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에 갇힌 고인물 200화
55단계 - Lv.2052 하늘 유적(3)
고대 요정들의 취미 생활은 마법이요 평생의 과업 역시 마법이었다.
미궁을 현실이라 가정한다면 궁수들의 최종루트가 결국은 마법으로 귀결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시절엔 총기의 개념도 없었으며 원거리 화력투사의 수단은 마법이 전부였다.
화살은 재질에 따라서 다양한 마법을 새길 수 있으며 활 자체도 마법을 잘 먹는다.
애초에 활을 만든 것이 요정이며 다른 모든 종족에게는 요정이 그것을 전파했다.
장비에 새겨지는 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마법이 깃든 룬 강철도 최초의 최초에는 요정이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다.
대체로 대륙의 역사는 태초에 요정이 있었나니로 시작된다.
그만큼 먼 옛날의 요정 제국은 강대하다.
그리고 그 제국을 무너뜨린 그린스킨들도 강대하다.
이 두 팩션은 언제나 대륙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당연히 파밍을 논할 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린스킨들은 그 막대한 물량으로 훌륭한 경험치 공급원이 되어준다.
요정들이 고대에 만들어놓은 무수한 마법적 장비나 장치들이 훌륭한 소재가 되어준다.
"이 유적은 어느 정도는 군사적인 목적을 띄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도 요정왕이 있었겠죠?"
"오베론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칭호 같은 거라서 같은 이름으로 존재했겠지."
[하늘 유적]을 한 번이라도 뚫으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같은 [하늘 유적]으로 반드시 입장할 수 있는 [키 아이템]은 당연하게도 같은 [하늘 유적]에서 나온다.
부익부 빈익빈, 거기에 위에서 앞서나가는 이들이 이득을 점점 크게 굴려 나가는 스노우볼링 행위.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좀 이상하긴 하군. 43서버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하이랭커 파티가 하나 있다고 했지?"
제니와 블랑쉐가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나도 유명한 파티기에 나도 들어는 보았다.
정확히는 그 리더와 서브 리더가 아까 하드스록까지 찾아와 리프트를 이용하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갔을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굳이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목적은 분명해진다.
우릴 잡으러 왔다.
그렇지만 주어진 단서만으로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신들이 목격하여 정보가 퍼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상이 완전하게 알려지진 않았을 텐데.
"뭐, 퇴로는 언제나 확보하고, 대응 수단만 확실하면 문제는 없지."
"하이 랭커면 사람도 아니지 않나요?"
"우리도 이미 아니고 말이야."
"그게 그렇게 되나."
꼬맹이는 유적 나들이에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고대 요정들의 마법에 대한 진심은 꼬맹이 못지않으므로 동류를 만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두근두근 쫄깃쫄깃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내게 묻는다.
"다시 우리 서버의 오베론을 볼일이 있겠죠?"
"친구가 되고 싶어?"
"대단한 마법사라면 언제든지요!"
하긴 마법의 신에게도 예쁨받았으니까.
혹시 내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꼬맹이는 왕국에서 살아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내 실패 이후를 생각해 보게 된다.
블랑쉐가 효과적으로 드론들을 격추시키고 꼬맹이가 즐거워하며 마법적 보안을 무력화시켰다.
수천 년은 족히 되었을 유적은 그런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하지만 완전할 수는 없다.
허점은 곳곳에 존재했고, 그것이 게임적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기믹이다.
제니가 그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드러냈다.
"저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고단계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진행이 부드럽네요."
"로건과 함께할 때는 어땠기에?"
"숙련되기 전까지는 팔을 물어 뜯겨서 잃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죠."
"짐승들의 습성에는 빠삭하겠네. 고비라고 할 것은 없었어?"
"제일 위험했던 건 습지의 공룡들을 사냥하는 네임드 몬스터 무리와 마주했을 때인 것 같아요."
그렇다곤 해도 너무 숙련된 인원들이 모여 있어 이리되고 있을 뿐, 썩 안정적인 공략은 아니었다.
