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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76화 (176/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76화

왕국 ? Lv. 167 하드스록의 슬럼(2)

사람이 사는 곳은 언제나 사회가 형성된다.

그것은 그 어떤 곳이라도 마찬가지다.

하드스록 외곽의 슬럼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미궁의 바깥이란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무수한 유배자의 후손이자 빈민들 역시 그랬다.

사실 빈민이라는 말이 꼭 옳지는 않다.

슬럼이라는 단어에 가난이라는 뜻은 없다.

단지 공권력이 포기하고, 치안이 열악하며, 주류사회에서 격리된 곳이라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하드스록의 슬럼은 비록 그리 불리긴 하지만 후자의 조건은 충족하고 있는지 조금 의문스러운 곳이었다.

국토의 절반 정도가 슬럼이라 할 수 있는 하드스록은 오히려 정돈된 시가지가 슬럼가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형상이기에.

그리고 슬럼의 조직들은 나름대로 재산 모으기에 열심이었다.

"이야, 모아두고 보니 참 뭐가 많네요."

"그래도 고블린들이 챙겨준 것에 비하면 소박할 정도군요."

"교회……. 아니, 신전 부지는 알아보고 있으세요?"

"여신님께서는 어디든 좋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 마음 가는 대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막내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최근에는 험악하게 인상을 쓸 일이 많았기에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쪽이 아무래도 막내의 본질일 것이다.

레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러 가지 제반 사정을 감안하여 떠맡은 일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자신의 출신을 통감하게 되는 나날이다.

원래부터 약았었고, 유배자가 된 뒤에 바깥의 평생보다 더 길게 체감되는 시간을 보내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녀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리더가 내린 시험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뒷주머니에 넣어둔 게 많았었던 건 눈감아주겠다. 대신, 증명해라.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사실 그 자체라 뭐라 항의할 수도 없다.

아마 시험이라는 의혹 자체도 사실이겠지.

처음부터 리더는 레미에게 슬럼의 일을 맡길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아주 관대한 처사요 인간적인 처분이다.

그리 하리라 믿었으니 먼저 털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긴 하지만.

사냥꾼을 보내주는 자리에서 설마 역정을 내겠나 싶은 안전책이었다. 이미 들키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쓸모를 증명한 셈이 되긴 했으니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처분이 모두의 만류로 리더가 강제 휴식을 취하게 되면서 난이도가 현격하게 상승해 머리 아플 뿐이다.

천사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레미야~ 로커스트 길드에서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겠다고 확답했어!"

"으윽, 네에."

* * *

로커스트 길드의 마스터, 로커스트는 불과 며칠 전 붕괴해버린 옆 동네 보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오랜만이다. 제리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없나?"

"그걸 하러 내가 나와 있으니 해야겠지……."

여러 가지로 시달린 듯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악몽을 꾸는 듯했다.

하지만 로커스트는 그 사정을 봐줄 정신이 없었다.

그가 가진 정보는 너무나도 적다.

지금까지 그가 알게 된 건 엔젤의 갑작스러운 조직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심지어 그 엔젤이라는 히트맨은 이미 8년간 이 근방에 신뢰를 쌓아온 인물이었다.

어딘가 나사가 빠져 불안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성실했고, 무엇보다 강했다.

은거한 랭커라는 소문마저 도는 와중 다들 엔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엔젤의 초기 의뢰가 8년 전, 이 근방 구역의 판도를 바꾸어놓았으니까.

현재 자리 잡은 조직들은 달리 보면 모두 엔젤의 고용주였으며 수혜자였다.

이제 와서는 조직 간의 암묵적인 합의마저 이루어졌다.

그들의 세력권인 북부 병원 구역이 아니라 좀 더 먼 구역에서 일어나는 시비를 처리하는 용도로만 의뢰한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간 8년 전 그 일의 재탕일 뿐이니.

모두가 엔젤을 두려워했다.

그 미친 광전사가 언제 갑자기 자신의 집에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 여자의 보스라는 자가 나타났더군."

"……그게 무슨? 1인 길드 아니었나?"

"아니었나 보더군. 다른 나라에서 왔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엔젤은 그냥 처음부터 여기 잠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하드스록에서 보낸 토벌……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진작 쓸어 담았을 테니."

