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에 갇힌 고인물-194화 (194/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94화

왕국 - Lv. 463 블랑쉐(4)

열매는 지금의 블랑쉐가 가진 가장 큰 무기다.

17년 차 유배자는 왕국 기준으로는 그리 긴 경력이 아니며 그마저도 스펙으로 찍어눌러온 시간이었다.

고참이라면 능히 해내는 효율적인 마인드맵 세팅, 고성능 장비의 파밍 루트, 특정 가성비 스킬의 획득 방법.

17년 차이되 오히려 그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밖에 지식이 없다.

민간이이었던 대다수의 유배자들과는 몸에 익힌 기본기가 다를뿐더러 장비는 원래 유배자를 상대로 파밍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상의 적이 되어 내던져지니 새로이 학습할 방도도 없다.

그러니 이미 알고 있는, 그리고 알 수밖에 없는 방식의 접근을 해야 했다.

미궁의 시스템이 보장하는 열매는 훌륭한 소모품이다. 보관도 용이하며 부피나 무게도 부담스럽지 않다.

반면 위력은 아주 발군이다.

대개 그 스테이지를 진행하는데 사용되는지라 충분한 수량을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유배자는 적다.

블랑쉐는 거의 병적으로 열매를 수집했다.

처음에는 의뢰의 대가로 받은 돈도 가능하면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신원이 불확실한 바, 돈이 있다고 제대로 된 장비를 구매할 수도 없다.

루트는 있지만 가격이 지나치게 천문학적이다.

몰래 리프트로 숨어들어가 제단에 열매를 바치고 다시 열매를 파밍하는 일도 종종 했다.

전사의 나라에 감지 수단은 턱없이 부족하다. 위험부담은 있을지언정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붕대의 괴인은 연막 속에서 빠르게 달려 나왔다.

[대시]는 잔기술로서 유용하다.

일격에 산을 가르고 하늘을 찢어버리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한 두박자의 우위만으로도 크다.

복도의 모퉁이를 달리는 와중 관성을 해소하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한 두박자 빠른 기동이 가능해졌다.

낡은 옛 건물은 보수를 했다곤 하나 여전히 쓰이지 않는 방이 많다.

그런 방의 얇은 벽을 뚫어내고, 창문을 통과하며 우회했다.

이 신전의 신이 지켜보고 있겠으나 그럼에도 승산은 있다.

벽을 걷어차서 무너뜨리며 들이닥쳤다.

아까의 교전으로 수준을 파악한 요정 쌍검사가 깜짝 놀라며 이쪽을 본다.

벽을 뚫으리라고는 생각 못한 눈치다.

스펙은 나쁘지 않되, 대인전 경험이 부족하다.

바깥에서는 민간인이었을 것이며 미궁에서도 전투에 몸을 맡기는 생활을 하진 않았다.

다가오는 쌍검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 효율적으로 가다듬어진 무언가라기보다는 몬스터를 도륙하는 단순작업의 영역이다.

그런 검은 받아내기 쉽다.

마력을 다루는 방법만은 17년간 체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식은 야지를 떠돈 왕국의 8년 동안 더더욱 단련되었다.

그 괴물들 사이에서 블랑쉐는 스펙상 절대적 약자였으며, 약자의 싸움 방식을 익히게 만드는 스승이었다.

부딪히는 순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스펙 자체는 저쪽이 위다.

민첩에 극도로 투자한 블랑쉐에게 암습 판정이 일어나지 않는 싸움은 레벨이 반 막 나는 수준의 손해다.

하지만 그럼에도 먼저 닿은 칼날이 반듯하게 미끄러진다.

너무나도 깔끔하게 흘리기 당한 오른손의 검격에 제니가 당황한다.

균형이 무너지지만 요정 특유의 민첩함으로 왼손의 궤도를 맞춰낸다.

그러니 힘이 실려 있지는 않다.

민첩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한만큼 정밀한 동작이 손 끝에 구현된다.

검면에 손바닥을 대고 뒤집는다.