블랑쉐가 드론을 한 번만 놓치더라도 상황이 급박해질 것이다.
골렘들이 철저하게 각개격파를 당하고 있기에 쉬워 보이는 것이다.
"이런 힘이 있었는데 요정 제국은 어째서 멸망했을까요?"
"이게 엄청 세보여도 트롤 다섯이 달라붙으면 비슷해진단 말이지. 그런데 트롤은 너무 많고 요정은 너무 적어."
"물량 앞에 장사가 없군요."
"전투와 전쟁은 또다른 문제니까."
요정 제국은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 다른 종족들은 아직 미개하고 보잘 것 없는 보살핌의 대상이었을테니까.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한 성격 역시 한몫했을 것이고.
그런 모진 시련을 겪고도 아직 꽃이 가득 핀 그루터기 요정들이 대단하다.
골렘 하나와 마주쳤다.
오래 기동을 하지 않고 있던 골렘은 삐걱대며 기동을 시작한다.
내가 하던 모습을 보고 배운 꼬맹이가 그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마법 방벽이 미처 제대로 펼쳐지기 전에 차단당한다.
뻗어나가는 마력의 실은 그 조작이 점점 숙련되어 간다.
꼬맹이가 가진 스킬 [초마도사]와 [원소의 눈]은 최고로 정밀한 마력운용을 담보한다.
한 가지 술식을 놓고 장악하는 모의 마법전을 놀이 대신 하곤 하는데, 단순한 술식에서는 나와도 대등하게 대항할 수 있을 정도다.
뛰어난 재능과 하루 종일 마법만 생각할 수 있는 열정이 빚어낸 어엿한 마법사다.
[아케인]에서도 이렇게 기술적으로 정밀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는 드물리라.
골렘이 미처 일이서기도 전에 마력 방벽이 분해되었다.
희우가 소리 없이 호버링 하며 골렘의 뒤로 돌아간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뒤통수의 장갑과 장갑 사이에 아다만타이드 단검이 박힌다.
그에 합을 맞춰 블랑쉐의 견제 사격 몇 발이 골렘의 눈에 적중했다.
감지 수단의 파손은 골렘에게 설정된 행동 패턴에 혼란을 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강력한 물리 딜러가 존재한다면 치명적인 시간이다.
박쥐화한 꼬맹이가 날아올랐다.
여전히 비행은 서툴지만 제 몸 정도는 가눈다.
희우가 단검을 비틀어 틈을 만들고 그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강격]
순간적으로 두 배가 된 물리력이 골렘의 장갑을 뜯어낸다.
꼬맹이가 그 사이의 전선으로 손에 넣었다. 마법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는 저런 식으로 디버프를 꽂아 넣을 수도 있다.
나는 마력을 굳이 소비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다.
마력소모가 심한 클래스는 폭발력은 있어도 지속력은 아쉽다.
마투사는 유지력이 괜찮은 편이지만 비상시를 대비하는 편이 더 낫다.
무생물을 상대하는 전술도 점점 숙련되어 간다.
할 일이 없는 제니만 어딘가 불편해하고 있다.
덜컹하고 골렘이 기능을 정지했다.
넓은 복도 끝으로 늘어선 문들이 보였다.
"병사들의 숙소인 모양이군. 그래도 고대 요정들은 모조리 마법사지. 아마 연구실에 가까울거라 뭔가 챙길 건 있을 거야."
연구 자료는 내게는 큰 의미가 없다. 지겹도록 봐온 물건들이니까.
꼬맹이가 고대 요정어를 읽지 못해서 시무룩하고 있는 동안 개인물품으로 추정되는 비품들을 뒤적인다.
자잘하고도 값진 소재들은 제니가 짊어진 커다란 배낭에 넣는다.
민첩 전사도 전사기에 근력이 뛰어나고 짐꾼으로서는 훌륭하다.
게임 시절에는 인벤토리가 넓다는 개념이었다.
