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74화
왕국 - Lv. 116 전사의 나라(4)
내가 꼭 편견을 가지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경향성이 존재한다.
미궁에서 어떠한 클래스를 주력으로 삼느냐는 생각 외로 그 사람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지표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쁘면 할 수 없다.
바깥에서의 직업이 학자이거나, 교수이거나, 프로그래머거나, 사기꾼이거나 어찌 되었건 머리 쓰는 일로 취급받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성직자도 일정 부분 공유하는 특징이다.
민첩직인 궁수와 사수, 그리고 암살자.
이쪽은 흔히 한데 묶이지만 의외로 그들끼리도 성향은 갈린다.
사수는 블루칼라 전문직과 군인들이 많다.
궁수는 마법에 한 발을 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이 어딘가의 사람들이 분포한다.
암살자는…… 특수전 군인이나 범죄자가 많다.
군인이라면 가까이 지낼만한 사람이겠으나, 범죄자라면 정말 악질 중의 악질일 가능성이 높다.
전사는 아무래도 몸을 쓰는 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다.
운동선수나, 현장직 종사자, 그리고…… 야쿠자나 삼합회 등의 범죄자들.
일반화할 정도는 아닌 경향이다.
하지만 왕국에서 거대한 길드라는 집단이 된다면 저 경향에 따라 길드들은 각자 극명한 특징을 보인다.
전사의 비중이 높은 국가가 있다면 대체로 슬럼가가 대규모로 형성된다.
그런 나라는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군소 길드들도 유난히 난립하는 편이다.
바깥에서도 범죄 조직을 꾸리던 자들이 원인인데, 그들은 심지어 끼리끼리 뭉치는 것을 잘하는지라 더욱 큰 문제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미궁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개인이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이곳은 어찌 보면 그들의 홈그라운드니까.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통제가 못 미칠 줄은 몰랐는데."
"다른 나라도 정도의 차이지 상황은 비슷하다고 하네요."
"슬럼이야 어딜 가나 있지. 왕국에 복지제도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
애초에 이토록 규모가 큰 왕국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국가가 존재해도 하나나 둘 정도로 갈리는 편이다.
사왕국, 클래스별로 예쁘게 네 개로 나뉘어 있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보통은 성향이 갈리는 클래스들끼리도 어느 정도 뒤섞여 어울리며 그 길드 연합체 안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지낸다. 균형과 조화까진 아니더라도 서로 으르렁대며 미운 정도 들고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이렇게 완전히 갈라서기까지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모르겠군.
전사와 마법사가 특히나 원수지간이다.
그리고 바깥에서 관리직 경험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마법사다.
결국 진정한 싸나이들만 남아버린 전사의 나라.
이 나라는 무려 영토의 절반 이상이 슬럼이었다.
빈민이라는 의미의 슬럼이라기보다는 거칠고 험하다는 의미의 슬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스토피아잖아. 시가지만 벗어나면 난개발 골목들이 가득하고, 온갖 조직들의 전국시대. 이건 왕국 초기 개척시대에도 안 이런데."
국가의 이름이 된 연합체의 중심 길드 [하드스록]조차도 제대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곳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덕에 천사는 이런 저택에 살면서도 발각되지 않고 지냈다.
"슬럼 내의 고급 주택단지도 참 말 같지 않은 일이야."
"구하느라 나름대로 고생했어요!"
이게 약간 우스운 일일 수도 있는데 여신님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의뢰를 받아주고 이 주변 지역을 장악한 조직의 호감을 샀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천사님의 왕국에서 직업은 히트맨 되시겠다.
"살인에 별 거부감은 없나 봐? 그렇게 안 봤는데."
"저 광전사라 [광화] 켜면 괜찮아요. 끝나면 피가 좀 묻어 있어서 그렇지. 헤헤."
해맑게 웃으면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하지만 적게 일하고 많이 벌려면 역시 그런 거뿐이더라고요."
레벨이 좀 낮아도 천사는 천사다. 목표가 랭커급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있는 이는 드물 것이다.
사실 천사의 레벨 200은 그리 낮은 것도 아니다.
튜토리얼 통과자의 평균 레벨은 100에도 미치지 못하며 대다수는 그대로 왕국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눌러앉는다.
절대다수의 유배자들은 레벨이 100 남짓에 불과하다.
이런 안정된 왕국이라면 훨씬 더 하다. 아마 200렙도 상위 10%는 될 거다.
일단 여신님께 물어보자. 천사에 대한 관리는 여신님께 일임했었다.
너무 좋아하시기에 말이지.
