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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에 갇힌 고인물-198화 (198/563)

망겜에 갇힌 고인물 198화

55단계 - Lv.2052 하늘 유적(1)

왕국에서도 죽는 이는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수는 튜토리얼보다는 현저히 적다.

사실 리프트를 굳이 드나들지 않고 왕국에 얌전히 처박혀만 있다면 아주 안전한 곳이다.

어차피 모든 유배자들이 수없는 사선을 넘어 왕국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 혹은 단지 고참을 만나 버스 타고 왕국에 도달하는 유배자도 많다.

그런 이들은 다른 의미로 NPC가 된다.

치안이 좀 불안정할지언정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는 왕국이다.

전투가 필요한 직업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전투와 무관한 안전한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왕국이 공격받는 랜덤 인카운터가 터지지 않는 이상 인구는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 않는다.

농사꾼이나 요리사, 전기공이나 마도공학자.

그런 종류의 직종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일이 뭐가 그렇게 많겠는가.

이 왕국은 개중에서도 특별히 많은 유배자와 대륙 출신의 NPC들이 살아가는 왕국이다.

[길드석]에 따르면 [사왕국]이라 불리는 거대 길드와 그 예하 길드의 소속 유배자만 하여도 5천만에 육박한다.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면 틀림없이 그보다 더 많다.

그중 랭커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리프트 단계 클리어의 상위 1,000명이며, 하이랭커라 불리는 이들은 다시 그중의 상위 100명이다.

랭커는 엄청나게 희소한 존재다.

거기에 파티 단위로 이루어지는 리프트 공략의 특성상 개인보다는 파티 단위로 세어야 한다.

즉, 하이랭커라 불리는 파티는 스물이 넘지 않는다.

그중 다섯이 하드스록에 존재했다.

[하드스록] 파티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파티는 일그림이라 불리는 괴인이 리더로 있는 파티다.

전력으로는 [하드스록]을 제외하고도 최강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행보로 유명하며 알음알음 인기도 많았다.

그 리더인 일그림은 튜토리얼에서 이미 100년이 넘어간 채로 왕국에 도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그럼에도 도전자로 지내오고 있으며 이 거대한 왕국에서 랭킹을 유지하고 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괴짜라 부르기 손색이 없다.

다른 이들은 아직 다음이 있는 자들이다.

대개 70년 차 남짓에 이 왕국에 도달한 후, 이제야 유배자로서의 마지막을 지내는 중인 이들.

어쨌건 일그림은 유명한 하이랭커였다.

거기에 관심을 거부하지 않고 즐기는 편임에도 쉽게 목격되는 이는 아니었다.

각자 이름값을 이용한 사업을 벌이건 뭐건 하고 있는 일반 랭커들과 다르다.

하이랭커는 자신들이 가진 노하우를 최대한 숨기는 이들이며 한 발이라도 더 앞서나가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자들이다.

목격되더라도 [왕국] 중심의 리프트에서 목격된다.

일종의 중립 지대로서 작용하는 성직자의 나라.

왕국 내부의 다른 리프트가 새로이 발견되어 분산되기 전까지는 유일한 리프트였을 곳이다.

그런 하이랭커가 굳이 랭킹의 최전선인 성직자의 나라를 벗어났다.

그리고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하드스록의 리프트에 나타난 것은 충분한 가십거리였다.

숨길 생각 없이 당당했던 덕에 호외 신문이 나돌며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일그림은 그 관심을 흐뭇하게 즐기고 있다.

지금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이 집중된 상황에서 굳이 대화하는 것도 그래서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와중이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일그림 당번이 된 서브 리더, 에리나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난쟁이 왕국의 수도를 통째로 날려 버린 녀석들은 아직도 꼬리가 안 잡히고 있단 말이지."

하이랭커 중에서 43서버에 근거를 둔 파티는 일그림뿐이었다.

다른 랭커들은 그가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하에서 적당한 수준의 파밍을 할 뿐이다.

"삼의회 놈들도 모른다고 지금 찾아 헤매고 있다고 하던데. 얼마 전의 천사부터 해서 일이 아주 많아 보이긴 했어."

"분명히 알고 있겠지."

"맞아,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놈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없고 말이야."

파티 [하드스록].

하나의 나라가 되어버린 거대한 길드의 근간.

당연히도 최강을 논한다면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이다.

척을 진다고 아주 두려울 것은 없으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거암 같은 존재들.

일그림으로서도 언젠가는 거꾸러뜨릴 생각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잡아 족치고 싶은데. 싹수가 보이면 영입할 수도 있고."

"욕심이 많네?"

"얼마 전에 전쟁의 신에게 도전하겠다며 떠나간 녀석 빈자리를 채워야지."

옆에 있던 에리나는 깃털 날개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머리 위의 링도 그에 따라 움직였다.

"신이라. 그거 해봐야 별로 좋을 것도 없는데."

"크크큭. 도전자에게 져서 다음 회차로 넘어온 녀석이 그런 소리 해봐야 설득력 없어."

