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5화
왕국 - Lv. 463 블랑쉐(5)
인생은 언제나 리턴과 리스크 사이의 줄타기다.
제니를 통해 43서버를 한 번 더 털어버리는 것은 당장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었다.
43서버에 거점을 둔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수상한 이들을 찾고 있다.
삼의회가 내 편을 들어준다곤 하더라도 기록이나 감시하는 눈길 자체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한두 번은 우연이라 넘어가겠으나 반복되면 그것은 필연인 즉, 위험부담이 너무 큰일이라 하겠다.
아예 타국의 리프트를 쓰지 않는 이상 조금의 텀을 둘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어차피 다른 곳으로 통할법한 [키 아이템]은 많다.
어느 서버도 아닌 아공간, 튜토리얼에서 미리 학습할 수 있는 ‘홀수 층’에 해당하는 곳으로 입장하여 눈치 볼 것 없이 파밍을 하는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대량의 레벨업을 통해 상승한 스펙에 적응도 할 겸이었다.
대량의 바람 원소 결정도 있다.
제단에 바치면 최대한 유사한 곳으로 가기에 어둠 정령의 영지였던 그 우주 공간처럼 정령계가 현실에 실체화된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영체에 대한 전투 경험도 쌓을 필요가 있다.
적절한 행선지이던 참이다.
다행히도 제단으로 입장하기 전에 여신님께서 소식을 전해왔다.
암살자가, 블랑쉐일 것이 틀림없는 암살자가 난입했다.
레미는 분명히 신전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우격다짐으로 돌파했다고.
"사랑의 작대기를 놓아준 언니를 잃을 수는 없어요!"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희우가 시가지 한가운데서 날아올랐다.
무엇이라 말할 틈조차 없었다.
다행인 점은 기천사의 비행이 지나치게 빨랐던 나머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유배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천사 하나가 더 출현했다는 사실은 알려지면 귀찮다.
그러나 말릴 상황은 아니었다.
나와 꼬맹이는 으슥한 곳에서 공간이동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려고했다.
공간이동은 국가 마법사들이 구성한 방호벽에 의하여 차단되어있었기에 뚫어내는데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발로 뛰는 것보단 빠르다.
번쩍이는 공간이동의 섬광 사이로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폭발이 연기가 솟구치고 불길이 일고 있다.
아주 큰일 난 꼴이다.
희우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영감님도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이런 제길. 최근 너무 주목을 너무 끌었었나. 확신을 가지고 온 거였군요."
"나도 미처 생각 못했군. 처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야 했는데."
그것 자체는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가장 크게 예상을 벗어난 것은 블랑쉐 본인이다.
"가만, 혹시 블랑쉐가 아닌가?"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 붕대 속은 화상으로 일그러져있더군. 사고로 생길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정확히 얼굴만 망가트릴 생각이었던 거지.」
"전투 스타일은 어땠죠?"
「열매를 많이 쓰더군. 무기는 자체는 단검이었다. 사람 죽이기를 아주 잘할 것 같은 효율적인 움직임이었어. 미궁에서 익힐만한 기술은 아니다.」
"여신님께서 본 게 그렇다면 사실이겠죠."
모든 정황증거가 가리키는데도 형편 좋게 우연히 얻어걸릴 확률은? 거의 없다.
레미는 충분히 위험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배자는 죽지만 않았다면 불구가 되는 일 따윈 없다.
사색이 되어 일어난 레미는 하늘이 푸른색임을 깨닫고, 내 모습도 확인한 후, 멍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둠이 아니야. 1층이 아니야. 다행이다……."
"언니이! 부케 받으셔야죠!"
"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직후에 천사들이 날아올랐다.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하건 중요하지 않다.
블랑쉐가 이대로 꼬리를 감춘다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음? 저번에 기도하러 왔던 여신님의 신도들 아닌가?"
노의사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자신의 내력에 대하여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여신님은 모른 척 하기로 해줬다면서도 내게는 태연스레 알려준다.
신이 바로 비밀을 누설할거라고 상상도 못한 얼굴로 노의사가 불평을 한다.
"기껏 고쳐놓은 게 다시 박살이 났어. 우리 후원자님이라도 화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자네들은 그 천사 뭐시기하는 길드원이었나 보지?"
레미는 이제 이 의사양반의 소중한 후원자다. 내버려둬도 훌륭한 경호원이 되지 않을까?
거기에 여신님이 목격한 바대로라면 분명히 천사가 하나 더 있음을 노의사도 깨달았겠다. 그 점은 시치미를 뚝 떼는 것에 노련함, 혹은 세상을 달관함이 느껴졌다.
나도 맞장구치며 모른척했다.
"큰일이었죠. 범인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는 마스터가 위험하지 않도록요."
"보통은 길드 마스터가 가장 강할 텐데 특이한 길드로군."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고맙네. 이리 구하러도 와주니……. 예전 같았으면 불타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썼을 건데 말일세."
실질적으로 불을 끈 것은 놀라 달려온 다른 길드들이 아니라 이 의사양반이다.