공권력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조직과 오가는 거래의 문제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내버려 두는 편이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로커스트는 친구 아닌 친구의 푹 꺼진 눈두덩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다.

엔젤을 거느린 보스라.

그의 조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당연히 그다.

하지만 엔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저항이나 가능하면 다행이다.

결론은 정해져 있다.

무언가 오랜 음모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개 조무래기 유배자인 그는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르고 그랬기에 이리 살았다.

그럼 그 순리에 따를 뿐이다.

하지만 순순히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입술을 적시는 로커스트를 보며 제리코는 슬며시 웃었다.

"내가 할 설명은 다 했네. 아는 얼굴이 이렇게 입을 터는 게 나을 거라고 앞에 세워두더군. 빌어먹을."

"친절도 하시군. 뭐 중학생 꼬마라도 되나?"

"글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여자의 목소리. 그리 어린 느낌은 없지만 나이든 느낌 역시 없다.

원숙하다기보단 젊은 느낌.

의아함이 솟구친다. 대체 누구기에?

그리고 들어간 자리에서 여자치고는 장신이다 뿐 하늘하늘한 것이 주먹질 한방감일 것 같은 보스가 보였다.

물론 로커스트는 외모로 강함을 판단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다만 외모로 클래스는 판단할 수 있었다.

유배자로서 반평생을 하드스록의 국민으로 살아온 전사의 혼이 소리 질렀다.

"마법사? 여기가 어디라고!"

레미는 손가락을 튀겼다.

막내가 움직였다.

정확히 30초가 지나고 로커스트는 굴복했다.

"끄으윽, 끄윽. 내가 잘못했소."

"놔줘요."

막내가 모가지를 틀어쥐고 있던 힘을 뺐다.

스킬까지 사용하며 저항했으나 막내는 묵묵히 걸어가 팔을 붙잡고 꺾었다.

검을 휘둘렀으나 붙잡혔다.

날이 살을 파고들거나 말거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검을 뺏은 후 모가지를 턱 움켜쥐는데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대로 허공에 대롱대롱 들어 올려지자 스킬이고 뭐고 다 소용 없다.

전사는 발을 대지에 딛고 싸우는 것을 상정하는 클래스다.

"당신들 바보예요? 마법사가 뭐 어쨌다고요. 지금 당신 입장을 모르겠어요?"

"아니, 압니다. 알아. 하지만 마법사는 좀……."

레미는 아연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대체 왜 그놈의 마법사 소리부터 입에 담는 거야. 내가 그 소리를 지금 몇 번째 듣는지 알아요?"

"그게……. 여긴 원래 그렇습니다만…… 다른 나라에서 오셨나 봅니다?"

레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5년 만에 왕국의 문이 가동했음을 알려줄 수도 있다.

사전에 입을 맞춘 대로, 그들은 마법사의 나라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뭐 그 마법사 아래로는 기어들어 가기 싫으시다?"

"그럴 수는 없지! 끄으으윽!"

"조건 반사네 아주 그냥. 마법사를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목이 졸리니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막내는 로커스트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서 병을 빼앗아 팔에 뿌렸다. 손바닥에 난 자상이 사라진다.

고통으로 얼굴이 벌게진 로커스트가 켁케대며 대답했다.

"전쟁을 벌였던 대상을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오? 우리가 이런 썩어빠진 시궁창에 사는 것엔 그놈들이 일조했는데. 뻔뻔하게 어찌 그런 말을!"

"네에, 네에. 그건 알겠고. 이거나 보시죠."

"마법 스크롤인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 크흑!"

막내가 다시 제압을 했다. 뼛속까지 새겨진 마법사에 대한 증오는 끝까지 젊은 보스가 건넨 서류를 의심하게 했다.

무슨 수작이 있을지도 몰라.

그것은 하드스록에 오래 몸담은 이들에게는 일종의 미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법사에게 당할 수 있는 험한 꼴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전사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곳이 미궁이다.

부들부들 떨며 독실로 안내받은 로커스트는 스크롤을 찢어버리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다가는 다음 회차로 사출될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했다.

그의 유배자 연차 대부분은 이곳에서 조직의 일원으로 보낸 세월이다. 연차가 얼마 차지 않았을 무렵 운 좋게도 어느 고참의 파티에 업혀 들어온 탓이다.

