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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87화 (18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87화

왕국 - Lv. 462 블랑쉐(1)

마법사의 실험실이라는 것은 으레 무언가랑 이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샤크마조차도 요정들과의 연대를 취해 세력을 구축했을 정도다.

마법은 돈이 많이 든다. 샤크마는 돈이 필요했고, 미친 요정들과 협업하여 기적의 샘물을 짜내는 장사를 했다.

키메라 연구 역시 마찬가지다. 당연하게도 배후가 있다.

자금과 재료를 조달할 만큼 커다란 조직.

[랜덤 인카운터]는 말 그대로 랜덤이기에 세부적인 사항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지하 실험실을 싹 털고 나오면서 여러 가지를 발견했는데 개중에선 [키 아이템]으로 사용할 물건도 많았다.

"난쟁이 왕국에서 온 전서. 흠. 되게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모양이네. 여긴 난쟁이들이 큰 세력인가 보군."

"43서버는 상당히 혼란한 모양이에요."

그 말대로다. 용인 마법사에게 자금을 대고 있는 조직은 여럿이 있었고 오고 간 서신도 많았다.

대부분은 키메라 연구를 하는 이유가 유배자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키메라라고 하면 굉장히 끔찍해 보이지만 결국 유전자 조작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행위다. 그걸 마법으로 할뿐이지.

마법적인 생명공학의 개념이다.

그 원인은 약탈 경제에 종사하는 유배자들이었다.

개미처럼이나 많은 유배자들이 신출귀몰하게 온 사방에 나타나서 약탈을 일삼는다.

43 서버의 국가들은 굉장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 했다.

"우리 서버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거긴 통과자가 거의 없어서 유배자가 꽤 드문 존재였잖아."

"유배자는 말로만 들어보았다 같은 반응도 많긴 했죠."

"그 설원 난쟁이 마을의 이끼 난쟁이 상인 기억나지? 아마 그 사람도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는 거의 만나지 못했을 거야."

"다 죽었으니까요?"

"응. 우주 시대로 가면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없는 모양이고."

바르바로이는 간접적인 암시에 능했다. 나는 그의 안배로부터 대략적인 청사진을 잡을 수 있었다.

아마 나를 오랫동안 대하며 터득한 지혜겠지.

"반면 43서버는 유배자를 골치 아프고 귀찮은 해충처럼 취급하는 모양이야. [종족 메인스트림]은 거의 발견되지 않음 모양이려나."

일단 서류와 자료들로부터 대강의 연대도 파악할 수 있다.

중세 판타지의 기준 시점으로부터는 제법 미래다. 100년 가까이 지난 시대.

다양한 마법 공학의 여명기로 유배자들이 가장 자주 나타나는 시기기도 하다.

난이도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시기기 때문에 저단을 도는 유배자들이 뻔질나게 출현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주 강력한 것도 아니니 해충 취급일 수밖에.

"이런 일이 있다면 한 가지 재밌는 일이 있지. 인간의 나라는 지원을 하지 않지?"

"실제로도 인간은 코빼기도 안 보였군요."

"왜일까?"

희우가 생각을 한다. 어찌나 열심인 귀에서 수증기를 뿜는 환상이 얼핏 겹쳐진다.

참 언제나 열심이다.

곧 정답에 도달했다. 유배자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다.

정확히는, 하이랭커처럼 생각하기에 더 가깝지만.

"아, 그 저단계를 도는 유배자면 아무래도 종족 카드를 손에 넣기 힘들 거고……! 그러면 인간일테니까!"

"다양한 종족이 반목하는 세계에서 어쨌든 인간이긴 한 유배자들이 비빌 곳은 같은 인간이다 이 말이야."

그렇다하더라도 이번 왕국은 인구가 너무 많다. 서버 번호가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것도 드문 경우다.

보통은 단절이 생긴다. 그 왕국 자체의 역사가 어떻건 말이다.

이 왕국은 지나치게 오래 유지되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유배자가 많아. 그 유배자들은 또 대다수가 약탈 경제에 종사하고."

"뭔가……. 슬럼으로 밀려난 건 아니지만 일용직 노동자 같은 느낌이네요."

"아주 정확해."

그리고 바로 그 일용직 종사자인 두 명이 옆에서 오들오들 떨며 이 대화를 듣고 있다.

제니는 그 와중에도 내가 건넨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거기, 리더님?"

"어, 넵. 부르셨습니까!"

"긴장하지 마시고. 저희는 그냥 12단계에서 랜덤 인카운터를 만났고 그걸 돌파했다. 그렇죠? 단지 그 뿐인 일이에요."

"네네넷."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이건 글렀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군.

신중한 성격이란 말은 달리 말하면 대범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집합은 넓다.

[피의 군주]에 딸린 스킬들의 비주얼이 좀 쇼킹하긴 하지.

제니에게 말을 건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우리는 좋은 관계를 쌓아갈 수 있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제니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대답했다.

"어, 그 말씀은 혹시 저희와 지속적으로 파티 플레이를……."

"예, 43서버에 볼일이 생겼거든요."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랭커님께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흠? 랭커?