"어떻게 된 겁니까. 얘 왜 이런 걸로 먹고 살고 있어요?"
여신님은 변명했다.
「아니, 그렇지만 이 녀석. 힘쓰는 거 말곤 시킬 게 없다고. 위험한 곳도 안 가려고 하는데 그걸 어찌 억지로 보내나.」
"이야, 부끄럽네요."
하기야 몸을 숨기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너무나도 안정된 왕국이기에 [리프트]는 네 왕국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임시로 하던 일이었지만 위장 신분이 생긴 후에도 관성으로 이어온 느낌인가.
"저는 불만 없어요!"
"아니, 그래 알겠어. 하나만 물어보자. 바깥에서 무슨 일 하다 온 거야?"
지금의 천사는 몹시 아름답지만, 천사 보정을 떼고 인간 시절의 모습을 역산해보면 아주 예쁜 편은 아니다.
그냥 마을 정도 수준에서 인기 있는 동네 처녀 정도.
진한 허니 블론드와 해맑은 미소가 매력적인 순수한 아가씨겠지.
특정 부분은 희우나 꼬마 마법사가 시무룩해질 정도로 굉장하지만 그뿐이다. 외모로 먹고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온전히 머리 쓰는 화이트 칼라 직업도 제외하자. 그건 아닌 것 같다.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 아마 나름대로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의 힌트는 보통 손에 있다.
손가락에 약간 화상 자국, 그리고 날붙이에 의한 자상의 흉터 같은 것도 약간.
거기에 저택의 주방이 아주 본격적인 것을 보면 설마…….
"요리사였어요! 제 가게도 있었답니다."
"세상에."
"이 말을 하면 다들 놀라더라고요."
"항상 밝히고 다니는 건 아니지?"
천사는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설마요. 친구가 되고 난 후에나 바깥 이야기를 하는 거죠."
생각해보면 이렇게 맹해보여도 나 다음가는 고참이긴 하다.
"좋아, 알았어. 뭘 해야 하는지는 알아들었지? 파트너와 잘 해보라고."
"파트너면 그 마법사 아가씨 말이죠? 저도 꼬마 마법사라고 부르면 될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꼬마 마법사 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요리사라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표정에 드러나 있다.
"네, 전 상관없어요. 언니."
"으응, 알았어. 우리 꼬마 마법사. 하지만 나보다 키가 큰데 꼬마라니."
천사가 여전히 방실방실 웃는다.
그래도 달리 말하면 저런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털어놓는 천사는 7층 이후, 8년 동안 보지 못한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희우와는 다른 의미로 긍정적인 친구다.
천사는 다 이런 녀석들만 되는 것일까.
아니지. 나도 해본 적이 있으니 꼭 그렇지는 않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과 점심은 모두 천사가 요리했다.
놀랍게도 정색하고 평가해도 후한 점수를 줄 만큼 훌륭했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요리는 내가 진지하게 신경 써서 연마한 전투 외적인 부분이니까.
"전 요리를 좋아했어요. 요리밖에 몰랐죠. 바보란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제 가게만 잘 꾸릴 수 있다면 만족했고요."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
이렇게 정색할 만큼 요리를 잘한다. 너무 잘한다.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운 파인 다이닝처럼 잘한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과거에 요리를 배워봤던 유배자 중에서는 셰프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과 비교해도 이건…….
"혹시, 그쪽 지구에 미쉐린 가이드라고 있었어?"
"아! 네. 제 가게가 별 3개였어요! 좋았던 시절이죠."
젠장, 이건 졌다.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지.
아마추어인 내가 진짜 전문가는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이번엔 왕국에서도 가게를 열고 싶네요.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천사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꿈 많은 시골처녀 같은 모양새로.
그 해맑음에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유배자는 원래 어떤 식으로건 망가져 있기 마련이다.
슬럼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언젠가 식당을 열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 정도는 미궁의 ‘보통’에 불과하니.
"그래, 일단 랭커가 있는 곳은 건드리지 말고, 말 잘 듣는 녀석들부터 확보해."
이 말은 꼬마 마법사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는 막내와 천사를 대동하고 하루 종일 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직의 생리는 막내가 잘 알고, 이곳의 경험은 천사가 많다.
우리 꼬마 마법사는 쓸모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 *
왕국의 길드는 유배자들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이 아니다.
미궁이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의 일부다.
왕국에서도 미궁은 유배자들이 무리를 짓고 서로 경쟁하기를 유도한다.
튜토리얼에서 층층마다 그렇게 세팅하였듯이.
무리를 짓는 인간들은 자연히 서로 서열을 만들고 경쟁하게 되기 마련이다.
