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75화
왕국 - Lv. 167 하드스록의 슬럼(1)
몇 번인가 불린 끝에, 꼬마 마법사는 자신의 호칭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이전까지는 그 호칭을 고수할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를 어떻게 부르느냐. 그건 인식에도 영향을 준다.
개중 꼬마와 마법사는 아주 괜찮은 조합이었다.
보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이젠 필요 없다.
"어차피 가명을 하나 만들긴 해야 한다면서요?"
"그랬지요."
"레미라고 하죠. 그게 더 짧고 좋을 것 같네요."
"어, 나 그거 알 것 같은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애니메이션이다.
꼬마 마법사 레미.
흡사한 구석은 하나도 없다. 수수하게 생겼으나 장신에 고압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여마법사.
차라리 메데이아라거나, 신화 상의 악녀를 떠올리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습격자가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은 아니다.
주체가 조직일지언정 치안이 존재하는 곳이 슬럼의 고급 주택가다.
문지기가 열어주는 철문을 벗어나자 곧바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해가 졌다는 말과는 다르다.
분위기가 어둡다.
저 안쪽의 시가지와는 다르게 아무렇게나 무너져 있고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할 생각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퀭하고 움푹 들어간 눈빛에 생의 의지란 보이지 않았다.
약쟁이들도 많았다.
연기가 뻐끔뻐끔 올라오고 있다면 어김없다.
굶주린 아이들은 야생의 살쾡이처럼 이곳저곳을 희번덕거리며 살펴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가진 게 많아 보이는 여마법사가 습격받지 않은 것은 오로지 막내의 존재 덕분이었다.
2미터에 달하는 큰 신장과 우락부락한 체격과 팔을 수놓은 문신.
막내는 실로 오랜만에 온화한 표정을 거두고 바깥에서 자주 사용하던 영업용 가면을 썼다.
시궁쥐처럼 비쩍 곯아 있는 약쟁이 몇몇이 천사를 빤히 바라본다.
이 슬럼에 저리 예쁜 여자는 아주 귀하다.
꼬마 마법사, 아니, 이제는 레미인 여마법사는 그들의 눈에 살짝 일렁이는 욕망을 보았다.
막내가 한 번 쳐다보고 인상을 써주자 잦아드는 불꽃.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유배자로서의 첫 발걸음도 3층의 난민촌이었으니.
왕국이 마냥 낙원이 아니라는 말의 진의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별다를 것도 없다.
이곳에는 저런 사람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았다.
대부분 유배자는 아니다.
유배자의 후손은 유배자가 아니기에.
"잘도 이런 곳에서 지내셨네요."
"아, 뭐 익숙해서……."
천사는 언제나 광전사만 해왔다고 한다. 익숙하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느껴진다.
레미는 그 속에서 쉽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허술해 보여도 고참은 고참. 55년 차라니 레미의 9년이 아무리 밀도가 높더라도 저 경험을 넘어설 수는 없으니까.
저 해맑음 또한 힘이 있으니 유지된 성격일까? 아니면 고장 난 끝에 도달한 곳일까?
파티 리더인 선배님 앞과는 또 조금 다르게 차분한 천사의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본다.
그래도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은 분명하다.
리더가 그리 하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리더의 식견은 아주 정확했다.
지금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셋은 슬럼에 완전히 제격인 인물들이었다.
막내 또한 이런 비참한 광경과 늘 함께 살아왔을 것이다.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슬럼의 고급 주택가는 대부분 지위 있는 자들의 가족들을 위한 곳이다.
사업장과는 거리가 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천사에게 많은 일감을 주었던 조직은 비교적 큰 편이었으나 랭커라 불릴 만한 이는 없다.
리더는 딱 잘라서 조무래기라고 했다.
"어차피 오래 존속한 왕국은 유배자가 아닌 인구도 엄청나게 많거든? 특히 이런 슬럼이면 유배자라는 것만으로도 귀중한 전력이 되지."
마인드맵의 유무. 이 슬럼의 모두가, 나아가 왕국의 모두가 알 수 있는 차이다.
아주 직관적인 전투력의 차이.
그 때문에 많은 길드들이 신규 유입되는 뉴비를 바라는 것이니까.
과연 조무래기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조직의 입구는 허술했다.
온 사방이 폐자재나 판자 따위로 얼기설기 엮은 가운데 홀로 콘크리트인 길드의 건물은 그럴 듯했으나 초병의 수준부터 문제가 있다.
한 놈은 대낮부터 졸고 있고, 다른 한 놈은 주저앉아 담배도 아닌 무언가를 태운다.
레미는 잠깐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하게 말해 그녀의 전투력은 형편없다.
레벨 이전에 체력이라거나 다른 부분에서 센스가 부족하다.
실전은 레벨이 아니니까.
단독으로 대치한다면 저 초병들에게도 질 것이다.
