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0화
30단계 - Lv.875 난쟁이 왕국(3)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신들이었다.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그 미래에 접속해있던 유배자들이었다.
하이 랭커 일그림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 어떤 미친놈이 저지른 짓이야? 재밌는데?"
"재밌기는 개뿔이 지금까지 공들인 게 싹 날아갔는데."
"뭐 어때. 어차피 날아갈 거 다 쓸어 담아서 챙겨오면 되지 않겠어? 어차피 미래를 한번 리셋 할 필요도 있었어."
그의 파티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에 미래의 가능성이 흐트러져 심연의 먼지가 되어버릴 정도의 격변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다시 바로잡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미래가 유지될 리가 없다.
"새로운 장난감은 언제나 환영이지."
"영입할거야?"
"싹수를 보고, 거기에 만약 그놈이 싹싹 빌면서 엎드린다면 생각해보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 거잖아."
"아니지, 이런 걸 할 정도면 엄청난 녀석이라고. 다른 곳에서도 하이 랭커 하다가 죽어서 왔을 거야."
미궁의 모든 역사는 튜토리얼 서버가 탄생하는 순간, 가장 먼저 유배자가 진입하게 되는 중세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그 기준이 크게 뒤틀린다면 이어진 역사는 끈이 떨어진 연처럼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보통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서버의 역사를 뒤트는 것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히어로 유닛]이 있다.
유배자가 직접 역사에 관여할 수는 없다. 기존에 미궁에서 살아가던 NPC들 중에서도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만이 실질적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영웅들과 친구가 되거나, 영웅의 스승이 되거나, 영웅의 라이벌이 되거나.
보통은 그런 간접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래야만이 긍정적인 미래를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은 그보다 쉽고 간단하며 파멸적인 행위였다.
"다 죽었군. 난쟁이와 관련된 히어로 유닛만 다섯이 죽었어. 어떤 이유나 안배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어."
"날아간 게 난쟁이 왕국의 수도였다며?"
"거기에 마도공학의 아버지인 위대한 공학자가 둘이나 껴있었으니 문제지."
"이 미래가 더 황폐해지겠네."
다르게 생각한다면 새롭게 태어날 미래는 더 천연자원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건 기술의 발전이 늦추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수요도 줄어들 테니.
하지만 유배자는 느긋하게 채굴기를 만들고 가공하여 왕국으로 가져갈 시간이 없는 존재들이다.
따지고 보면 손해다.
한 번쯤 미래를 바꾸어 자원을 리젠 시킬 필요가 있었다곤 하더라도 이렇게 과격한 짓을 할 이는 없다.
손해는 그들의 몫이니까.
그러니 이토록 과격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하이 랭커들 중에서는 없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분명 새로 들어온 누군가가 있다.
심지어 혼자도 아닐 것이다.
일그림은 즐거워했다. 어쨌건 그 누군가가 저지른 짓으로 인해 지금 이 미래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운 좋게도 사라진 미래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빠져나간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미래다.
"8년이었나? 46서버에서 이를 갈고 넘어온 파티가 있는 모양이군. 누군지는 몰라도! 고맙다!"
"정신병자 새끼."
그들을 상대하고 있던 NPC는 느닷없는 일그림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다.
하지만 뭐라고 반응하지는 못했다.
이미 그의 목은 몸통과 분리되어 있었다.
하이 랭커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를 좋은 거래상대로 여겨왔던 기존의 NPC들에게는 그리 느껴졌으리라.
맵의 가장자리까지 철저한 파괴를 끝마친 일그림은 챙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왕국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 미래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다시는 볼 일 없는 이들을 ‘사람’으로 대우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도들이 죽어나감에도 신들마저 침묵했다.
이젠 신도가 아니게 될 이들이기에.
* * *
야심한 새벽, 삼의회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일어난 일이 너무나도 심각했기에 불평조차 할 수 없다.
"이젠 소문나는 건 못 막겠군."
"이렇게 큰일을 벌였으면 다 작살이 나기 마련이지."
"그 선배님 편을 든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삼의회 역시 곤란에 빠졌다.
43서버는 비교적 유배자에게 온건한 편인 서버로서 현재 왕국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십여 개의 서버 중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다.
갑작스레 일어난 43서버의 격변은 몹시 중대한 사항이었고 그들은 그 원인을 찾아내야 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의 선배님이 오늘 아침, 리프트에 진입했다.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직 중이던 국가 마법사에게 리프트를 통해 어디로 갔으며 무슨 일을 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거부했다.
경력으로 쓸 수 없거나 은밀한 이득을 취한 경우 기록하지 않기를 원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당시 파티장으로 내세웠던 쌍검사는 43서버의 출신이라고 한다.
그럼 누가 저지른 일인지는 뻔하다. 보통은 그럴 능력도 없으니까.