조금 전 골렘이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이건 병기창이군."
지하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문은 엄중히 봉인되어 있었다.
힘으로 부수기에는 강력한 마법이기에 마법을 중화해야 한다.
엄청나게 복잡하게 꼬아둔 술식이 나를 맞이했다.
꼬맹이도 옆에서 돕는다. 흘러드는 마력의 실들이 술식 사이로 얽혀든다.
둘 이상의 마법사가 동시에 해제해야만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자물쇠에 도달했고 꼬맹이는 몇 번의 실수 끝에 자신의 실을 반대편 자물쇠에 도달시킬 수 있었다.
우웅하고 문에 깃든 힘이 사라진다.
"힘으로 열건 마법으로 열건 아주 힘들게 되어 있네. 골렘을 물리치고 여기 도달해도 루팅하긴 힘들었겠는걸."
화려한 캐비닛들이 늘어서 있다. 입구와 달리 엄청나게 대단한 잠금이 걸려 있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굳이 마법으로 해제할 필요도 없다.
눈짓하자 희우가 힘으로 잡아 뜯었다.
"이게 이 유적 1층의 보상인가 보군."
개인실의 숫자와 일치하는 캐비닛들이다. 숫자나 장비의 질로 보아 요정 유격대였을까?
개개인이 모두 마법사였을 요정들의 무기는 예외 없이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유난히 커다란 지팡이가 눈에 띈다.
"이건 쓰기 좋겠는데. 마력 시전 보조가 눈곱만큼도 없는 대신 위력 보조에 모든 것을 올인한 스태프야."
꼬맹이가 받아들었다. 길이가 2미터 가까이 되는 지팡이라 제 키보다 50센티는 더 높다.
인간보다 우월한 뱀파이어의 근력이 아니라면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다.
가만히 지팡이를 분석하더니 대답한다.
"이 정도면 20% 정도의 증폭일까요?"
"비슷했지만 그것보단 효율이 낮아. 여기랑 여기 회로에서 누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단 말이지. 실효율은 16% 정도일거야."
"그래도 대단한 거죠?"
"시전 보조가 들어가면 증폭률이 10%를 넘기 힘드니까 나쁘지 않지."
제니가 고개를 갸웃한다.
"16%면 엄청 비싼 건데."
나는 낄낄대며 다른 캐비닛에서 검을 두 자루 꺼내 들었다.
"재질이 미스릴인 건 어쩔 수 없지만 쓰도록 해."
"미스릴……!"
같은 잎사귀 요정이니 쌍검 사용자도 있을 수밖에.
제니의 감격을 뒤로하고 장검을 하나 찾아냈다. 한손으로도, 두손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바스타드 소드다.
가장 고풍스럽고 상석마냥 의미심장한 위치의 캐비닛에 들어 있었다.
다른 무기는 없다.
요정들 중에서도 별종은 있다. 마검사를 굳이 택하는 녀석들이 그런 놈들이다.
그리고 요정은 오래 산다.
검술을 단련하고 마법에 조예가 있다면 그 끝에 도달하는 길은 하나다.
"오러 블레이드가 자주 덧씌워진 흔적이 있군."
소드 마스터가 오랫동안 사용한 검에는 지문처럼 그 흔적이 남는다.
가장 처음 단조되었을 때는 없었을 물결무늬가 고르게 퍼져 있다.
오러 블레이드가 많이 씌워지고 그 파장이 검에 흔적으로 남은 결과다.
최고 수준의 검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보정의 한계치는 만족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스킬은 중요하지만 그 스킬의 확률에 보정을 주는 장비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는 것이 곧 힘이 되는 이유다.
"잠깐만 옆방에 있다가 올게."
오러 블레이드는 오랜만이다. 검사로서 활동한 게 몇 회차 전이던가.
전사는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해지지만 그만큼 유틸리티가 부족했다.
그 경직된 운용방식으로는 홀로 수많은 상황을 대응할 수 없다.