하긴 그리 생각할 만도 하다.

하드스록이 아무리 유사 국가라곤 해도 공문서에 장난질을 할 정도면 그 정도 밖에 생각이 닿지 않겠지. 사실 랭커도 못하는 짓이지만…….

공권력이 내 편이다 이 말이야.

거기에 어차피 곧 사실이 될 호칭이니 문제없다.

내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손을 내밀자 제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값비싼 물건을 만지듯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희우가 옆에서 그걸 부럽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만하죠.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그 상자는 계약금인 셈 쳐요."

"정말 감사합니다!"

* * *

"이 전서를 쓰면 그 난쟁이 왕국이나 적어도 그와 관련된 곳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인 셈이지."

"[키 아이템]이란게 그런 개념이군요."

"숫자가 새겨져 있는 것들은 일반적인 키 아이템이야. 좀 더 은밀하며 대륙의 정세와 관련되어 있고 난이도가 높은 것들은 저런 식으로 떨어지지 않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유니크 키 아이템]이라고 해야 하려나."

딱히 그렇게 구분지어 부르는 일은 없다. 어차피 통용되는 키 아이템이라는 개념은 대부분 숫자가 달린 잡다한 것들이니까.

그건 미궁의 시스템적 배려에 가까운 물건들이다.

좀 더 세계를 파고들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그 세계의 팩션과 접촉하여 징표가 될만한 것을 손에 넣거나, 어딘가 숨겨진 보물을 발굴해 손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와 연관된 장소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할 수 있으니까.

중간에 실패한다면 예비가 없을 경우에는 그대로 단절될 위험도 있다.

시간 탐험대가 따로 없다.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희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금화를 리프트의 제단에 바치면 어떻게 되나요?"

"그럼 금화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가겠지. 운이 나쁘다면 어느 유배자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금화가 떨어져 있는 [메인 던전]일지도."

"그건 좀 싫네요."

"아무거나 넣으면 랜덤에 몸을 맡기는 거야. 아주 끔찍하고 위험한 행위지."

"명심할게요."

암살의 방식 중 그런 게 있긴 하다.

파티가 제단에 올라갔을 때, 바깥에서 제물을 던져 올려 아주 위험한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

본디 모든 것에서 악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란 생물이니까.

길드 하우스에 도착하는데 녹초가 된 레미와 마주쳤다.

"오, 고생 많아 보이는걸. 개기는 녀석들은 없지? 막내는?"

"헨리 아저씨는, 아니 신관님은? 어쨌든 병원에 남아 있어요. [북부 슬럼의 왕]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자리를 지켜야죠."

잘할 거 같아서 던져두긴 했는데 정말로 잘 하고 있다.

나는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여신님이라도 말이다.

여신님은 그다지 조언할 것도 없을 정도로 레미 혼자서 잘 해나가고 있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막내, 아니 이젠 가명으로 헨리라고 불리는 거구의 신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조직의 생리에는 빠삭하니까.

"도움이 될 것 같은 녀석들을 빨리 추려서 나한테 보내. 교육은 시켜 줄 테니까."

"네에, 노력해볼게요. 아마 제리코랑 그 아내를 중용하게 될 거 같긴 해요."

"길드 경영인지 조직경영인지는 몰라도 잘 하고 있어. 그 의사 양반은 어때?"

무수한 물자 지원과 장비 지원에 행복해하고 있던 노의사는 처음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호응했다고 한다.

"촌장님이나 다름없는 그분이 전폭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니 일이 쉽긴 하네요."

"다 잘되어가고 있군."

저택에 들어서자 정원에서부터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주방이다.

엔젤이 빵을 굽고 있었다. 달달구리한 재료가 많은 것을 보면 여신님께 올리는 공물인 모양이다.

"오, 좀 늦은 점심이지만 드시겠어요? 요리할까요?"

이 천사가 8년간 무엇을 했나하니 정말로 취미 생활을 즐기며 게으르게 살았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돈은 주방에 탕진했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여유가 생긴 유배자들이 그런 식으로 취미와 일상에 목을 매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도전자들은 취미가 미궁이 되어버린 자들일 뿐이니까.

"나중에 요리 좀 배워볼까."

"제가 리더에게 뭔가를 가르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셰프 출신은 많이 봤는데. 그 중에서 최고인 것 같아서."

여신님도 공물에 대만족하고 있으시다.

"좀 쉬다가 다시 보자고. 스킬 세팅에 대한 선택지를 정리해봤는데 네 의견도 중요하니까."

"그럴게요. 빵 맛있겠다!"

"좀 먹을래? 여신님도 괜찮으시다는데. 아니 가능하면 만신전으로 오라는데?"

"그건 좀 곤란합니다."

"하하하, 여신님도 농담이래."

발코니로 나가니 트동트 영감님이 파이프를 물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상의는 제대로 착의하고 있다.

대륙의 원주민인 오크와 유배자 출신의 오크는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신 모습이다.

"음? 왔는가."

"허리는 좀 괜찮으십니까?"

"내가 그리 늙었을 줄은 몰랐지. 앓아누워서 끙끙대는데 고향이 얼마나 그립던지."