유배자가 제대로 된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평균적으로는 500레벨 정도가 필요하다.
여신님이 추정하는 이 노의사의 레벨은 1000에 근접한 수준이었다.
정순한 오러, 그것도 메스 같은 짤막한 것을 매개로도 장검만큼이나 길게 뽑을 수 있는 수준의 소드 마스터는 드물다.
일단은 우호적이니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두자.
모든 유배자가 부귀영화를 탐하는 것은 아니다.
엔젤처럼 각자 실현하고 싶은 꿈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바깥에서부터 품고 왔던 어떤 신념이겠지.
유배에서 돌아갈 기약이 없으니 이리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랭커라는 것도 결국 [리프트]에서 어느 단계까지 클리어 했냐로 결정 되는 것이다. 왕국의 구석에 은둔한 괴물들은 상상이상으로 많다.
혹여 과거 회차에서 랭커였을지라도 그 자체에 신물을 느끼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수밖에.
노의사는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갔다.
몇 번인가 미심쩍음을 느끼긴 했다. 이 병원 거리는 역시 저 노인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블랑쉐가 예상할 수 있었던 적은 치천사였다.
치천사는 전사계통 종족인 천사들 중에서도 파워형이다.
날개도 강인하고 깃털을 통한 보조무장도 탑재하고 있다.
대신 움직임이 재빠르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단순한 최고속도는 날개달린 천사다보니 충분히 빠르다.
하지만 그저 이동 속도에 대한 것이지 전투 중 동작 자체의 민첩성은 의외로 뛰어나지 않다.
폭격기가 빠르지만 도그파이트는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치천사는 그런 의미에서 비교적 느리고 묵직한 전사를 위한 종족이었다.
그래서 추격자 중에 기천사가 있을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와중이었다.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기이할 정도로 인적 자원이 풍부한 길드. 길드 마스터는 또 이상할 정도로 약했는데.
그렇다면 바지사장일 가능성.
진짜는 따로 있다.
그 경우 지금 따라오는 기천사는…….
그 순간 눈앞에 그 천사가 금빛 광채와 함께 나타났다.
블랑쉐는 어이없음을 담아 숨을 들이쉬었다.
슬럼은 과거에 시가지가 뻗어나갔던 적 있는 폐허다.
널린 판자촌을 제외하더라도 건물의 폐허들은 많다.
오랜 기간 청부업자 노릇을 하며 폐허들의 구조는 꿰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들 가리는 것이 많으면 발견할 수 없다.
천사의 시력이 뛰어나다고 보이는 것을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능력마저 뛰어나지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으로 정찰에 특화된 스킬 세팅을 했다면 또 모를까.
요컨대, 이렇게 순식간에 추적당하는 것은 상정 외의 일이었다.
"어떻게……?"
"시간의 신의 신성은 무슨 색이게요?"
쾌활한 어조로 말하는 기천사는 자신의 주변에 남은 흔적을 가리켰다.
블랑쉐는 씁쓸하게 그 사실을 이해했다.
"행운의 신이 축복하기라도 한 모양이군."
무기를 든다. 이대로 잡혀줄 수는 없기에.
절망적인 상황은 이미 충분히 겪어보았다. 여기서 주저앉을 정도면 8년간 살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기천사가 민첩함의 반대급부로 내구력 자체는 천사답지 않게 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래봐야 괴물이긴 매한가지지만 치천사를 상대로는 이빨조차 안 박힐 수도 있는 것이니 다행이 아닐지.
그러나.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천사가 다가왔다.
서늘한 죽음의 그림자가 뇌리를 스친다.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본능의 작용이었다.
죽음과 멀어지려 안간힘을 쓰는 척추반사.
오로지 그것만으로 무기를 상대의 공격에 가져다 댈 수 있었다.
그리고 튕겨나갔다. 힘에서는 확실하게 밀린다. [대시]로 운동에너지를 흡수하며 몸을 숙인다.
그대로 날듯이 달려온 천사가 블랑쉐를 찔렀고 붕대와 망토를 두른 괴인은 허무하게 꿰뚫렸다.
그 순간 천사 역시 깨달았다.
허상이다.
아마도 어떤 스킬의 조화.
공부하기로는 긴급회피에 유용한 형태의 스킬이다.
허상을 남기고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은신으로 몸을 숨겼다.
마력을 모아 탐지를 터뜨린다.
천사가 된 이후로 마력의 총량이 크게 늘었다. 이제 이 정도 탐지는 마법직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위치는…… 바로 뒤.
그대로 돌며 상대의 공격에 반응.
단검과 단검이 부딪힌다.
그 와중 묵빛의 불꽃이 튀는 것을 보며 블랑쉐는 장비의 차이마저 절감했다.
이러면 단순한 검 대 검으로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열매가 허공을 난다. 칼집이 난 보랏빛 열매.
천사는 폭발 열매를 신경 쓰지 않았다.
싸움의 무대가 되었던 주인 없는 폐건물에서 요란한 폭발이 일었다.
