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80화
왕국 - Lv. 1320 북부 슬럼의 왕(1)
북부의 왕은 포악하지만 머저리는 아니다.
그는 달아오른 북부 병원 구역을 조용히 관찰하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한 자선사업은 아니다.
물론 당연히 그렇겠지만, 의도된 환상의 조성이 느껴진다.
조직원들 일부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저분하고 때 묻은 것에 물을 뿌리며 닦아내고, 무너진 잔해를 옆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처음 시작된 그 행동은 일견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보였다.
유배자인 조직원들은 본래도 자신들의 거처 주변은 저렇게 치우곤 했다.
그들의 근력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평소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어딘가 찝찝한, 혹은 마지못해 하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제 주변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손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던 NPC들도 일부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북부의 왕은 염병하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돈이다. 돈으로 고용한 녀석들이다. 자발적으로 저런 일을 하는 놈이 있겠는가.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군중심리라는 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슬럼에도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는 얼마든지 있다.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충격요법이 따로 없군."
헛돈을 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정말로 이 구역을 어떻게든 개선하려는 용의주도한 설계가 느껴진다.
이미 오늘은 이곳의 사람들에게 꿈이나 다름없는 날이다.
생전 보지 못했던 깨끗한 음식들이 넘쳐서 썩을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사방에 널려 있다.
깨끗한 옷도, 위생용품도, 하다못해 따뜻한 이불이라도.
정말로 원하는 게 있다면 주어진다.
바깥의 복지정책처럼 어중간하다면 조성되지 못했을 환상이다.
하지만 너무 과하다.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퍼주고 있다.
훔치는 녀석도 있었지만 곧 그 좀도둑조차도 그게 의미 없는 일이란 걸 깨닫는다.
어안이 벙벙해진다.
가장 회의적인 인간조차도 몸 사릴 뿐 의구심을 표한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긍정적인 효과만 나지는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부터 푹 썩어들어 가 있는 녀석들이다.
평생 그렇게 사는 법밖에 모르고 지금도 잠깐 당황했을 뿐, 슬럼의 생존자답게 비열하고 치졸한 짓거리를 할 것이다.
대머리의 거한 하나가 나타나서 독려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한눈에도 위압적인 외모다. 문신이 꿈틀대는 팔에 강렬한 스킨헤드.
중남미풍의 구릿빛 피부.
어느 조직의 보스조차도 아니고 차라리 돌격대장이 아닐까 싶어지는 비주얼이었다.
하지만 작업에 참여하는 그 얼굴은 갱의 것이 아니었다.
찌들었고 우중충한 표정이 아니라 정말로 이 일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다.
북부의 왕은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성직자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다. 일종의 광신도라고 봐도 좋겠군.
거기에 제법 강하다.
타고난 체격을 감안해도 저렇게 중장비 같은 힘을 내려면 300? 400? 그 정도 레벨은 되지 않을까.
이 슬럼에서는 저항하기 힘든 수준의 강자다.
아마 천사의 눈물이라는 길드의 일원이겠지.
그 거한이 나서서 움직이며 멍하거나 망설이는 이들에게 고함쳤다.
고함임에도 꾸짖는 것 같지는 않다. 걸걸한 목소리와 상반되는 경건함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누가 듣더라도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할 법한 목소리였다.
그것이 슬럼의 주민들이 빠진 혼란에 방향성을 제시했다.
조금씩 조금씩, 환경을 미화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한다.
불안과 불신이 가득한 다른 구경꾼들의 시선도 조금 누그러지고 있다.
거기에 이 거리에는 빈민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사업을 벌이는, 물론 그렇다곤 해도 시가지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물건을 파는 조그만 구멍가게거나 가짜 술을 만드는 술집 따위의 주인들도 나서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그대로 두면 안 되겠군."
찝찝하기 그지없는 세뇌방식이다.
미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저놈들은 그것을 모른다.
배후에 있는 녀석이 이런 식으로 떨거지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후, 그걸로 뭘 어찌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방향은 틀림없이 북부의 왕으로 향할 것이다.
지금 짓밟는 게 좋겠다.
이 슬럼에 저런 세력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
때마침 그의 길드에서 보낸 병력이 도착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에 진작 불러두었다.
* * *
제리코는 비록 이 상황에 기뻐하였으나 낙관하진 않았다.
북부 병원 구역의 이변은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고 무수한 승냥이 떼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개중에는 호랑이나 사자도 있을 게 분명하다.
천사의 눈물? 엔젤? 다 좋다 이거야. 하지만 북부의 왕이 나타난다면?
아무리 엔젤을 편할 대로 써먹으며 그 강함을 알게 되었다곤 해도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왕이라는 칭호가 생기니 정말로 자기가 왕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정신병자를 감당할 수는 없다.
