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83화
왕국 - Lv. 215 북부 슬럼의 왕(4)
마법의 신은 끈질기며 집요하고 섬세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한 이들이 모인다면 으레 그렇듯이 끊임없이 대화가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어 나간다.
한 가지 주제가 정리되고 나면 그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난다.
그렇게 기존 술식의 응용 방안이나, 구상은 했으되 구현은 하지 못한 각종 다양한 방면의 마법에 대하여 대화가 오갔다.
우습게도 나 역시 오랜만에 이 정도로 진심인 자를 만난 셈이라 꽤나 빠져들고 말았다.
희우와 꼬맹이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군것질을 포함하여 실컷 놀다가 돌아왔음에도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국 둘 모두 들여야 했다.
만신전의 관리인은 기묘한 얼굴로 두 소녀를 안내했다.
"여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건 처음이양. 신들께서 아주 흥미가 많구낭."
그러다 보니 다른 신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여신님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오오! 실물이잖나!"
여신님은 자신의 손을 떠나간 새로운 천사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둘이 마주 앉더니 쑥덕거리기 시작하는데 대체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듣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열과 성을 다해 술식을 허공에 그리고 있는 마법의 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다.
좀 더 있다가 나타난 것은 자연의 신이다.
"뭔가, 이건. 반상회라도 할 셈인가?"
"좋지. 네 녀석 그 낯짝은 오랜만에 보는군!"
"마법의 신은……. 제정신이 아니군."
"저긴 내버려 두자고."
"그래 내가 그동안 지켜봐 온 이 영웅들의 이야기나 좀 들어볼까."
자연의 신과 혼돈의 여신이 공물로 받은 주전부리를 불러내면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반면 나와 마법의 신 쪽은 계속해서 학술적 토론의 연속이다.
허공에 수 놓인 마법진과 술식의 개수가 서른 개가 넘어가기 시작했을 무렵, 자연의 신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여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나?"
마법의 신이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한 대답까지 줄줄 늘어놓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대화에 대해 해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빠져나왔다.
자연의 신이 당황했다.
"어, 어디를 가는 건가!"
"돌아오겠습니다. 자연이시여."
"아니, 잠깐만!"
그렇게 말은 했으나 애초에 두 신의 관계는 상당히 양호했던 모양으로 곧 대화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지친다. 이번 회차 마법의 신은 대단한 사람이군요."
"미친 마법사지. 그 왜 소설 같은데 나올 법한 그런 느낌으로."
"여신님,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군요. 아름다우십니다."
"너도 실물로 보니 더 낫군."
이쪽에서는 그다지 골치 아픈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연방의 언어와 마크가 인쇄되어 있는 과자와 차는 충분히 맛있었다.
꼬맹이는 방글방글 웃더니 옆으로 사라졌다.
자연의 신이 꼬맹이를 아예 무릎에 앉혀놓고 마법의 신과 열띤 토론을 벌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경청하는 모습이 귀엽다.
"내가 싫어서 저기로 간 건 아니겠지?"
"그럼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어요!"
"아니, 내가 뭘 못했다고!"
여신님이 낄낄댄다.
"일 중독자지 일 중독자. 가정에 그리 소홀해서 되겠나."
"가장이니 돈을 벌어와야죠."
"지금 버는 것 반만 벌어도 충분하거든요!"
"어려운 문제로군."
시답잖은 농담이긴 했으나 그런 이야기는 벌써 다 끝난 후였던 모양이다.
여신님께서 물었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메인 던전에 대해서라면 나도 알고 있다. 도전해 봤었으니까. 그걸 뚫어내려면 보통으로는 안 될 텐데."
"일단 이 아이랑 저기 꼬맹이는 데려갈 겁니다."
"그걸론 불충분한데."
"파티원은 더 구해야죠."
우선은 블랑쉐, 그 후에는 아무래도 전사거나 그에 가까운 인원들이 더 필요해진다.
뒤편에서 마법이나 갈겨대는 건 우리 꼬맹이로 충분하다.
마법사는 결국 극한의 극한까지 내다본다면 유틸리티로 팀을 보조하는 존재니까.
"단기적인 계획부터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
그러고 보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는 했다. 이제 와서는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슬럼을 먹고, 거기 여신님의 교단을 세울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레벨링하느라 한동안 바쁘겠죠."
"슬럼의 저놈들을 신도로? 흐음."