재무담당의 용인이 비명을 질렀다.
"제기랄! 이건 처음부터 함정이었어!"
"그 손을 가장 열렬하게 잡은 건 네놈인데."
비명을 지르는 용인을 보며 트롤이 빈정거린다.
그는 새로이 슬럼에 신전을 만든 혼돈의 교단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했다.
사실 혼돈의 신좌 자체는 어느 서버에나 존재한다.
메이저한 신이라기에는 권능이 미묘하기에 닳고 닳은 고참들이 육성 과정에서나 고려한 후에, 징벌을 감수하고 배교하는 것이 흔한 신이다.
운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대단해보이지만 실상을 별 볼일 없다.
전설 속의 대신격, 행운의 신이라면 모를까.
혼돈의 권능은 그저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던질 뿐, 결코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불리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권능이 확실한 이득이 될 수 없으니 당연히 교세가 큰 경우는 거의 없다.
보편적으로 혼돈의 신에 대한 인식은 그러하다.
마이어가 둘의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손해 볼 것이 없어. 하이 랭커들이 누구의 짓인지를 열심히 캐고 다니겠지. 그냥 말하면 될 거야. 거기까지 비밀로 해주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으니까."
"그리하면 온전히 그 선배님이 감당해야할 문제가 되겠지. 부디 우리 시가지를 전쟁터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트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가 잡은 줄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잘한 짓일 수도 있고."
마이어와 용인이 의아하게 이쪽을 본다.
트롤은 자신이 조사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 왕국은 아주 오래된 왕국이다.
수백 년을 산 늙은 요정들도 왕국의 시작을 보지는 못했다.
그 늙은이들이 처음 왕국에 발을 디뎠을 때도 이 땅은 이미 개척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 후로는 패권을 잡아 국가로서 존재한 길드의 이름만이 끊임없이 바뀌어왔을 뿐이다.
언제 다음 회차로 떠날지 모르는 유배자들이 역사서를 써서 남길 리도 없으니 의지할 정보는 적다.
그럼에도 미궁에는 신이 있다.
단지 수명이 긴 종족들 이상으로 오랜 세월 존재하는 이들.
트롤이 수소문하다 못해 결국 의지해야했던 것은 자신이 모시던 신이었다.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응답했다.
이례적으로 신언까지 사용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의 신이 해준 말은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
한때, 왕국에 유배자들이 리프트조차 모두 확보하지 못해서 처음부터 개척을 해야 했던 먼 옛날.
아직도 많은 신좌가 텅텅 비어있어 그 어느 신도 존재하지 않던 무주공산의 시대.
그 별 볼일 없는 신격인 혼돈의 신 이 왕국을 지배했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유배자로서 왕국에 발을 디뎠던 일부 오래된 신격들이나 겨우 알고 있으며 젊은 신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오래된 과거.
트롤이 모시는 신은 그 시절 유배자로서 이 왕국에서 살아갔던 이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롤은 신에게 새로운 혼돈의 신도가 왕국에 발을 디뎠음을 알렸다.
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혼돈이 아닌가? 그때 그 혼돈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족히 수천 년은 지난 일이로군. 이후 혼돈의 신좌는 계속해서 비어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신 또한 관심을 가졌다.
만신전은 신들의 공간이다. 신들이 불러야 찾아갈 수 있으며 아무렇게나 가서 기도를 올릴 수조차도 없는 곳이다.
트롤은 재빨리 새로 개축되고 있는 혼돈의 신전을 찾아갔다.
현재로선 유일한 신관인 헨리가 그를 맞았다.
그의 손을 잡고 혼돈의 여신께 인사를 올렸다.
물론 트롤은 기대하지 않았다. 모시는 신의 신언이나 메시지를 받는 것도 드문 일이다.
온갖 세계에 걸쳐있는 신도들을 모두 굽어 살필 수는 없다.
그러니 남의 신도와 선뜻 대화해 주는 신은 없다.
그래서 신언이 내려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개척시기의 혼돈이라면 내가 맞는데? 아직도 날 기억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군. 뭐? 그림자의 신? 나는 모르는 신인데. 그땐 비어있는 신좌였어.」
트롤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의 신인 혼돈의 여신에게 말을 거는 내용을 듣고는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오, 세상에. 혼돈이시여. 저는 당신의 신도였던 적이 있는 암살자입니다. 제가 신이 된 것은 한참 나중의 일입니다.」
「그래? 교단에서 높은 지위였나?」
「기억하실만한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먼. 사실 어차피 그 시절 이야기는 기억도 잘 안 나.」
「오래 살다보면 그렇더군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마이어와 용인은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뭔가 알 필요가 없는 것까지 알게 된 기분인데."
