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1화
30단계 - Lv. 875 난쟁이 왕국(4)
제니는 녹초가 되어 자신의 숙소에 도착했다.
12시간이 넘게 이어진 전투였다.
키메라는 끔찍할 정도로 많았다. 난쟁이들도 많았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수 시간에 걸쳐 도시를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모두 제니가 죽여야 했다.
말라붙은 피에 다시 신선한 피가 쏟아지고 그 위를 또다시 피가 덮었다.
살점과 피가 뒤섞여 몸 위에서 굳었다.
땅을 어찌나 굴렀는지도 모른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손발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음에도 싸웠다.
수십 번은커녕 수백 수천 번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니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오르골이라는 사내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적을 방해해 준 덕분이었다.
튜토리얼에서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던 시절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투였다.
어차피 죽어도 다시 시작될 뿐이니 이렇게 처절하게 싸울 바에야 그냥 죽음으로서 편해졌을 것이다.
분명 몸을 한참이나 씻어내고 빠져나왔음에도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는다.
파티 리더로서 귀환 보고를 하러 가자 당직을 서던 국가 마법사가 토악질을 할 정도였다.
어떻게 숙소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밤이 깊어 길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시가지 중심부에 단기 계약한 숙소의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니는 피로와 흥분이 뒤섞인 채로 파티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로건! 나 오늘 정말……."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방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의 파티는 이미 해체되었다.
로건은 아마도 그와 제니가 돈을 빌려주어 구매할 수 있었던 이전 딜러들의 집으로 가 있을 것이다.
제니와 로건도 언젠가 은퇴하게 된다면 그곳에서 함께 살 생각이었다.
인간을 고집한 파티의 딜러 두 명과는 다르게 요정과 난쟁이는 수명이 기니까.
나이 먹고 결혼하여 은퇴한 두 딜러가 수명이 다해 떠난다면 그때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렇네."
로건이 사실은 겁쟁이임은 알고 있었다.
무기가 하필이면 사슬 낫인 것도 그래서다. 전사의 무기치고는 리치가 아주 기니까.
탱커인 것도 튼튼한 힘 계통 전사가 어지간해서는 잘 죽지 않아서 고른 길이다.
그 난쟁이 친구는 새로운 모험을 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오히려 모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떠나갔다.
과거에도 사소하게 부딪힌 적은 있다.
제니는 좀 더 모험을 하고 싶었다. 적당한 저단계의 짐승을 잡아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안정적이었지만 재미가 없다.
솔직히 큰돈이 되지도 않는다.
욕심이 있다면 만족하기는 힘든 삶이었다.
그래도 제니는 로건을 이해했다.
그래서 혼자 나섰다.
분위기상 둘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니와 로건 모두 멀쩡하긴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오르골의 눈빛이 그랬다.
로건이 오지 않았음에도 별말 하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놔주는 대가로 고른 인질이 제니인 셈이다.
로건의 미안해 라는 말에는 그런 뜻도 있었다.
텅 빈 방에 온기라고는 없다. 모험가 생활을, 그리고 유배자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서늘했던 적도 잘 없다.
봄날 새벽의 추위에 몸을 떨며 장비를 해제했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둬도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낡은 나무 바닥에 툭툭 갑옷이 떨어진다.
허리춤의 예비 무기들도 이어서 풀어놓으려다가 멈칫했다.
전부 내구도를 다하고 사라졌다.
가지고 들어간 무기는 전부 그곳에서 소모했다.
"그게 거의 전 재산이었는데……. 그래도 굉장했지."
해야 할 일, 그리고 벌어질 일.
그 모든 것이 처음 한순간에는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제니는 그 힘에 매료되었다.
수백만은 살고 있었을 거대한 난쟁이의 도시.
눈앞에서 무너져 불타고 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그녀도 안다.
43서버는 제니 파티의 출신지였고 유배자로서 대륙의 주민과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
아주 큰 국가였고 대단히 훌륭한 장비들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몇 번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둔 강대국이다.
그것이 오늘 사라졌다.
제니는 비로소 랭커라 불리는 유배자들에 대하여 이해했다.
그냥 열심히 사는 것으로는 랭커라고 불릴 힘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오늘 겪은 것 같은 격렬하고 힘든 전투를 대체 얼마나 넘어왔을까?
사선을 넘어 기다시피 해서 계단에 간신히 도달한 것이 대체 몇 번일까?
제니는 자신이 시험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오르골이 길드를 옮기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 그 시험을 통과했다고 느꼈다.
그때의 감상이, 그때의 전율이, 지금에야 입으로 새어 나온다.
"이게 랭커의 삶이구나. 저 위쪽에 있는 유배자들의 삶이구나……."
물론 제니도 안다.
이것이 대단한 행운에 불과함을.
오르골이 굉장한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을.
그에게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넘어왔을 길일 것이다.
그걸 제니가 훨씬 더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봐주었다.