북부의 왕은 랭커다.
말석이라곤 해도 [길드석]의 랭킹에서 확인할 수 있는 1,000위까지의 순위에 올라 있는 엄연한 진짜 랭커다.
이 왕국에 1,000명밖에 존재하지는 고레벨.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엔젤이 랭커라는 소문은 돌지만 아마도 사실은 아닐 테니까.
랭커란 것은 그만큼 상징적인 존재이며 힘의 상징이다.
그냥 좀 강하면 아무 곳에나 랭커를 너무 쉽게 가져다 붙이는 게 문제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멍청이들과 더 이상 어울릴 이유는 없었다.
"짐은 다 챙겼어?"
"귀중품은 모두 가지고 있어요. 여보."
"이 정도 장비에 재산이면 어딜 가도 살 수 있어. 마법사의 나라에도 전사는 필요하지.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거야."
아직 어린 딸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아내가 딸을 안아든다.
"괜찮을 거야. 우린 살아남을 거야."
그리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천사의 눈물은 인원이 많지 않다.
대부분은 기존의 조직원들을 일시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감시 따위 있을 리가 없다. 태연하게 가족들은 인질로 잡고 협박하던 마법사가 생각난다.
그리고 곧 이 거리에 들이닥칠 파괴도.
도망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옳았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배자는 모두 죽여라!"
"NPC들은 걸리적거리지 않는다면 남겨둬라!"
거센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리코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내와 딸의 손을 붙잡고 달린다.
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이 장비만 해도 대단한 재산이다.
모습을 가리는 망토와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쓴다.
골목 골목을 달려 빠져나간다.
이곳에서 아주 멀리 달아나야 한다.
아예 마법사의 나라에서 용병으로 일한다면 하드스록의 손길이 쉬이 닿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멸시받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하드스록에도 그렇게 망명처럼 떠밀려와 지내는 마법사들이 많다.
극도로 특정 클래스의 비중이 높은 각 국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클래스들의 몸값이 높다.
돈은 잘 벌 수 있을 거다.
정신없이 달린다.
하지만 제리코는 운이 없었다.
"거기 정지!"
그런다고 정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야, 이 호로 자식아.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 앙?"
가볍게 휘두른 대검이 땅을 뜯어낼 정도로 박살을 내버린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리코는 강제로 멈춰서야 했다.
비교적 저레벨인 아내와 NPC인 딸이 충격에 떠오른다.
몸을 던져 받아낸다.
엉망이 된 바닥은 구르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칠 만큼 파편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머리를 세게 부딪치자 피가 흐른다.
철컥철컥하고 중장갑의 발걸음이 들린다.
고개를 들자 늑대의 귀를 가진 전사가 내려다보고 있다.
"이거, 유배자잖아? 장비가 쓸데없이 좋아 보이는데. 그 천사 뭐시기 하는 놈들한테 받았냐?"
머리 위에 떠 있는 칭호는 [북부의 왕] 제리코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고 절망했다.
"너는 그 천사 때문에 죽는 거야? 알겠어?"
검이 내려쳐진다.
그리고 그것을 천사가 막아섰다.
* * *
애초부터 이런 공격이 빠른 시일 내에 들어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푹 쉬고 있던 리더가 나선다.
그런 단순한 계획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걸요?"
"천사님이 그래도 랭커를 상대로 버틸 수 는 있을 겁니다. 저도 합세하겠습니다."
심연에서 주워온 미스릴 문짝을 들고 막내가 말한다.
소위 말하는 장비빨이다.
랭커라 불리는 이들은 끔찍하게 강력하겠지만 이미 그들은 랭커만큼이나 강력한 적들과 마주해 왔다.
하던 일의 연장일 뿐이다.
레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가죠."
[라이트닝 볼트]
천사가 막아선 대검을 향해 전격이 내달린다.
이어서.
[라이트닝]
[컨퓨즈]
[슬로우]
대미지보다는 전적으로 방해효과를 노린 저주 마법들이 속사포처럼 날아간다.
레미는 공격 마법보다는 이런 방향으로 연습을 했다.
그녀의 재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며 마법 공격력을 활용할 만큼의 실력도 없다.
하지만 이 전사로 가득한 나라에서는 마법사의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북부의 왕의 휘청거린다.
"마법사? 건방진! 여기가 어디라고!"
반응은 어찌 한결같은지.
천사가 낡은 대검을 들고 스킬을 발동한다.
광전사 특유의 붉은 기운이 몸 주변에 일렁인다.
북부의 왕은 어이없어했다.
"천사? 이런 젠장. 고위종족이 여기 왜 있어?"
대답은 없다.
무감정한 얼굴이 고개를 들고 묵묵히 검을 휘두른다.
