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6화
왕국 - Lv. 463 블랑쉐(6)
의식의 잃음은 순간이었다.
오랜 습관은 끊어진 뇌와 몸의 접속을 빠르게도 복구시켰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에도 악몽이 지나간다.
자신의 과거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악몽.
살아 있는 인간은 아니며 살아온 삶조차도 없는 무언가.
자의식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블랑쉐는 답을 얻지 못하고 눈을 떴다.
슬럼의 낡은 거리, 적막한 폐허.
잇달아 들려온 폭음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바보는 적었다.
약에 취해 너절하게 드러누워 있는 약쟁이 몇몇 말고는 쥐새끼들이나 보일 뿐이다.
흐릿한 시야가 좀 더 분명해진다.
블랑쉐는 천사가 자신을 업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깨달았던 사실도 떠올랐다.
짧은 생각 끝에 그녀는 8년 전, 어느 기억의 편린을 이끌어내었다.
"이제 1승 1패인가?"
"그러게요."
순순히 긍정하는 상대는 방글방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재주도 좋다.
천사는 순순히 블랑쉐를 내려주었다.
두 발로 디딘 땅이 흔들린다. 휘청이자 다가와서 부축도 해준다.
비로소 블랑쉐는 자신의 여동생을 다시 보았다.
이전의 그 조그마한 꼬마가 아니었다.
젖살이 쏙 빠지더니 앳된 티가 싹 달아났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아니라면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 남자의 유전자인가 싶다.
"그때 지고 얼마나 분했는지 알아요? 이번에는 언니가 분할 차례네요."
많은 다른 유배자들과 다르게 희우는 블랑쉐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초회차여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회차가 있을지도 알 수 없어서였다.
걱정이라면 정말로 아저씨를 죽이려고 든다는 것 하나뿐이지만 이젠 해소되었다.
지금의 블랑쉐는 아저씨에게 위해를 가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스스로 망가뜨린 얼굴이나 몸을 보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 마리의 흑표범처럼 사나우면서도 매력적이었던 그 모습을.
그때는 긴장도 했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하고 감탄도 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보통의 각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시에 다른 여러 가지 안타까운 점도 떠오른다.
블랑쉐가 물었다.
"오르골은 살아 있나?"
"물론이죠."
"그래. 그렇겠지. 내가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어요."
블랑쉐는 뭐라 말 못 할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적대하지 않는 것이 지나치게 오랜만이다.
유배자가 아닌 NPC들이야 그녀가 어떤 존재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그들에게 볼일은 없었다.
경험치로서 죽일 것도 아니며 그에게 의뢰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궁에서 NPC란 존재에 대해 일반적인 인식은 결국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젠 그녀 역시 그랬다. 그럴지도 몰랐다.
"이대로 순순히 잡혀가려고요?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요?"
"죽이려고 했지. 원래는."
"이제는요?"
"모르겠다."
시간이 흩어버릴 증오라고는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껍질밖에 남지 않았다.
블랑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깨닫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을 부정하는 이 세계에서 그녀가 의지할 희망이 한 줄기 있다면 그것은 그 남자뿐이다.
본래 그녀가 돌아갈 동기였던 여동생들……. 오르골의 입장에서는 실패작이었던 그녀들은…….
어쩌면 단지 그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 되어버렸다.
오르골, 그 남자와 지금 이 아이만 거짓이 아니라면.
그래도 믿고 싶었다.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블랑쉐라는 코드네임을 부여받았던 소녀는 오르골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연료를 잃은 불길은 약해진다. 증오는 이름의 불꽃은 8년간의 세월 속에서 그렇게 꺼져갔다.
그보다는 텅 비어갔다.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게다가 블랑쉐는 어차피 지금 이 여동생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오르골을 만나고 싶다.
증오인지, 애정인지.
그저 애증으로 그 남자를 다시 보고 싶다.
"그냥 확인해 보고 싶네."
"무엇을요?"
"나를."
희우 역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지금 상대의 눈에는 그게 없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던 그것,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강렬한 의지.
독기라고 부를 만한 어떤 목적성이 없다.
대신 정말로 지친 누군가의 눈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영감님과 비슷한 눈이었다.
동시에 희우는 이 암살자가 겪었을 왕국에서의 삶을 떠올렸다. 모두 추측이지만, 그 어떤 추측도 결코 긍정적인 삶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아마 자신이었어도 정신적으로 죽어가지 않았을까?