"고블린 다루는 솜씨를 보니 나쁠 것 없더군요. 마침 그쪽에 교리도 예쁘게 정리되어 있고. 그대로 써먹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막내는 교단의 근간이 될 경전들을 충분히 챙겨왔다. 아니, 그 본인부터가 열심이었다.
여신님은 어딘가 께름칙한 얼굴로 대답한다.
"사실 내가 그걸 정말로 믿고 있냐고 한다면……."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 결국 그런 내용 아닙니까. 최소한의 질서를 잡기 위한 규칙이라면 그게 법이건 교리건 어떻습니까."
"그래……. 리얼타임으로 교단을 굴리는 건 또 오랜만이군."
"잘 부탁드립니다. 대신 제 일은 신경을 좀 덜 쓰셔도 될 테니까요."
준비를 충분히 갖추고 의도된 곳으로 갈 수 있는 리프트의 난이도는 우리가 겪은 튜토리얼보다 낮다.
비정상의 극치를 달리는 게임을 하다가 정상 난이도를 플레이하게 되었으니 어찌 불편하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네놈뿐일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희우가 경청하고 있다.
"방금까지 했던 이야기에서 잘 모르겠는 것 있으면 물어봐."
"어. 음. 그러니까 고블린 때처럼 교단을 세워 슬럼을 장악하고 그대로 조직처럼 굴릴 거라는 말이죠? 혹시 마약 같은 것도 그대로 유통하나요?"
"그걸 금지하면 반발이 심할걸."
"하지만 그건……. 엄청 나쁜 거잖아요."
"대체재를 만들지 않고 무턱대고 금지하는 것보단 낫지. 슬럼의 조직들은 재정이 턱없이 불건전해. 고블린들에게 언제까지나 손만 벌릴 수도 없고 말이야."
희우는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여신님이 조금 도와준다.
"강한 유배자는 그만큼 벌이가 많지. 하지만 그 낙오자들을 모두 홀로 먹여 살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왕국은 미개척지가 생각보다 많다고 했잖아. 그 이유가 뭘까?"
스스로 생각해야 느는 법이다.
꼭 왕국이 아니더라도 리프트 내부에서 주어지는 환경도 온갖 역학 관계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경우 순간적으로 어떤 판단이 최선의 이득을 뽑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감각을 기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이번 회차에서 희우를 잃는다면, 다음 회차에서라도…….
하지만 이 아이에게 다음 회차가 있을까?
갑자기 우울해지려는 가운데 인상을 잔뜩 쓰며 희우가 대답했다.
"리프트의 보상이 훨씬 크다고 했으니까 개척을 위해 몬스터 토벌 따위를 할 이유가 없는 거군요?"
"하나 더 있어. 더 중요한 이유."
여신님도 지긋이 바라본다. 희우는 면접관 앞에 선 취준생 같이 쭈뼛거린다.
"모르겠는데요!"
"좋아. 그 정도만 해도 잘했어.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거치고는."
"아닌데요! 저 생각 많이 하는데요!"
많이 하긴 하겠지. 이 아이가 깊이 생각하는 것들은 대체로 어디를 어떻게 찌르면 효과적으로 죽을까 같은 분야일 것이다.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서야. 하이랭커씩이나 되면 이 왕국에 오래 머물렀을 거고…… 그럼 원한도 서로 많거든."
"그렇게 살벌해요?"
"힘을 추구하는 자들의 목적이 꼭 클리어는 아니지. 그냥 위에 서고 싶은 거야. 레벨업과 힘에 중독되어버린 인간들이지. 언제건 경쟁자를 줄일 수 있다면 줄일 거다."
희우가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 뭔가 생각하는 듯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러는 걸까요?"
"폭력으로 인한 우위는 가장 원초적인 우월감이니까."
이걸 모르는 건 의외일지도 모른다. 가정교육은 잘 받은 덕일까? 혹은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초인이라 그럴까.
희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리한다.
"그럼 우리가 개척하고 그쪽에서 농사라도 짓게 하려는 거군요."
"꼭 농사가 아니어도 이득 볼 사업은 많아. 그건 여신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응? 잘 모르는데."
"교단 큰 거 굴리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서버에서 털어오면 되었거든."
"약탈 경제가 이렇게 또 문제가 되는군요."