"그래도……."
제니는 기회를 잡아낸 것이다.
다음 날, 오후까지 뻗어 있었던 제니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속된 길드의 하우스로 가서 탈퇴 의사를 밝히는 것이었다.
업무를 보고 있던 그루터기 요정이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나비의 춤]은 요정들이 모인 길드이며 그럭저럭 알려진 중견급의 길드다.
잎사귀 요정 쌍검사 하나가 탈퇴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길드석에서 탈퇴를 마치고 새로운 길드 [천사의 눈물]에 신청을 넣은 제니는 곧바로 숙소 계약도 해지했다.
그 후에는 최대한 다른 멤버들에게도 첫인상을 좋게 하기 위해 몸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목욕도 하고 장비도 돈을 다 털어서 새로 장만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많이 주워왔다. 환전은 금방 이루어졌으며 돈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 제니에게 무언가 부족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의지일 것이리라.
그렇게 고양이 귀 쌍검사는 시가지를 벗어나 북부 슬럼 구역으로 갔다.
파티 하나가 하룻밤 사이 자취를 감추었음에도 시가지 중심부는 평소처럼 북적였다.
* * *
"얘는 누구예요?"
레미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새 부하다."
"오……."
제니는 당황했다.
"저기 오르골 님?"
"꿀단지를 쥐여줬으면 그 값은 치러야지?"
제일 중요한 것은 희우와 나, 그리고 꼬맹이지만 다른 인원들도 최소한의 레벨링은 필요하다.
랭커가 공격해 오더라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필수다.
한동안은 [북부 슬럼의 왕]이라는 우리 헨리 신관님의 칭호와 천사라는 종족의 존재가 억제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임팩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휘발될 것이며 결국 다른 생각을 하는 멍청이들이 생긴다.
결국 인원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 대상이 제니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올라가고자 하는 독기가 엿보이는 유배자라면 가치가 있다.
생각 외로 처음부터 도전자인 유배자는 드물다.
대부분 이런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제니는 처음 길드 하우스에 들어설 때의 비장한 표정이 완전히 무너진 채로 두리번거린다.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른 분위기네요……."
뭘 생각했던 걸까. 들어올 때의 모습이 갓 전입 온 이등병의 느낌이기는 했다.
오래 살면 느는 것은 사소한 관찰력 따위다.
등에 멘 쌍검도 드워프 왕국에서 그때그때 주워 휘두르던 물건이 아니다.
왕국의 산업이 만들어낸 멀끔한 공산품이다.
새겨진 길드 마크는 현재 하드스록에서 명품으로 유명한 곳.
갑옷도 번쩍이는 새것이다. 마찬가지로 명품 취급받는 공산품.
그리고 들어오는 포즈는 얼마나 또 뻣뻣한지.
리프트 입장 전에 나른하게 낮잠을 자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 배짱으로도 어제 있었던 일을 견디긴 힘들었던 모양이다.
좋은 일이다.
공포가 새겨졌다는 것이니까.
나는 제니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자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다.
제니가 나를 배신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리라.
일단 레미에게 맡겼다. 우리 길드의 명목상 길드 마스터는 레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제니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해갔다.
놀람, 공포, 체념, 그리고 다짐.
그 모습을 보며 레미도 대강 눈치챈 모양이었다.
"거기 신참, 일단 일하러 가자고."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조차도 한순간 혹할 정도로 보스의 품격이랄지 관록이랄지 그런 게 뿜어져 나왔다.
역시 사기와 기만에 능한 아이다. 내 안목은 정확하다.
따봉을 날려주며 희우의 방으로 갔다.
삼의회의 의원들을 어르고 달랜 후에 뒤늦게 저택에 도착했을 때, 희우는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
사실 천사는 그다지 수면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 시절의 정신을 고스란히 가진 채 천사가 되었으니 그 습관을 유지할 뿐이다.
그러나 희우가 깨어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어딘가 멍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또한 좋다. 정말로 어제의 일에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문제니까.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주었다. 안아줄 수 없는 종족 차이는 불편하다.
거의 자지 못했겠지만 그럼에도 수면은 정신을 재부팅하는 효과를 가진다.
문은 이미 살짝 열려 있었다. 환기를 위해서일까. 그 안에서 우리 상큼한 천사는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어찌 기억에 있는 상황이군.
"음. 으으음. 음음. 확실히 조금 끼는 거 같기도 하고."
시간은 권능이나 마법 없이도 속도가 변한다. 괜히 상대적인 거라고 하겠어.
지금은 내 삶의 그 어느 순간보다 집중해야 했다. 암살자로서의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아주 조용하게 빠져나왔다.
저번의 그 필살 섹시 포즈와는 조금 다른 문제다.
본인이 알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다행스럽게도 들키지 않았다.
* * *
희우는 침울해했고 약간의 악몽도 겪었다.
이겨 내었다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것에 가까운 정신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꼬맹이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사실도 그에 도움이 되었다.