미궁의 순리의 일부인 하드스록의 슬럼가는 다양한 조직들이 군웅할 거 하는 지옥도였다.
이 자식들은 왜 여기서 춘추전국시대를 찍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덕에 천사는 일거리가 많았고, 심지어 골라 받으며 나름대로 고급 히트맨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장 저택에서 빠져나와 그 주변을 걸으면 보는 시선이 많아진다.
뭔가 노릴 것이 없는지, 이길 수는 있는지 재어보는 듯한 시선.
노숙하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으나 눈빛만은 서늘한 이들.
왕국에 도달한 모든 유배자들이 유능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난이도의 튜토리얼이라면 정말로 30년차 정도 되는 이들에게 업혀갈 수도 있을테니까.
그런 이들에게 왕국은 꼭 행복한 곳은 아닐 터였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
마이어 의원에게 허가는 받았으니 여기서 뭘 하건 상관 없다.
어차피 그들이 내려놓은 곳이니까.
몽환의 숲을 정복한 남자, 하드스록의 삼의회의 의원인 마이어에게 내가 요구했던 것은 간단했다.
"우리는 이 왕국을 어찌할 생각이 없어. 단지 클리어를 노리는 도전자일 뿐이지."
여기서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이 랭커들은 죄다 그런 이들이니.
"하지만 최소한의 기반은 필요하단 말이야."
"저희가 후원하겠습니다!"
그건 좋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기존의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초월한 길드다.
이미 잔뜩 무언가가 엮여 있을 하드스록과 이어질 필요는 없다.
"괜찮아. 우린 따로 길드 하나 만들어놨어. 너희들의 입지를 침해하지도 않을 거야. 그냥 이 바깥의 슬럼을 좀 정복하고 거기 놈들을 부려먹는 정도로 끝낼 거니까."
"저희가 동맹을 맺으면 되겠습니까? 국가 간의 동맹으로 예우하겠습니다."
아주 쓸개도 빼다줄 기세였다.
그만큼 마이어의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의외로 온건한 선배님이다. 그렇다면 아군으로 끌어들이자. 어떻게든.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그냥 우리를 용인해 주면 좋겠어. 신분도 좀 만들어주고. [리프트] 써야 하거든."
"그건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하이 랭커들은 길드가 통제할 수 없는 인원들입니다. 저희가 거기까지는……."
"통제해 줄 필요 없어. 그냥 할 수 있는 한 소문을 억제해 줘."
"그들도 결국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땐 우리가 알아서 할게."
요컨대, 방관자가 되어달란 말이었다.
국가단위로 움직여 귀찮게 굴지 말고 공권력으로서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는 뜻.
친애하는 마이어 씨는 빠르게 손익을 따지는 듯했다.
그리고 하이 랭커급의 싸움으로 비화될 이 사태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결론 내렸다.
위장 신분은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 우리는 할 일을 하면 된다.
꼬마 마법사가 천사, 막내와 함께 길을 나서는 것을 배웅했다.
그리고 희우에게 말했다.
"우린 점검 좀 할까?"
"어떤 점검이요?"
"천사에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 늘 하던 훈련이야."
"대련인가요?"
"그건 좀……. 상성이 너무 나빠서 난 이제 너 못 이겨."
"이히히."
희우가 배시시 웃는다. 기쁜 듯 부끄러운 듯.
언데드가 천사를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리고 공부도 해야지."
"으……. 하지만 열심히 할게요!"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쪽이 무조건 좋다.
천사라는 종족과 시간이라는 신앙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낼 수 있도록 개조해야 한다.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희우는 랭커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상대할 일 역시 생긴다.
"너도 전투 마법의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네! 아빠!"
꼬맹이의 눈도 반짝인다.
자질구레한 일은 [메인 던전]까지는 데려가지 않을 동료들에게 맡긴다.
현재로선 끝까지 함께할 재능이 있는 인원은 이 둘뿐이다.
"블랑쉐의 위치도 확인해야 하는데."
현재 끌어들이기 가장 적당한 성능의 민첩 클래스.
사수와 암살자 모두에 소질이 있는 초고성능 고정 네임드 NPC.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는데.
마법사나 성직자의 나라에 있을 리는 없다. 블랑쉐는 마법에 재능이 전혀 없다. 마법적 탐지를 따돌리긴 힘들다.
그럼 아마 사수의 나라나 이곳, 둘 중 한 군데.
그것도 아니라면 완전히 어딘가 야지에서 서바이벌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천사도 히트맨을 하고 있을 정도인 이 동네에서 그게 본업인 블랑쉐가 일거리가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전사의 나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