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199화
55단계 - Lv.2052 하늘 유적(2)
"우와, 이것들 너무 센 거 아니에요?"
"상성이 안 좋아서 그래. 애초부터 자아가 희박한 무생물한테는 암습 판정이고 뭐고 없으니까."
블랑쉐는 어이없음에 한숨을 삼켰다.
저렇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천사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게 골렘을 해체시켰다.
골렘은 아주 큰 석재를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모습이었으며, 약점은 전혀 외부로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약점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게 7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돌덩이 거인의 몸 곳곳에 존재하는 마력선들이다.
하나를 끊어서 해결될 만큼 단순하게 만들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런 약점 같지도 않은 약점들이 마력으로 강화된 두꺼운 석재 속에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심지어는 자체 동력으로 가동하는 마력장벽마저 존재한다.
"이건 왜 마도공학이 아니죠?"
"순수한 마법이니까. 과학의 과 자도 섞이지 않았잖아."
"그런가……."
옆에 있는 조그마한 흡혈귀가 그 말을 거든다.
"마도 공학은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기술에 불과해요! 진정한 마법은 마력과 술식의 균형과 조화!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블랑쉐는 이번에는 한숨을 삼키지 않았다.
하아, 하고 피어나오는 숨결이 희다. 온도가 아주 낮은 곳이었다.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섬은 그 고도만큼이나 추웠다.
옆의 제니가 그에 공감하듯 마찬가지의 한숨을 내쉰다.
얼마 전, 넘을 수 없는 벽으로서 블랑쉐를 마주했던 제니는 이제 공감대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 정체가 악명 높은 고정 네임드 유배자임을 모르는 제니 입장에서는 동병상련이 따로 없는 모양이었다.
블랑쉐의 생각에는 보나 마나 오르골이 또 어디서 싹수가 보인다고 주워온 민첩직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제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 저보다는 훠얼씬 선배님이신 것 같은데……. 비상식적이죠?"
블랑쉐는 침묵할지 대답할지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가 더 선배라는 것은 사실이 아닐 터였고, 블랑쉐는 침묵하기로 했다.
제니의 한숨이 조금 더 깊어졌다.
쓰러진 골렘을 분해하고 있던 오르골이 입을 열었다.
"이건 쓸 만하겠어. 나중에 [모루]를 찾으면 뭘 좀 만들 수 있겠는데."
골렘의 내부를 이루고 있던 소재들은 제법 희귀한 금속들이었다. 적어도 마력 선만큼은 아주 순도가 높은 미스릴이다.
마법 금속이라 불리기도 하는 미스릴은 생각보다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금속이다.
하지만 그걸 쓸 만한 형태로 가공하는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다.
이미 저렇게 길게 실처럼 뽑혀 있는 미스릴이라면 가치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법.
오르골이 솜씨 좋게 뽑아내자 또 그걸 받아든 꼬맹이가 돌돌 말아서 품에 챙긴다.
제법 무게가 있을 텐데도 싱글벙글하며 등에 짊어지는 것이 무섭다.
그래, 블랑쉐는 무섭다고 생각했다.
천사 특유의 근력으로 옆에 쓰러져 있는, 아니, 박살이 나 있는 다른 골렘은 뜯어내는 여동생은 더 심하다.
언니라 부르라고 해버렸으니 고스란히 의자매 비슷한 관계로 흘러가기는 했다.
그게 과연 잘한 짓인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피어난다.
그 옆에 있는 다른 하나까지, 쓰러진 골렘 셋을 파괴한 것은 결국 저 천사였다.
천사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기천사는 속도에 특화된 존재다.
7미터 크기의 골렘은 레벨로 따져도 1000에 육박하는 괴물이라고 했다.
단검으로, 비록 그 단검의 재질이 물리 무기에서는 최고봉에 달하는 아다만다이트제라 한들 겨우 단검이다.
그 단검으로 저렇게 쑤셔서 박살 낼 수 있는 물건인가 하면 아주 비상식적인 일이라 하겠다.
그래, 오르골이 처음 말한 대로다. 상성이 아주 나쁘다.
그런데 왜 딜이 박히지?
어이가 없을 정도의 공격력.
암습 판정조차 없는 마당에 힘과 민첩의 어중간한 트리를 타고서 저런 위력.
블랑쉐는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고민을 해보았다.
동 레벨이 되었을 때, 동 장비로 저걸 흉내 낼 수 있을까? 천사까지 되었다고 치고 말이다.