왕국에서 블랑쉐가 그런 초기 스탯을 가지고도 결국 오래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것은 그런 문제도 있다고 했다.
보통은 다음 서버가 열리기 전에 사망하고 이미 8년이 지났으니 얼추 맞아 떨어지리라.
희우는 그 사실에 오싹함을 느꼈다.
바보가 아니니까 느낄 수 있는 오싹함이다.
1층에서, 그리고 2층에서 있었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나중에 문득 되새겨본다면 말이다.
아저씨는 희우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 뿐, 대충 그녀의 가문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그녀는 랜덤 NPC이다. 생성되는 범위가 정해져 있는 형태의 랜덤 NPC일 것이다.
적어도 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지.
다시 블랑쉐를 본다.
비슷한 고민이겠으나 좀 더 확신과 악의를 가진 말을 들었을 것이다.
희우는 이 암살자가 아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아는 오르골은 지금 가고 있는 곳의 그 오르골도 아니니까.
하필 아저씨도 꼬맹이도 언데드인 덕에 누군가와의 스킨십을 할 일이 없는 요즘이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뒤편으로 돌아가 꼭 안았다.
블랑쉐는 어이없다는 듯이 희우를 본다.
"뭐냐?"
"아니, 그냥 고생 많이 하셨네요 싶어서."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희우는 언제나 자신의 주관에 긍정적이면 당당한 편이다.
아무 원한이 없는 이에게 사연이 있다면 기꺼이 그 사연에 공감하고 같이 울어줄 수 있다.
상상하자니 정말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크훌쩍, 뭐, 썩 나쁘진 않을 거예요. 오르골이 미궁을 클리어하고 해방할 거니까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건 아무도 모르죠."
정말로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까 해봐야죠?"
"……."
희우는 왜 아저씨가 블랑쉐를 원하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NPC라고 자각한 이상 미궁의 끝을 보고 싶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지나치게 찝찝한 삶이 아니겠나.
블랑쉐와 함께 다시 신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트동트 영감님과 아저씨가 레미에게 엎드려 사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블랑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엄청나게 이상해졌다.
* * *
명백한 실책을 저질렀다면 인정하고 수습해야 한다. 단지 사과로만 끝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레미는 떨떠름하게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 저기 괜찮으니까 일어나주실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너무 벌떡 일어나니까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럼 어떻게 해줄까?"
"아니, 그냥 일어나요. 제발!"
입장상 위인데 사과할 일이 생기면 이렇게 되기 쉽다. 참 곤란하군.
레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어쨌든 살아남았잖아요? 그리고 저기 일거리가 오고 있는데."
희우가 잡아 온 모양이군.
그리고 돌아보았는데 한눈에도 몹시 당황한 것 같은 암살자가 눈에 띈다.
잡아 왔다기보다는 같이 걸어온 느낌인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희우가 얼른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그럴 법도 한가 싶다.
내가 과거에 겪은 블랑쉐들, 그중에서도 바로 이전 회차에서 길드원으로 삼았던 블랑쉐도 그랬다.
은근히 멘탈이 약한 네임드다.
사실 뭐 원래부터 멘탈이 좋았던 친구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나? 가만 듣고 보면 사연이 참 기구하기 짝이 없으니까.
유전자 클론이라니 내가 할 소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영 악취미다.
다가가자 움찔한다.
뭐지? 뭔가 의심을 받고 있나?
"넌 누구냐. 내가 아는 오르골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남자가 아니다."
화상으로 잘 알아볼 수 없음에도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느껴진다.
확실히 이전 회차의 블랑쉐에게 들은 대로라면 오르골은 이런 짓을 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능력에 걸맞은 자부심으로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폭군에 가까운 남자다.
내가 그 양반의 모티브일 수는 있으나 동일인물은 아니지.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한다?
"진정해. 블랑쉐. 나는 그 오르골이 아닌 건 사실이니까."
"그 오르골?"
좋아, 이젠 솔직해져야 할 때다. 희우가 그렇게 말했다.
저 아이가 내게 구원이라면, 블랑쉐에게도 구원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우리가 비슷한 처지라는 식으로 몰고 갈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블랑쉐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블랑쉐보다 쇠약해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문드러지기 직전인 것이 보인다.
별일이 없었다면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블랑쉐는 보통 그렇게 죽는다. 능력 부족보다는 살아갈 이유를 잃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이전 회차의 블랑쉐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이번의 블랑쉐에게 해주고 싶다.