종족이 종족인만큼 근력은 이쪽보다 강하다.
북부의 왕은 광화된 천사의 힘에 놀라며 최대한 빗겨 내야 했다.
대검과 대검이 서로 미끄러지며 불꽃을 튀긴다.
받아내고만 있지는 않는다. 그대로 몸을 뒤틀며 왕 역시 스킬을 발동한다.
유니크 스킬 액티브 [짐승의 어금니]
거칠게 휘두른 대검이 잡아 뜯는 듯한 흔적을 남기며 맹진한다.
천사의 대검과 맞부딪히는 순간 또다시 방해가 들어왔다.
이번엔 마법조차 아니었다.
눈빛으로만 슬쩍 보인 구석의 모습에 아까 그 마법사가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총격이 닿은 곳이 화끈하다.
푸른 플라즈마가 불티처럼 휘날린다.
플라즈마 라이플?
물론 유니크 스킬의 액티브씩이나 되는 공격은 그 정도에 개의치 않았다.
천사는 날개를 펼쳐 공격을 받아 내려 했고, 날개가 그대로 뜯어졌다.
몸 역시 마찬가지다.
팔 한쪽, 다리 한쪽, 그 상태로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피를 흩뿌리며 날아간다.
그것을 대머리의 거한이 받아내었다.
그조차도 몇 발 물러서며 미끄러져야했다.
포션을 뿌리는 일조차도 이미 너무 익숙해진 일이다. 천사는 회복되었고 날아올랐다.
깃털이 흩날린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깃털을 보며 왕은 약간의 악몽을 떠올렸다.
[메인 던전]을 깔짝여보던 시절 무수한 새떼처럼 달려들던 치천사들의 모습을.
하지만 저 천사는 그만큼 강하지 않다.
대지를 강하게 딛고.
힘차게 밀어 찬다.
힘이 몸을 타고 흐르는 방향을 제어하고.
비행중인 천사를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오른다.
그때 다시 마법이 발목을 잡았다.
끈질기게 날아온 저주의 투사체가 왕을 따라잡는다.
약간 미세하게 느려진 속도 덕에 정확히 원하는 타점이 나오지 않았다.
마법은 이래서 불쾌하다.
천사가 대검을 들어 받아내고 그대로 저 높은 상공까지 둘 모두 치솟았다.
주력은 이 천사인가?
누군지 알 것 같다.
엔젤이라는 이름으로 근래 명성을 날리던 청부암살자다.
진짜 천사였다고?
그다지 레벨이 높지는 않으나 종족빨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적해내는 모습이 소름 끼친다.
하지만 이런 걸 손에 넣고도 얼마나 게으르게 산 것이지.
너는 그 나태함 덕에 죽는다.
왕의 일격이 내리쳐진다.
그가 가진 유니크 스킬 [짐승의 왕]은 힘 계열치고는 민첩 계통으로 쏠려 있는 유니크 스킬.
정밀한 동작에도 큰 보정이 들어간다.
발 디딜 대지는 없으나 그럼에도 매끄러운 힘 전달이 느껴진다.
아주 아름답다.
대검 대 대검이지만, 천사 대 잎사귀 요정이지만.
이 전투는 이길 수 있다.
파리처럼 내리쳐진 천사가 그대로 땅에 처박힌다.
지진 같은 소리와 함께 주변의 건물들이 반파된다.
도미노처럼 쓰러진 일부 구역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왕의 눈에는 보인다. 천사 본인은 대단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광전사라고 했던가. [광폭화]까지 발동한 이상 정말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지 않는 이상 싸울 것이다.
천사는 너무 단단하다. 그냥 몸뚱어리 자체가 그렇다.
부상은 입힐 수 있으나 치명상을 일격으로 입히긴 힘들다.
총격이 다시 날아든다.
플라즈마 라이플은 맨몸으로 때우기에는 부담스러운 위력이다.
실탄과는 다르게 갑옷을 뜨겁게 달구며 겉부터 녹여가니 장비의 손상도 크다.
저 마법사부터 쳐 죽여야겠군. 천사는 천천히 요리할 수 있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꾼다.
내려친 대검을 다시 몸을 뒤집으며 회수한다.
그리고 [맹돌진]을 발동한다.
[대시]의 몇 티어 위의 상위 스킬.
돌격하며 공격하는 것에 보정을 넣어주는 이 일격을 마법사가 피할 수는 없다.
총기를 겨누고 있는 마법사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권능?
불길함에 왕 역시 신을 불렀다.
결투의 신의 서늘한 은빛 신성이 몸을 감싸고 극적으로 강화되는 몸 상태를 느낀다.
그리고 시간이 멈추었다.
왕은 멈춘 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는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