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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88화 (18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88화

30단계 - Lv. 875 난쟁이 왕국(1)

왕국에도 날씨는 존재한다.

사실 하늘도 존재하고 숲도 존재하며 강이나 바다도 존재한다.

왕국이라 불리는 것은 이 공간, 어쩌면 이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 세계는 어디까지 이어지는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넓다.

일개 행성으로서 정의되고 마는 서버와는 차원이 다른 넓이를 자랑한다.

우주라는 개념을 넘어 고전적인 세계의 개념을 차용한 설정이다.

그럼에도 가장자리로 갈수록 척박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기에 개척에는 한계가 있다.

광대한 영토를 지닌 왕국이 리프트를 통해 다른 세계에서 가져오는 약탈에 의존하는 이유다.

그 다른 세계들, 예를 들어 끊임없이 새로 나타나는 튜토리얼 서버나, 홀수층과 같은 형태의 아공간은 계속해서 새로 생겨난다.

리프트를 드나드는 유배자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다보니 왕국의 모든 것은 힘을 위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힘이라는 것은 크게 보면 강해지기 위한 정보, 작게 보면 당장의 스펙이다.

당장의 스펙에서도 정점에 서는 것은 [유니크 스킬]이나 고위 종족이다.

하드스록의 북부를 뒤엎어버린 천사의 존재는 겨우 이틀 만에 널리도 알려졌다.

습도 높고 안개가 낀 봄날이었다.

* * *

"스카우트 제의에는 관심 있는 척만 해."

"그러면 그냥 넘어갈까요?"

열렬한 러브콜이 당당히 날개와 링을 펼치고 요리중인 엔젤에게 향한다.

나는 엔젤의 지시대로 아침밥의 재료를 손질하며 대답했다.

"아니면 어쩌려고? 치천사씩이나 되는 종족에 레벨도 그리 안 높아. 그러면 미친놈들처럼 달려들걸?"

레벨이 낮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거대 길드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랭커들이 입맛대로 육성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제자로 받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는 녀석들도 이미 많았다.

정보와 꼼수가 곧 힘으로 치환되는 미궁은 묘하게 도제같은 시스템이 존재한다.

마인드맵을 꾸준히 손봐주며 지식을 전수할 고참의 존재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는 전투력의 한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자기들끼리도 눈치를 봐야해. 피망 썰어 둘게."

"언젠가는 파토가 나지 않을까요? 아 그거 좀 더 잘게 채썰어주세요. 꼬맹이는 야채 싫어하니까 몰래 넣을 거예요."

"어차피 파토나려면 시간이 필요할거야. 네가 노골적으로 시간을 끄는 티를 낼수록 더 심해지겠지. 이 정도면 되나?"

"이미 어딘가의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군요. 그거보다 더 잘게도 가능해요?"

그때 꼬맹이가 오른손으로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었다.

최근에 만들어준 인형을 왼손에 들고 있다. 데포르메된 토끼 인형이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줄도 모르고 비척비척 걸어 나오는 것이 정말로 열 살의 평범한 아이 같다.

본래 뱀파이어답게 잠이 적었던 꼬맹이는 최근 많이 자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자라는 건 아니지만 인간답게 살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서적인 부분은 그런 곳에서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희우가 자연스럽게 장갑을 끼고 비척대는 꼬맹이를 안아든다. 소파에 폭 올려두고 물을 먹인다.

본인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엄마라기 보단 언니로군. 그래도 제법 태가 난다.

바깥에서는 막내였다고 하던데.

"피망을 숨겨야 해."

"주세요. 바로 넣을게요."

"좋아."

먹음직스러운 수프에 피망이 들어간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미슐랭 쓰리 스타에 빛나는 셰프가 최선을 다하여 숨긴 야채다. 사실 이게 미슐랭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면 말이야. 그렇게 시간만 끌면 된다는 거야. 한 달 정도는 간을 볼 수 있을 거거든? 그 정도면 충분해."

"하이랭커급도 내다보신다고 했죠? 그게 가능할까요?"

"연합해서 공격해오지만 않는다면 감당할 수 있어. 한 달 정도면 떡을 치지. 튜토리얼에서 가져온 게 얼마나 있는데."

"46 서버는 어디든 털 수 있을 기반이 있으니 그렇군요."

엔젤은 레벨링이나 파밍에 욕심이 없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미궁에서의 삶을 질색하는 이 요리사는 하드스록의 시가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레스토랑을 내는 것이 꿈이다.

천사 씩이나 되어서도 그런 소박한 생각만 하는 것은 원래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어딘가 잔뜩 상처 입은 결과일까?

