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2화
왕국 - Lv. 463 블랑쉐(2)
스킬이라는 것은 미궁이 부여하는 인지를 초월한 힘이다.
그 작동 방식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며, 아무 맥락 없이 결과만을 만들어낸다.
병기술은 몸에 익힌 기술이다. 궁술도 기술이다. 마법 역시 기술이다.
하다못해 추위를 대비하는 법, 칼로리를 아끼는 법, 장비를 만드는 법, 이런 것들도 원리를 알고 제대로 수행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스킬은 응용이 불가능한 정해진 결론만 내놓는 대신 ‘그냥’ 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스킬에 설정된 변수만을 가지고.
게임은 현실의 단순화이다.
미궁은 그 게임이 다시 현실이 된 것이다.
번역기에서 한글을 영문으로, 그리고 그 영문을 다시 한글로 재번역한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부분.
그게 스킬이다.
여신님의 신전은 여전히 낡은 병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혼돈의 상징인 보랏빛 신성을 버금은 등불이 곳곳에 걸렸을 뿐이다.
문짝도 없는 문을 통과하는 순간 성역 특유의 신성한 감각이 몸을 휘감는다.
대기의 신성 농도가 확연히 높아져 있다.
사람을 찾아보았다.
아쉽게도 우리 헨리 신관과 레미는 바쁜 모양이라 병원에 상주하고 있는 노의사를 보게 되었다.
"여신님의 신도인가? 기도를 드리러 왔다면 저쪽이네."
이 노의사와는 초면이다. 의도적으로 나와 희우, 그리고 꼬맹이는 드러나지 않게 했다.
노의사는 그렇게 말한 후에 환자의 찢어진 머리를 계속해서 꿰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수술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스탯을 찍은 외과의라고 들었는데 그 이상이 보인다.
게임 시절에도 왕국 내부에 구현되어 배치되어 있던 여러 유배자들의 형태들을 생각하면 아마도…….
뭐 중요한 일은 아니니 넘어가자.
이 병원은 이제 완전히 여신님의 신전이요 성역이다.
순수하게 탱커였던 막내는 여신님의 성기사로 선택받았고, 그에 따른 마인드맵의 보정을 받았다.
힘 쪽은 이미 조건을 만족하고도 남을 만큼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기에, 지능 쪽만 약간 투자하면 되었다.
성기사 클래스의 관련 스킬이 뜰 확률은 신앙심에 따라 결정된다.
현실이 된 미궁에서는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을 따라가는 듯했다.
막내는 너무나도 쉽게 성기사가 되었다.
성역을 선포하는 것 자체는 성기사 클래스의 스킬을 보유했다면 신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막내가 정성 들여 세워둔 제단이 보였다. 막대사탕이 꽂혀 있다는 점만 뺀다면 아주 정갈하고 제대로 만들어져 있다.
무지갯빛으로 끊임없이 변색하는 비석을 보니 2층 생각이 나는군.
꼬맹이는 그 앞으로 가서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은 제 성역이기에 신도의 구석구석을 그 어느 때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약간의 시간 후 여신님께서 신음을 흘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이 아이 말이다. [초마도사]는 당연히 가지고 있고……. 」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속도로 마법을 습득하고 있으니까요.’
「유니크 스킬 [원소의 눈]도 있다.」
‘……그건 NPC 전용인데.’
이건 생각해보지 못했다.
너무 잘 배워서 약간 이상하긴 했다. 그냥 내가 잘 가르친 덕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저건 세상을 시각이 아닌 마력시로만 보게 되는 저주 아닌 저주다.
약간 끼워 맞춰진다. 거의 자폐에 가까웠던 처음의 상태나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던 원래의 모습까지 알 것도 같다.
저걸 가진 시점에서 일상생활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 지금 이 아이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얼굴을 보고, 희우의 얼굴을 보며 지내는 거지?
「하나 더 있다. 유니크 스킬 [동경하는 목표] 이건 난 모르는 스킬인데 혹시 아는 게 있나?」
‘…….’
나는 이걸 모른다. 더 정확하게는 유저로서는 알면 안 되는 내용이다.
인디한 게임사가 언제 추가할지 모르는 로드맵은 종종 유출되기 마련인데.
이건 사실 내가 아직 플레이해 보지 못한 버전에서 추가될 예정인 스킬이었다.
벌써 10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패치노트만큼은 생생히 기억 나는 게 우습다.