"신좌에 앉아 본 적도 없는 너한테 듣고 싶지는 않네요."

어쨌든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 정도 일을 벌일 녀석들이라면 유능하다.

그 일의 후폭풍을 알 것이다.

그러니 멍청하게 제가 했습니다. 하고 단서를 뿌리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하드스록일 것이라 특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유능하다는 가정하에서였다.

다른 나라들은 제각각 훌륭한 감시 체계하에 리프트를 통제하고 있다.

하나 전사들만 잔뜩 모인 이 나라는 그런 게 없다.

아주 최소한의 행정적 절차 외에는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다.

기록의 신뢰도가 가장 낮은 국가이니 여기일 수밖에.

"삼 일이나 뒤적였단 말이지. 수상하다면 북부 슬럼의 그 길드가 수상하긴 한데."

"갑자기 나타나서 일을 벌이는 놈들 말이지?"

"맞아. 다른 천사도 하나 더 있더군. 그 모습을 보고 왔어."

문제는 그거다. 천사의 눈물이라는 길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 능력은 없어 보였다.

[북부 슬럼의 왕]이라는 칭호는 거창하지만 하이랭커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밀려나 도태된 녀석들의 왕 아닌가?

당장 일그림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칭호만 해도 [죽음의 청기사]다.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신화적인 칭호만이 랭커들 사이에서 제대로 인정받는다.

"안에서 단서를 수집해 봐야겠군. 만나면 일단 줘패고.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해봐야지."

"그래 얼른 가자. 가자."

시가지 중심부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으나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있던 둘이다.

국가 마법사에게 다가가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이랭커에게 행선지를 물을 수 있는 이는 없다.

리프트를 향해 다가가자 썰물처럼 구경꾼들이 갈라진다.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이렇게 구경하러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핵폭탄 같은 존재들을 상대로 어찌 그러겠는가.

하드스록이라는 위명 아래에서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으니 이러고 있을 뿐이다.

아무 제단으로나 향하자 번호가 새겨진 키 아이템을 들고 있던 파티가 소스라치며 물러난다.

둘은 그 사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제물을 바치고 리프트 속으로 입장한다.

* * *

"저게 하이랭커죠?"

"뭔가 느껴져?"

"좀, 무섭네요. 스탯이나 스킬 찍다 보면 몸속에 내재된 마력량도 저렇게까지 올라가는 건가요?"

"상위 스킬로 갈수록 어떤 식으로건 마력을 활용하게 되거든. 너도 최근에 마력 관련 패시브가 많이 나왔지?"

"그건 그래요."

결국 마력은 초인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

시스템적 보정과는 별개로 개인의 능력인 부분이다.

스킬 또한 그것을 보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니까 당연하다.

꼬맹이도 눈을 비비적거린다.

"제 눈에는 아주 눈부신 태양처럼 보여요. 다가가면 타버릴 것처럼."

"쟤들 레벨이 한 3천 정도 될 거야. 침공으로 리셋 되기 전의 막바지쯤엔 보통 저렇게 되거든."

단순 계산으로 다섯 배.

그냥 부딪히면 이길 수 없다. 기초 능력치가 아무리 높더라도 정도가 있다.

유니크 스킬이고 뭐고 하나도 없는 NPC가 3000레벨이어도 그런 마당이다.

심연에서 보았던 3000 근방의 괴물들은 그 능력 대부분을 맷집과 근접 공격에 몰아넣은 불균형한 능력치 덕에 상대 가능했던 것이다.

마침 고블린 군대도 있었던 참이고.

드래곤 로드 등은 정말로 편법에 편법을 더한 극한의 꼼수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보통 신들은 그렇게 기꺼이 화신하지 않는다.

생명줄의 문제 이전에 이미 동료나 다름없는 우리 여신님이니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유배자의 3000레벨과 마인드맵이 없는 것들의 3000레벨은 전혀 다를 수밖에.

"뭐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한 2천 렙만 되어도 찍어 누를 만하니까."

"2천 레벨……."

옆에서 듣고 있던 제니가 울상인지 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최근 자주 보여주는 얼굴이다.

충성을 다하고는 있지만 따라가지는 못하겠다는 태도.

사냥꾼이 저런 표정을 많이 보여 줬었지.

"흠."

블랑쉐는 짧게 콧소리를 내고는 묵묵부답이다. 계속 그랬다. 나와도 대화를 많이 하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다.

필요하다면 대화는 희우와 이루어졌다. 나는 그렇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제니가 키 아이템을 바친다. 푸른 타원형의 포탈이 커진다.

그리고 우리를 삼킨다.

바친 제물은 키메라 연구로부터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의 키 아이템.

한눈에 봐도 중요해 보이는 금박을 입힌 책이다.

이건 난쟁이 왕 옥좌의 방 금고에 있던 물건이었다.

이미 통째로 밀어버렸지만 만약 정상 진행되었다면 난쟁이 왕국에서 분기점을 마주했을 것이다.