파고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레벨링은 도와줄게. 일단은 우리가 먼저 하고."

"가게를 지키려면 힘은 필요하겠죠."

요리하다가 말고 팔을 걷으며 알통을 만들어 보인다.

가느다란 팔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식사 준비가 끝나고 식탁에 모였다.

삼의회와 만났던 최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솜씨다.

종간 차이에 대한 연구에서도 말이다.

영감님은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만화 같은 고기를 뜯었다. 오크는 육식동물이다.

꼬맹이도 아무것도 모른 채 피망을 섭취했다.

희우가 속삭인다.

"그런데 피망을 먹이는 게 의미가 있어요? 뱀파이어인데."

"언제까지나 뱀파이어일 수는 없지. 이게 좋은 종족은 아니라서."

"아……. 그럼 저도 안아줄 수 있겠죠?"

"신경 쓰여?"

"아저씨한테 못 안기는 것도요. 그리고 오빠라고 불러도 되요?"

"안 돼."

"피이."

토라진 척을 하는지 진짜 토라진 건지 잘 모르겠다. 연기가 늘었다기 보다는 너무 표리일체라 그렇다.

대체로 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되는 것 같은 아이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솔직한.

아니, 대화로 주의를 돌려놓고 뭐하는 짓이야.

"잠깐만. 너 피망 왜 빼고 있어?"

"앗, 제길 들켰다."

"하. 나 참. 쬐끄맸던 이유가 있네."

"우유는 좋아했는데!"

기천사의 압도적인 핸드 스피드로 대체 뭘 하는 거람.

어쨌든 이런 느낌의 평화로운 아침.

막내, 그러니까 헨리 신관은 병원에서 지내고 있기에 없다.

출퇴근하는 레미만 퀭한 눈으로 나와 희우를 보고 있다.

* * *

로건과 제니는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랭커는 두려운 존재지만 동시에 그만큼 대단한 존재기도 하다.

이 둘이라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에만 전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능력이 여기까지였을 뿐이다.

오래 묵은 왕국은 다음 회차로 떠나기에는 지나치게 평화로웠기에, 최대한 사리고 또 사리며 지냈다.

그리고 지금, 유배자 생활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적어도 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걸 봐! 로건 아재! 우리가 반년은 일해야 겨우 손에 들어올 수준의 재산이라고! 그걸 그냥 줬어!"

"계약금이라고 했잖나."

"말이 그렇단 거지 그냥 줘도 상관 없어보였잖아!"

"돈이라 돈……. 난 아무리 그래도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다곤 생각 못하겠어."

"오히려 안전하지! 그런 괴물 셋이랑 파티를 하는 건데!"

데시벨이 참으로도 높다. 로건은 테이블에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이게 옳은 걸까? 이제 와서 모험을 떠나는 게 말이야."

"모험가는 모험을 하니까 모험이야!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도 모험이었어!"

"단순작업이나 다름없는 모험이었지. 대신 그만큼 안전하고."

제니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들겼다.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평화로운 왕국을 본 적이 없어. 그냥 여기서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싶어. 튜토리얼에 다시 돌아가는 건 싫어……."

"그럼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위험해. 랭커들에게 엮이면 무슨 일에 휘말리지도 모르잖아."

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함께한 동료다.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생존한 회차다.

수백 수천 번 죽고 또 죽던 시절에서 벗어나 왕국에 도달하고.

이제껏 본적이 없었던 왕국의 규모에 놀라고.

여기서 정말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루었다.

"결혼하겠다고 은퇴한 그 친구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 미궁은 원래 이런 곳이야. 그래 원래 안전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

"그럼 나 혼자라도 갈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분노할지도 모르니까."

"미안해."

제니는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로건에게 내민다.

"그러게 난 처음부터 아재한테 탱커는 안 어울린다고 했잖아."

"미안해……."

"셋방살이라도 해. 그 친구 집 산다고 빌려준 돈의 반은 우리 거니까."

로건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의 은퇴라는 것은 계획이 아닌 경우도 흔하다.

어느 순간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된다.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밤을 꼬박 샌 채, 제니는 숙소를 나섰다.

오랜 모험가 생활로 번 돈은 전부 함께했던 동료의 은퇴를 위해 모아준 후였다.

그때는 오랫동안 계속 모험가 생활을 할 줄 알았다.

어쨌건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 * *

혼자 나타난 잎사귀 요정 쌍검사를 보고 물었다.

"난쟁이 탱커는?"

