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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79화 (179/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79화

왕국 ? Lv. 167 하드스록의 슬럼(5)

북부의 왕은 실로 드물게도 그 시건방진 표정을 접어서 넣어두었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황망함, 당황스러움 따위가 떠올라 있다.

"이게 뭔지 설명해 봐."

로커스트는 얼른 아는 바를 최대한 털어놓았다.

"천사의 눈물이라는 길드는 아무런 이권도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막대한 자금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대부분 거기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아무 잡음 없이 조용하게 통일되었죠."

"그리고 너도 넘어갔고 말이지?"

"저는 왕께서 연락을 주실 거라 믿고 있었기에 인내를……. 윽!"

"살살 쳤어. 살살. 아부가 너무 건방져서 말이야. 그래 계속해 봐."

로커스트는 몸을 살짝 떨었다. 정말로 툭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 역시 유배자 전사인데.

"그러면서 이 슬럼을 시가지로 뜯어고치겠다고 했습니다. 돈은 얼마건 있다며."

"놀랍군."

북부의 왕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왕이 머물고 있는 술집임에도 수군수군하는 소음이 들려올 정도다.

바깥은 마차나 차량이 오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거기서 내려지는 것은 죄다 생필품이나 식품 따위였다.

의약품도 일부 보인다.

모두 아주 깨끗하고 반짝이는 신품이었다.

틀림없이 하드스록의 시가지에서 생산되어 이곳까지 배송된 물건들이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뭐가 좋아서 이걸 여기까지 배달하겠는가. 시민의 자존심은 대단하다.

전사로서, 유배자로서 단련되어온 뚝심과 자부심은 이곳에서 그대로 선민의식이 되었다.

그 자신이 가장 그것을 잘 안다.

하지만 지금 유배자들이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배달씩이나 한 물자들을 제 손으로 하차까지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쥐여준 것일까?

그럼 그 천사의 눈물이라는 길드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더 남아 있는 것일까?

약탈 경제가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국의 경제 구조상 저런 일은 새로운 서버가 열린 초기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한 서버를 털어먹을 정도의 대단한 세력을 가지고, 다른 세력보다 빨리 선점까지 했을 때 말이다.

"이건 좀 천천히 가볼 필요가 있겠군."

칭호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장비도 주섬주섬 벗어서 차원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술집 내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이들은 그럼에도 이 남자가 북부의 왕임을 알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른다.

"술맛이 떨어지는군."

"주인장!"

"시끄러워. 그거 때문이 아니니까."

"넵."

왕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톡톡이 아닌 쿵쿵에 가까운 소리가 난다.

종족은 잎사귀 요정이지만 손가락의 힘도, 두개골의 내구도도, 피부의 질김도.

모두 요정이 아니다.

늑대인지 하이에나인지 모를 동물의 귀가 리듬감 있게 까닥거렸다.

"저렇게 많은 돈을 멍청하게 자랑하는 녀석들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서 술이 맛있겠어."

"그, 그렇습니다."

"일단 구경 좀 더 해보자고. 아주 달달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왕은 손수 자신의 병을 허리춤에서 뽑아 들었다.

아직도 피가 질질 흐르고 있던 로커스트의 팔을 향해 뿌린다.

아직은 손상이 정착하기 이전이기에 뭉개진 팔이 회복된다.

"피도 닦아. 그리고 내가 오지 않았으면 해야 했던 일을 해. 난 보고만 있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특별히 술집 내에 있던 이들의 입단속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여긴 로커스트 길드의 사업장이다.

제 보스가 눈앞에서 빌빌 기는 꼴을 보고도 돌발행동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없다.

* * *

제리코는 얼마 전에 있었던 끔찍한 일을 전화위복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엔젤이 미쳐서 어떤 마법사와 함께 들이닥쳐 조직을 구워버렸지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겁박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지금 황홀함을 맛보고 있었다.

장인들이 만든 최고 품질의 무기와 갑옷들은 그 같은 슬럼의 낙오자들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은 힘이 정의인 이 미궁에서 훌륭한 전투 장비만큼 든든한 재산도 없는 법이다.

번쩍번쩍하는 신품 장비들은 틀림없는 하드스록 최고의 장인들이 직접 제작한 룬 강철제였다.