폭압과 불꽃이 터져 나오고 능숙하게 그것을 추진력 삼아 거리를 벌린다.
부상은 생겼으나 포션 한 모금이면 해결. 이것은 그녀가 요원으로 활동하던 바깥에도 없던 것이다.
대지가 흔들리고 시야도 흔들린다. 귀가 먹먹했다.
대량의 고폭탄에 가까운 위력을 보이는 파괴적인 소모품이다.
다만, 블랑쉐도 천사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효과가 있을까?
대부분의 왕국에 저런 고위 종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겨우 17년차인 블랑쉐는 랭커급에 도달해본 적이 없다.
천사의 정확한 성능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유유히 폭발 속에서 걸어나오는 천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 저항력이 얼마나 되는 것일까?
마법 [익스플로전]과 동위호환인 저 열매의 위력은 결코 약하지 않다.
대형 마수라할지라도 뱃속에서 터뜨린다면 확실히 절명시킬 정도거늘.
천사는 날지 않았다. 날개조차 펴지 않는다 유유히 걸어와 단검을 다시 든다.
블랑쉐는 판단을 바꾸었다.
공격적인 열매는 대부분 마법적 피해를 가한다.
부수적인 물리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덤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마도 상대의 마법저항력은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다.
이번엔 블랑쉐가 달려들었다.
천사가 마력을 담은 아다만타이드 단검을 들어 올려 공격에 가져댄다.
가벼운 동작임에도 무시무시하게 빠르다.
[은신]
은신 특유의 이펙트인 검은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는다. 지극히 눈에 띄는 그 이펙트는 일종의 패널티다.
그리고 미궁에 존재하는 스킬들 대부분은 이후 패널티를 완화하는 연계 패시브가 존재한다.
쿨다운도 그중 하나다.
가능한 민첩으로 최대한 몰아 찍으며 단검을 사용하다 보니 그야말로 암습에 특화된 스킬셋을 가진다.
은신을 통해 동작을 감춘다. 검은 그림자가 확 튀며 가리지는 않으나 깜빡깜빡하며 사라지는 모양으로 보일 것이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통하지 않을 잡기술이지만 [마력시]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사는 드물다.
블랑쉐는 대단한 고급 스킬들의 획득 조건을 알지 못했고, 아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다.
약자로서 강자를 상대하는 법.
바깥에서부터 익혀온 기술을 활용하는 법.
그게 결합한 방향성이 이것이다.
부딪히는 순간 다시 [은신]으로 흐려진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쿨다운이 없는 연속적인 [은신]은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끊임없이 깜빡이며 사라지는 암살자는 천사의 감각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기술이라는 것은 본디 환경에 민감하다. 아무리 달인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주어지는 정보에 왜곡이 낀다면, 아니 오히려 달인이기에 흔들릴 수 있다.
상대의 동작이 꽤나 무뎌진다.
마력으로 은신을 벗겨내어도 소용없다. 어차피 쿨다운이 없기에.
이것은 일종의 변칙 근접 전투술이다.
그러나 과연 고위종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천사는 순수한 신체능력의 반응속도로 블랑쉐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쩌면 어중간하게 보여서 더 골치 아픈 공격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블랑쉐는 방심을 느꼈다.
상대가 낼 수 있는 동작의 속도가 억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어거지로 빈틈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사이를 찌른다면 끝이다.
봐주는 건가? 어째서?
아마도 오만해서겠지.
한때 자신이 그랬기에 알 수 있다. 지난 17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도중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
상대의 공격이 조금 헛치는 순간 온 마력을 담아 그것을 옆으로 쳐냈다.
품속이 아주 한순간 열린다.
달려든다기보다는 무기를 든 팔을 붙잡는 느낌으로 파고든다. 그대로 등으로 밀치며 회전.
깔끔함 꺾기가 완성되었다.
팔이 약간은 손상되는 느낌, 그리고 폐부를 팔꿈치로 친다. 힘껏 찍었으나 어딘가 답답한 감각.
천사의 다른 손이 블랑쉐를 붙잡으려고 했다.
빠져나가기 위하여 [은신]으로 흐리고 [대시]로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상궤에서 벗어난 동작을 가능케 하는 스킬의 조합이다.
하지만 천사는 이제 되었다는 듯 그 팔을 붙잡았다. 핀 형태의 날개가 펴지고 가늘고 새된 진동음이 울린다.
폭발적인 가속 앞에 제대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동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대로 블랑쉐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충격으로 폐부의 숨을 토해내며 블랑쉐는 자신이 하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쿨럭. 큽. 스펙 차이가…… 너무 나는군."
몸이 땅에 거의 박혀들었다.
시공한지 오래 되어 제멋대로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이 더 크게 갈라졌다.
사람모양 도장이 찍혔을지도 모를 충격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천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러게요. 스펙 차이가 너무 심해서 제대로 된 승패가 아니네요. 다음에 다시 해봐요. 언니."
그 언니라는 단어에.
한순간의 의문을.
다음 순간의 깨달음을.
그리고 블랑쉐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