이제 와서 다시 그 튜토리얼로 떨어진다면 살아서 그곳의 왕국까지 갈 자신이 없다.

한숨을 푹 내쉬며 스크롤을, 아니, 서류를 보았다.

"음?"

그것은 일종의 계약서였다. 마법이 강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내용 또한 몹시 정상적이었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 로커스트는 젊은 여보스와 악수를 하고 있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 * *

다들 쉬이 협조하는 것 같지만 그건 단순히 산하에 들이는 조건이 너무 좋은 탓이었다.

이건 노골적으로 말해 폰지사기에 가까운 무언가다.

당장은 레미의 길드, [천사의 눈물]에 도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명목상으로만 산하에 둘 뿐 챙겨가는 것은 쥐뿔도 없으니까.

도리어 강력한 뒷배를 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득을 점치는 조직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랭커와 접점 하나 없을 조무래기들이다.

"그러고 보니 길드 이름 왜 이래요?"

"그때 울면서 두들겨 맞았던 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게 기념할 만한 일인가?"

"기념이라기보단 경고지. 까불지 말자는 경고……."

레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천사는 또 해맑게 웃고 있다.

뭐 대충 리더에게 까불었다가 눈물 짜게 될 일이 또 생기지 않게 주의하자 그런 걸까?

수험생이 걸어두는 ‘나는 할 수 있다’ 표어처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상당히 어려운 사람이다.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고참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튜토리얼에서 구르며 배운 것은 진짜 고참과 가짜 고참을 구분하는 법.

천사는 어찌 되었건 진짜였다.

그리고 어쨌든 주변 조직의 보스들 중에서도 진짜는 있었다.

방금 태도를 싹 바꾸어 합의한 로커스트 길드 마스터 또한 그런 이 중 하나다.

그는 조무래기처럼 행동했고 조무래기처럼 손을 잡았지만 다른 놈들보다 판단이 빨랐다.

멍청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제 한 몸 건사할 자신은 있는 놈이었다.

이건 보는 눈이 어떻다는 문제보다는 살기 위해 배운 것 중 하나였다.

튜토리얼의 난민촌에서도 누구의 밑에 들어갈지 정해야 했다.

저렇게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보다는 단순하고 별생각 없이 사는 이들이 더 안전한 경우도 많았다.

여러 번 죽어가며 배운 교훈이다.

"방금 그 사람이 로커스트였죠? 그 남자도 위험하다고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뭔가 믿는 게 있어요."

"전 잘 모르겠는데 잘도 아시는군요."

막내가 팔에 흐른 피를 닦으며 자애롭게 웃는다.

"그러게요. 제가 눈치 보는 건 참 자신이 있어서."

이건 확실한 장점이자 재능이었다. 리더가 협업을 지시한 이유겠지.

* * *

불과 일주일 만에 북부 병원 구역을 석권한 조직의 이야기가 퍼졌다.

많은 이들은 당황했다.

"랭커가 급습하여 다 때려눕히고 선언했다던데."

"랭커가? 거긴 별로 돈 나올 구석도 없지 않나?"

"낸들 알겠나."

이 슬럼에선 유배자, 혹은 유배자 출신이란 사실만으로도 강자가 될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용병으로 그게 아니더라도 착취할 이들은 널려 있다.

일종의 특권 계급인 그들 중에서는 당연히 프리랜서라고 할 만한 이들도 많았다.

모두가 주시했다.

저렇게 신생 조직이 생겨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리고 보통 저런 일이 생기고 나면 일감이 생긴다.

돈 역시 힘 못지않게 정의를 규정하는 기준이니까.

개중에서는 과연 레미의 식견대로 뒷구녕으로 딴소리를 한 남자도 있었다.

애초에 8년 가까이 북부 병원 구역을 나눠 가지고 있던 조직들의 인맥이 빈약할 수는 없다.

로커스트는 오래전, 자신을 이 왕국까지 버스 태워준 고참에게 오랜만에 서신을 받고는 미소 지었다.

저쪽도 기억의 그늘을 뒤집어엎은 다음에야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거기에 랭커가 있다는 게 사실인가?]

슬럼의 북부구역을 장악한 왕이 흥미를 보였다.

그에게는 언제나 병사가 필요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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