분명히……. 추가되는 NPC 전용 유니크 스킬 목록에 저런 게 있었다.
효과는 나도 모른다. 이름만 보았을 뿐이니까.
그리고 NPC 전용 스킬은 대개 인카운터용으로 추가된다.
특정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슬쩍 희우를 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마주친다. 그대로 보고 있자니 헤실헤실 눈웃음을 짓는다.
이미 2층부터 대충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계속 나올 수도 있다고 말이다.
미궁에 패치가 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이쪽이 진짜인 것 아닐까?
사실 블랑쉐도 게임 시절에는 동료로 삼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르게 현실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게임과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미궁이 먼저고, 게임이 나중인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트동트는 블랑쉐를 어떻게 알아보면 되는지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었다.
미모의 스파이라는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리는 없다.
자그마치 8년이 지났다. 어떤 식으로건 모습을 바꾸었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종족은 인간일 확률이 높다. 카드를 사용하면 외모가 돌아온다.
그렇다면 바꾼 보람이 없어지니 인간인 상태를 유지하리라.
어차피 하드스록의 슬럼을 돌아다니며 청부업자 노릇을 하는데 대단한 종족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트동트는 ‘밴디지’라는 이름의 청부업자가 접근해 왔을 때, 낌새를 알아차렸다.
안 그래도 어중이떠중이들은 걸러질 시점이었다. 걸어둔 돈이 돈이다 보니 온갖 시정잡배 비렁뱅이들이 모조리 몰려와 내가 할 수 있다며 큰소리쳤다.
마법사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당장 트동트부터가 마법사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늙은 전사를 연기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트동트는 노련한 주술사다. 거기에 그간의 경험은 마인드맵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게도 충분한 미궁의 은총을 주었다.
상대의 강함을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마법은 많다.
청부업자입네 하며 찾아오는 이들 대부분은 한주먹거리조차 되지 않는 멍청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부의 왕의 주선을 받아 자리에 들어온 저 성별 불명의 붕대 괴인은 틀림없이 진짜배기다.
서늘한 살기가 살갗을 아프도록 찌른다.
붕대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서리 내리듯 시리다.
그 눈을 보고, 키를 재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서는 태도까지 본 후에.
트동트는 이 자가 말로만 듣던 블랑쉐임을 확신했다.
정황적으로 ‘진짜’들 중에서 이런 수상쩍은 의뢰에 가장 먼저 뛰어들 이는, 신원이 존재할 수 없는 블랑쉐뿐이다.
슬럼에서도 다시 외곽지역의 작은 오두막.
왕국이 좀 더 융성하던 시기에 지어졌고 이제는 버려진 폐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서부의 왕은 무투파였던 북부의 왕과는 다르게 계략과 음모를 즐기는 이였다. 그는 슬럼에 대하여 좀 더 사업적으로 접근했다.
그런 노력 끝에 현재 슬럼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청부업자나 용병이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치고 있다.
밴디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입구에서 들어와 살짝 무너진 가장자리의 벽에 기대선다.
언제 건 도망칠 수 있도록 신경 쓰는 모습이다.
트동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은 할 수 있겠군. 그 정도 능력이 있어 보여."
"표적에 대하여 제공할 수 있는 정보, 보수의 지급 수단."
대답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필요한 것을 요구할 뿐.
트동트는 금괴를 꺼내어 쌓았다.
하나, 둘, 셋, 넷……. 모두 열 하고도 다섯 개.
룬 강철로 만든 갑옷 한 벌을 장만할 수준의 돈이다.
"선금이다. 완수한다면 나머지도 금괴로 지급하지."
"이 정도면 정보는 없어도 되겠군. 접수하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온몸을 붕대로 감은 괴인은 사라졌다. 무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실적만은 서부의 왕이 증명하는 기록으로서 남아 있다.
이 슬럼가 최강의 청부업자는 아니겠으나, 이름만 말하면 아는 이다.
트동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드 하우스로 가지는 않았다.
길드의 안전가옥으로 은밀하게 마련한 집에서 머물렀다.
미행하여 따라온 밴디지는 한참을 더 지켜보고 나서야 사라졌다.
트동트는 한숨을 내쉬며 움직였다.
* * *
꼬맹이에게 스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히려 의아하다는 반문이 돌아왔다.
"그럼 남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거죠?"
"지금부터 그것도 배워보자. 마력시를 멈추는 방법을."
"……그게 가능해요?"
"그 어떤 마법보다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얼굴이 어떻게 보인다고 했지?"