* * *
레미는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영감님은 여전히 그녀의 곁에서 미안해하고 있다.
괜찮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기에 레미는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그대로 죽었어도 나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어쨌든 왕국도 한 번 와봤고……. 마법에 대해서는 잔뜩 배울 수 있었던 회차니까요."
"목숨이 여러 개라 한들 알던 모든 것과의 단절이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나."
"다르긴 다르죠. 다음이 있다는 사실."
"나는 잘 모르겠는 감각이군. 유배자가 아니니 말이지."
이젠 뭐가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레미는 자신의 이전 회차들을 생각했다.
대부분은 허무하게 죽었지만 그 못지않게 끔찍했던 죽음도 많았다.
그럼에도 삶은 끝나지 않았다. 넋을 놓고 있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도 없으니 움직여야 했다.
중학생이었던 소녀는 미궁에서 나이를 아홉 살이나 더 먹었고 가끔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다시 시작되는 다음 회차를 떠올리고는 느꼈어요."
이러니 현대 지구가 그립지 않을 수가 있나.
리더의 목표가 미궁의 클리어, 그리고 모든 것의 해방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새삼 그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이다.
실패하더라도 그녀 자신은 이곳에 남겠지만 말이다.
영감님이고 레미고 리더가 생각하는 공략조에 포함되지 않음은 이미 전달받았다.
사실 둘 모두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영감님은 왕국을 유람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일을 좀 돕다가 떠날 것이라고 한다. 유배자가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오크 주술사가 할 일은 많다.
굳이 따지자면 그동안 지나쳐온 층만큼이나 힘든 곳도 아니고.
애초에 영감님은 그게 목표였으니까.
그것이 아마 영감님의 결말이 될 것이다.
"나는 뭐가 목표지……."
반면 레미는 잘 모르겠다.
막내는 신관이 되었다. 세상살이에 누구보다 지쳐 있으며 여신님께 귀의하여 위안을 얻는 그 거한에게 잘 어울리는 결말이다.
언제나 발랄한 귀여운 소녀는 리더와 함께 미궁의 끝을 보는 것이 목표다.
엔젤은 요리에 진심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가게를 내고 싶다는 나름의 목표가 있다.
50년 차가 넘었다고 했던가.
긴 유배 생활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을지 모르겠다.
사냥꾼은……. 그곳에서 행복하시겠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던 꼬맹이도 이제 어엿한 마법사다. 레미가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수준의 마법을 다룬다.
스킬로서 구현하더라도 레미가 닿을 수 있는 곳일지 모르겠다.
아마 무리겠지.
레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블랑쉐라는 암살자를 영입하기 위해 벌어진 일에 휘말리며 레미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꿈도 재능도 미래도.
그리고 누군가의 기대조차도.
오히려 그걸 잘 아니까 기꺼이 미끼 역을 자청했다.
하기야 한낱 중학생 정도의 경력으로 미궁에 들어온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일개 중학생이 사실은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는 것은 소설이나 동화 속의 이야기다.
이 미궁은 엄연한 현실이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열등감이 피어오른다. 마음이 우중충해지자 표정에도 그것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거기 후원자님은 뭐가 그렇게 죽상인가. 크게 다치면 포션을 써도 후유증이 남을 때가 있지. 어쩌면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진료를 마치고 나온 노의사였다.
이곳은 신전이자 병원이며 조직의 보스인 레미에게는 주요한 사업장이다.
딱히 세금을 거두냐면 오히려 돈을 퍼붓고 있는 쪽이지만 어쨌든 보스가 머물러야 하는 본진임은 분명하다.
레미는 문득 충동을 느꼈다.
바깥에서의 꿈은 있었다.
성적 좋은 중학생이 으레 가질 만한 꿈.
의예과에 들어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
그게 진짜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냥 성적이 좋으니 맞춰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으니 무언가 하고 싶었다.
적어도 이 미궁에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만 치다가 스러진 티끌 같은 유배자로 끝나고 싶지는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노의사에게 다가갔다.
그 기세에 앞뒤의 두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레미는 정말로 충동적으로 무릎을 꿇고 내뱉었다.
"선생님……. 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 어어. 음. 그래. 우리 후원자님이 원한다면 그 정도야 뭐."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인 기세에 노의사는 얼떨결에 승낙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