"그보다 자네 그림자의 신을 섬겼나? 트롤 암살자라도 하려고?"
"트롤은 너무 눈에 띄니까 그냥 몸을 좀 숨기고 선빵 칠 기회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무슨 암살자씩이나."
아주 이상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종족이 트롤이라고 언제나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것은 아니니까.
마이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긴 하군. 하지만 그림자의 신께서는 왜 그리 혼돈의 여신께 저자세이신가? 어차피 한때 신도였다고 지금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
트롤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개소리 같지 않을까 고민을 해야 했다.
"지금의 신들 다섯이 달라붙어도 못 이길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이 되나?"
"전쟁의 신께서도 맨날 두들겨 맞았다고……."
신들 개인의 무력을 논하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화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보게 될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전쟁의 신은 아주 오래된 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전사의 신으로가 가장 메이저한 신이 전쟁과 결투다.
그러니만큼 더 많은 도전자가 찾아온다.
당장 삼의회의 일원들이 이 왕국에서 동안도 몇 명의 하이랭커가 전쟁의 신좌에 도전했다가 랭킹에서 사라졌다.
전쟁의 신은 트롤 전사답게 그 사실을 공표했다.
대체로 전쟁의 신은 신들 중에서도 강력하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아마 레벨이 못해도 7천은 될 거라고 하더라고……. 자긴 가능하면 적으로 돌리지 않을 거라고."
이번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7천개의 포인트?
2,300개의 스킬?
스쳐 지나가는 환상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깊고 길게 뻗어 나가있는 마인드맵.
"그건……. 정말로, 말 그대로 신이군."
갑작스럽게 다른 모든 것이 사소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7천 렙의 뒷배가 있다고?
그럼 그냥 된 거 아닐까?
신좌에 갇혀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레벨링을 했다는 것은 가진 정보도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다.
노하우도 전혀 다른 영역에 있을 터.
레벨이 곧 전투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숫자라면…….
용인이 짧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좋아,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으니 가서 46 서버에서 들여올 자원으로 장사할 궁리나 해봐야겠군. 사실 43서버가 작살이 났으니 46 서버의 가치는 더 올라가거든."
마이어가 중얼거렸다.
"그게 전부 계획된 것이라면……. 그 선배님도. 여신님도."
트롤이 받았다.
"일단 우린 횡재한 셈이군. 그 뭐 하이랭커들이 달려들어서 척살 하려고해도 여신님이 화신 한번 해주면 다 끝장나는 거 아닐까?"
물론 실제로 그러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신이 화신으로서 강림한다는 게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니까.
완전히 잊혔다가 돌아온 혼돈의 교단이 화신을 감당할 여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인지를 아득히 벗어난 이야기다.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으며 관련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
마이어가 정리했다.
"그분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우린 모른 척만 하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해먹지 않겠는가.
물론 삼의회의 일원들은 각자 모시는 신에게 보고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곧 모든 신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 시절의 혼돈이 돌아왔노라.
오자마자 43서버를 뒤집어 엎어버렸노라.
좋은 의미로건 나쁜 의미로건 큰 파장이 찾아올 것이다.
* * *
그 시각, 여신님은 신좌에 드러누워서 막대 사탕을 오독오독 씹어 먹고 계셨다.
「악마는 단 걸 아무리 먹어도 이가 썩지 않지!」
"그건 뱀파이어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한숨을 쉬며 희우와 꼬맹이, 그리고 넋이 나간 듯한 제니를 돌려보내었다.
큰일이 있었으니 쉬게 해야 한다.
「그런데 네놈은 어딜 가나? 집에 가질 않고서?」
"분명 지금쯤 삼의회가 다 모여 있겠죠. 저 때문일 게 뻔하고요. 그러니 가서 어르고 달래고 당근도 주고 채찍도 때리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고가 많도다. 대전사여.」
"이제 여신님도 점점 더 바빠지실 겁니다."
「이미 만신전은 난리가 난 모양이다. 뭐 가서 인사라도 해야 하나. 오랜만이라고 말이지.」
"그러셔도 좋고요."
만신전에서 자연의 신과 대화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여신님은 생각보다 유명하신 분이었다.
적어도 신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삼의회도 바보가 아니라면 이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이닥치자 예상대로 모여 있다.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 세 명의 의원은 큰 문제없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에 동의했다.
비밀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거절하기에는 46서버를 독점한 내가 그들에게 줄 이득이 너무 클 것이다.
대신,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면 언질을 좀 달라고 불평하기는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진짜 미리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결국은 유명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일단은 하드스록의 하이랭커들 중 일부만이 알음알음 아는 정도가 적당하다.
일을 벌였으니 곧 무슨 일이 생길 것이다.
삼의회의 의원들이 약간만, 약간의 시간만 더 벌어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