"으음…… 설명을 못 하겠어요. 그냥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는데."
원래 [원소의 눈]은 재능이자 저주다.
저걸 가진 케이스를 한 번 더 보았었는데 어느 회차인가에서 만난 인간의 용사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보는 것이 전혀 다르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면 학습으로 같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다만 세상의 모든 것을 마력의 실로 엮여 있는 빛 덩어리로 보게 된다면 그게 정서에 좋을 리는 없다.
보통은 미쳐버릴 것이다.
꼬맹이는 처음에는 그런 상태였던 것 같다. 본인도 그리 대답했다.
오히려, 어떻게 지금처럼 생활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마법을 배우고 싶었어요. 아빠가 그때 하는 걸 보고서. 정말 정말 멋있고, 대단하고. 어 아무튼 그랬어요."
가상 노심이 그렇게 멋있었나?
고심 끝에 그냥 뿌듯해하기로 했다.
꼬맹이에게도 마찬가지로 칭찬해 줬다.
대단한 재능이라고.
몸을 비틀며 부끄러워한다. 얼굴은 활짝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표정을 보고 학습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거울 보고 열심히 연습했어요. 막내 아저씨랑 영감님이 많이 도와줬고요. 어떤 게 ‘웃는다’인지 공부했어요."
꼬맹이가 이제 와서 부끄럽다는 듯 고백을 하는데 듣고 있던 희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저는, 굉장히 축복받은 환경에서 살아왔군요."
"그렇게 말하지 마. 원래 각자 나름대로 힘든 거니까. 내가 다 부끄럽네."
꼬맹이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방실방실 웃는다.
한숨만 쉬고 있는데 영감님이 돌아왔다.
좋은 소식과 함께였다.
‘밴디지’라는 이름을 쓰는 청부업자에 대해 듣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면 거의 확실하군요. 얼굴을 불로 지지기라도 한 거겠죠. 누구나 알아볼 테니까요. 정말로 누구나."
내가 영감님을 블랑쉐를 색출할 요원으로 써먹은 건 우연이 아니다.
전쟁과 야성의 신 아래에 고블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암살자 정도뿐이다.
영감님은 대주술사로서 많은 암살자들을 보아왔다.
그들이 어떻게 몸을 숨기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사고하는지.
주술사는 그린스킨 군단의 지휘관이다.
영감님이 이미 알던 사실에 블랑쉐의 습관 따위만 좀 더 알려준다면 식별은 쉽다.
유능한 암살자는 그렇기에 자신만의 루틴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 모든 것이 우연히 겹치기는 힘들다.
"이제 블랑쉐가 오르골에 대한 원한을 어찌 생각하는지 좀 더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입을 잘 털어야겠죠."
"8년간 심경의 변화가 어찌 있었을지 잘 모르지 않나? 괜찮은 거 맞나?"
"정확한 심리를 추적하는 건, 저도 못하죠. 하지만 무슨 일을 겪었을지는 대충 압니다. 그건 짬 되는 유배자들이면 모두 알 겁니다."
틀림없이 NPC인 영감님 앞에서 말하기는 약간 저어되는 부분도 있으나, 이제 와서 그걸 가리는 것도 우습다.
"이 왕국에 기록된 서버만 46번까지 아닙니까. 약 460년의 세월입니다."
심지어 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훨씬 더 길다. 어느 정도 안정된 왕국도 중간에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럴 경우 유배자들의 길드들이 만든 시스템이 붕괴한다.
다시 초기처럼 무법지대가 시작될 것이다.
‘왕국’이라 불리는 공간은 원래 그렇다.
"추정 수천 년에 달하는 이 왕국에 블랑쉐가 몇 명이 도달했을 것 같습니까."
"많겠지. 아주 많을 거야."
영감님이 쓰게 웃는다.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네임드 NPC는 그 서버가 닫히지 않는 이상 다시 왕국에 나타나지 않는다.
46서버의 블랑쉐가 죽지 않는다면 이후 번호의 서버에서 다시 블랑쉐가 나타날 일은 없다.
"블랑쉐가 왕국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회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네임드니 보통은……."
"비슷한 배척을 받겠군."
"그래서 비슷한 최후를 맞을 것이고요. 모든 블랑쉐들은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미움을 받는 네임드라 유난히 그렇지요."
그러기 전에 챙긴다.
나는 다른 유배자들과는 다르게 블랑쉐와의 인연이 있으니까.
8년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