제대로 검을 드는 클래스는 정말로 오랜만이다.
아마도 먼 과거의 소드 마스터였을 요정의 방에는 명상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런 장소 또한 보정이다.
유배자는 미궁의 무수한 비밀을 파헤치며 그것을 이용하는 이들이다.
언젠가 이 검의 주인이 그랬을 모습대로 자리에 앉는다.
마인드맵이 열리고 심상의 우주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마투사는 소드 마스터와 아주 흡사한 메커니즘을 사용하지만 훨씬 더 마법사에 가깝다.
주먹질보다는 마법 그 자체가 딜링 수단이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는 훨씬 더 전사에 가까운 클래스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의 위치는 가깝다.
마투사의 길로 뻗어나간 가지들에서 옆으로 찍어나간다.
맺히는 스킬의 열매가 늘어나고 내 우주에 빛이 더해졌다.
종족적 보정을 제외하면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에 가까운 확률 보정이다.
포인트는 많았고 다 소비하기 전에 반드시 뜰 것이다.
포인트의 절반이 전사다운 패시브를 만들어냈을 때쯤, 마침내 새로 피어난 열매에 번쩍이는 글귀가 새겨진다.
[오러 블레이드]
좋아. 한번 켜볼까.
눈을 뜨고 일어서서 검을 앞으로 들었다.
보랏빛의 일렁이는 기운이 검에 맺혀든다.
단단한 석재의 벽에 슬쩍 밀어넣어보았다.
두부를 자르듯이 파고든다.
미궁에서 세상 만물의 근간은 결국 마나의 입자다.
그것은 분자보다도 작으며 원자보다도 작은 어떤 근원된 입자이며 오러 블레이드는 그것을 감각으로 인지하고 정렬할 수 있는 검사가 만들어내는 기적이다.
검을 뽑아냈다.
확실하게 육안으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 오러 블레이드는 아주 수준이 높지는 않다.
감이 떨어진 탓이다.
날 끝에 정렬된 마나의 입자는 원자 수준으로 예리하지 못하다. 기껏해야 분자 수준일까.
"뭐 큰 상관은 없지."
다시 마인드맵을 켠다.
그리고 마투사의 길을 더 끝까지 뻗어나간다.
부족한 패시브를 보완하고, 마력 통제의 사정거리는 더욱 짧아지지만 효율은 더욱 더 올라간다.
일반적으로 마투사와 소드 마스터의 짬뽕이 추천되지 않는 것은 둘 모두 각자의 극한으로 효율을 추구하는 클래스기 때문이다.
마투사는 빠른 시전과 효율적인 마력 소모를 통한 지근거리 마법투사로.
소드 마스터는 가진 모든 마력을 절삭력의 강화로.
오러 블레이드의 소모를 감당하며 동시에 마투사의 폭발을 가미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마력 소모를 강요한다.
약간은 어색해진 자세를 취한다.
이런 형태의 검사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세는 일격 필살이다.
그게 실패하면 어차피 죽으니까.
가뜩이나 불안정한 클래스 둘이 섞이면 그 불안정함은 극에 도달하는 법.
앞으로 가볍게 걸음을 뻗으며 벽을 베었다.
번쩍이는 섬광처럼 보랏빛 오러 블레이드의 잔상이 남는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무속성의 폭발이 일어났다.
소리 없이 조용히 벽의 베인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타고 분자 사이사이에 파고드는 마력 폭발은 실질적으로 물질분해에 가깝다.
무너진 벽이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아주 가늘고 곱다.
"그런데 이 베기 한 방으로 가용 마력의 10%가 날아가는군. 이게 그냥 때린 평타인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클래스 명이 따로 없는 야매 클래스들은 다 이유가 있다.
변태들이나 하니까 말이지.
마투사 때처럼 속성 부여까지 하면 소모는 더 큰일이 날 테니 딱 이 정도 사양으로만 사용하도록 하자.
난 평타를 열 번 날리면 빈 깡통이 되는 검사가 되었다.