뭐, 하드스록이 이상한 거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뇌가 죄다 근육으로 들어찬 놈들이니 리프트 타고 약탈할 생각만 하는 거다.
생각해보면 우리 여신님도 전사였군. 아주 퓨어한 전사.
"뭔가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대전사여."
"어차피 우린 리프트 타고 레벨링하러 떠날 거니까. 사실 그렇게까진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
"무시하지 마라!"
"막내 아저씨랑 레미, 그리고 그 천사 언니는 계속 함께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 친구들도 그게 더 편할걸?"
"무시하지 말라니까!"
파티 개편은 피할 수 없다. 희우의 오밀조밀한 얼굴이 약간의 섭섭함을 그려낸다.
* * *
기묘한 일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유배자의 미덕임에도 모두가 둘러서서 그 결투를 구경하기만 했다.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였다.
레미는 약간의 소름을 느꼈다.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검을 든 휘황찬란한 천사가 주관하는 가운데 모두가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이기는 자가 이 북부의 지배자가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데도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있을 리 없는 일을, 하지만 그들에게 이득되는 일을 잔뜩 벌이며 혼을 빼놓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마치 단체로 최면에 걸린 것처럼, 있지도 않던 그들의 신성한 전통을 보는 것처럼.
정숙하게 결투를 지켜보고 있다.
오늘의 일들은 철저한 블러핑의 연속이다.
사실 북부의 왕을 정면으로 제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 슬럼의 분위기가 이리될지 또한 미지수였다.
객관적으로 천사의 눈물 길드는 그만큼 강하지도,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이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게 보였다. 누구라도 속고 말 정도로 당연하게 그리 보였다.
리더의 지침대로 이 상황을 만들어낸 레미조차도 속을 것 같은 기분이다.
천사의 눈물이 엄청나게 부유하며 동시에 엄청나게 강력한 길드라고 믿어버리고 말 그런 느낌.
사실은 여기 셋은 그렇게까지 강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리더한테는 절대 안 까불어야지."
"어머, 나랑 같은 생각하고 있네요?"
천사가 슬며시 말을 건다.
"우리 리더 지나치게 굉장하지 않아요? 후, 재능 있는 것들이란. 세상은 참 불공평하네요."
"그래요? 난 레미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실현되지 않은 계획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실행시킨 건 레미지요. 잘했으니까 칭찬해줄게요."
방긋방긋 웃으며 그리 말하는데 괜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뱃속에서 꾸물거리던 불쾌한 기분은 무엇이었을까? 열등감?
그럴지도 모르겠다.
퍽!
막내의 강력한 라이트 훅이 들어가며 왕의 이빨이 레미에게 날아왔다. 천사가 그걸 붙잡았다.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린다.
결투 중인 둘은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또한 모두에게 어필 중이다.
가능한 한 최적화된 마인드맵을 가진 랭커가 주 무기를 들지 못하면 얼마나 약화되는지 아는 이는 적다.
그런 이들의 눈에는 막내가 그야말로 랭커와 대등하게 혈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야 어찌 되었건, 그리 믿게 된다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연출과 블러핑.
시키는 것을 잘하는 것 또한 재주다.
적어도 그런 재주는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로 했다.
우습게도 모두의 손을 떠난 마지막 장면마저도 극적이었다.
서로에게 크로스 카운터가 들어가고 모두 쓰러졌다.
먼저 일어선 것은 막내였다.
스킬에 의한 보정이 이 정도로 축소된다면……. 타고난 체급이 다른 막내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결과는 근성과 의지를 포함해서 근소할 정도의 차이.
막내는 비틀비틀 걸어가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을 긁는 왕을 보았다.
그리고 그 머리를 힘껏 짓밟았다.
북부의 왕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막내가 양팔을 치켜들고 고함을 질렀다. 다분히 연출된 전투의 함성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전사다운 외모의 막내가 그리하자 신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된다.
이어서 어디선가 환호가 시작되었다.
레미가 미리 고용해 둔 바람잡이들이다.
그 환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번져나갔다.
외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조차도 소리 질렀다.
이미 그들의 기쁨은 풍족한 먹거리만으로도 다 채워진 후다.
다른 구역에서 소문을 듣고 몰려온 주민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래도 좋았다.
레미는 때맞추어 지금까지는 숨겨두었던 술을 풀었다.
군중들을 더 즐겁게 만들고 그 인식에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섞어 넣어야 한다.