아주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 속을 흘러갔다. 꿈속에서조차도 말이다.
합리화할 수단도 이미 있고, 그러기 위한 각오도 진작부터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닥쳐오자 쉽지는 않았다.
가능한 직접 피를 보지 않고 파괴에 의한 간접적인 살해만을 실행했는데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기분은 비슷했다. 문득 자신의 짐이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거의 1층에서부터 꾸준히 들고 다닌 물건이다.
배낭이라기보다는 보따리 같은 조악한 물건이지만 이래저래 수선해서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해 왔다.
봇짐같이 촌스럽지만 튼튼하다.
별생각 없이 그것을 뒤적인다. 넣어둔 것들은 그냥 예쁜 돌, 보석으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정말 그냥 예뻐서 넣어두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만들어준 손수건, 옷가지 몇 개, 개중에는 원피스도 있다.
6층부터 시작된 설원 테마 때 만들어준 목도리와 장갑도 있었다. 이건 이제 쓸 일이 없다.
천사는 대부분의 환경적 요인에 면역이다.
그러다가 보따리 맨 아래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교복이 트동트의 번개에 불타 사라지고 처음으로 입었던 미궁의 옷이다.
2층에서 죽은 요정의 복장. 그야말로 요정처럼 발랄하고 귀여운 옷이지만 요정의 사제복이 생긴 후에 접어 넣어두었다.
왜 버리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았더니 그저 예뻐서였다.
아저씨가 보기에 귀엽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소매도 접어야 했고 다리도 접어야 했다.
가슴팍은 헐렁해서 따로 끈으로 묶지 않으면 곤란할 지경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충동적으로 꺼내어 털어보았다. 오랫동안 아래에 처박혀 있어 구겨져 있지만 요정의 물건답게 그다지 주름지진 않았다.
이러니까 요정이 선호 받는다. 마법도 마력도 없는 세계에서 온 유배자들에게는 신비할 수밖에 없는 종족이다.
벌써 추억 같아진 옷을 탁탁 털어서 입어보았다.
이전에 접어두었던 소매를 다 펴더라도 꼭 맞는다. 나풀거리는 치마는 그때도 허리는 맞았다. 지금도 꼭 맞다.
이 옷을 처음 입을 때보다 높아진 키만큼 세상도 조금 낮아졌다.
그럼 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한 명의 유배자로서 아저씨 곁에 서 있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사소한 기쁜 점 하나는, 가슴팍에 끈을 묶을 필요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치마 역시 이전처럼 볼품없이 늘어진 게 아니라 좀 더 화사하게 퍼져 있다.
오히려 가슴팍은 약간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기분 탓인가 싶어 만져본다.
"음. 으으음. 음음. 확실히 조금 끼는 거 같기도 하고."
그 순간 문 앞까지 다가온 누군가의 존재를 감지했다.
희우는 뻣뻣하게 굳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아저씨가 정말로 천사의 오감으로도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기척을 지우는 것도 느꼈다.
너무 잘했기에 돌아갔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 어어어, 그래도 입고 다니긴 좀 그렇지. 어디 뒀더라 이거 한번 빨아야 하는데."
혼자 한참을 더 자연스러운 척 연기한 끝에야 아저씨가 진작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 좋아. 그래도 덕분에 이제 다른 생각이 하나도 안 나."
긍정적 사고. 긍정적 사고.
그래도 최근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키가 멈춘 후에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던 체형 변화가 급격했던 게 또 최근이다.
아저씨는 좀 두근두근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보면 고자 같다. 신체는 이십 대일 텐데 왜일까.
* * *
휴, 죽을 뻔했네.
천사의 일격은 농담이 아니다. 포션도 못 쓰는 언데드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척, 꼬맹이를 찾아가서 일전의 연발 미티어 스웜의 어느 부분이 미흡했는가에 대하여 대화했다.
꼬맹이는 아직 이론적인 부분은 많이 미흡하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은 타고난 재능으로 메꾸고 있다.
이론이란 어차피 감각을 보조하기 위한 것.
정말로 뛰어난 이에게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백에 백은 그냥 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감을 몸에 익히기 위해 드는 노력의 양은 재능에 달렸다.
꼬맹이는 극단적으로 지름길을 따라 걷는 케이스다.
비록 마인드맵은 없으나 마법은 역설적으로 가장 마인드맵과 무관한 영역.
그래서 마법사는 NPC여도 관계없다.
슬슬 슬럼의 신전도 제대로 굴러가고 있으니 가서 여신님을 통해 더 정확한 조회를 해볼 필요가 있겠다.
랜덤 NPC들이 어떤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갑자기 포인트가 잔뜩 생겼다. 그렇다면 파워업을 해야 한다.
몇 가지 유니크 스킬 후보를 생각해보았는데, 그럼 그 조건을 맞추러 가야 한다.
레벨링도 계속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