슬쩍 좌우를 본다.
한쪽은 종족빨, 다른 한쪽은 타고난 피지컬빨.
더러운 세상. 왜 나는 몸치일까?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자신을 따라주는 강한 전투원들이 있다.
레미는 천천히 걸어갔다.
초병들이 고개를 든다.
천사를 알아보았다.
"오, 엔젤 나으리 아니야. 오랜만인걸? 또 돈 떨어졌어?"
레미도 고개를 돌렸다.
"가명을 그딴 걸 썼어요?"
"으음,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들 하잖아."
"효과는 있어 보이네요."
모두가 찾는 천사가 가명을 엔젤이라고 지을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대범한지 맹한 건지.
마력을 끌어올리며 불길을 피워 올린다.
그다지 전투적으로 활약하지 못한 레미는 미궁이 측정하는 기여도도 높지 않았다.
그 험난한 튜토리얼을 거치면서도 레벨은 160 정도에 머문다.
다행스럽게도 마인드맵이 부여하는 스킬은 센스나 재능과 관련 없이 공평한 위력을 선사해 준다.
[파이어 볼]
* * *
"그렇지 거기서부터 힘을 주고 그걸 위로 이어나가는 거야. 천사의 근육은 근섬유부터 인간과는 전혀 다른 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여도 지장이 없어."
"확실히 인간일 때와 비교하면 그저 힘만 세진 것과는 다르단 생각이 들어요. 괴물 같네요."
초인이라 한들 인간.
물리적 내구도의 한계는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천사의 육신은 다르다.
피부부터 그 아래의 피하지방, 근육, 혈관까지 모든 면에서 다르다.
이 초현실적인 종족은 인체가 기준이라면 비정상적이며 몸에 무리가 갈 동작을 취해도 별다른 지장이 없다.
그래도 본래부터 평범한 육신은 아니었던 탓인지 규격을 가볍게 초월한 힘도 그럭저럭 적응하는 모습이다.
애초에 기술적으로는 완성에 가깝던 아이였다. 그리고 내 기술을 훔쳐내며 점점 더 완성에 다가가고 있다.
아직은 지지 않지만 언젠가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도 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 내 파티원이 또 하나의 나만큼 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클리어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과거에 암살자였던 나나, 단검전사였던 나처럼 되어야 한다.
"좋아, 아주 좋아. 몸 쓰는 건 정말 타고났구나. 습득이 굉장히 빨라. 이제 날개를 쓰는 법을 더 배워야겠군."
"그런데 공부란 게 이게 전부예요? 그럼 지금까지와 똑같은데."
왕국의 문을 넘어오기 전, 나에게 했던 각오와 다짐에서 비롯된 발언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분도 공부시키긴 할 거야. 하지만 그건 [메인 던전] 공략을 시작한 후의 이야기고, 네가 서브 리더로서 기능할 만큼 파티원을 추가 모집하고 나서의 일이지."
"그러고 보면…… 고정 NPC들로만 구성된 파티를 원하신다고 했었죠."
"맞아, 난 누가 되었건 그 사람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다루기가 쉽거든."
내가 지난 세월 간 겪은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유배자를 너무 믿었던 탓도 있다.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유배자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이 미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가 좋아서 돌아가고 싶지 않거나.
나는 나와 함께했던 도전자들이 모두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클리어를 위해 노력했던 것은 자신이 NPC임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저도 NPC일 수 있겠죠? 그리고 아저씨도요."
아래에서 눈을 치켜뜨며 저렇게 물어온다.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더 있다가 말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두려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왜 그래요?"
"음,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럼 더 쉬어요. 쉬기로 약속했잖아요."
내가 마이어라는 유배자와의 교섭 후 저택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희우의 강력한 주장이 있어서였다.
당분간은 놀고 뒹굴고 그냥 같이 지내기만 하자고.
그 발언에 불만을 가지는 파티원은 없었다.
여신님 역시 동의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지쳐 보이는가에 대하여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결론은 그렇다고 하자였다.
"아저씨도 의외에요. 못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노는 걸 못하다니. 그거 불안증 뭐 그런 증세인 거 알아요?"
"흠, 정신과적 진단으로는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데."
"혹시 그것도 어디서 배웠어요?"
"정신과 전문의 출신 유배자를 수소문했었지. 사실 깊이는 몰라. 그냥 위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게 알려달라고만 했거든."
"지금 아저씨가 제일 위험해요. 이건 제 직감이에요. 믿으실 거죠?"
"좋아. 믿겠어."
사실 희우는 정말로 내가 뒹굴거리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하지 못했다.
계속 무언가 계획을 짜려고 하니 차라리 공부를 좀 열심히 하자고 했다.
"사냥꾼 아저씨가 있었어도 같은 말을 했을 걸요. 아저씨 없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거 고마운걸."