난쟁이 왕국과 그 적대 세력, 어느 팩션에 붙어 우호도를 수집할 것인가.

이 경우 적대 세력은 인간이며 그 반대편에는 나머지 모든 종족이 있다.

혹여 우리 파티 중 인간이 있었다면 선택지는 발생하지 않고 그대로 잠입액션이 되었을 스테이지다.

일단 우리는 난쟁이 왕국을 갈아버렸으므로 인간 팩션의 편을 든 셈이 되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연계로 이어지는 인카운터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못한다.

박살을 내버린 것이므로.

그렇지 않고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협력하는 여러 종족의 주요 시설을 들리게 된다.

계속하여 잠입액션의 장으로 자료를 빼 오는 식의 임무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인간의 역사에 남을 영웅적인 유배자가, 게임적으로는 한방에 우호도를 최대치까지 올릴 수 있는 랜덤 인카운터다.

그리고 이 집요한 디테일의 게임은 그런 경우조차도 코딩을 해두었다.

현실이 된 미궁에서도 그런 안배는 다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TIP : 인카운터의 근간 자체를 분쇄해 버리다니. 재주도 좋군요. 미궁은 그런 대단한 유배자를 위해 걸맞은 시련을 준비합니다. 기대하시길.]

부유감이 끝나고 발이 대지에 닿았다.

훈련받은 대로 모두 즉각적인 위협에 주의한다.

입장과 동시에 공격받는 것은 고단계로 갈수록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주변을 살펴도 위협이 없음이 확인된 후, 희우가 날아올라 정찰했다.

금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온 희우가 내려와서 감탄했다.

"와, 구름이 바다처럼 깔려 있어요!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이란 건 신기하네요!"

"그거 알지. 지구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경치를 보면 미궁이 좋아지기도 해."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지만요."

그런 와중 꼬맹이는 작은 입을 딱 벌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알겠어?"

세상을 빛이 아닌 마력으로 인지하는 꼬맹이라면 보일 것이다.

과연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천연 마력로가 만들어진 섬이네요. 가리는 게 많아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중심에 맥이 보여요."

"그것도 채취해 갈 거야. 하늘에 섬을 띄워둘 정도의 마력이 응집된다면 무엇보다 거대한 바람의 결정이거든."

"실피드를 불러올 수 있겠네요."

일단은 숲이었다. 주변을 흐르는 안개는 모두 운해에서 넘쳐흐른 구름이다.

마력 농도가 높아 기분 좋은 습기를 즐기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천연의 섬은 우리가 당도한 만큼 아주 일반적인 섬은 아닐 것이다.

미래가 마도공학의 시대라면 과거는 순수한 마법의 시대다.

어느 서버에나 고대라고 부를 만한 먼 과거에는 요정의 제국이 존재했다.

요정 제국은 무수한 유산과 유적을 남겼고, 대체로 유배자들이 요긴하게 사용한다.

이런 곳은 서버마다 곳곳에 숨겨져 존재하며 통칭으로는 [하늘 유적]이라고 불린다.

* * *

에리나가 돌아왔다. 일그림은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치천사의 깃털이 팔랑팔랑 떨어져 작은 폭발을 일으키자 인상을 쓰며 깨어난다.

"위험하게."

"흠집도 안 날 녀석이."

"그래. 그래. 누구 있는 건 발견했어?"

에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음 유적으로 가 보자고."

일그림은 팔을 벌렸다. 에리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전사를 끌어안았다.

"무거워."

"뻥 치시네. 격투가의 근력으로 무거울 게 뭐 있어."

"내 기분이 무거워."

"그럼 생각을 바꿔봐. 하늘 드라이브라고."

"말이나 못 하면 밉지라도 않지. [하늘 유적]으로 온다는 거 확실하긴 해?"

일그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의도하고 저지른 짓이라면 거의 반드시지. 그렇게 코딩되어 있거든."

"코딩이란 말 좀 안 쓰면 안 되나? 그렇게 말하면 내가 NPC 같잖아."

"에이,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걸 가지고 말이야. 나도 게임했던 기억만 가진 NPC일지도 모른다고."

에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신이었던 시절에도 [게이머]라는 놈들은 죄다 마음에 안 들었어."

"나 정도면 괜찮지. 위트 있고, 재치 있고. 안 그래?"

"제발 입 좀 다물어."

일그림은 그렇게 했다.

에리나는 무거운 갑주의 전사를 들어 올린 채 날아오른다. 본래라면 유배자를 막아서야 할 스테이지의 벽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귀중한 아이템의 효과다.

제물로 바칠 때 함께 넣는다면 서버에서의 유배자의 활동 반경 제한을 없애준다.

"[심연의 성물]까지 썼는데 아무것도 발견 못 하면 너무 화가 날 것 같아."

일그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나가 입을 다물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신 속으로만 생각했다.

로그라이크에서 소모품은 너무 아끼면 똥이 된다.

그리고 미궁에 존재하는 모든 장비는 결국 소모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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