어린 시절, 그 남자에게 총기도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싸우는 법을 배웠었다.

황무지의 블랑쉐는 시간이 넉넉했고, 삶의 이유는 오르골을 찾아내기였으니 그 불쾌한 추억은 끝없이 되새김질 되는 연료였다.

제니는 검이 상대의 손바닥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왼손의 검이 벽으로 향했다.

제니 역시 낮지 않은 레벨의 유배자기에, 벽을 푹하고 파고든다. 빼낼 틈은 없었다.

처음의 검격을 받아낸 단검이 목을 노린다.

제니는 오싹함을 느꼈다.

* * *

그 공방은 당사자들에게는 잘게 쪼개진 한호흡이 계속해서 늘어진 연속적인 사고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이며 별달리 튀는 재능도 없는 레미에게는 순식간에 챙챙하더니 제니가 큰일이 났다는 결과로만 다가왔다.

[메모라이즈]되어 구현만 완료 된 채, 발사가 지연되고 있던 디버프들이 날아든다.

조준만큼은 정확했다.

미궁의 모든 디버프 마법은 투사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사가 독보적인 최강을 논하게 될 테니 어쩔 수 없다.

블랑쉐는 제니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생채기만 그었다.

대신 마력을 감은 단검이 날아드는 디버프를 베어낸다.

투사체의 속도를 더 가속해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다.

그런 걸 쉬이 해낼 재주가 있다면 좀 더 전투적인 마법사의 진로를 잡았을 것이다.

현재 레미는 몇 개의 필살기성 공격마법을 탑재한 보조술사에 가깝다.

다발로 날아드는 디버프 중 일부는 제니에게도 명중했다.

암살자가 솜씨 좋게 제니를 방패삼은 덕분이다.

[라이트닝 볼트]가 이어서 캐스팅 된다.

다만 그것은 발사되지 않았다.

대신 [메모라이즈]되어 주변을 맴돈다.

발사되지 않은 번개도 닿으면 마찬가지의 데미지와 마비를 줄 것이다.

암살자는 제니를 방패로 다가오려다가 포기했다.

제니가 무력화된 잠깐은 그야말로 찰나다.

더 이상 전진하다가 검 대 검이 아닌 개싸움이 된다면 당연히 전사가 유리해진다.

열매 몇 개가 바닥을 구르고 또다시 연막을 터뜨렸다.

레미가 기침을 한다. 최루효과는 없으나 마법사의 기관지에는 충분히 강력하다.

여신님이 대신 판단했다.

「차라리 넓은 곳으로 가지, 좁은 곳을 제대로 상정하고 왔다. 일단 길드 마스터 챙겨서 연막에서 벗어나!」

마법사의 몸 주변을 돌던 번갯불이 뒤편으로 정렬된다.

레미는 서둘러 제니에게 업혔다.

검은 챙겨야 했다.

다행히 암살자는 즉시 이어서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요정의 등에 업힌 마법사가 움직이는 포대처럼 번개를 연막 속으로 날려대었다.

기초 마법인 [라이트닝 볼트]는 빠르고 연속적인 캐스팅이 가능하다.

기관포를 연상케 하는 속도로 번갯불이 번쩍인다.

좁은 복도를 가로지르는 연속된 마법들은 그것이 기초적인 것일지라도 충분한 파괴를 일으킨다.

그러나 여신님이 방향을 지적했다.

「위다!」

레미는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위층과 천장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처음 뛰어든 것도 그곳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원래 개방되어 있던 폐병원이니 구조 정도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좁은 공간을 쥐라도 된 것 마냥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천장을 겨눈 전격이 다시 빛을 뿜는다.

「저 속도로 움직이면 못 맞춘다. 마력 낭비하지 말고 큰 거 준비해!」

여신님의 말이 옳다. 레미는 필살기성으로 탑재한 [라이트닝]을 준비했다.

이건 시간이 걸린다.

제니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러다 몸에 이상을 깨닫는다.

"어……, 이거 독……!"

그 사실에 레미도 이상을 깨닫는다. 최초의 습격 때 이미 정화계통 패시브는 소모되었다.

