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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97화 (197/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97화

왕국 - Lv. 463 블랑쉐(7)

고정 네임드 유배자 NPC는 우울한 존재다.

차라리 대륙의 주민이라면 모를까 그들은 끊임없이 고통받는 미궁의 광대들다.

신들을 죄수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진짜로 죄수인 이들은 오히려 이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블랑쉐는 8년의 기간 동안 고통받았다.

그녀가 알던 모든 사실은 부정당했고 그녀의 기억에 새겨진 모든 정보는 거짓이었다.

그녀는 17년 동안 미궁의 유배자였던 적이 없으며 바깥에서 불우한 과거를 가진 암살자였던 적도 없다.

오르골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의 복제품도 아니다.

단지 미궁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존재다.

저런 기억을 가지고 1층에서 눈을 뜬 그 순간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블랑쉐는 이 사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너는 내게 진짜다."

우스운 일일 수도 있다.

블랑쉐에게 그렇게 말한들 무슨 증거가 될까?

내가 그가 알던 오르골과 다른 이라는 사실마저 설명한 마당에 이 말은 위안 이상의 무언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블랑쉐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위안이었다.

께름칙한 고정 NPC로 보는 이가 없다.

애초에 우리 파티의 유배자들 중 블랑쉐에게 사망한 경험이 있는 것은 레미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다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한 것도 아닐뿐더러 공포스러운 괴물, 마주치면 죽는 미친 몬스터 정도의 인식일 뿐이다.

공포는 아직 공포로 남아 있는 동안은 원한이 되지 못한다.

블랑쉐를 싫어하는 이들은 블랑쉐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의 무력을 지녀본 적이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지금의 환경은 블랑쉐라는 인물에게 아주 따듯하게 다가왔다.

3년을 야지에 떠돌았고 5년을 두려움에 떨었다.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했다기보다는 업무관계의 대화만 나누었다.

따뜻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 편안한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블랑쉐가 틀림없이 그랬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암살자의 냉혹한 면은 후천적인 것이니까.

처음으로 블랑쉐와 친해질 수 있었던 이전 회차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언뜻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이는 이 여인은 생각 외로 소심하며 요령 없는 바보다.

그렇게 남아 있을 수 없는 환경에서 평생을 지내왔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슬픈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은 맞았다.

어느 회차의 블랑쉐건 같은 성격, 같은 과거, 같은 사고를 하니까.

"그랬나……."

이미 자신이 무한히 복제되는 개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블랑쉐는 덤덤하게 이전 회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도 이전 회차는 아닐 것이다.

내가 겪은 이전 회차의 블랑쉐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의 그녀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훈련받은 포커페이스는 누구도 감정을 읽어낼 여지를 주지 않는다.

희우와 함께 가만히 경청하며 아침 식사를 마친 블랑쉐는 곧 사라졌다.

정확히는 제 방에 틀어박힌 것이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은신이다.

"내버려 둬도 되나요?"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나는 너를 알고 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모른다. 얼마나 웃긴 상황이야."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

희우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블랑쉐와 함께 내 지난 회차 이야기를 들었으니 유추하기 힘들진 않은 내용이다.

"혹시 연애는 해보았다는 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내 쪽에서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블랑쉐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그게 연인 아니에요?"

"너랑 나는 어떠니?"

희우의 눈이 데굴데굴 구른다.

"우리 관계는 서로 합의하에 있죠!"

"그건 큰 차이란다. 아가야."

"아가라뇨! 저 다 컸거든요! 언니도 못 알아봤다고요!"

불안해하는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내 쪽에서는 아무런 마음도 없었다.

단지 가장 친근한 동료로서 대했을 뿐이다.

지난 회차에서 내가 거느렸던 길드는 왕국을 통합했었다.

시스템과 체계를 만들어 정착시키는데 많은 노력이 소요되었다.

결과는 지금 이곳 이상의 이상적인 낙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낙원의 힘을 결집시켰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유배자들은 그들이 살던 현실로 돌아갈 가능성을 원하지 않았다.

유배자들이 원하는 것은 낙원이 된 미궁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곳을 본다고 믿었다.

그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마지막까지 동조해 주었던 이들이 길드에 합류한 고정 네임드 NPC들이다.

그들은 각자 강렬한 동기를 부여받은 설정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대부분 도전자가 된다.

그래, 마치 나처럼 말이다.

유능하고, 적극적이며, 클리어만을 바라본다.

"그래도 아저씨는 알아보는 사람은 없잖아요?"