배려, 이런 걸 받아본 게 얼마 만이더라? 사실 파티원을 굳이 만들기 시작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해낼 수 있을 줄 알았기에.
"저랑 하는 농담 따먹기도 재밌죠?"
"아, 그럼 항상 재밌지."
그때 난입하는 딸내미.
"아빠! 신성과 마력의 변환에 대한 술식 만들었어요!"
"벌써? 숙제를 아주 빨리 하네."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꼬맹이도 귀엽다. 희우가 덥석 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불타버릴 것이다.
천사링이 푹 가라앉는다. 정수리에 닿을 듯하다.
"우으. 으우……."
"좋아, 그럼 이 장갑에 그걸 새겨보자. 신성 차단이 가능하도록."
그 말에 살짝 처져 있던 천사링이 파르르 떨며 떠오른다.
"무슨 말이에요?"
"만질 수 있게 해보겠단 거지."
다 소일거리다.
뭔가 내 진정한 목적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그런 일.
우리 파티원들이 잘하고 있나가 조금 걱정이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장 신분이 만들어져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다.
* * *
레미가 전투에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좀 요란하게 선빵을 날려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천사는 200렙 남짓이지만 막내조차도 그에 준한다.
기껏 해봐야 150 언저리에 머무는 약한 것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천사가 광화를 사용하지 않고도 길드 마스터를 무릎 꿇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나 엔젤! 대금도 꼬박꼬박 후하게 지불했는데! 보너스도 챙겨준 적 있지 않나!"
"하하하, 미안해요. 보스. 하지만 전 원래 이쪽 소속이라."
그러며 천사가 눈짓하는 방향에는 [파이어 볼]을 연달아 때려 넣어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든 마법사가 있다.
보스는 절망했다.
정체불명의 강력한 유배자인 엔젤을 상대로 훌륭하게 우호 관계를 쌓아왔다고 생각했다.
그 이름값 덕에 수월하게 진행된 일도 많다.
그래서 집도 구해주고 주방도 만들어줬는데!
그런데 갑작스러운 배신, 그리고 길드의 점거.
당혹에 빠진 보스의 앞으로 레미가 나선다.
보스의 눈이 뒤집혔다.
"그렇군! 그랬어! 이 간악한 마법사 스파이가 너를 고용했나? 이건 하드스록에 대한 배신행위야! 전사의 긍지는 내다 버렸나!"
"긍지 같은 소리 하네.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 못 들어주겠는데."
레미도 그간 영감님이나 리더의 마법 강의를 들으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전력에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손끝에서 약간의 원소를 구현하는 정도는 스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배자의 장점이다. 스킬로 사용해보았으니 감을 잡는 것도 더 쉽다.
크게 벌린 오른쪽 검지와 엄지 사이에 스파크가 흐른다. 굵직한 것이 아주 따끔할 게 분명하다.
마력을 더 집어넣어 전압을 높인다.
"자자, 순순히 사업장을 다 바치고 우리 산하로 들어오거나……."
"……."
"죽거나."
레미의 눈에 다채롭게 변하는 표정이 보였다.
이 보스는 아무래도 연차가 그리 높지는 않은 모양이다. 죽음에 대한 걱정 자체는 크게 없는 느낌.
그러나 욕심이 그 눈을 가린다. 이렇게 안정된 왕국은 드물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유배자에게 아쉬움 정도는 줄 수 있다.
하긴,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버젓이 영업하는 왕국이 흔할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겪어온 유배자들은 그런 사회를 만들어낼 인간들이 아니었다.
이곳 왕국은 바깥과 유사한 문명을 누릴 수 있는 낙원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아쉬움일 뿐이다.
보스는 입을 다물었다.
목숨 자체는 크게 아깝지 않을 테니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일까?
혹은 동맹 관계에 있는 다른 길드가 구출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단 지져보았다.
"그으윽!"
"전사라서 그런가 튼튼하네."
조금 더 지져보았다.
"잘 참는걸."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을 것 같나! 마법사!"
"비장한 척하지 마."
레미는 한숨을 내쉬며 천사를 불렀다.
어떤 여성 유배자가 붙잡혀 끌려왔다.
레미가 비릿하게 웃는다. 수수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짙은 비릿함이 오히려 더 무섭다.
나직하게 속삭인다.
"보스……. 아내를 사랑해?"
"너 너너 이 비겁한 녀석!"
"아내로 안 되면 아이도 있는데. 유배자도 아닌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지 확인도 해볼 수 있겠네?"
"아 아 안 된다. 내가 잘못했다. 아니, 잘못했습니다."
막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진짜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저건 연기가 맞을까?
오금이 저릴 정도로 질척한 저 표정과 말투가 정말로?
리더의 인선은 과연 확실했다.
그래도 그다지 보스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거주민들을 보면 이 남자가 해온 일이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