튜토리얼 이전이나 그렇다.
왕국에선 힘센 쪽이거나 더 세질 쪽이 선배다.
"의도하신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그…… 딱 저희 귀에만 들어올 정도로 시선을 모으셨더군요."
"지금쯤이면 소문은 안 났을 거고 수뇌만 알겠거니 했지. 그래, 인간인 거 보니 당신이 몽환의 숲을 정복한 마이어인가?"
"후, 그리 부르면 부끄러우니 그러지 마시지요. 잠깐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아니, 난 긴 이야기 할 생각 없어. 어차피 강제는 못 할 거 알잖아."
마이어는 조금 난처하게 고개를 들었다.
"못 할 것 같습니까?"
"뒤에 셋, 앞에 넷. 그리고 지붕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게 둘."
"……잡아!"
* * *
랭커의 기준은 왕국마다 조금씩 다르다.
통상적인 왕국에서의 랭커는 1,000레벨 정도면 족하다.
겨우 일반적인 히어로 유닛이 아닌가 생각할 수는 있지만 유배자가 그 정도 레벨에 도달하려면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다음 회차로 사출되지 않는다면 충분히 제 실력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리프트]는 사냥터를 제공해 줄 뿐이지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회차의 왕국은 인구가 훨씬 많았고, 자연히 랭커라고 불리려면 그보다 높은 레벨이 필요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아홉은 전원 1,500레벨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괴물들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했다.
8년간의 레벨링?
계층 형식이라 한정된 자원만이 주어지는 왕국 이전 구간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는 없다.
[심연]같은 시간이 뒤틀리는 공간을 다녀왔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뭉개다가 온 것이다.
그랬기에 랭커들은 이 하이 랭커 출신으로 추정되는 선배를 제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주의해야 할 것은 함정.
온갖 기상천외한 수단을 다루고 그것을 결코 남에게 공유하지 않는 것이 하이 랭커라고까지 불리는 괴물들의 특징이다.
스펙 이전에 수단이 다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만 조심한다면, 절대적인 능력치에서는 밀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막 왕국에 진입했을 뿐인 상대니까.
직선으로 돌격하는 전사들은 그래서 상대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두들겨 팰 생각을 했다.
즉사하지만 않는다면 힐링 포션이 살려낸다.
오히려 죽을까 봐 본격적인 액티브 스킬은 자제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달려들지 않고 사태를 지켜본 마이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는 있었다.
정말로 보기만 했다.
빌어먹게도 잘생긴 사내의 옆에 서 있던 미녀가 움직였다.
아니, 그것을 움직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맹세코 상대가 [시간 정지] 따위의 트릭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정도를 감지할 수 없다면 랭커가 될 수 없다.
발동하는 스킬 따위 없이 제 발로 뛰어 앞에서 덮치는 둘을 발로 까서 날려버렸다.
포탄처럼 날아가는 그 둘에 의해 전방에서 달려들던 다른 둘도 엎어진다.
위에서 덮쳐들던 둘은 잡혀 메쳐졌다.
뒤편의 둘이 동료를 찌를 수 없으니 무기를 거두었고 그 틈에 제압당했다.
정확히 뒷목을 가격하여 쓰러뜨린다.
저들이 느린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스킬도 발동하지 않았지만 쏘아진 화살만큼은 빨랐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마이어의 인지능력도 당연히 초인적이었다.
하지만 마이어는 단지 보았을 뿐, 단순한 신체 능력만으로 저것에 반응할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뒤늦게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만큼의 강풍이.
이 모든 일이 움직임에 대기가 압축될 만큼의 속도로 일어났다.
마이어는 과연 삼의회의 일원다운 순발력을 발휘했다.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부디 노여워 마시고 저희가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헤아려 주신다면 보답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인다.
젠장? 어떻게?
서로 스킬을 쓰지 않았지만 너무 극명하게 갈리는 신체 능력 차이다.
심지어 지금 덮친 이들은 모두 전사다.
[심연]에 들어가서 100년 동안 학살쇼를 하다 나왔는데 겨우 8년밖에 안 흐른 건가?
보고받은 칭호가 다 사실이라고 해도 네 자릿수 레벨은 불가능한데?
경험치가 물리적으로 그렇게 주어질 수가 없다.
자유 PK층인가? 아무리 그래도 500렙은 못 넘을 건데?
신앙? 아니지 권능을 쓴 느낌도 아니었다.
천사? 그래 천사가 둘이랬지. 천사인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기껏해야 레벨 200따리일 천사가 뭐 저렇게 세.
번개처럼 스치는 깨달음.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200렙 정도가 아닌가 보다.