"모를 일이지. 여기서 하이랭커들을 만났는데 갑자기 오르골 네 이놈! 하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들겠어?"

"오우, 그건 정말 끔찍한데요."

"그리고……. 흠.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는데."

언제까지고 아무 말 없이 있을 수는 없지. 그러니까…….

희우가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내 얼굴에 불이 붙었다.

"으어아으아앗! 이러려던 게 아닌데!"

"죽는다! 천사가 뱀파이어 잡네!"

꼬맹이가 큭큭대며 신성력을 중화해주었다.

얼굴에 저걸 지져지면 끔찍하게 아프기에 옆에서 도와주는 편이 좋다.

희우는 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알아요, 아저씨 이상하게 저에 대해서 잘 알잖아요."

"그럼. 모르는 게 없지."

"지금 제 키가 몇이게요?"

"170 약간 안 되지?"

눈을 껌뻑인다.

"왜 알아요? 여기서 자 구해서 재본 건데."

"눈대중이야. 옷 만들 일이 많으니까."

민첩을 엄청나게 높게 찍어보았다면 그 감각이 몸에 남는다. 그러면 아주 정밀한 눈대중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더라고요. 그러고 다른 사람들, 막내 아저씨나. 사냥꾼 아저씨나 그런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다가 문득 깨달았죠."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었다.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아니면 그냥 배려였을지.

하지만 맹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부분에서는 핵심을 꿰뚫는 이 아이는 스스로 이미 깨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통은 퇴마사 같은 직업의 여고생은 없다면서요? 이런 튀는 설정이 있는 거 보면. 음. 그래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세상이었지만 남들 모두가 보기에 그렇다면……."

"진정해. 아직 확정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어."

"그렇죠? 그리고 사실 전 제가 가짜여도 상관없어요."

"그래?"

"진짜로 없다고 하면 뻥이지만. 그래도 뭔가 좋잖아요. 지금도."

내가 노골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희우가 희희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는다.

"NPC는 누군가 게임을 꺼버리지 않는다면 계속되는 거죠?"

"그건 그렇겠지."

"그럼 못 끄게 하면 되잖아요."

"클리어하면? 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사라질지도?"

"데이터를 남길 법을 찾는다면 괜찮아요. 저는 제가 만약 이 게임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여도 아저씨를 잊지 못할 거예요."

"버추얼 남자친구냐."

"남편이죠! 어쨌든 그러면 되었다고 생각해요. 전 바보니까 더 이상은 몰라요."

얼씨구.

뭐 그래 긍정적이라서 좋다. 저렇게 생각하면서도 또 어느샌가 마음에 어둠이 차오르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희우는 놀라울 정도로 그런 부분이 없었다.

어려운 건 모르는 바보라서 그럴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 것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그냥 나는 나일 뿐이라고.

프로방스가 가진 마음가짐과도 같다. 게이머들은 사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 경우에는 너무…… 혼란스러울 증거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도 저도 아닌, 도저히 정답을 알 수 없게 흐려버리는 미궁의 장치들.

하지만 희우는 어딘가 그런 증거들에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보통 좀 더 사소한 것.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은 가까이 존재한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아이다.

"이젠 저한테 좀 의지하고 있으세요?"

"그런 것 같아."

"아저씨를 믿지 마세요. 아저씨를 믿는 저를 믿어요! 후후후후."

"좋아, 그럼 이제 그 말을 틈을 봐서 블랑쉐한테도 하는 거야."

"넵! 제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쟤 생각보다 아싸찐따거든. 괜히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자살한다. 그건 막아야 해."

"그럼요. 아직 제대로 된 결판을 못 낸걸요."

희우가 총총히 뛰어간다. 블랑쉐가 들어간 방 근처부터는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움직인다.

원래는 내가 저 아이의 멘탈을 신경 썼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는 희우가 더 나를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다.

한쪽만이 부담을 지는 것은 좋지 않다.

서로에게 기대는 것.

그게 최고다. 여러 가지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꼬맹이를 덥석 안아들었다.

머리를 마구 문지르자 꺄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대륙보다는 엄마 아빠의 딸인 편이 더 행복하니까요."

"기특하기도 해라. 생각이 너무 많아지는 건 꼭 좋은 일은 아니란 말이야. 너도 조심하렴. 혹시 의심이 들거나 불안하면 꼭 말하고."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뭔데?"

꼬맹이는 당돌하게 붉은 눈을 빛내며 말한다.

"마법은 미궁보다 위에 있을까요? 아래에 있을까요?"

마법이 미궁을 창조했는가, 그게 아니라면 미궁이 마법을 창조했는가.