전사로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딱히 그린스킨의 사상에 심취하지 않았으므로 맨몸을 드러내고 전투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켓포를 맞아도 버텨낼 수 있는 방어력.

죽음으로 잃을 것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인가.

심지어 마찬가지로 전사인 그녀의 아내에게도 슬럼에선 구할 수 없는 훌륭한 장비가 주어졌다.

유배자가 아닌 딸을 전사로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그 딸에게도 몸에 맞는 장비가 지급된다.

정말로 그가 원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조직원들에게도 각자 원하던 물건이 무사히 배송되었다.

유배자조차도 아닌 일부 인원들은 제 뺨을 꼬집으며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세상에! 우린 이제 부자야!"

"빌어먹을 시가지 놈들 이렇게 좋은 걸 지들만 쓰고 있었단 말이야?"

그나마 시가지 출입 자체는 가능한 유배자 조직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속속들이 들어오는 장비들은 시가지에서도 귀한 물건들이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돈이 난 거지?

아다만타이트 주괴라도 가지고 있었나?

전사의 로망과도 같은 금속이다. 하이랭커쯤 되지 않으면 아다만타이트가 함유된 합금조차 소유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 그냥 전설 아닌가 싶은 재질이다.

단지 마력을 머금은 룬 강철만 되어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장비니까.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보는 시가지 놈들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제리코가 아니더라도 북부 병원 구역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우선 먹을 것이 이렇게 넘쳐나는 일 자체가 병원 구역 주민 대다수에게는 처음이었다.

병자들도 환호를 내질렀다.

그들은 돌보던 의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상으로 지원되는 각종 의약품은 알면서도 고칠 수 없던 병이나 부상을 말끔하게 해결했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며 원장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얼마나 돈이 많은 건가? 아니 대체 뭘 한 거지?"

"이 정도면 이 병원 건물을 신전으로 임대할 수 있나요?"

원장은 웃었다.

"물론이지. 아니, 나도 그 혼돈의 신도 할 수 있겠나? 혹시 그분 접미사가 금전인가? 그건 아니겠지?"

"자유의 여신이십니다."

"세상에. 정말 좋군."

레미가 처음으로 보는 밝은 표정이었다. 잔뜩 구겨진 주름살이 활짝 펴지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레미는 아까부터 느끼던 불쾌함이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이 노의사에게 깃들었던 감정은 사실 고결함이라기보다는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손을 내밀 여유가 누구에게도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조차 염치없는 짓이란 걸 이 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기도 하다.

"하하, 얼마 만에 이리 유쾌한 기분이 되는지 모르겠군."

곧 바깥에서 의료장비를 다루던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살리러 왔다.

오래 방치되어 죽어가던 기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원장 선생, 그냥 시가지 들어와서 지내지그래. 언제까지 여기서 지내려고."

"내가 여길 어찌 떠나나. 샘이 있는 시가지엔 어차피 환자도 없고."

"그래도 병은 나지. 노환도 어쩔 도리가 없고."

"개소리지. 난 외과의야."

그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보며 레미는 입속에 고인 침이 쓰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꿈 많던 중학교 2학년, 가정은 화목했고 고등학교 입시 준비도 순조로웠다.

성적은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녀의 꿈도 의사였다.

문득 스마트폰이 그립다.

* * *

우리 파티원들이 주도하고 있는 슬럼의 상황은 이미 하드스록의 삼의회 의원들에게 포착된 후였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확하게 아는 용인은 지극히 상인스러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얼치기 국가라도 국가는 국가다.

하물며 민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를 이미 겪어본 대부분의 유배자들은 유사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사의 나라에서도 공권력은 아무나 휘두를 수 없는 힘이 되었다.

의원인 용인은 아무나가 아니다. 그 힘이 편을 들어준다면 급하게 처분하는 것에 가까웠던 처음과는 차원이 다른 이득을 굴릴 수 있다.

나는 정확히 그런 상황을 원했다.

이러이러하게 흘러가게 만들 것이라고 가장 처음 말했을 때, 파티원들은 아주 놀랐었지.

고블린이 챙겨주고 희우가 가져온 그 작은 주머니가 가진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력과 직결된 희귀한 소재들은 같은 무게의 다이아몬드보다도 큰돈이 된다.