모든 발동형 패시브가 그렇듯 쿨다운을 가진다.

포션은 상태이상을 회복시켜주지는 않는다.

제니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격렬한 활동이 더 빨리 독을 몸에 돌게 했다.

질주 중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 결과는 뻔하다. 긴 복도를 통해, 그 끝에 있는 창문으로 건물을 탈출하려 했으나 바닥을 한바탕 구르는 결과가 되었다.

사소한 찰과상을 무시하며 레미는 구르는 관성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장이 무너진다.

역수로 쥔 단검이 보인다. 붕대를 두른 암살자가 천장을 딛고 가속하여 내리찍는다.

반사적으로 펼쳐지는 마력 방벽.

단검이고 암살자인 이가 암습 보정을 받지 못한다면 실질적인 위력은 별볼일 없을 수도 있다.

역시나 단검은 레미의 방벽을 일격에 꿰뚫지 못했다.

레미는 뒤로 몸을 던지다시피 날렸다.

방벽이 유지되는 동안 빠져나가야 한다.

원래 암살자는 개활지에서 약해진다.

설마 성역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큰 오산이었다.

그때, 마력 장벽 안으로 어느 틈인지 모르게 들어와 있는 구체가 보였다.

보라색이고.

못생긴 열매였으며, 칼집이 나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 * *

블랑쉐는 약자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였다.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왕국 외곽의 강인한 괴물들의 체급 앞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강인해진 인간의 육신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사용해야 했던 것은 여러 가지 잡기들이다. 독을 비롯하여 함정이나 열매를 다루는 기술들.

자연스럽게 스킬도 그런 것들로 채워졌다. 얼마 하지도 않을 검을 맞대는 싸움은 오랜 기간 몸에 익힌 기본기로 대체한다.

마력 방벽 안으로 소리 없이 흘러들어간 폭발 열매도 그런 보정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더 이상 추적하지 않고 오히려 거리를 벌린다.

쾅하는 폭음. 하지만 단련된 암살자의 눈은 마지막 순간에 내부에 방벽이 하나 더 펼쳐졌음을 놓치지 않았다.

손이 간결한 동작으로 품속에 들어간다. 다음 동작으로 단검이 날아간다. 상위 스킬 덕에 [강격]을 투척에 담았다.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마법사의 몸에 단검이 꽂힌다.

암습판정이다.

거기에 발려 있는 것은 효과가 빠르고 강한 독이다. 스치기만 해도 결과적으로는 확실한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쌍검사를 본다. 이쪽은 마비독이었다.

전사에게는 데미지를 주는 종류의 독이 효율적이지 않다.

소중한 경험치니 죽이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표적이 더 중요하다.

그대로 확인 사살을 위해 달려가려고 했다.

발목이 붙잡혔다.

"마비되었을 건데?"

고양이 귀의 요정은 포효했다.

"마비독 가진 짐승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블랑쉐는 인상을 썼다. 전사를 상대하면 이게 문제다. 세팅에 관계없이 최소한의 튼튼함을 보장받는다.

단검을 내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발목이 잡아당겨진다.

이쪽의 검에 힘이 들어가지 못했다.

목이 아니라 어깨에 박혀들지만 치명적인 곳은 아니다.

그리고 제니는 그 상황을 고스란히 암살자가 무기를 상실한 상황으로 만들어냈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다. 벽으로 밀어붙인다.

그러며 팔목을 붙잡아 꺾었다.

쌍검을 손에서 놓친지라 마스터리 보정은 빠져나가고 없다.

마비독의 여파로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악력이다.

손목을 그대로 물어뜯었다.

이 공격만큼은 블랑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공격은 그녀가 한 것이다. 요정 쌍검사는 무기를 내던지고 달라붙었고 블랑쉐는 결국 무기를 놓았다.

예비 무기는 유배자의 기본 소양이다.

하지만 다시 마스터리의 보정이 몸에 깃들기 전, 잠깐 빠져나간 틈은 제니에게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로 보정이 사라진다.