잘 모르겠으면 일어난 일을 믿으면 된다.
"스킬을 구사하지 않고 저희 목숨을 살려주신 것에 너무 감사드리며……."
그 와중,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죽었다.
젠장. 난 다음 회차가 없는데. 그냥 전부 데려와야 했어. 아니다. 하이 랭커를 부를걸.
이미 패닉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와중에도 아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정해. 후배님. 우린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그럼요!"
따뜻한 미소가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오싹했다.
* * *
스킬 위주의 싸움에 너무 익숙해진 랭커 놈들은 쉽게 착각하곤 한다.
애초에 기본기보다 스킬에 의존하는 게 유배자의 보통이니 어쩔 수 없긴 하다.
기술을 연마하는 것보다는 레벨을 하나 더 올려 액티브가 뭐 하나 더 생기는 게 더 쉽게 강해진다.
최소한의 기술을 갖춘 후에는 보통 등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술마저 파고드는 변태여야만 하이 랭커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 희우의 신체 능력과 기술은 경이롭다 못해 뭔가 유니크 액티브라도 하나 켠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누가 봐도 그게 아닌 걸 알 수 있는 맨몸으로 말이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의 격차는 우리 레벨을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신에게 빌어 확인할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 여신님같이 한가하지 않은 이상 그리 즉각적으로 반응해주지는 않는다.
이 가련한 남자는 완전히 착각의 늪에 빠졌다.
그 착각을 더 가속하기 위하여 칭호 돌림판을 좀 보여주자.
뭐가 좋을까?
"이거 보여?"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은 참 웃기긴 하다.
착착 돌아간다.
[드래곤 슬레이어]
[화신의 대적자]
[행성파괴자]
드래곤 슬레이어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화신의 대적자에서는 의아함만 가득해졌고.
행성파괴자에 이르러서는 대체 그게 무슨 칭호인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사실은 알지만 상상하기도 싫다는 얼굴이 되었다.
희우는 하나만 띄워도 되었다.
[시간의 천사]
비교적 만만한 심연의 신을 제외하면 대신격의 신앙을 보유한 유배자는 극도로 희귀하다.
어느 정도냐면 천사보다 희귀할 정도다.
그럼 시간의 천사라는 건 대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운빨똥망겜의 덤프트럭이지.
사람은 말이야……. 천사에 치이면 죽어!
칭호 돌림판까지 본 남자는 완벽하게 전의를 상실했다.
전의는커녕 무언가 생각하고 왔던 교섭의 내용마저 백지로 돌아가 버린 듯했다.
멍한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모두 뜻대로 하겠습니다……. 부디 저희 길드만은……."
상대의 눈빛에 완전한 체념이 깃드는 것을 보는 일은 은근히 즐겁다.
* * *
돌아오는 길에 희우가 물었다.
"진짜 목숨 걸고 싸웠으면 졌겠죠?"
"아직 레벨링도 파밍도 안 해서 서로 스킬 밑천까지 다 털었으면 도망치기도 힘들었을걸?"
"공간이동으로 튀어도요?"
"그거 사실 아주 찰나는 공간의 균열이 남아. 걔들 속도면 공간이동을 따라갈 수도 있어. 너도 할 수 있고."
"와……. 그런데 잘도 속을 거라고 확신하셨네요."
이건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 안다고 희우가 따라 할 수는 없을 거다.
"사람은 말보다 다른 것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표정, 몸짓, 눈빛, 하다못해 손의 모양에서조차도 정보를 얻지."
"그건 심리학자들이나 그런 거 아닌가요?"
"아냐, 그냥 본능적으로 그래. 그러니까 나는 내 모든 행동을 그야말로 그 남자의 상상 속에 존재할 법한 까마득한 하이 랭커에 맞춘 거지. 상상력을 가동할 소재만 잔뜩 쥐여준다면 누구나 속아."
"오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따라 할 필요가 없다.
"넌 연기할 필요가 없지. 언제나 그렇게 자신감이 넘친다면 누구나 속아 넘어갈걸."
"그런가아."
항상 태양처럼 빛나는 자신감의 덩어리.
좌절보다는 전진.
절망보다는 희망.
가아끔은 의기소침하긴 하지만 그것마저 귀여운 시간의 천사 아니겠나.
돌아가는 길은 데이트의 마무리.
싱글벙글한 희우가 무심코 내 손을 잡았다가 나를 불사른 점만 빼면 아주 좋았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꼬마 마법사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 나라의 수뇌 중 하나가 협조하게 만들었으니 지금부터는 이 녀석의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