요정은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쉰다고 했어요. 저 혼자라도 괜찮을까요?"

"그건 좀 예상외인데. 은퇴는 아니지?"

"잘…… 모르겠어요."

어제 보여준 비주얼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오래된 왕국은 드물고 나도 표본이 많지 않다.

그래도 평화롭다는 점에서는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리프트를 드나드는 것을 투쟁이 아닌 노동으로만 보고 있었다면 어제 같은 일은 산업재해겠지.

탱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다.

애초에 근접전사는 튜토리얼에서 생존하여 내려오는 숫자도 적은 편이다.

어떤 식으로건 가장 먼저 희생되는 클래스니까.

하물며 두들겨 맞으면서도 버티는 것이 역할인 탱커는 몸만이 아니라 여러 부분이 너덜너덜해지기 쉽다.

전사들은 언제나 그렇다.

이 하드스록이라는 전사 국가의 탄생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런 것일 터다.

다른 클래스는 전사의 고통을 몰라주는 경우가 흔하니까.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탱커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어차피 서버로 들어갈 길만 있으면 되니까."

"마음 바뀌면 언제 건 돌아오라고 하세요. 우린 괜찮으니까요."

꼬맹이는 로건이건 제니건 별로 관심이 없다.

효율 좋은 마법진을 위한 완전한 원 그리기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가자고 파티 리더."

"열심히 하겠습니닷!"

뭔가 군기가 바짝 든 느낌이 묘하다. 지금 다시 보니 장비도 번쩍번쩍하는게 충동구매건 혹시 몰라 준비했건 아끼던 장비를 꺼내온 모습이다.

칼도 새 거다. 어제 봤던 쌍검은 무기라기보다는 작업용의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재질부터가 다르다.

흑철이면 룬강철 바로 아래로 지금 왕국의 상황대로면 거의 사치품에 가까울 정도다.

모든 장비는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누구나 아끼는 장비 정도는 있다.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국가 마법사에게 가서 보고를 하고 이동한다.

마법사는 기계적인 태도로 신원을 조회하고 등록절차를 마쳤다.

어디로 가는지도 기록된다.

난쟁이 왕국의 문서를 통한 43서버 입장.

마법사가 잠깐 의아하다는 듯 제니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뒤편의 우리도.

다시 스펙을 살핀다.

"제니잖아! 로건은 어디 갔어? 저 사람들은 누구고? 이거 괜한 객기 부리는 거 아니지?"

제니가 멋쩍게 웃었다.

"나도 가끔은 모험을 하고 싶어서."

"쯧, 살아 돌아와라. 너희가 공급하는 가죽이 제일 질이 좋단 말이야."

"……그럴게요."

이런 등록 후에 일주일 이상 돌아오지 못한다면 실종처리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사망이다.

제단에는 제니가 난쟁이 왕국 전서를 바쳤다.

몸에 부유감이 찾아든다.

* * *

[TIP : 난쟁이들의 나라는 흔히 산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는 단지 땅굴이라고 부르기에는 휘황찬란할 수 있습니다.]

도착한 곳은 산 위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그냥 산이다.

하지만 맞은편의 산맥에는 누가보아도 그냥 산은 아닌 것이 있다.

산맥의 구석구석에 빛이 새어나온다. 밤하늘을 밝히는 네온사인만큼이나 밝다.

산 구석구석을 뚫고 산맥 자체를 하나의 도시로 개조해버린 거대한 도시였다.

저 속에는 난쟁이들이 가득할 것이다.

"와, 예쁘네요. 다 죽여야 하나요?"

"그래야지. 경험치니까."

"43서버가 작살나지 않을까요?"

"나겠지. 히어로 유닛도 있을테니 미래도 바뀌겠지. 하지만 괜찮아. 여긴 우리 서버 아니야."

미궁의 경험치는 질보다 양이다.

정확히는 레벨 구간별로 받을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있다.

위로건 아래로건 적정 레벨을 벗어나면 주어지는 경험치는 극도로 적다.

하지만 적정 레벨의 상대는 대개 버거운 상대다.

보통은 안전하게 훨씬 저레벨의 적들을 사냥한다.

많이 잡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유배자들에게 적의 숫자는 적의 강함보다 훨씬 위협적인 폭력이다.

제니나 로건의 레벨도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리프트를 드나들며 수십 년간 조금씩 쌓아올린 레벨일 것이다.

"경험치 분배 해야 하니까 내가 보고 구간 나눠줄게. 아, 제니라고 했지? 광역기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대화에 제니는 오싹함을 느꼈다.

로건이 느낀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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