오늘이 즐거울수록 좋다.
그렇다면 모두 이날을 무언가 굉장히 대단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이 남아있다면 [천사의 눈물]이라는 길드는 북부의 정당한 지배자로서 자연스레 인정받으리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천사가 다시 날며 모두를 축복하듯 빛을 뿌렸다.
그러자 모두가 마치 명예로운 바이킹 전사라도 된 것 같이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불렀다.
고생하고 고생한 끝에 왕국에서 도달한 결말이 슬럼의 밑바닥이기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 모든 연출은 그런 심리를 자극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편의 연극이 끝났다.
* * *
꼬맹이가 교수들 간의 대화에 낀 학부생마냥 혼란에 빠져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졌을 무렵.
마법의 신도 꼬맹이를 알아보았다.
[초마도사]의 유니크 스킬을 가지고 나타나는 랜덤 NPC.
물론 본인에게 대놓고 그리 말할 정도로 무례하지는 않다.
귀여운 제자 대하듯이 조심조심 머리를 식혀주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마법적 냉기가 꼬맹이를 감싼다.
뱀파이어치고는 체온이 많이 올라간 상태긴 하다.
자연의 신은 그 모습을 보더니 대화를 멈추고 일어서서 내게 왔다.
"그래, 여기 온 제일 중요한 이유는 그거지?"
"아시겠지만 제가 여러분 눈치를 좀 보긴 해야 해서……."
"이런 부분에선 소심하다고 말할 정도로 신중하군. 내가 자네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나?"
"신의 마음만큼 알기 힘든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난 도전자였고, 클리어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야."
"고맙습니다."
여신님이 낄낄댄다. 마법의 신도 꼬맹이를 안아 들고 다가왔다.
공대였던 말투가 극존칭이 되어 있다. 어쩐지 낯이 간지럽다.
내가 이루어낸 성취 대부분은 게이머로서의 지식을 적극 활용한 꼼수투성이니까.
"오르골 선생님, 오늘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행복했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이런 관계를 가능하면 정기적으로……."
"제 편을 들어준다면 말이죠."
"아, 물론이죠. 전 도전자는 아니었지만 클리어라는 것 자체는 또 흥미가 많습니다. 미지를 탐구하는 것이 마법사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실례지만 바깥에서 하던 일이……?"
"천체 물리학자였습니다."
"어쩐지 납득이 되는군요."
본래는 단지 내게 호의를 가진 신들이 얼마나 나를 지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확인하려고 왔던 길이다.
마법의 신 정도는 쉽게 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신에게 극존칭을 받을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로 순수 마법학자에 가까운 타입의 마법신은 나로서도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다.
모든 결과가 좋다.
슬럼에서의 일도 좋게 끝났다고 한다.
운이 좋은 쪽으로만 팍팍 튀는 것을 보니 우리 희우가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슬쩍 보니 장갑을 끼고 과열된 꼬맹이를 주무르고 있다.
마법의 신은 그 장갑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간이 너무 흘렀다.
이제 슬슬 나서야 할 때다.
「나의 마지막 전사가 기다리고 있다. 중세의 황제를 쓰러뜨려라. 그렇다면 나는 너를 인정하겠다.」
귓가에 신언이 울렸다.
‘전쟁이시여. 이런 건 의외로 또 쿨하시군요.’
「네 녀석이 마지막 층에서 창을 다루는 모습은 보았다……. 혼돈의 창 놀림과는 다르지만……. 돌이켜보니 훌륭한 전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더군.」
그런데 뭘 인정하는 걸까?
「혼돈은……. 이번에는 정말로 좋은 대전사를 둔 것일지도 모르겠군……. 후우…….」
어딘가 씁쓸한 한숨을 마지막으로 트롤 전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의 신이 슬쩍 내게 말을 걸었음을 티 내지 않기로 했다.
하도 자주 부딪혔더니 좀 미운 정이 든 것 같다.
만신전을 나서자 한밤중이었다.
키리가 귀를 축 늘어뜨리고 마중 나온다.
"좀 더 일찍 나오면 안 되는 거양? 내가 퇴근할 수가 없잖앙."
"제가 좀 친한 신이 많아서."
"신들과 다과회를 하는 유배자라닝. 들어본 적도 없엉."
"하하하."
내일부터는 리프트에 진입해야 한다.
휴식은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