아닌 것 같다.
바로 그래서 블랑쉐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양질의 총기다. 플라즈마 라이플은 그녀의 세계에도 존재하던 물건이다.
비록 세부적인 디테일은 아주 달랐으나 크게는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체가 나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어차피 언제나 사수를 겸직하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수를 더 메인으로 삼던 암살자에게 어려운 무기는 아니었다.
무심히 눈빛으로 주변을 훑던 와중, 무언가 날아드는 것이 보인다.
자세를 낮추고 조준, 그대로 격발.
지글거리는 선을 남긴 채 발사된 푸르스름한 덩어리가 날아오는 물체에 적중했다.
4개의 프로펠러를 통해 부양력을 얻는 작은 드론이었다.
기하학적 문양이 곳곳에 새겨진 금속제의 비행체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자세를 회복하려고 했다.
눈처럼 생긴 카메라가 플라즈마에 녹아내렸다. 이미 기능은 상실했다.
하지만 경보를 울리는 기능은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는 연속된 사격, 정확하게 프로펠러 네 곳이 끊어지고 추락하는 기체에 두 발이 더 적중했다.
"오, 과연. 사격은 확실한걸?"
"오히려 이쪽이 본업이다."
제니는 완전히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다 괴물이다.
나만 사람이다.
아니, 요정이다.
* * *
의도치는 않았는데 현재로썬 파티원이 전원 여성이다.
뭐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뜻은 아닌데, 희우가 조금 눈을 부라리기는 했다.
"저는 아저씨 거지만 아저씨는 모두의 것일 수도 있잖아요."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현모양처는 늘 조심하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언니한테?"
"아니요, 오라버니요."
흠,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희우의 가족 이야기는 그다지 좋은 추억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본인이 개의치 않으니 이리 꺼낼 수 있을 뿐.
공략은 순조로웠다.
우리 파티의 전임 사수였던 사냥꾼은 안타깝지만 초인적인 사격 실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숙련되었기에 빗나가는 경우는 적었으나 나타나는 즉시 격추하는 수준의 신기는 아니었다.
블랑쉐는 그런 신기를 보여주었다.
당장 스킬에 구애받지 않고 일정한 위력을 내는 게 총기니 그렇다.
본인은 일단 사수를 메인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암살이 본업이 아니라는 건 틀림없이 비약이지만 바깥에서의 일은 도검보다는 총기를 이용했을 터이다.
슬럼에서 희우와 마주했을 때는 가지고 다니던 싸구려 권총을 활용할 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 정도 위력으로 천사를 쓰러뜨리긴 힘들다.
쓸 수 있었다 하더라도 마스터리의 보정이 깃든 단검이 더 위력적이었으리라.
이렇게 마인드맵에 따른 보정이 늘어갈수록 총기의 입지는 미묘해진다.
일반적인 총기라면 그렇다.
미궁에는 꼭 재질 자체에 속성이 깃들지 않았음에도 불가사의한 성능을 내는 총기들이 존재한다.
블랑쉐가 얻어야 할 것이 그런 것이며, 동시에 내가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도 그런 것이다.
"조건, 조건을 맞춰야지 나는 장비 덕을 좀 보고 말이야."
"저도 칭호가 잔뜩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핵심 칭호가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 유니크 스킬도 있어. 네가 고른 [은빛 섬광]은 일단 바람과 관련 있는 칭호가 있어야 해."
다른 조건은 이미 만족했다.
[은빛 섬광]은 바람과 공간의 보정을 받는 유니크 스킬이다.
출현 조건에는 관련 칭호의 보유 여부가 있다. 일정 희귀도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희우는 이미 [시간의 천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공간 계통은 클리어했다.
시공간은 언제나 하나다. 심연의 신 덕에 부각되지 않을 뿐, 시간의 신은 결국 공간의 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한 나와 달리 희우는 바람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하늘 유적]은 그러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런 곳의 보스는 대부분 바람 속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것치고는 어째 기계 같은 것들만 나오고 있긴 한데요."
"드론 날아온다."
블랑쉐가 다시 말없이 드론을 처리한다.
본래 경보를 울려 골렘을 잔뜩 불러들여야 하는 드론들이다. 유능한 사수의 존재는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불러들이지 않아도 될 적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는 레벨링보다는 파밍을 노리고 온 곳이니까.
유적은 2층이 생각나는 고풍스러운 양식이었다. 그곳과는 달리 낡은 티조차도 나지 않는다.