이건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고.

이번 회차의 바벨탑에 가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날은 그대로 마인드맵을 점검하고, 여신님의 권을 통해 다시 세팅하고, 일부 유니크 스킬의 조건에 대해 다시 고려했다.

그 날 새벽쯤, 블랑쉐가 나타났다.

조금 질린 듯한 얼굴이었다.

희우가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옆에 바싹 달라붙어서 팔짱을 낀 채 생글생글 웃고 있다.

"언니가 클리어를 위해 최선을 다한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어떻게 한 거야?"

"진심을 담아 대화하면 언제나 통하는 법이죠!"

블랑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보다는 이 녀석의 수다를 듣다 보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다."

"하하하. 뭔가 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지."

"혹시 저를 바보라고 말하는 건가요?"

블랑쉐가 어딘가 누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얼굴의 형태가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인상으로 알 것 같은 그런 표정.

나도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나와 거의 동시에 말한다.

""귀여운 바보지.""

희우가 헹 하고 웃는다.

"그럼 되었어요."

나나 블랑쉐 같은 아싸들에게는 이런 슈퍼 인싸가 특효약인가 싶기도 하고.

* * *

레미는 빠르게 후회했다.

노의사는 얼떨결에 승낙했다고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공부할 게 너무 많았다. 의학부 학생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길드 마스터로서의 업무는 그래도 상당 부분 헨리 신관으로 이관되었다.

애초부터 레미가 해야 할 일은 유배자들을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는 일이었고 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존재감을 퍼트리며 어그로를 모으는 역할도 있었다.

그럴싸하게 역할을 마친 이제는 마법사다운 복장을 하고 다닐 필요가 없다.

대신 흰 가운을 받았다.

기분이 묘하다.

"뭐, 사실 가르친다고는 해도 말이지. 나도 대부분은 까먹어서. 외과의 할 생각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그거밖에 모르겠군."

그것도 상당히 야매다. 유배자를 상대로 하는 진료가 일반인에게 하는 것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물론 일반인도 많이 보기는 하지만…….

어딜 봐도 제대로 된 의료는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싸한 설비 자체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자, 일단 이걸 다 외우고. 조금 있다가 시험을 보도록 하지. 마법을 동원해도 되니까 부정행위라고는 생각하지 말고."

기억력을 보조하는 마법은 존재한다.

미궁에서 그것으로 뭐라고 따지는 이도 없을 것이다.

산더미 같은 책을 보면서 레미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기분이 되었다.

노의사가 껄껄대며 추가했다.

"종족 간의 차이에 대해서도 공부할 필요가 있지. 요정은 인간과 별다를 것도 없지만 오크는 많이 다르거든."

"너무한 일이네요……."

"그건 내 독자연구거든. 미심쩍어하지는 말게. 의외로 말이지 전쟁 중이라거나, 난리통인 동네에서는 야매 진료도 흔한 일이야."

"어디서 오셨는데요?"

노의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향에서의 몇 가지 추억이 지나가서다.

총성이 끊이지 않는 나라였다. 피의 비릿함과 초연의 매캐함이 어디를 가나 느껴졌다.

암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어떻게든 사람을 살려보려고 했던 시절이다.

미궁에 들어온 이후에는 아마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고.

"에티오피아."

레미가 신음했다.

"내전인가요?"

"오, 일본 아가씨라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 관심이 있었나보군."

"아뇨……. 그냥 유명하니까요."

"그런가?"

레미는 숙연해졌다.

* * *

며칠이 지났으니 43서버를 한 번 더 들어가도 될 것 같다.

한 번 더 이런 짓을 벌였다가는 다시 발들이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에 연속적으로 진입해 아주 뽕을 뽑는다. 이후 다시는 들어갈 생각을 않고 말이다.

다른 서버의 파티원도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고 말이지.

아공간으로 파밍하러 가는 것은 조금 미루자.

불려온 제니는 훨씬 깔끔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암살자를 보며 미심쩍어했다.

아예 무기에 손을 얹고 거리를 벌린다.

"회유했어."

"……정말요?"

"그래. 그래."

블랑쉐는 늘 그렇듯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돈이라면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고, 애초에 삼의회가 내 편이니 블랑쉐의 위조 신분은 쉽게 만들어졌다.

애시 당초 돈은 꽤 많이 모여 있었으며, 영감님이 건넨 금괴로 신분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되었었다고 한다.

제니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힘차게 고개를 흔든다.

파티 리더의 역할인 이상 그녀가 일단 국가마법사에게 보고하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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