"지병에는 힐링 포션이 안 듣긴 하죠."

힐링 포션의 효능은 외상에는 기적에 가깝지만 병에는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다.

병이란 것은 바로 방금 전에 걸려서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왕국에 병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이든 오크인 영감님이 갑작스럽게 도끼와 망치를 들고 모험에 나선 결과였다.

지병이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그저 노환이다. 오크가 젊은 시절 몸을 험하게 굴리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또 무릎이 쑤시는군."

"블랑쉐에 대해서는 뭔가 소식 있습니까?"

"아직은 없네. 내건 돈이 많으니 잔챙이들은 수도 없이 문의를 해오고 있네만."

"길드가 좀 안정되고 나면 레미도 도울 겁니다. 그럼 더 편해지겠죠."

블랑쉐가 만약 야생에서 서바이벌하기를 택했다면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본래도 청부업자나 다름없었던 그녀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 접근방법은 의뢰였다.

큰돈이 걸린 청부가 있다면 끼어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블랑쉐로서도 크게 한 건한 후에 다시 잠적하며 힘을 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감님은 그 의뢰의 클라이언트 행세를 하며 무언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뢰 내용은 뭘로 내거셨습니까?"

이 부분은 상황을 살피고 그에 맞는 의뢰를 내야만 한다. 내가 신경 쓰기에는 당장의 스펙업이 급했으므로 일임했다.

영감님은 대답했다.

"자네가 좋은 미끼 주지 않았나."

"미끼……. 레미요?"

"이러려고 마법사인데 내세운 것 아닌가?"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한데."

그런 의도가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일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마법사에 대한 반감을 내세워 해소하려고 했다.

그래서 레미는 위장 없이 당당하게 마법사로서 활동했다. 평소의 복장도 로브와 고깔모자. 그야말로 마법사다.

물론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하여 엔젤과 헨리가 대부분의 경우에는 붙어 다닌다.

"일이 아주 잘 풀려서 레미는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되겠구나 했었는데."

"그런 것 같기에 좀 써먹었지."

마법사에 대한 반감보다는 북부의 왕에 대한 반감이 더 컸던 모양이었기에, 레미는 오히려 존중받는 입장이었다.

적어도 이 북부 슬럼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자연스럽지 않은가. 갑작스레 길드를 세우고 북부를 장악해버린 길드 마스터가 마법사다. 다른 쪽 슬럼에서는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많겠지."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

"흔쾌히 하라고 하더군."

하긴 어차피 돈 때문에 하는 일이다. 영감님이 의뢰주인 이상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블랑쉐라면 더더욱 그렇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그녀가 의뢰를 그르칠 리는 없지.

원래 청부업은 신용이 생명이다.

"중요한건 자네가 구슬릴 수 있냐는 건데."

"힘으로 제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수배부터 떨어졌으면 리프트를 쓰긴 힘들었을 테니까요."

리프트에 접근할 수 없다면 지난 8년간 주된 경험치 수입은 다른 유배자나 왕국 미개척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낸 기간에 비하여 효율이 끔찍하게 나빠진다.

"그래도 저희 없이는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하니 조심하세요."

"원칙과 원리대로만 행동하는 암살자라하지 않았나. 그럼 차라리 이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지."

튜토리얼에서 마주친 블랑쉐와는 다르다.

청부업자로서의 블랑쉐는 적어도 대뜸 레미를 죽인 다음에 돈을 요구할 리는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살지는 않는다. 계약관계가 얽힌 순간부터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원칙을 따른다.

그런 삶의 방식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오르골’이 그녀를 그런 식으로 길렀다.

이것은 단지 괴물로만 보이던 블랑쉐와 친구가 되어본 후에나 간신히 알게 된 사실이다.

어차피 왕국 이후에도 학살자로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기도 하고.

문제라면 증거가 남지 않기에 별 탈이 없었던 그녀의 튜토리얼 통과 방식을…… 왕국의 유배자들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고정 네임드 NPC인 그녀에게는 지난 17년간 별 탈이 없이 해왔던 일이 갑자기 문제가 된 느낌일 것이다.

17년간 유배자로 지내왔는데 이번 회차에서만 별안간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고 적의를 내보인다.

"그래도 레미를 상대로 의뢰를 내는 건 너무 악랄한 발상 아닙니까?"

"내가 본 최고의 유배자가 자네인데 누구한테 배웠겠나."

좀 할 말이 없긴 하군.

"알아보는 사람만 없으면 당장 오크 전사로 리프트를 타셔도 되겠군요."

"아 물론, 나 정도면 원하는 파티도 많겠지. 허허허. 어이구 허리야. 에구구."

"주술사 하셔야지 전사는 못하겠습니다 그려."

영감님은 그 말에 카드 한 장 안 구해 주냐며 껄껄댄다.

그리곤 말했다.

"괜찮아. 내가 그 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것 같은가? 이것도 자네보고 배웠다네."

"믿겠습니다."

블랑쉐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확실히 모르겠다는게 변수라면 변수긴 하다.

너무 흔적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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