초인이 날뛰는 세상에서 전투력은 돈보다 중하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용인이 내놓는 의견은 제법 의외였다.

"그렇군. 이 왕국의 인구가 그렇게 많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서버에서 채굴하는 자원은 한계가 있지요. 랭커들의 평균 레벨마저도 제가 겪은 다른 회차에 비해 500은 올라간 왕국입니다."

옳은 말이다.

왕국의 인구가 몇이건 주어진 자원의 양이 변하진 않으니까.

그 결과가 바깥의 저 슬럼이고 말이야.

원래 같으면 랭커급들도 손에 넣을만한 아다만다이트 합금 장비가 이 왕국에서는 하이랭커의 전유물이라고 한다.

존속한 기간이 길수록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러모로 겪어보지 못한 규모와 역사의 왕국이다.

"거기에 46서버는 열린 지 8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열쇠를 쥔 자들조차도 백이 채 되지 않을 정도니까요."

"이 나라에도 있겠군."

"대단한 권리지요. 우리의 자원은 계속 메말라 있지만 그들은 새로운 서버의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요."

"그럼 담합하겠는데?"

용인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내 말을 받았다.

전사의 나라에선 이런 대화가 이리 매끄럽게 진행되는 상대가 드문 모양인지도.

"그게 문제입니다. 46서버의 자원은 거의 왕국으로 흘러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45서버도 유배자를 배척하고 있기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패배했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곳은 시작부터 퍼즐을 아주 잘못 맞춘 곳이었죠. 전조는 충분히 있었으나 결국 과거도 미래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깽판 친 멍청이들이 너무 많았나 보군."

"세대교체의 문제지요. 겪어보지 않은 녀석들은 NPC를 정말 제 발닦개로 아는 놈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NPC들도 화를 낼 줄 알고 단합할 줄 안다.

유배자가 제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왕국에 온 이상 제한시간을 가진 방문자일 뿐이다.

세계 전체가 적으로 돌아선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 되어버린다.

두 서버 연속으로 큰일이 나버린 결과 현재 다양한 천연자원들이 품귀현상을 겪고 있다.

급히 처분하는데도 상상 이상의 낙찰가가 나온 것엔 그런 배경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진 물건의 처분을 저희에게 맡겨주신다면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결의에 찬 용인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서로가 윈윈하는 거래다.

내가 당장 가진 물건들 중 상당수는 전사보다는 마법사를 위한 것들이니까.

[하드스록]이 그 거래를 담당할 수 있다면 마법사의 나라 [아케인]을 상대로 대단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무수히 많은 카드가 남아 있다.

46서버 출신자들의 담합? 웃기는 소리지.

현실은 내가 다져둔 기반이 그들의 원활한 자원 채취를 방해하고 있음이다.

2차 요정 전쟁이 너무 빨리 일어났다. 중세에선 대륙의 주민들도 제 몸 사리기에 바빠 유배자와 거래나 협조하는 일이 적어졌을 것이다.

그럼 눈 돌릴 곳은 행성째로 채굴하기 시작하는 미래인데, 거기선 또 첨예한 삼파전의 대립으로 자원 유출에 극도로 민감한 상황이니 여의치 않을 게 분명하다.

담합 자체도 의도이긴 하겠으나, 그들이 지닌 열쇠가 생각보다 만능의 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숨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결국 지금 이 왕국에서 46 서버의 자원을 제대로 공수해 올 수 있는 것은 우리 파티 정도뿐이라는 이야기.

같은 튜토리얼을 통과했으나 출발점이 너무나도 다르다.

이후 46서버의 모든 [종족 메인스트림]을 우리가 쥐고 흔들었을 테니.

고생한 보람이 넘치다 못해 터져나갈 것 같다. 실로 오랜만에 표정 관리가 힘들 정도다.

용인 역시 몹시 기뻐 보인다.

친애하는 마이어 씨도 오가는 대화의 실체를 이해하고는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테이블에는 승자밖에 없다.

패자는 나머지 모두가 될 예정이다.

다만, 신들의 눈치는 좀 봐야겠군. 이후 만신전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희우와 꼬맹이는 지금 무슨 대화가 오가건 디저트를 맛보는 데 여념이 없다.

추가 주문하여 포장까지 한 후에 레스토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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