그럼 근력이 더 높고 종족도 인간이 아닌 제니가 신체 능력의 우위를 점한다.

붙잡고 놓지 않는다.

마운트로 이행하지는 못했으나 벽에 처박고 박치기를 날렸다.

그리고 주먹질.

차라리 이 편이 더 효율적이다. 날붙이끼리 맞댄다면 이길 자신이 없다.

오산이라면 블랑쉐는 맨손 전투에도 아주 능하다는 점이었다.

분명 힘은 더 강했을텐데 어느 순간 역으로 붙잡혔다.

그대로 관절기가 들어간다.

칼침을 맞아 쓰지 못하던 왼팔이 아니라 주먹을 쥔 오른팔이다.

우두둑 꺾이는 소리가 나고 제니는 바닥에 엎어졌다.

한 번 더 어깨를 통해 독이 들어갔다. 이번에야말로 거품을 물고 꿈틀거리는 모습이 일어나진 못할 것이다.

블랑쉐는 그대로 바깥을 향해 달려갔다. 마법사는 살아 있었다.

꽂혔다고 생각한 단검은 로브 속의 갑옷에 가로막혀 있다.

재질이 뭐지? 쉽게 막아낼 위력은 아니었을 텐데.

* * *

여신님은 제니에게 화신을 고려했다. 이미 의식이 없는 레미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는 듯하다.

대주술사 트동트는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지금 레미의 로브 속에 있는 갑옷은 무려 미스릴제다.

마법사가 사용해도 마법 시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몇 안 되는 금속.

막내의 문짝을 좀 써서 만들어낸 순도 높은 미스릴 흉갑은 치명적인 부위를 대부분 방어해 준다.

거기에 새겨진 수많은 주술적 문양들은 착용자의 방어력을 극대화한다.

팔다리는 방어되지 않지만 그건 사실 뭐 유배자에게는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중요한 부위는 아니다.

이 상황 자체는 여신님에게도 의외였다.

블랑쉐는 신중한 완벽주의자다. 승리가 100%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 약간은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블랑쉐를 아는 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튜토리얼 초기의 블랑쉐는 고정 네임드 유배자 중에서도 아서를 제외하면 최강을 다툰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당히 강한 수준의 네임드가 출현하면 학살을 벌이지 않고 통과한다.

자신이 실패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도박에 나서지 않는 것이 블랑쉐다.

무모함과는 언제나 가장 먼 곳에 서 있기를 바라는 네임드다.

그러니 이번에도 좀 더 신중한 접근을 예상했다.

구체적으로는 레미에게 허점을 보이게 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뛰어들 줄이야.

무언가 변수가 있었을까?

완벽하게 허를 찔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문득 드는 생각.

솔직히 말하여 레미의 가치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화신을 낭비할 정도일까? 이번에 또 사용하면 정말로 여신님 본인에게도 큰 타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렇게 남발하라고 주어진 기능도 아니다.

게다가 저 모양 저 꼴의 제니가 화신을 감당할까?

고민할 시간은 거의 없다. 여신님은 신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이기로 했다.

신처럼은 너무 많이 살아봤다.

그렇게 화신을 결심한 순간, 누군가 암살자를 가로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이분은 마법사지만 우리 신전의 중요한 후원자이신데!"

암살자의 표정이 이건 또 뭐야로 바뀐다.

여신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막내도 천사들도 급하게 달려오는 와중이다. 신전 내부는 전투원의 공백이 있었다.

여신님은 신도가 된지 얼마 안 된 노의사의 정보를 제대로 열람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저 노의사는 강한가?

"거기에 신성한 신전이자 병원에서 무슨 횡포인지!"

노의사는 분노하며 메스를 꺼내 들었다.

그 끝에 무형의 기운이 서렸다.

오러 블레이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썩 물렀거라!"

블랑쉐는 따질 것도 없이 즉시 임무를 실패로 판단했다. 암습하지 않고선 못 이기는 상대다.

연막이 터지며 암살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상황을 잘 모르는 노의사는 굳이 암살자를 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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