고대 요정 제국은 어쨌거나 자신들의 문자로 뭔가를 남기기를 참 좋아한다.
벽의 곳곳에 새겨진 고대 요정 문자를 읽을 시간은 있었다.
"바람과 협력, 안락한 거처를 제공. 흠."
"무슨 뜻이죠?"
"보스가 바람이랑 관련된 무언가는 맞다는 뜻인데. 드래곤 레어라도 제공하나."
"바람이면 실버 드래곤이던가요."
"아직 있을지 모르겠네."
"있을 거 같지 않아요?"
"네가 그런 말하면 너무 무섭다."
아무래도 뭐가 있어도 있긴 하다고 봐야겠지.
3000레벨급의 드래곤만 되어도 화신이나 실피드 없이는 좀 버겁다.
그리고 지금은 둘 다 없다.
하지만 이제 슬슬 외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힘을 갖추어야 할 시기다.
"크게 좀 돌아서 가자고. 내가 필요한 물건 먼저 좀 챙겨야겠다."
고대 요정의 유적은 순수 마법에 관련된 물품이 잔뜩 쏟아져 나오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나는 마투사 트리를 타다가 어정쩡하게 바르바로이의 망토에 의지해 [피의 군주]를 달아둔 기형적인 마인드 맵을 가지고 있다.
[피의 군주]는 전쟁이나 테러 같은 환경에서나 강한 스킬인지라 대 랭커전을 상정하면 좀 아쉽다.
즉시 전력이 필요한데, 마침 마투사 트리를 타던 참이다.
더 이상의 마력 제어는 그냥 스탯 보정과 내 능력으로 메꾸고 검을 들어야겠다.
소드 마스터의 필수품인 [오러 블레이드]의 조건은 칭호 몇 개와 도검 계열의 마스터리, 그리고 검술과 마력에 대한 조예다.
이게 생각보다 그리 쉬운 조건은 아니다.
말 그대로의 문무겸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저 [오러 블레이드]를 얻기 전까지는 도통 쓸모가 없는 어정쩡한 트리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스킬을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은 게임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내 경우에는 정확하게 알고 핀 포인트로 저격할 수 있다.
찾아야 할 것은 가능한 가장 훌륭한 보검, 마도공학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법적인 것이어야 한다.
마검의 소유 여부는 소드 마스터와 마검사 계통 스킬의 출현 확률에 큰 보정을 부여한다.
한 자루 정도는 있을 법한 유적이니 샅샅이 털어보면 된다.
최소한의 포인트로 [오러 블레이드]를 따고, 남은 포인트로 패시브를 뽑아 마투사와 어찌 융합시켜 보도록 하자.
이 또한 따로 힘살자처럼 클래스명은 존재하지 않는 야매 클래스다.
화력은 터무니없지만, 그 이상으로 마력 소모가 심하기에 전투 지속력도 터무니없이 낮다.
하지만 한동안 이 파티에서의 내 역할은 슈팅게임의 봄(Bomb)이 될 것이다.
내가 마력탈진이 오더라도 든든한 동료가 있으니 초필살기 한방만 세게 꽂을 수 있다면 문제없다.
그게 경험치 분배에서도 이득이다.
그리 생각하며 움직이는데 길을 막고 있는 골렘이 나타났다.
바깥에 있던 것보다 더 크고 더 고레벨일 것이다.
보스는 내가 먹을 테니 이놈들은 여기서 배분한다. 나는 거의 마법사로서의 보조 작업에만 충실했다.
골렘 표면의 마력 방벽부터 해킹해서 벗겨내야 한다.
제 운명을 모르는 골렘이 포효하듯 웅웅거렸다.
* * *
"이젠 거기밖에 안 남았지?"
"아……. 거기. 바람의 정령이었나?"
"바람의 정령왕이 너무 오래 머물러서 중심부가 유사 정령계가 되어버린 유적이었지."
"정령왕은 좀……."
일그림이 싫어하는 티를 내자 에리나가 버럭했다.
"[심연의 성물]도 갖다 써두고 안 가 보면 어떡해!"
"마법적인 건 영 별로야. 남자는 힘인데."
"정령 때려잡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에리나는 짜증을 내며 가속했다. 오래 들고 다녔더니 일그림이 정말로 무겁다는 느낌도 든다.
일단 중무장한 전사는 쇳덩어리나 다름없기도 하니까.
마지막 섬은 꽤나 먼 곳에 있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